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샛길 하나
난천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1년. 제노는 연구는 물론 챔피언의 일로 바쁜 난천을 대신해 장막시티에 머물며 플레이트의 수집에 열중했다.
모은 플레이트는 모두 19개. 각각의 플레이트에 이름을 붙인 난천은 제노가 가져온 레전드플레이트를 조사하며 이것이 마지막 플레이트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제노는 그것에 동의했다. 딱히 난천만큼의 지식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냥 그게 정해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플레이트는 난천의 발표 이후 신오의 유적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새로운 발견에 학계가 술렁이고, 난천은 눈코 뜰 새없이 바빠졌다. 그에따라 두 사람의 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 난천은 장막시티의 집 열쇠를 하나 더 만들어 제노에게 맡겼다. 거기에 본인 명의의 카드까지. 당황한 제노가 몇 번이고 거절했으나 난천은 기어코 그것들을 제노의 손에 쥐여주었다. 집을 봐주는 대신이라나 뭐라나.
그 보답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제노는 난천의 말대로 집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내부를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그가 고른 물건들도 몇 개씩 채워졌다. 제발 제 카드를 사용하라는 난천의 말에 제노가 큰마음을 먹고 장막백화점에서 난천의 카드로 커피포트를 결제했을 때, 난천은 크게 기뻐했다. 다음날부터 두 사람의 아침 루틴에 모닝커피가 더해졌다.
둘째, 난천은 제노의 자료수집을 토대로 자신이 해석한 것을 가장 먼저 제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공동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특혜라고 했다. 다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설명하는 날은 거의 없었다. 난천이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 또다시 자리를 비우게 된 난천이 외출준비를 마치고 애용하는 구두를 신었다. 현관까지 그를 마중 나온 제노가 난천을 위해 어젯밤 미리 준비한 짐을 넣은 캐리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난천이 감사를 표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제노는 꼭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처럼 훌륭하게 보조를 맞춰주었다.
“이번에도 집을 잘 부탁할게. 학회의 일이 끝나면 가장 먼저 연락할 테니까.”
“다녀오세요.”
왠지 오래된 부부의 대화 같다고 생각한 난천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자, 제노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천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며 덧붙였다.
“카드, 원하는 만큼 써도 되는 거 알지?”
“꼭 필요한 것만 살게요.”
“아니야. 네가 사용한 카드 내역을 확인해야 내가 안심이 되는걸.”
내가 없는 사이에 굶으면 안 되잖아? 난천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제노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내역이 난천 씨께 전해지니까 사용하지 않는 건데도요, 하는 말은 삼켰다.
문을 나서기전 몇 번이고 제노를 돌아본 난천이 결국 현관으로 돌아와 그를 껴안았다. 키 차이로 인해 제노가 난천의 품에 쏘옥 안겨들어 갔다. 제노를 품에 안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에도 같이 안 갈 거지?”
“네에.”
“너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제노는 공식 석상에 나서는 것을 무척이나 꺼렸다. 딱히 연구자로서의 지위에 관심이 없다곤 했지만, 글쎄. 하지만 난천은 굳이 그것을 캐묻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제노를 깊게 신뢰하는 상태였다. 그저 그가 먼저 얘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밥 잘 챙겨 먹어라, 늦게까지 혼자 다니지 말아라,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나에게 먼저 전화해라. 귀에 박히도록 늘 말하는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읊은 난천이 그제야 집을 떠났다. 발걸음에서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창가에 서서 그가 차량에 탑승하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제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울리는 것은 포켓기어. 신오지방의 트레이너들은 대부분 포켓치를 사용하기에, 관동지방에서 온 제노의 것이 분명했다.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한 제노가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챔피언은 떠나갔나?
“… 그래.”
- 그럼 본부에서 보지.
짧은 말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잠시 한숨을 쉰 제노가 외출을 준비했다.
*
“….”
“….”
장막시티, 갤럭시단 본부. 제노는 꼭대기 층에서 태홍과 마주하고 있었다. 태홍이 앉은 자리 양옆에는 마치 그를 지키기라도 하듯 마스와 주피터가 각각 좌우에 서 있었다.
태홍은 제노가 책상 위에 올린 피크닉 바구니를 노려보았다. 라탄 소재로 짜인 그것에는 하얀 천이 둘러져 있었고, 안은 제노가 직접 만든 알록달록한 포핀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이게 뭐지.”
“포핀이야.”
“그걸 물은 게 아니다.”
“아니, 뭐, 매번 빈손으로 오기도 그래서….”
게다가 나도 외출할 핑계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난천은 한번 길게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제노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카드 사용 내역을 보며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묻기도 했다. 묘한 집착에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주거지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할 말은 없었다. 결국 제노는 갤럭시단과 접촉하기 위해 밖으로 나설 때마다 외출에 대한 핑계를 만드는 쪽을 선택했다.
이번엔 마트에서 나무 열매가 할인을 하길래 잔뜩 샀다는 핑계였다. 연고시티의 포켓몬 애호가클럽에서 받은 포핀케이스로 포핀을 한가득 만든 제노가 혼자 처리하기 힘든 완성품을 잔뜩 싸서 여기로 가져왔다. 갤럭시단은 사람도 많고 간식을 나눠 먹기엔 딱이었다.
태홍의 왼쪽 뒤에 서 있던 마스가 먼저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포핀을 하나 집어 든 그가 말했다.
“태홍 님, 제가 먼저 하나 먹어보겠습니다. 독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냥 죽던가. 제노가 노골적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는 것에도 불구하고 마스는 꿋꿋이 포핀을 입에 넣고 씹었다. 잠시 우물거리던 마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무슨 일이지, 마스. 독인가?”
“겠냐고.”
태홍의 오른쪽 뒤에 서 있던 주피터의 물음에 제노가 답했으나 씹혔다. 잠시 조용히 있던 마스가 입에 든 포핀을 꿀꺽 삼키곤 말했다.
“무척 맛있습니다, 태홍 님.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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