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샛길 하나
천관산의 꼭대기에 위치한 유적지, 창기둥. 신오지방의 챔피언, 난천은 창처럼 깎인 기둥들 사이로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난천을 등지고 창기둥에 오르는 계단의 반대편 끝에서 설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기를 품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가 쓴 후드에 달린 털이 흔들렸다.
“당신이지? 배지 8개를 모두 모았다는 트레이너가.”
난천의 목소리에 그가 조금 돌아본다. 그것만으론 그의 생김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튀어나온 모자의 챙이 보였다.
검은색 외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거기에 모자까지. 대엽이 알려준 정보와 외관이 일치했다. 난천은 사천왕들의 얘기를 떠올렸다.
*
“간만에 배지 8개를 모두 모은 트레이너가 나타났는데, 도통 리그에 모습을 보일 생각을 않는군요.”
배지를 8개 모은 트레이너는 리그에 도전할 자격을 얻는다. 각자의 일로 바빴던 신오지방의 사천왕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한자리에 모였다. 허나 도전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오엽의 말에 대엽이 양팔로 제 머리를 받치곤 의자 등받이에 몸을 쭈욱 기댔다.
“아- 아, 우리 아가씨와의 배틀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내 열기가 완전히 식어버렸다고.”
“우리 아가씨…?”
그리고 침묵. 사천왕들이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난천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여! 난천!”
“늦어서 미안해, 다들. 조사하던 게 이제 겨우 정리돼서 말이야.”
열심이구만. 대엽이 난천의 말에 호응했다. 살며시 웃은 난천이 모두 모인 사천왕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도전자는?”
“감감무소식이야. 리그에 도전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여.”
“전진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마지막으로 거친 체육관일 테니까.”
대엽이 오른손을 내저으며 하는 말에 충호가 물었다. 대엽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 이미 물어봤는데, 천관산으로 가는 방향만 물어보고 사라졌다나 뭐라나.”
대엽은 수상한 차림의 자그마한 도전자를 떠올렸다. 그의 입술이 한층 더 비죽 튀어나왔다.
*
대엽이 그를 처음 만난 건 물가체육관 앞이었다. 평소처럼 배틀에 흥미를 잃은 전진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물가시티로 왔다가, 웬일로 굳게 닫혀있는 체육관의 입구에 서 있는 이를 발견했다.
‘도둑… 아니, 도전자인가?’
온통 검은색인 차림에 얼굴을 가리는 후드. 거기에 푹 눌러쓴 모자까지. 첫인상만으로 그를 침입자로 판단했던 대엽이 생각을 바꾸었다. 대엽이 어슬렁어슬렁 다가가자 그가 대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
“….”
상대는 말이 없었다. 다만 고개를 살짝 까딱여 인사할 뿐이었다. 대엽이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포켓몬 트레이너? 물가체육관에 도전하려고?”
“….”
“으하하, 너 어지간히도 과묵한 녀석이구나? 배지는?”
그 말에 의문의 도전자가 주머니에서 배지를 한 움큼 꺼내 보였다. 아니, 세상 누가 배지를 이렇게 챙겨 다녀. 대엽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손바닥 위의 배지를 천천히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개잖아. 너, 제법인데!”
“… 정전으로 공사 중이라 물가시티에 올 수가 없어서….”
엇, 말했다. 대엽이 자신도 모르게 말하자 상대가 모자를 더욱 푹 눌러썼다. 이것 참, 웬 수상한 놈인가 했더니, 레이디였구만! 목소리만으로 제노를 미인의 반열에 집어넣은 대엽이 혼자서 무언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엄지로 물가체육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사천왕 대엽. 이 녀석하곤 친구야. 따라와, 전진을 만나게 해줄게.”
“… 제노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캬, 미인은 이름도 예쁘구만~!”
“….”
*
두 사람은 길잡이등대의 전망대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서, 대엽은 멋대로 떠들어댔다.
“- 그래서, 여기 꼭대기에 있는 게 전진이야.”
“….”
제노는 대엽의 얘기를 반쯤 흘려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대엽은 차가운 미인이라며 멋대로 감탄사를 흘려댔다. 헤어스타일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띵, 알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라이츄였다. 피카츄보다 진한 색에 커다란 덩치. 제노의 몬스터볼 안에서 피카츄가 멋대로 튀어나오더니, 두 포켓몬이 마주 보고 섰다.
“오, 우리 아가씨도 피카츄가 있구나?”
“….”
그사이 진화한 호칭을 무시하고 피카츄를 바라본다. 피카츄는 라이츄와 전기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전류를 나누고 있었다. 무언의 대화를 마친 피카츄가 제노에게로 뛰어올랐다. 제노는 익숙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런 제노를 바라본 라이츄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앞서나갔다.
“전진은 거기 있냐?”
대엽의 물음에 츄우, 하고 답한 라이츄가 누군가의 발치에서 멈춰 섰다. 쌍안경 앞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가 돌아보았다. 누가 전기 타입 체육관 아니랄까 봐 금발을 가진 관장, 전진이었다.
“여, 전진.”
“… 대엽. 옆의 사람은?”
“체육관의 도전자라고? 무려 배지를 일곱 개나 가진!”
대엽의 말에 전진의 눈에 잠시 흥미가 떠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린다. 그가 제노에게 돌아가달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그의 라이츄가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울며 제노를 가리켰다.
전진의 시선이 다시 도전자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품에 안긴 피카츄에게로.
“피카?”
“… 그 피카츄. 한쪽 귀가 특이하네.”
“우와, 진짜다! 전혀 몰랐어~”
“피츄 시절부터 이랬어요.”
대엽이 감탄사를 내뱉는 사이 라이츄가 다시 한번 제노의 피카츄를 가리켰다. 피카츄의 표정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라이츄 또한 온몸에 전기를 끌어모았다. 그 둘을 바라보던 전진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파트너가 너의 피카츄와 겨뤄보고 싶어 하는 것 같군.”
“그치 그치? 뭘 좀 아는 녀석이라니까!”
“… 나에게 도전하는 트레이너가 가끔 있지만 다들 시시하다고 할까.”
자연스럽게 대엽의 말을 무시한 전진이 계속해서 말했다.
“난 무엇보다 포켓몬 트레이너로서 전율할 만한 시합을 원해. … 네가 승부의 즐거움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트레이너이길 바라지.”
전진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두 사람은 조용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 배틀도 아닌데 주먹을 불끈 쥔 대엽이 말했다.
“녀석이 먼저 체육관으로 돌아갔나 봐. 우리도 어서 가자!”
“….”
“차갑구만~”
제노가 말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대엽이 능청을 떨며 제노의 옆으로 붙었다. 언제부터 우리였단 거야. 여전히 시끄러운 대엽의 말을 흘려들으며 제노가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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