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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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한 갈래 길

“크윽, 너처럼 나약한 놈에게 또 당하다니…!”

한껏 인상을 찌푸린 소년, 실버는 분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포켓몬을 바라보았다. 그가 꺼낸 마지막 포켓몬인 엘리게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어째서, 강하게 키웠는데, 어째서 저런 놈에게 번번이 지는 거야! 잔뜩 힘을 준 그의 주먹이 잘게 떨렸다.

그런 실버의 속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배틀에서 승리한 심향이 입을 열었다.

“포켓몬을 단지 도구로 생각하는 태도가 잘못된 거야. 그런 자세로 배틀에 임하는 너에게 내 포켓몬들이 질 리가 없어!”

“흥, 잘난 듯이 떠들어대기는.”

엘리게이를 다시 몬스터볼로 되돌린 실버는 늘 그랬듯 심향의 말을 무시하고 탑에서 내려왔다. ‘포켓몬을 도구로 대하면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올곧은 눈도, 그 옆에 당당히 선 마그케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성에선 내 엘리게이가 우위인데, 어째서 매번 지는 거야. 끓어오르는 속을 삭이는 그의 손이 엘리게이가 든 몬스터볼을 세게 쥐었다.

씁쓸한 패배를 안고 탑에서 나오던 그를 막은 것은 한 포켓몬 트레이너 무리였다.

“어이, 너. 잠깐 우리 좀 보자.”

“뭐야?”

“설마 우리를 기억 못 한다고 하진 않겠지.”

“…? 너희가 누군데?”

비열한 웃음이 입가에 걸린 남자 세 명. 당연하게도 실버는 기억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묻는 실버의 태도에 세 사람이 열불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에 금빛시티에서 마주쳤잖아! 기억나지 않는 거냐?!”

“약한 놈은 기억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며 콧웃음 친 실버가 세 사람의 얼굴과 차림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제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약한 주제에 시비를 걸어오길래, 엘리게이로 혼을 내주었던 놈들이었다.

실버의 반응에 이를 바득바득 갈던 세 사람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실버를 둘러싸듯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몬스터볼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실버는 전신에서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자 세 사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번에도 그 건방진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게 만들어주지!”

“엉엉 울어도 봐주지 않을 거라고?”

가라! 외침과 동시에 셋의 몬스터볼에서 포켓몬이 나왔다. 각각 꼬렛, 니드런, 구구였다. 반면 실버의 손은 몬스터볼을 쥔 채로 머뭇거리며 포켓몬을 꺼내지 않았다. 실버는 심향과의 전투에서 완패한 자신의 포켓몬들을 떠올렸다. 포켓몬 센터에 다녀왔다면 몰라도, 당장은 그 어떤 녀석도 더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실버가 아랫입술을 문 채로 초조해할 뿐 포켓몬을 꺼내지 않자 셋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한껏 찡그린 저 얼굴도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한 녀석이 큰 소리로 외쳤다.

“포켓몬을 꺼내지 않겠다면, 이대로 공격해 주마! 니드런, 몸통박치기!”

명령에 따라 니드런이 실버에게로 덤벼들었다. 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니드런을, 실버는 순간 몸을 비틀어 겨우 피했다. 포켓몬이 사람을 공격하는 행태에, 길거리 배틀인가- 하고 모여든 구경꾼들에게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실버에겐 그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고, 그건 상대들도 마찬가지인 듯 이를 드러내며 히죽거리기까지 했다.

이 미친 놈들, 진심이잖아? 목숨을 위협하는 악의와 정면으로 마주한 실버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으나, 생각할 시간 따위 주지 않겠다는 듯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

웅성거리는 사람들, 트레이너 셋과 그들의 포켓몬 세 마리, 그리고 맞은 편에 엉망진창으로 쓰러진 소년 하나. 그것만으로 모든 판단을 마친 제노가 속으로 혀를 찼다. 다대일, 게다가 한 명인 쪽은 포켓몬도 꺼내지 않은 상태. 포켓몬 배틀에서 할 수 있는 비겁한 짓은 다 하는군. 성스러운 탑의 앞에서 일어나는 추잡한 행태에, 마을에 발을 들이며 들떴던 제노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꺼졌다.

그냥 포켓몬 센터에나 들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노가 몸의 방향을 튼 순간, 악을 쓰며 바닥에서 일어나는 소년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 눈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튀는 붉은 머리, 그리고 저 싸가지없는 얼굴… 저거 저거, 주인공 라이벌 아냐?

이런 얘기가 있었던가? 설마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수많은 의문이 제노의 머릿속을 스치는 사이, 포켓몬 배틀 비매너 삼 형제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이 입을 열었다.

“킬킬, 꼴좋다! 자, 이걸로 끝이다! 가라-”

“피카츄.”

“피카!”

응? 나는 피카츄를 꺼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들려온 낯선 포켓몬의 이름에 개노답 삼 형제가 당황하는 사이, 셋의 포켓몬 사이로 전격이 스쳤다. 빛이 사그라들자 보이는 것은 감전되어 몸을 움찔거리는 채로 쓰러진 포켓몬들과, 그 사이에 당당히 자리 잡은 피카츄 한 마리였다.

“너, 넌 갑자기 뭐야!”

“으악, 내 꼬렛이!”

“구구!”

절망에 빠져 제 머리를 붙잡은 두 사람과 달리 니드런의 파트너는 아직 싸울 마음이 남아있는지, 주먹을 꽉 쥐곤 피카츄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이, 이 쪼끄마한 게…!”

“피카피카피…”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제노는 피카츄에게 살짝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피카츄가, 네발로 서선 꼬리를 바짝 세웠다. 양 볼의 전기 주머니에서 파지직 하고 전기가 튀고, 온몸에 전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길한 전조를 잔뜩 보인 피카츄가 한순간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앞발을 구르며 크게 짖었다.

“피카!!”

“으, 으악! 살려줘!”

“잘못했어!”

“두, 두고 보자!”

그 울음에 셋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위협이 성공적으로 먹혀든 것을 확인한 피카츄는 몸에 힘을 풀고 두 발로 서더니, 제노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잘했어?

“응, 잘했어.”

“피카아~”

곧장 달려온 녀석이 제노에게 안겨 애교를 부렸다. 피카츄에게 쏠려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제노를 향했다. 마치 그가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듯 한걸음 두걸음 비켜나는 사람들에 제노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피카츄에게 명령한 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머리를 배반하고 멋대로 움직인 몸에 기분이 찜찜했으나,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되는 사람을 구했으니 잘된 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제노는 실버에게로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얘, 괜찮니?”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허나 의식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었는지, 독기를 품은 눈빛이 꺼질 듯 말 듯 힘겹게 제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라이벌 역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경계와 적의를 받으면서 한가롭게 그런 생각이나 하는 동안, 기어코 실버의 눈이 감겼다. 아 맞다 얘 다쳤지.

설마 죽었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자 숨결이 느껴졌다. 그냥 기절했나 보다.

… 애를 이대로 두고 갈 수도 없고. 어휴, 작게 한숨을 쉰 제노가 실버를 안아 들었다. 그가 포켓몬 센터 쪽으로 향하자, 멀뚱히 방관만 하던 사람들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다가 일이 정리되고 나서야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한두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몇몇 들려왔다. 쓰러진 소년을 챙겨 가는 이는 그것에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튼 누가 경찰에 신고했으니 됐어. 내가 할 일이 준 거잖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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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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