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샛길 하나
거세게 쏘아지는 물줄기를 맞고 허공에 붕 뜬 한카리아스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한카리아스가 난천의 발치까지 날아왔다.
“… 수고했어, 한카리아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전투 불능 상태를 확인한 난천이 한카리아스를 볼로 돌려보냈다. 한카리아스가 들어간 몬스터볼을 쥔 난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겪는 패배일까.
분하다, 하지만 싫지는 않다. 강자와의 배틀은 챔피언이 된 후 느끼던 권태를 깨트리고 고양감을 가져다주었다. 아직도 솟아오르는 열기에 난천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을 때, 눈앞의 상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아, 어어, 응.”
쑥 내밀어진 손. 난천이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그 손을 마주 잡는다. 나도 참,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데 들떠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니. 난천이 속으로 자책하는 사이 상대가 입을 열었다.
“좋은 시합이었어요. … 챔피언.”
“이미 나를 알고 있었구나.”
“네.”
처음부터 자신을 일반 트레이너라고 속인 의미가 없어졌다. 난천이 머쓱하게 미소 짓자 그가 후드를 젖혔다. 캡모자 아래로 드러난 밝은 눈. 생각보다 앳된 얼굴에 놀란 난천이 물었다.
“혹시 나이가…?”
“얼마 전에 18살이 되었어요.”
“어머.”
난천이 놀람을 표했다. 어린 사람에게 졌다는 수치심은 일절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감탄.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제노라고 합니다. 관동에서 왔어요.”
“나도 다시 소개할게. 신오지방 챔피언, 난천이야.”
미소 지은 두 사람이 악수를 마쳤다.
“훌륭한 시합이었어. 네 전력을 끌어내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먼저 당해버렸네. 남은 포켓몬들이 뭐였는지 물어도 될까?”
“이브이요.”
“에브이?”
“… 아뇨, 그냥 이브이요.”
아직 진화하지 않았거든요.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난천이 아하하,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듣는 사람의 속이 다 시원해지는 소리였다.
실컷 웃은 난천이 그제야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고 제노에게 물었다.
“아, 사실 너에게 진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어. 그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에 왔지. 배지를 전부 모았다던데, 어째서 리그에 도전하지 않는 거니?”
“챔피언 자리보다 더 관심 있는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가방을 뒤졌다. 안에서 주섬주섬 꺼내 든 것은 돌로 만들어진 육면체, 석판이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든 난천이 그것을 살폈다.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 존재, 플레이트의 힘이 모인 피리 소리를 듣는다.’
“이건….”
“사실 고고학에 관심이 있거든요. 특히 신오지방의 전설에 대해서요.”
상대는 저명한 고고학자. 제노가 조금 수줍은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 이런 플레이트를 여러 개 모았어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난천 씨께서 조사에 도움을-”
제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천이 그의 손을 낚아챘다. 갑작스레 잡힌 손에 제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천의 얼굴이 배틀이 끝난 직후처럼 다시 흥분에 휩싸였다.
“고고학에 관심이 있다고?”
“네? 아, 네.”
“특히 신오신화에??”
“네에….”
“이 플레이트를 혼자서 모았다고? 다른 종류도 더 있고??”
“…네.”
난천이 제노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그의 눈이 심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어쩐지 불길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천천히 얘기하자. 춥지 않니? 장막시티에 내 소유의 집이 하나 있거든, 거기로 가자. 괜찮지?”
플레이트를 돌려준 난천이 멋대로 얘기를 진행하며 제노를 천관산 아래로 이끌었다. 제노는 거의 납치에 가까운 형태로 끌려갔다. 가서 팥차 끓여줄게, 팥차 좋아하니? 난천의 물음에 제노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잘된 거 맞지…?
*
장막시티, 난천의 자택. 제노를 거실의 소파로 안내한 난천은 정말로 간단한 다과와 함께 차를 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한 제노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는 건 오랜만이었다.
집이라고는 했지만 잘 사용하지는 않는지 삭막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딱 필요한 물건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아마도 난천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연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듯했다.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제노의 모습을 본 난천이 말했다.
“집이 좀 휑하지? 잠깐 머무는 용도로만 사용하던 곳이거든. 그래도 난 제법 여기를 좋아해, 봉신마을과도 가깝고.”
그리고 갤럭시단의 아지트가 있는 곳이죠. 차와 함께 말을 삼킨 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천이 계속해서 말했다.
“우선 네가 보여준 암석플레이트, 어디서 찾았는지 물어도 될까?”
“천관산의 폭포 근처 동굴에서요. 다른 것들도 신오지방의 곳곳에서 발견했어요. 어쩌면 나머지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몰라요.”
다시 암석플레이트를 받아든 난천이 처음보다 유심히 그것을 살폈다. 플레이트에 적혀있는 ‘그 존재’. 어쩌면 창조신이라고 불리는 포켓몬을 일컫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제노가 말했다.
“플레이트에 적힌 모든 문구들은 신오지방에 전해지는 창조 신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난천 씨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난천의 시선이 플레이트에서 제노에게로 옮겨갔다. 제노가 긴장한 듯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곤 덧붙였다.
“제가 발견한 플레이트들, 전부 난천씨께 드릴 테니 조사에 도움을 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 미처 마치지 못했던 말. 난천은 가만히 제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제노의 무릎에 올려진 주먹에서 땀이 배어났다. 영원 같던 몇초가 흐르고, 난천이 소파 사이의 탁자를 쾅, 짚으며 벌떡 일어났다.
“당연하지! 아니, 도움은 오히려 내가 받고 싶어! 원하는 만큼 지원해 줄 테니, 부디 나와 함께 연구해 주지 않겠어?!”
“네, 네?”
난천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이런 인재를 다른 이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난천이 다시 한번 제노의 양손을 꼬옥 붙잡았다.
“이래 봬도 난 신오지방의 챔피언을 맡고 있는 몸이야. 물질적 지원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
“아, 그, 그게-”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니지?! 설마 이미 플레이트의 존재를 아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니?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어떤 제안을 했든 내가-”
“좋아요!!”
난천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제노가 소리쳤다. 그의 외침이 거실에 울려 퍼지고, 침묵이 찾아왔다. 제노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 저는 난천 씨를 돕고 싶어요.”
“세상에….”
나에게 이런 천운이 찾아오다니. 난천이 제노의 손을 놓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수줍게 인사하는 소녀가 마치 아르세우스가 내린 기적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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