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날리는 바람에, 흩어지는 바람에 下
가족이, 가족이어떻게찢어지는데 가족이
Part 1.
모두는
진 보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편지에는 카시오페아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은 다른 보스들의 퇴학 처리 일주일 전에 각 아지트로 전해졌다. 오르티가의 집으로 가장 먼저 전해진 편지를 가빈이 받았고, 가빈이 오르티가에게, 오르티가가 다른 보스에게 진 보스의 소식을 전했다. 그 후 누군가는 집에서 카시오페아라는 사람이 네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되어있음을 깨닫자마자 멜로코는 부츠를 운동화로 갈아신고 기숙사로 향했다. 개조한 교복 아래에 평범한 신발을 신고 달려나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웠다. 머리는 이미 바람에 날려 산발이었고, 얼굴은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적어도 누군지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하다못해 이름 하나라도 알 수 있다면.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방 앞의 명패에는 아무 이름도 걸려있지 않았다. 멜로코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편지의 주소와 기숙사의 방 번호를 계속 대조해보았지만 그저 텅 빈 방이 계속 그의 눈 앞에 보일 뿐이었다. 혹시 무슨 정보를 알 수 있을까 학교 측에 연락해보았으나 그 학생이 꽤 오래 전에 스스로 퇴학 처리를 부탁했으며, 원칙상 퇴학당한 학생의 정보는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는 사무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이름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요…. 멜로코의 간절한 부탁에도 스마트로토무 너머에서는 곤란한 듯이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계속 들렸다. 결국 그는 힘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멜로코는 그대로 비어버린 기숙사 방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소리를 죽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뛰어다니지 않기. 그딴 규칙이 다 뭐라고, 라 말하는 것처럼 그의 울음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학생들은 방 밖으로 나와 연신 그의 옆에 서서 괜찮냐고 물어보거나 휴지나 물 등을 가져다주었다. 멜로코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는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진정이 되자 조용히 일어나 기숙사를 빠져나가 바로 아지트로 향했다. 남은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다른 보스들이랑 이야기해야 했다.
아지트 천막을 열자 다른 보스들이 간이 의자에 둘러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대… 이미 퇴학 처리돼서… 늘 거친 말투였던 멜로코는 말을 맺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힘없이 말을 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어… 우린 이렇게 됐어… 그는 망연자실하게 계속 중얼거리다 비파가 정신 차리라며 어깨를 붙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밖에서 계속 말소리가 들렸다. 조무래기들의 대화였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 이참에 그냥 학교로 돌아가든가 할까. 다섯 개의 아지트에 모인 조무래기들은 이미 각자의 방향대로 튀어나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스타단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쳐도 보스들이 퇴학당하면 사실상 끝, 그런데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면 보스를 잃은 스타단은 또 그런대로 끝. 그들이 무얼 택해도 스타단에 남아있을 수 없게 된 이상 스타단은 이미 해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스타단의 해산을 굳이 따로 공지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섯 보스들은 아지트에 조무래기들을 모두 모아놓고 일주일 후 스타단이 해산될 것임을 알렸다. 친절하면서 잔인하게도 아지트는 학교 측에서 정리할 테니 학교로 돌아올지 말지만 정하면 된다는 학교 측에서의 연락을 이미 받은 상태였기에 그들이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뒤 각각의 아지트에 커다란 차가 도착했다. 오르티가가 부탁한 것이었다. 차는 스타모빌 다섯 대를 실어날랐다. 팀 세긴에서는 차 두 대가 나왔다. 각각 스타모빌과 디제잉 장비를 싣고 있었다. 오르티가는 학교 부품이 아닌 어떤 것도 학교 측에 넘겨줄 수 없다고 했다. 평소 그가 집안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제일 부정적이었던 멜로코도 순순히 스타모빌을 넘겨주었다. 그 역시 오르티가랑 같은 생각이었다. 디제잉 장비가 실린 차는 곧바로 피나의 집으로 향했으며, 스타모빌 다섯 대는 오르티가네 집 차고에 보관되었다. 크고 조악한 차 다섯 대가 전부 들어가고도 남는 차고가 있음에 모두는 감사했다.
그 이후로 며칠간은 계속 바람이 불었다. 빨리 떠나라고 밀어내는 건지 떠나지 말라고 붙잡아두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은 이리저리 흩날리듯 불었다. 며칠간 아지트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동안 피나는 아무 말도 없이 디제잉 장비가 있던 자리를 정리했다. 주변은 꽤나 너저분했다. 바닥에 말라붙은 샌드위치 소스와 어디서 깨졌는지 모를 조명 조각과 바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악보들이 보였다. 악보를 하나로 정리하자 놀라울 정도로 다 다른 곡의 일부였다. 몰랐는데 그동안 작업한 곡이 이렇게나 많았네…. 그는 모은 악보를 가방에 넣었다. 푹 눌러쓴 모자 때문에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멜로코는 낮 동안에 조무래기들을 한 명씩 만나며 나름대로의 감사를 담은 말을 전했다. 겉보기에 감사인사처럼 보이는 어투나 표현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인사를 들은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같이 감사의 말을 건넸으며, 누군가는 학교로 돌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밤이 찾아오면 그는 아지트 천막에 틀어박혀 누구도 모르게 한참을 울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추명은 남은 옷감들과 각종 재봉 도구, 게임기를 차례차례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는 동안 몇몇 조무래기들의 요청으로 개조한 교복을 원래의 형태로 돌려주었다. 전부 다시 학교로 돌아갈 결심을 한 사람들이었다. 아지트 외진 곳에 있던 조무래기들이 그에게로 말없이 찾아와 스타단 마크가 그려진 모자를 건네주었다. 어딘가 할 말이 있어보였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그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받은 모자를 품에 소중히 챙길 뿐이었다.
오르티가는 하루종일 아지트 밖에 누워있었다. 평소 그가 종종 스타모빌을 세워두던 자리였다. 조무래기들이 그의 상태를 걱정하여 뭐라 말을 건네도 전혀 듣지 않았다. 아지트에 고인 물이 흘러 그의 머리카락과 옷이 젖었다. 몸 전체에 풀이 눌러붙고 요술봉이 녹슬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머니께 차를 사달라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카시오페아가 누군지 찾아달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걸 그는 잘 알았다. 이때까지의 모든 기다림이 허망했다.
가빈은 그를 찾아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입을 닫기를 택했다. 가빈은 자신이 아는 모든 걸 말하면 그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았다. 그게 언제든 그 길로 본인이 원래 걸어가야 할 길을 빠져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은 교장이 아니며 이제는 집사로서의 일을 해야 했다. 미래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이미 정해진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를 빠져나가게 둘 수 없었다.
비파는 며칠간 해산 일로 정신이 없었기에 관리하지 않아 흔들리는 천막을 하나씩 일으켜세웠다. 어차피 곧 철거될 건데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조무래기에게 그는 고맙지만 그때의 일은 지금 생각할 게 아니라고 답했다. 스타단을 지켜야 한다. 설령 끝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그가 보스로서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조무래기들은 굳이 비파가 있는 곳에 찾아와 감사인사를 전했다.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는 울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다섯 보스들이 다시 모인 건 퇴학 처리 이틀 전 밤이었다.
“다들 마음은 정했어?”
“난 이미 정했어. 나머지는 나도 몰라. 도통 말을 해주질 않아서.”
비파의 물음에 멜로코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다들 멍하니 있는 와중 피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 뭐 하나만 말해도 돼?”
모두가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 중에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긴 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오르티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터놓고 말하니까 좋네! 일주일 전에 그냥 퇴학시켜달라 할걸. 그는 누가 봐도 실성한 사람 같았다. 나머지는 웃을 수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 곧 있으면 존재하지도 않을 스타단에 대한 걱정, 그리고 진 보스에 대한 걱정이 한데 뒤엉켜 머리가 복잡했다. 이상하게도 진 보스에 대해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들지 않았다. 편지를 봤으니 당연했다. 결국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읽는 순간 그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내왔는지, 또 보내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감사와 미안함의 말이 길게 적힌 마지막 장의 아래에는 무언가 말라붙어 있었다. 편지를 아무렇게나 겹쳐서 한번에 적었는지 제각각이었지만 확실히 그건 눈물 자국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스타단 보스, 그리고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명찰을 내려놓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아무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은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확실한 건 그보다 전에 소식을 들었어도 퇴학당하는 날까지 모두가 스타단 아지트를 지키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가기를 선택하지 않은 이상 어찌되었든 이제부터는 각자가 각자의 미래를 그려나가야 했다. 과거에 멈춰 착실히 현재를 살아갔던 이들에게 미래라는 단어는 너무 무거웠다.
고마웠어. 잘 지내. 그들은 그런 형식적인 감사인사도 주고받지 않았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스타단이 해산된다고 친구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다섯은 한데 묶여있진 않아도 어떻게든 연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수많은 앞으로 어떻게? 는 적어도 지금 답을 내릴 일은 아니었다. 일단 모두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편지에서 이때까지 진 보스가 견뎌야만 했던 무게가 느껴졌던 만큼 그들 하나하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내려놓기를 원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려놓아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다음을 약속하는 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혼자만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날이 밝자마자 다섯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학교를 찾아가 퇴학 처리를 요청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퇴학이라는 글자 앞에 ‘당사자의 요청으로’ 라는 문장이 붙었다. 각자의 아지트로 돌아간 다섯은 자신들보다 더 일찍 학교로 돌아가거나 학교를 떠나기를 선택한 조무래기들로 인해 한층 허전해진 아지트를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아지트 전체가 흩날렸다. 누군가의 바람에 아지트 모두가 흩어졌다.
최선의 결말이었다.
바라던 결말은 아니었다.
Part 2.
각자는
퇴학당한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피나는 충분한 휴식이 끝난 후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에 집중하지 않던 시간만큼 집중해야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옷장에는 스타단에 들어가기 전 입던 단정한 옷들과 스타단에 들어가고 나서 산 단정하다는 말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 옷들이 같이 걸려있었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이 옷장을 같이 쓰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무엇이 지금의 나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는 옷들을 따로 분류해서 걸어두지 않기를 택했다.
그는 더 이상 디제잉을 하지는 않았지만 작곡은 계속했다. 디제잉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디제잉 장비는 먼지가 쌓일 때마다 바로 닦았다. 먼지가 쌓이면 함께한 추억에도 먼지가 쌓일 것 같아 싫었다. 가족으로부터 방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니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말도 들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그의 가족은 그의 방이 더 이상 단정해보이지 않는다는 걸 신경쓰는 듯했다. 딱 가족이 신경쓰는 만큼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사이트 사이사이 음악 파일과 작곡 프로그램이 있는 걸 볼 때마다 그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책상에도 악보와 문제집이 어지럽게 뒤섞여있었다. 옷장도, 컴퓨터도, 방도, 책상도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펜을 집어던지다 다시 가지런히 정리하다가를 반복했다. 가족으로부터 주기적으로 다른 지방의 트레이너스쿨을 알아봐줄 테니 학교에 다시 가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단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는 언젠가 알고 지내던 다른 친구와의 통화에서 디제잉을 하지도 않는데 아직도 장비를 정리하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 스타단의 사정은 알고 있지만 그들이 함께한 추억의 깊이까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는 언젠가는 쓸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로 방에 이것저것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때만큼은 언젠가 쓸지도 모르잖아. 라고 대답했다. 평소에 하지도 않을 행동과 말을 계속하니 어딘가 이상했다. 뻗친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헤드셋에서 음악 대신 강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정해진 루틴대로 행동하는 게 맞는 거 같았다. 그러나 그 중 무엇이라도 하면 왜인지도 모를 후회를 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더 이상 스타단은 없음에도 여전히 자신은 스타단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멜로코는 그 후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단 나서고 봤던 자신에 익숙해져 어디라도 나서지 않으면 속이 답답했다.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되는 대로 먹고 다시 나다니다를 반복했다. 추명이 만들어준 부츠는 오래 걷기 불편해 더 이상 신지 않았지만 방 한켠에 고이 보관해두었다. 방에 세워두니 진짜 부츠보다는 일종의 예술품 같기도 했다. 키가 더 자라면 무릎까지는 오지 않게 되려나. 물론 그래도 더 이상 신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스타단 해산 이후 그가 제일 자주 만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추명이었다. 아무데나 돌아다니는 자신과 달리 그는 목적지를 정하고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있는 듯했다. 무릇 닌자라면 어디든 잘 돌아다녀야 하는 법이오. 라고 말하는 그는 닌자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뭐해? 라는 질문에 주로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의상 스케치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의상 제작을 관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멜로코는 그 말에 안심했다. 더 이상 스타단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나름대로 자신답게 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림 가르쳐줘.”
“갑자기 말이오?”
“사실 네가 만들어준 부츠를 보고 전부터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가르쳐줄 수는 있소만… 학원이나 다른 강의 같은 방법도 있을 터인데….”
“필요없어. 우선 즐겁게 하는 게 중요해. 전문적인 건 그 다음에 생각할래.”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도 미술부가 있었지, 참. 아카데미 재학생이 아닌 자신에게는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스타단이 되기 전 자신이 미술 수업에 크게 열중하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그때 잠깐 뭐라도 제대로 들어놓을걸.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추명과 만나며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그림을 구경하는 것에도 열중했다. 가끔씩은 콜사, 팔자크 등 익숙한 이름들도 보였다. 다들 자신만의 개성이 확고해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내 스타일을 가질 수 있을까. 아직 기초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면서 벌써부터 여러 생각을 하는 생각이 우스웠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이제야 조금 미래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어보니 추명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이제 뭐해? 계속 이렇게 지내도 되나? 모르겠소…. 막막한 대화를 하면서도 둘은 가르침과 배움에 열중했다. 멜로코는 집에서도 그림 공부에 몰두했다. 따로 강의를 듣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관련된 책을 보기도 했다. 갈수록 시야가 트이는 기분이었지만 동시에 답답했다. 자꾸 목에 걸려 울렁거리는 것의 출처가 이제는 볼 수 없는 친구에 대한 기억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즈음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스타단이 아님에도 스타단이길 바란다는 걸 인정했다.
추명은 스타단 해산 이후 며칠 동안은 밖에 나가지 않았다. 단복으로 입던 닌자 옷은 마네킹에 걸어 방 한구석에 두었다. 다시 보니 자신의 껍데기나 허물 같기도 했다. 물론 그것에서 벗어난 자신은 나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애벌레도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은 스타단이라는 환경 하나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도저도 아니게 보였다. 닌자 옷을 입지 않는다고 무난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단순히 옷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 집, 그냥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게 낯설게 다가왔다.
나가기로 결심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어색하고 낯설다고 계속 그 상태로 있으면 지금의 모습 그대로 굳어버릴 것 같았다. 이리저리 다녀보기로 결심한 김에 그는 팔데아에서 다닐 수 있는 모든 곳을 한번씩 다녀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든 나타나고 어디든 사라지는 그야말로 닌자다운 생각이었다. 그는 스케치북을 들고 앉아있다 우연히 멜로코를 만났다. 뭐야? 여기서? 완전 우연이네. 그렇게 말하는 멜로코의 목소리는 자신이 알던 그대로였다.
우연한 계기였지만 멜로코의 부탁에 그는 흔쾌히 그림을 가르쳐주겠다 말했다. 자신도 누군가를 가르쳐주기엔 한참 모자라다고 생각했지만, 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꺾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둘은 여기저기를 같이 다니다 어느 날은 표식의 나무숲으로 향했다. 팀 시의 아지트가 있던 곳이었다. 언제 사람들이 살고 있었냐는 듯 부지는 휑했다. 그푸리 한 마리도 굴러다니지 않았다.
“근데 여기엔 갑자기 왜 가자고 한 거야? 솔직히 의외였어. 가기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소… 오히려 언젠가 한번쯤은 반드시 가보겠다고 생각했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에 더욱 가보고 싶었던 것이오.”
아지트는 고요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했다.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텅 비어있는 공간을 보며 둘은 자연스레 진 보스를 생각했다. 아지트가 빠진 표식의 나무숲이나 진 보스가 빠진 스타단이나 별다를 게 없어보였다. 문득 멜로코는 그에게 진 보스가 원망스럽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잘 몰랐는데 여기 바람이 잘 드네. 같은 실없는 소리나 해댔다. 추명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한쪽 눈으로만 하늘을 보다 두 눈으로 보니 어딘가 새파랬다. 기분 좋은 파랑은 아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곳은 더 이상 스타단 팀 시의 부지가 아니라는 걸 납득하기로 했다.
오르티가는 스타단이 해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유학을 통보받았다. 그래도 회사를 물려받을 사람인데 교육에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개인 과외보다 좋은 시설에서 함께 교육받는 게 좋다는 점에는 그도 동의했지만, 선뜻 좋다고 나설 수도 없었다. 아직은 학교가 무서웠고,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었고, 떨어져 있다가는 왜인지 전부 잊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그의 어머니는 신설 학교라 시설이 좋다며 그를 설득했다. 물론 거절해도 어떻게든 가게 될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면… 가기 전에 해야 할 게 있었다.
그는 유학을 가는 대신에 스타단 아지트가 있었던 다섯 부지를 어패럴의 이름으로 매입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상 소유주가 있는 빈 땅으로 두겠다는 말이었다. 이름 없는 빈 땅이었기에 무사히 아지트를 세울 수 있었고, 그랬기에 다시 어떤 건물이든 들어설 수 있고 누구라도 매입할 수 있다. 그는 그 소식을 다른 보스들에게 알리며 그 자리에 스타단 아지트가 없는 이상 다른 무엇도 들어서게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당황하고 누군가는 놀랐으나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항상 그의 집안과 스타단의 일을 엮는 것에 부정적이던 멜로코도 그닥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가 가기 싫다고 떼를 쓸 거라고 예상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그가 내건 조건은 어패럴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받아들이는 대신 야외 행사나 전시회 등 일시적으로는 부지를 쓸 수도 있음을 이야기했다. 회사의 이름으로 매입한 부지를 비워두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오르티가는 그 역시 순순히 동의했다. 어쨌든 그곳이 스타단 부지가 아니라 완전하게 다른 장소가 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후 그는 다른 보스들에게 가능한 선까지 도와줄 테니 같이 유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피나는 배틀학 위주의 커리큘럼은 싫다며, 비파는 완전히 운동 선수로 활동하기를 택했기에, 멜로코와 추명은 당분간 그림을 그리며 지내고 싶어 단칼에 거절했다. 유학이라는 말 뒤에 어떻게든 떨어지기 싫다는 마음이 얼핏 비쳤지만 서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오르티가도, 다른 보스들도 서로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하나지방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학교 교복에 스타단 단복으로 쓰던 분홍색 겉옷을 걸친 채였다. 다른 보스들 모두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리본같은 매듭이 지어진 옷에 분홍색 겉옷을 입은 모습은 전체적인 색상이 다름에도 어딘지 모르게 보스 시절의 옷을 떠올리게 했다. 짧지만 결코 형식적이지는 않은 인사가 오고갔다. 방학 때에는 무조건 팔데아로 와 있겠다며 의젓한 척하던 그는 결국 비행기 탑승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울음을 터트렸다. 가기 싫어. 학교 가기 싫어. 너무너무 싫어. 그래도 다녀올게. 그리고 꼭 돌아올게.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다른 보스들은 그 말을 믿었다. 돌아오지 않겠다 말한 사람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돌아오겠다 말한 사람은 돌아올 것이다.
비행기에 타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스타단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비파는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빠르게 일상을 되찾았다. 그는 아카데미에 다시 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나, 공부를 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격투기 선수로 완전히 전향하는 대신 시간을 내서 개인 과외나 인터넷 강의 등으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가끔은 자신과 똑같이 공부를 계속하길 택한 피나에게 연락해서 공부 스케줄이나 과목별 공부법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바로 전화를 받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 사람마다 다 달라서. 스마트로토무 너머로 들려오는 자신없는 목소리에도 비파는 항상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는 가끔 다은을 만나 아카데미에 관해 물어보고는 했다. 스타단 해산 전 그는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다은을 붙들고 아니라면 모를까 공부를 계속하고 싶으면 아카데미에 다니는 게 맞다며 그를 설득했다. 다은은 그렇다면 너도, 라는 말을 아예 꺼낼 수 없었다. 과거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결국 둘은 학교 복도를 같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따로 시간을 내서 서로의 근황을 전하는 게 전부였다.
언젠가 비파는 다은으로부터 최근 아카데미에서 유명해진 학생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성적도 우수한데다 배틀에도 능하고 성격까지 좋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좋은 쪽으로 오르내린다는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인기인인 걸까. 비파는 그렇게 생각하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임을 깨달았다. 스쳐지나가듯 한 이야기라 화제는 금방 다른 쪽으로 옮겨갔지만 그는 그 학생이 자신과 다은과 같은 절차만큼은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마치… 진 보스를 떠올릴 때처럼.
그의 삶은 다른 보스들과는 달리 평탄하고 흔들리지 않는 듯 보였지만 그저 그의 노력으로 겨우 아슬아슬하게 현상유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회에서 우승해 받은 트로피를 찍어 자연스럽게 카시오페아의 번호로 보냈다가 누구신데 이런 사진을 보내냐는 답변을 받거나, 표정이 안 좋은데 친하던 누구랑 헤어지기라도 했냐는 질문을 지인들로부터 종종 받고는 했다. 그들이 카시오페아의 존재에 대해 알 리는 없을 테니 그는 그냥 컨디션이 안 좋다는 말로 에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상황을 이야기하면 모두가 카시오페아를 욕할 것 같았다. 분명 이별 통보를 받은 쪽은 자신임에도 그는 그런 말들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하나둘 쌓여갈 때쯤 그는 자신이 스타단의 그늘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Part 3.
다시, 모두는
다시 만나자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 모두가 제대로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였다. ‘모두의 만남’이 어려웠던 건 주로 오르티가나 비파 때문이었다. 오르티가는 학기중에는 아예 볼 수 없었으며, 비파는 시간을 내서 만날 수는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치의 차를 타고 훈련하러 돌아가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잠깐 시간을 내 한두시간씩 만나고는 했지만 하루를 온전히 함께하기에는 어려웠다. 시간이 흘러가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가 변했고 또 그대로였다.
피나는 작곡 활동에 불이 붙어 그 사이 기타를 여러 대 구입했다. 그랬지만 아무리 비싼 기타라도 쓰지도 않는 디제잉 장비보다 소중히 관리하지는 않았다. 동영상 사이트에 꾸준히 곡을 투고한 바람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는지 외부에 몇 번 곡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공부 역시 포기하지 않아 이전의 실력을 되찾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전보다 성적이 훨씬 좋아지기까지 했다. 어느 학교를 들어가도 단번에 성적 우등생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작곡도 공부도 열심히 하던데 어느 쪽으로 나아갈 생각이냐는 친구의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매사에 열심이면서도 대체 앞으로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학생회장으로도, 스타단 보스로서도 정직하게 걸어왔던 시간만큼이나 그는 오랫동안 방황하고 있었다. 과거에 자신을 두고 살아갈 수 없었기에 현재에 충실하자는 건 분명 좋은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결심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그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건 뜻밖에도 알로라지방에 있는 트레이너스쿨로의 유학이었다. 팔데아의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아예 소규모인 다른 지방과는 달리 적당한 규모에 나름대로 있을 건 다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커리큘럼이 괜찮았다. 공부도 작곡도 계속하고 있었지만 환경의 불안정함이 슬슬 압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전과 달라졌다 한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수업을 듣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유학을 갈지 말지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방학 때는 무조건 돌아올 것임을 다른 보스들에게 말해두었다. 공항에서 가기 싫다고 울던 오르티가가 계속 생각나서였다. 그는 분명 학교를 가기 싫다고 말했지만 자신에게는 헤어지기 싫다는 말처럼 들렸다. 만약 서로의 거리는 떨어지게 되더라도 마음은 떨어지지 않을 거란 걸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그 편이 서로가 느끼는 이별의 무게를 덜어줄 것 같았다.
멜로코는 독학과 가르침을 병행한 끝에 몰라볼 정도로 단기간에 그림 실력이 늘어났다. 추명의 가르침과 본인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그동안 여러 전시에 얼굴을 비추고 인터넷에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계속 그림을 올렸다. 그런 덕에 개인 주최에 소규모지만 합동 전시에 참여할 기회도 생겼다. 전시가 열리는 곳은 하필 팀 쉐다르의 아지트가 있던 곳이었다. 그는 오르티가에게 전화해 무슨 힘을 행사한 건 아니냐며 물었고 그로부터 뭐래? 그냥 우리 측에 말해서 빌렸겠지. 라는 단순하고 그다운 답을 받았다.
멜로코는 문득 스타단이 해산되던 시기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했다. 어패럴과 스타단이 엮이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모자라 나서서 동의하기까지 하다니 의외라는 다른 보스의 말을 듣고 순간 욱해서 우리가 이제 스타단이긴 해? 라고 말하던 일, 그러고 나서 1초만에 후회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던 일, 조무래기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대놓고 얼굴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던 일, 유독 마지막 날에 바람이 많이 불었었지…. 바람에 흔들리던 아지트만큼 불안정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자신은 놀랍도록 평온한 삶을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그는 추명과 함께 팔데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결국 팔데아에서 갈 수 있는 모든 장소를 전부 가고야 말았다. 그 후 그는 예술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로 보울마을에 죽치고 앉아 그림을 그렸으며 추명이 그림을 알려줄 때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집, 친구들과의 만남, 보울마을에서의 작업이라는 단순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단조로운 루틴이었지만 전혀 지겹지 않았다.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요즘 그에게 생긴 새로운 목표는 개인전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더 실력이 쌓이고 이름도 그만큼 알려지면 차근차근 준비해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어패럴의 이름을 달고 있는 스타단 부지였던 땅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었지만 정 안되겠다 싶으면 오르티가에게 연락 정도는 넣어볼 생각이었다. 착실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가끔 그런 자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다. 학교 밖의 개인이 된 이상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제외한 바깥의 일들은 인맥이든 뭐든 모두 이용해서라도 전부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진 보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의 현재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 확신이 될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만큼이라도 안정된 생활을 하길 바랄 뿐이었다.
추명은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옷을 보는 게 직접적으로 디자인과 연관된다고 보지는 않았으나 그는 이미 팔데아에서 다닐 곳은 다 다녀본 상태였고, 어딘가 정착하면서도 얽매이지 않을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선택한 게 옷가게에서의 아르바이트였다. 주어진 시간에만 일을 하면 나머지는 집이든 밖이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는 다른 보스들과는 달리 크게 미래에 대해 생각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지금을 천천히 되찾는 연습이 필요했다.
그 사이 그는 오르티가로부터 자신이 기업을 물려받으면 어패럴에서 일할 것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거절했다. 지인 비리…라는 거창한 이유보다도 그냥 오랜 시간 어딘가에 매여있는 건 자신과 썩 어울리지 않는 생활 방식이라고 여겨서였다. 닌자라면 역시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하는 법. 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야 어쩌면 방금의 제안이 이러다간 계속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라는 오르티가의 공포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옷을 만들고, 제작한 옷을 개인 sns 계정에 계속 업로드했다. 오타쿠로 보이는 몇 유저들로부터 자신의 코스프레 옷을 제작해줄 것을 의뢰받기도 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취향이 담긴 코스프레라면 그의 전문이었다. 의뢰한 유저들 중에는 가끔 돌핀맨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과의 통화에서 역시 돌핀맨은 히어로 같아서 너무 좋다고 오타쿠같은 목소리로 말하던 진 보스를 떠올렸다. 돌핀맨 오타쿠들의 계정 중에 진 보스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단번에 그만뒀다. 잊지는 않을 거지만 본인은 잊혀지고 싶어하는 것 같았으니 적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한 눈으로 보다 두 눈으로 보다 한 세상을 오로지 두 눈으로만 보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예전처럼 자신이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두 눈으로 세상을 본다고 딱히 시야가 넓어지는 건 아님을 깨달았다. 여러 일들을 겪고 여러 결심을 한 끝에 그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기를 택했다. 다른 누구보다 제일 대책이 없었으며, 단순하고, 가장 그다운 방법이었다.
오르티가는 불행하게도 방학 때 팔데아로 돌아오고 나서도 여유롭게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언어학에서 낙제 위기였기 때문이었다. 배틀학 위주의 커리큘럼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꼼짝없이 방학 기간 동안 가빈에게 추가 과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급을 막기 위해 기를 쓰는 것치곤 그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았다. 별일 없이 학교를 졸업하기.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조차도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학교 생활은 무난함 그 자체였다. 평범하게 반 친구들이랑 어울렸고, 평범하게 테라리움 돔에서 배틀을 즐겼으며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공부하고 부활동을 즐겼다. 그는 과학부에 들어갔다. 도구 프린터를 보고 과학부에서 본격적으로 기계도 다룬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는 추가 공부를 하는 와중 잠깐씩 다른 보스들을 만날 때마다 아 누구누구들이 같이 학교 왔으면 음악부나 미술부에도 들어갈 생각 있었는데.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물론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생활이 평탄하게 흘러간 만큼이나 그는 학교에서 그가 생각한 것보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학교에 하나지방 체육관 관장의 딸, 체육관 관장이었던 유명한 트레이너의 손자, 배틀 실력이랑 성적이 모두 우수한데다 학생회장이기까지 한 사람 등 체감상 이름 있는 누군가의 핏줄이나 뛰어난 재능으로 이미 학생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많았기에 대기업의 후계자라는 건 한순간 관심을 모을 수는 있어도 크게 특별한 위치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가 택한 방법은 학교의 일에 적당한 관심을 두는 것이었다. 그의 반, 그의 친구들, 그의 동아리, ‘그’를 둘러싼 것들 외에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왜인지 그렇게 해야만 과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어째서인지 학교가 떠들썩했지만 그의 반, 그의 친구, 그의 동아리가 엮인 일이 아니었기에 그는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가끔 그는 스타단 보스로서 입던 겉옷을 매만지며 이게 맞나, 같은 생각을 하며 진 보스를 떠올렸다. 항상 해결책을 제시해주던 그는 이제 없었기에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이러다 그냥 졸업하는 걸까. ‘별일 없는 하루하루’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누구보다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일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계속, 계속… 어쩌면 앞으로도.
비파는 스타단 해산 직후나 해가 바뀐 지금이나 가장 큰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격투기 선수로 전향한 그는 그 사이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으며, 방 안의 장식장에는 트로피가 쌓여갔다. 그는 상을 탈 때마다 바로 다른 스타단 보스들에게 자랑했다. 계속해서 축하 메시지를 받고, 가족에게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으며 기쁘게 웃다가도 뒤돌아서 이제는 진 보스의 연락처도 아닌 연락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는 청산할 수도 지워질 수도 없다. 자신에게서 절대 뺄 수 없는 일부가 생겼음을 그는 그럴 때마다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로 스포츠 뉴스를 탔으며, 여러 매스컴이랑 인터뷰도 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올곧고 반짝이는 그의 대답은 여러 사이트에서 실력도 좋은데 인성까지 제대로 갖추었다며 화제가 되었다. 기사들 사이사이에 학교에서 퇴학당한 일이 ‘프로 선수가 되는 과정에서 찾아왔던 시련’으로 짤막하게 서술된 부분을 그는 애써 무시했다. 왜 그랬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은 잘하네… 팀 카프의 아지트였던 곳에서 팬 사인회를 하며 그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숨겨야 했다.
학교에 다시 잘 적응해서 요즈음은 하루하루가 즐겁다는 다은의 말을 들으며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줬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스스로 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너라도 잘 다녀서 다행이야. 찝찝한 기분을 그런 생각으로 일부러 매듭지었다. 그런 마음에서 생긴 반동이었는지 공부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가끔은 선수임에도 공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는 질문에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로 대답했다.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이대로만 걷는다면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으나 그 사실은 비파에게 전혀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이유 없이 지치고, 훈련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곱게 접어둔 진 보스의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걸 읽을 때면 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나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분명 나를 응원해주고 있을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뭐야 그거, 러브레터야? 라는 코치의 농담에 그는 러브레터보다 더 소중한 편지예요. 라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팔데아 밖에서 대회가 열린다면 혹시나 보러 와주려나. 물론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러면 좋겠다. 비파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마무리하며 잠에 들었다.
*
그런 시간들을 거쳐 다시 지금. 드디어 하루를 통으로 빼서 모두가 만났다.
“근데 왜 팀 루크바 아지트인 건데?!”
“여기만큼 탁 트인 곳이 어딨다고? 뭘 아무렇게나 놔둬도 보기 좋잖아.”
오르티가는 그렇게 말하며 멜로코에게 보라는 듯이 스타모빌 다섯 대와 단복이 걸린 마네킹 다섯 개를 가리켰다. 스타모빌의 화력은 여전했고, 스타모빌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모두의 배틀 실력 역시 그대로였다. 그것들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전시 같기도 했다. 전시에 이름을 붙이자면 ‘스타전’ 정도가 적당해보였다. 스타단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들이 만난 시간은 한낮이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어 전혀 덥지 않았다.
만나서 별로 하기로 계획한 건 없었다. 그저 피크닉을 하며 수다 떠는 게 전부였다. 뒤쪽에서는 포켓몬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포켓몬들도 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추명의 더시마사리와 드래캄이었다. 분명 스타단일 때에는 엔트리에 없었는데 언제?
“저 친구들은 언제부터 함께한 거야? 오늘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처음 본단 말이오? 하긴 스타단 해산 이후로는 한 번도 멜로코 나리 앞에서 포켓몬을 꺼낸 적이 없었던 것 같소… 저 친구들은 기적처럼 다시 만난 소중한 동지가 준 것이오! 마치 멜로코 나리의 카르본처럼 말이오!”
그의 말인즉 스타단 보스로 있을 때는 만나지 못한, 스타단 활동 전에 같이 닌자 놀이를 하며 지냈던 친구를 얼마 전에 다시 만났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둘 다 팀 시의 아지트를 생각하면서 표식의 나무숲으로 향하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그들은 만나진 못했어도 서로가 서로를 계속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다음 만남에서 포켓몬을 두 마리나 교환했다. 그렇게 받은 게 수레기와 시마사리였다.
멜로코 역시 얼마 전에 기적같은 만남이 있었다. 어떤 카르본이 자신의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설마 하는 마음에 까를로스! 하고 불렀더니 바로 그에게로 달려왔다는 드라마같은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팀 쉐다르 근처에서, 그 다음에는 팔데아 전역을 돌면서 그의 흔적을 찾아다녔던 모양인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그 길로 바로 포켓몬센터로 향해 카르본을 회복시켜준 뒤 소중하게 볼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은 카디나르마가 되었다는 말씀!”
“감동적이야!”
비파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라도 봤다는 듯 옆에서 계속해서 박수를 쳤다. 비파같은 반응이 아니었을 뿐 나머지도 감격의 재회에 훈훈해진 얼굴이었다. 피나만이 조금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다들 한두마리씩 더 늘어난 엔트리 사이 그의 포켓몬들만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바꿔 말하자면 학생회장 시절의 엔트리 사이에 대도각참으로 진화한 자망칼만 있을 뿐이었다.
그는 스타단 해산 후 더 이상 악 타입 트레이너는 하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키우던 자망칼만큼은 계속 소중하게 데리고 있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원래 데리고 있던 엔트리에 악 타입 포켓몬이 하나 추가된 게 전부이니 악 타입 트레이너를 그만두겠다는 그의 말은 정말 정직하게 지켜진 셈이었다. 분명 제일 변함없는 건 자신일 텐데도 어째서인지 혼자 변한 것 같은 기분에 그는 포켓몬들이 모여 노는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 맞다. 나 보여주고 싶은 거 있어. 최근에 그림을 하나 완성했는데 완전 회심의 역작같이 나와서… 내 입으로 이런 말 좀 그렇지만, 나중에 개인전을 열면 이걸 대표작으로 걸고 싶을 정도로 잘 그려졌어.”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멜로코 쪽으로 쏠렸다. 그가 커다란 가방에서 꺼낸 그림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액자에 담겨있었다. 얼핏 보기엔 평소 그가 갖고 있는 독특한 화풍이 하나도 묻어나지 않는 사실적인 그림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채색한 부분 군데군데에서 그만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특이한 그림이었다. 전체적으로는 평범했지만 자신만의 느낌은 그대로 가져간 것 같았다. 인상적인 채색법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소재도 정말 무난하게 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건…
“모란꽃이잖아?!”
모두는 짠 것처럼 같은 톤, 같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 와중에 추명이 미안한데 혹시 이거 상황극이오? 라며 태클 아닌 태클을 걸었다. 좀 애니메이션 같긴 했나. 의도한 게 아님에도 괜히 부끄러웠는지 누구는 헛기침을 하고 누구는 시선을 피했으며 누군가는 그새 파도가 아름답네, 라고 말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다시 모두의 시선이 멜로코의 그림으로 향했다. 확실히 대표작으로 걸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대중성과 자신만의 색 모두를 갖춘 명작이었다.
눈에 띄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란꽃의 붉은색 뒤로 은은하게 푸른색이 칠해져 있었다. 주변의 풀은 싱그러운 녹색이 아닌 칙칙한 회색이었지만 위쪽으로 갈수록 풀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굳이 전시 전에 애써 멀리까지 들고 온 그림을 꺼내놓기까지 했는데 작업 배경이나 숨은 의도를 물어보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비파가 전시회를 연 예술가에게 질문하는 기자처럼 손을 번쩍 들고 멜로코에게 물었다.
“질문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아무도 하자고 말하지 않은 상황극의 시작이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곳은 이미 멜로코의 개인전이 열리는 장소고 나머지는 호기심 많은 기자가 된 듯했다.
“보통 모란꽃은 붉은색인데, 그 뒤쪽에 은은하게 푸른색을 깔아둔 의도가 뭔지 궁금합니다.”
“모란은 꽃들의 왕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색도 가장 화려한 붉은색이고…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모란꽃을 저만의 방식대로 아름답게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문득 꽃들의 왕이라는 표현을 곱씹어보니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왕이라는 건 일반적으로는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가장 빛나고 주목받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그 자리에 있기에 외롭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푸른색으로 표현하신 건가요?”
“네. 그래서 푸른색을 썼지만 전면에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도록 옅게 칠했습니다. 왕의 자리는 기쁨도 슬픔도 크게 드러내서는 안 되는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감정의 동요를 크게 드러낼수록 밑의 사람들도 혼란스러워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본래의 색인 붉은색을 위쪽에 강하게, 드러내기 힘들지만 분명 갖고 있을 푸른색을 아래에 옅게 칠했습니다.”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진짜 설명회라도 개최했다는 마냥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실제로 열면 내가 실망할까봐 미리 연습시켜주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멜로코는 웃고 있었다.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네. 이름이… 피나 님? 말씀해주세요.”
“풀이라고 하면 누구나 녹색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청록이나 금빛도 아니고 굳이 회색으로 칠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혹시 모란꽃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색을 잃어가는 주변을 표현하고 싶었나요?”
“좋은 해석이지만 아닙니다. 풀을 회색으로 칠하여 모란꽃이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외로움에서 비롯된 슬픔이 결국 잿빛이 되어 주변으로 번져가고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따지자면 주변의 풀도 결국 꽃을 구성하는 일부잖아요? 그러나 꽃이 색을 잃을까 걱정된 나머지 주변까지 둘러보지는 못한 것입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의 가장 화려한 부분만 보기 때문에, 본질 아닌 본질에 집중하려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린 거죠.”
“그렇군요. 좋은 설명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셋이 그러고 있는 사이 오르티가와 추명은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도 이 상황극 아닌 상황극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르티가는 뭘 물어볼지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추명은 어떻게 물어볼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수차례의 눈빛이 오간 끝에 오르티가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저도 질문하겠습니다.”
“네? 죄송한데 누군지 잘 안 보여요. 아예 일어서서 손을 들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농담입니다. 질문해주세요.”
“그… 위쪽에서 반짝이는 게 뭔지 궁금해요!”
“아, 네? 네. 위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있냐고 물어보신 거 맞죠? 잘 파악하셨네요. 말씀처럼 유독 위쪽이 빛나는 건 단순한 명암 표현이 아닌 실제로 위에 빛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모란꽃은 오전 중에 볕을 많이 받는 편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란꽃은 조금 다릅니다. 자꾸 낮이 아닌 밤에 빛을 받으려고 하죠. 그래서 위에서 반짝이는 건 낮의 해나 은은한 달이 아닌 여럿이서 동시에 빛을 내는 별입니다.”
“모란꽃이 조금 다른 이유는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모란꽃은 화려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밤에 상대적으로 덜 드러나보이는 건 사실이기에, 별빛 사이에 숨어 별들과 같이 반짝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너 전혀 이해 못했는데 알겠다고 한 거지?! 아니거든. 이해했거든. 상황극이 잠시 깨지고 둘이 왁왁거리다 마지못해 화를 가라앉히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이 추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둘이 또 다투려는 걸 말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멜로코의 그림에 개인적으로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였다.
“소인은 추명이라고 하오.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소?”
“아, 네. 이름을 먼저 밝혀주시다니 친절하네요. 말씀해보세요.”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꽃이 정적인 느낌이오. 물론 꽃은 항상 그 자리에 있기에 정적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소만, 그냥 자연스레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멈춰선 듯한 인상을 받았소이다.”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캐치하시다니 세심하시네요. 확실히 그런 느낌을 의도한 게 맞습니다. 모란꽃은 바람이 세게 와닿는 곳에 있는 게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 꽃은 바람이 세게 부는 곳에서 피어났습니다. 바람을 맞는 게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바람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꽃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다가 결국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기 싫다는 바람을 이룬 것입니다.”
“어딘가 슬픈 이야기인 것 같소.”
“그렇긴 하네요. 뭐든 피하려 할수록 강한 충격 한 번에 흩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 꽃도 그냥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기를 택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회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연스레 시키지도 않은 상황극은 종료되었다. 또다시 박수가 터져나왔다. 순수히 그림에 대한 설명을 칭찬하는 박수였다. 아, 뭐야, 부담스러워. 멜로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절대 그만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설명을 전부 듣고 나니 이곳에서 언젠가 멜로코 나리의 개인전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마침 주변도 꽃밭이니까 꽃을 테마로 해도 좋을지도? 전 주인이었던 내가 허락할게. 집에는 내가 잘 얘기해둘 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대도… 아무튼 고마워. 언제든 정해지면 가장 먼저 연락할게.”
“혹시 전시회에 쓸 음악은 안 필요해? 잔잔한 곡은 자신 없긴 하지만, 이참에 좀 이미지 변신? 이란 걸 해볼까 싶어.”
“뭐라고?”
“전시회 열리면 난 인증샷 남겨서 올리고 친필 사인도 할게! 입구에 걸어줘. 전시회 개최 축하합니다. 비파. 이렇게.”
“아, 아니, 다들 뭐라는 거야?! 아직 가게도 안 열었는데 재료 손질해달라는 소리하네! 흩어져, 흩어져!”
멜로코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여러 번 손을 휘저었다.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가지런하게 흩어졌다. 그새 바람이 더 강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루크바 아지트였던 곳 내부의 꽃들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딱히 계절을 타지 않는 곳인 팔데아지방임에도 마치 봄 같았다. 뒤로는 겨울 같은 설산에 앞에는 여름 같은 바다에 가을 같은 바람이 부는 날씨라니. 한 장소에 사계절이 있었다. 각 계절만큼 확연히 다르지만 계속 한데 모이는 자신들 같기도 했다. 반듯한 자세를 고쳐 걸터앉은 피나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바람이 불긴 해도 뭔가 평소보다 꽃잎이 더 높이 날아다니는 느낌이네… 어?”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바람에 흩날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꽃잎이 다시 한데 모여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모양은 바람이 만들어낸 또 다른 바람 같기도, 바람에 나부끼는 아지트의 커다란 깃발 같기도, 계절이 여러 번 변해도 꽃은 여전히 이곳에 피어있을 거라는 다짐 같기도 했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고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이내 꽃잎은 만화 효과마냥 높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더니 일부는 하나둘씩 땅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낮에 떨어지는 여러 색의 유성 같았다.
멀리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방금 봤어? 녹화해서 sns에 올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바람이 부는 동안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도 이걸 찍어서 어디 올리지 않기를 바랐다. 다섯 명이 같은 자리에서 본 신기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 속에만 간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정적도 잠시 비파가 반은 소망, 반은 허망이 담긴 눈으로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멀리 날아간 꽃잎들 중 하나라도 어디 다른 곳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어디?”
“진 보스가 있는 곳에….”
“아….”
진 보스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다가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다 낯선 곳에 떨어진 걸 발견한다 한들 어디서 날아왔나 보네. 생각하며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그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바람이 닿을 수 있다면. 몇 번이어도 좋으니 무엇이든 계속 날려보내고 싶었다. 마음이든, 편지든, 하다못해 오늘 본 것 같은 크기의 작은 꽃잎이라도.
“꽃이란 건 뭔가 별 같지 않소? 다함께 모여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이니….”
“그렇네.”
“아까부터 왜 그렇게 다같이 한번에 대답하는 것이오? 소인 빼고 다같이 작당모의라도 했소?”
모두는 각자의 방식대로 멋쩍어하며 웃었다. 아무튼 작당모의는 아니야. 아닌걸?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라는 말만이 거듭해서 들릴 뿐이었다.
만화같은 연출은 끝나고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다섯 사람이 남았다. 오늘의 일도 언젠가는 흐릿해질 것이다. 신기함과 놀라움은 다 사라지고 그때 좋았었지, 하는 형식적인 감상만 남을지도 모른다. 진 보스의 존재도 점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의 일이 그때 대체 뭘 그렇게 강하게 바랐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빛바랜 추억으로 남아도 좋으니까 우리를 잃지만 않기를 바랐다.
우리… 다섯이면서 여섯이기도 하지만 여섯이면서 다섯은 될 수 없는 우리. 한 자리가 빠진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를 오래 비워두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 지금. 다섯의 바람이 강했기에 그 순간 꽃잎이 흩날리다 흩어졌다 해도 믿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는 사이 잠깐 진 보스가 뒤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다 조용히 사라지기를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슬슬 일어나고 싶은 사람?”
“없어요!”
“없어.”
“없는데?”
“있겠냐?”
“말한 내가 잘못이지.”
피나는 그렇게 말하며 걸터앉은 자세를 다시 바르게 고쳤다. 어느새 해가 저무려 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는 별이 뜨는 것까지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날따라 해가 느리게 졌다. 멜로코가 가만히 있는 건 재미없다며 스케치북을 찢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바람에 날렸다.
바람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종이비행기에는 모두의 이름을 적었다.
사용한 BGM
Part 1. 모두는 / 베토벤 - 월광 소나타 제 1악장
Part 2. 각자는 /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 1번
Part 3. 다시, 모두는 / 바흐 - g선상의 아리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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