27화
한 갈래 길
그 말을 남기고 아폴로는 사라졌다. 아니, 해산도 해산인데 경찰한테 가라고. 그때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심향과 국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나!”
심향이 달려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실버 너도.”
“흥. 내가 이런 겁쟁이들한테 질 리가 없잖아.”
실버의 말에 동의하듯 장크로다일이 크르릉 울었다. 진화하며 바뀐 모습이 신기한지 심향의 마그케인이 제 두 배는 되는 장크로다일을 올려다보았다.
“국장님께서 라디오를 뺏기면 전국의 포켓몬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바로 여기로 왔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안심해. 계획은 막아냈어. 로켓단은 해체되었고.”
“그렇구나, 다행이다….”
심향이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본 실버가 코웃음을 쳤다.
“아주 태평한데 그래. 설마 저번에 내가 한 말을 잊은 건 아니겠지.”
다음에 만나면 승부를 내겠다는 말. 그것을 떠올린 심향의 눈빛이 곧장 변했다. 마그케인 또한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취했다. 허나 그 둘의 꼬질꼬질한 행태를 쳐다보던 실버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상태로 네놈을 이겨봤자 전혀 기쁘지 않을 것 같군.”
“무슨 소리야, 아직 싸울 수 있어!”
마그케인도 몸의 불꽃을 크게 키우며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실버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을 뿐이었다.
“시끄러워. 허세도 정도껏 부려라. … 그래, 네 나약한 마그케인이 최종 진화라도 하면 그때는 싸울 맛이 조금 날지도 모르지.”
“이…!”
꼬르르륵. 심향이 무어라 반박하려던 그때, 그의 배가 큰소리를 내며 울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렸다. 실버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고, 심향은 부끄러운지 붉어진 얼굴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제노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리자 심향의 얼굴이 거의 터질 듯이 빨개졌다.
누나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봐요. 심향의 말에 제노가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 지었다. 헛기침을 하며 바라본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목호 씨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야.”
*
라디오타워를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그들을 칭송했다. 여기에는 옥상에서 함께 내려온 국장의 몫이 컸다. 심향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사람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었고, 실버는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지 고개를 돌렸으며, 제노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쓰며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타워 바깥에는 경찰차 몇 대와 여러 명의 경찰들이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자 목호가 세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다들 무사한가?”
“그럭저럭요. 목호 씨는 괜찮으세요?”
“나야 문제없다.”
네 사람이 모여있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보도를 위해 나온 취재진들이 목호를 알아본 것 같았다. 거기에 두 소년이 로켓단으로부터 타워를 지켜냈다는 직원들의 증언까지. 제노가 주변을 흘긋거리자 목호가 장난스럽게 웃더니,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속삭였다.
“이런, 곧 기자들이 몰려들지도 모르겠군. 이쪽 골목을 통하면 따돌릴 수 있을 거다.”
가자, 목호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세 사람은 목호의 신호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목호는 우선 세 사람을 포켓몬 센터로 데려갔다. 심향은 방 하나를 받아 엉망이 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간호순이 보송송의 치료에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는 금빛시티에 하루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꼬르륵. 로비로 나오자마자 심향의 배가 다시 한번 울렸다. 마침 저녁 시간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체력 소모가 심했으니까. 목호는 자연스럽게 세 사람을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챔피언의 자리에 있는 목호 때문에 가는 도중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목호가 망토를 착용하지 않자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다. 망토의 의외의 기능을 알게 되었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정식집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독립된 룸에 앉아 있었다. 입구에 들어설 때 본 잘 교육된 직원들부터 공간의 디자인까지. 어딜 보아도 ‘나 비싸요.’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방안을 구경하는 동안, 목호만이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노크 소리.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들이 차례로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접시들이 가지런하게 정렬되며 상 위를 가득 채웠다. 접시 위 음식들은 무엇하나 빠짐없이 예술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원래 음식이란 게 눈으로 먼저 먹는 거라고, 플레이팅을 보는 것만으로 감탄이 나오는 자태였다.
“그럼 들지.”
“잘 먹겠습니다!”
이런 분위기에도 기죽지 않은 심향이 허겁지겁 음식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심향이 자신의 페이스대로 행동하자 긴장이 한결 풀렸는지, 실버또한 젓가락을 움직였다.
제노는 에피타이저로 나온 죽에 먼저 손을 댔다. 견과류를 꽃 형태로 놓아 장식된 죽은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후후 불고 입에 넣는다. 순식간에 고소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따뜻한 음식이 속에 들어가자 몸의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전을 집어먹던 심향이 녹차로 채워진 잔을 벌컥벌컥 비우곤 숨을 푸하, 내쉬었다. 허기가 좀 가시니 이성이 돌아온 듯했다. 그의 옆에 위치한 실버가 심향이 혼자 다 비운 접시를 노려보았다. 제노는 제 앞에 놓여있던 전을 실버의 앞으로 옮겨주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 그 얘기 좀 해주세요. 3년 전의 그 사람이요!”
심향이 눈을 빛내며 제노를 바라보았다. 먹기 편하게 물고기 포켓몬 찜의 뼈를 발라내던 제노의 젓가락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옆에 앉은 목호가 삼 년 전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린, 레드와 본인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거짓말을 했다가는 상황이 더 이상해진다. 제노는 적당히 대답해 주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뭐가 궁금한데?”
“누나도 그때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거죠? 어땠어요? 누나는 그 사람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하나씩 질문해, 하나씩.”
깔끔하게 떼어낸 뼈를 빈 접시에 옮겨 담으며 제노가 말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레드랑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야.”
“이름이 레드군요!”
“당신 관동 출신이야?”
제노는 침묵했지만, 실버는 그 안에서 긍정을 읽어냈다.
“레드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무지 강하겠죠?”
“강하지. 당시 최연소 챔피언이었으니까.”
따지자면 그린이 먼저 획득한 칭호였으나, 굳이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다.
“우와, 최연소 챔피언…. 그럼 석영고원에 가면 레드 씨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아니? 레드는 챔피언 자리 바로 때려치웠어.”
“네?! 그, 그럼 지금은 뭘 하고 있으신데요?”
“몰라.”
정해진 수순대로라면 아마 은빛산 정상에 틀어박혀 있겠지. 하지만 직접 연락해 본 적이 없으니 제노는 모르는 것이 맞았다. 제노의 답에 심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가, 챔피언 자리를 내려놓다니….”
“원래 그런 거랑 안 맞는 애이긴 했어. 뭐, 그래서 지금은 목호 씨께서 챔피언 자리를 맡고 계신 거지.”
“… 네?”
“응?”
“모, 목호 씨가요? 지금 저희랑 같이 밥 먹는 이, 이 목호 씨요?”
“응.”
당연한 것을 묻는 심향에 제노가 눈을 끔뻑였다. 달그락, 밥풀이 묻은 젓가락을 떨어트린 심향이 소리를 꽤액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룸에서 식사 중이라 다행이다.
“모, 모모, 목호 씨! 저한테는 그냥 트레이너라고 하셨잖아요!!”
“심향이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뭐어, 틀린 말은 아니니 말이다.”
“애초에 챔피언을 못 알아보는 네가 이상한 거 아냐?”
실버가 심향을 공격하며 혀를 찼다. 본인도 처음 목호 씨를 마주쳤을 땐 로켓단이냐고 물어본 주제에…. 심향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자, 목호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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