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두 갈래 길
두 사람이 한참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성호와 윤진이 나란히 돌아왔다. 실버와 제노는 그제야 자세를 바로 했다. 어쩐지 싸우기라도 한 것 같은 묘한 분위기에 제노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니, 별거 아니란다.”
그렇군요…. 왠지 지금 윤진의 말에 토를 달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제노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빙긋 웃은 윤진이 성호를 제노의 앞자리로 밀어 넣었다.
어딘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던 성호는 제노와 눈이 마주치자 파드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뭐야, 이 분위기, 뭔데, 무슨 일인데.
상황 파악에 애쓰며 눈을 굴리던 제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감사합니다. 숙소에 식사까지 해결해 주셔서….”
“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윤진이 우아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그러시겠죠, 속으로만 답한 제노가 계속해서 말했다.
“윤진 씨는 분명 루네시티의 체육관 관장이라고 하셨죠?”
“응. 혹시 체육관 도전에 관심 있니??”
“아뇨, 저, 그게 루네시티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셨나 싶어서요.”
“아, 그거 말이구나.”
윤진의 기세가 순식간에 다시 사그라들었다.
그가 말하길, 해안시티에는 체육관이 없다 보니 송화산에서 구슬들이 도난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그가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게 된 거라고.
“이끼시티에 있을 성호가 혹시 소식을 듣고 무리하게 행동했을까 봐 연락한 거였는데, 설마 마그마단의 본부에 쳐들어갔을 줄이야.”
“하하….”
날카로운 시선에 성호는 그저 웃어 보였다. 다행히도 윤진이 화제를 돌렸다.
“성호에게 얘기 들었어. 갤럭시 사의 리서치 펠로우라며? 제법 큰 곳에서 일하는구나. 혹시 고향이 신오인 걸까?”
“아니, 관동이야. 나랑은 성도에 유적을 조사하러 왔을 때 만났고.”
제노를 대신해 실버가 답했다. 어차피 포켓기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알아보기는 했겠지만, 개인정보 유출 이대로 괜찮은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윤진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관동이라. 얼마 전에 실프주식회사의 일로 다녀온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랬지.”
“어땠어? 나도 윤진컵의 일로 신오에는 가봤지만, 관동이나 성도엔 한 번도 가보질 않아서.”
윤진은 그야말로 스몰톡의 화신이었다. 상대의 개인사에 일절 관심이 없는 제노와 달리, 그는 이런저런 정보를 캐내어 공통점을 찾는 재주가 있었다.
출신지역이든, 학벌이든, 어딘가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 사람은 쉽게 마음을 내어준다. 성호도 그렇지만 윤진도 선수구나. 제노가 갑자기 너무 조용해진 성호를 바라보던 그때, 윤진이 물었다.
“그래서, 왜 신오에서 지내게 된 거야? 혹시 거기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다던가?”
“커헙-!”
콜록, 콜록. 커피를 마시던 성호가 갑자기 사레라도 들린 듯 마구 기침하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제노가 급하게 비치된 냅킨 몇 장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약간 빨개진 눈가를 한 그가 작게 감사 인사를 하며 그것을 받았다. 손끝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제노가 윤진에게 물었다.
“애인이면 애인이지, 숨겨둔 애인은 뭔가요.”
“그치만 비었잖아?”
그가 제노의 왼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노가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없어요, 그런 거. 신오에는 그 지방의 역사와 유적에 관심이 있어서 갔을 뿐이에요.”
“그래도 직장이 거기있으니 이 일이 끝나면 신오로 돌아갈 거지?”
“음… 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네요.”
그 말에 제노의 손가락을 바라보던 성호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호연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때 한번 헛기침을 한 성호가 입을 열었다.
“리서치 펠로우로 일한다고 하시면 저희 데봉 코퍼레이션도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고용 면접이 시작되었다.
뭔데 이거.
*
송화산.
네 사람은 정상에서 구슬을 지키는 노부부와 어린 트레이너 둘을 만났다. 아마 남자아이 쪽이 휘웅, 여자아이 쪽이 봄이 일 것이다.
제노가 되찾아온 주홍구슬을 어린 트레이너들에게 건네며 노부부가 하는 호연지방의 전설과 관련된 말은 흘려들었다. 주홍구슬이 어쩌고 가이오가가 저쩌고.
참고로 제노는 성호의 자켓을 걸친 상태였다.
민소매 차림으로 산에 오르는 것을 본 윤진이 어제의 외투는 어찌했느냐 묻기에, 너무 더러워져 두고 왔다고 답했더니 그가 경악했다. 어째서 이런 고져스한 레이디가 엘레강스하지 못한- 뒷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성호가 산 위는 아직 추울 것이라며 벗어준 자켓이었다. 다행히도 성호의 예상은 맞았다. 묘하게 안개가 낀 송화산은 위로 향할수록 서늘한 기운을 강하게 뿜어냈다. 자켓에 팔을 완전히 끼운 제노가 한쪽에 꽂힌 라펠 핀을 내려다보았다. 엄지 한마디만 한 키스톤이 꽂혀있다.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팔을 들었다가, 기다란 소매에 완전히 가려져 손을 꺼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잠시 실례할게요.”
곁으로 다가온 성호가 자켓의 소매를 접어올리기 시작했다. 옷매무새를 다듬는 손길이 제법 야무졌다.
밖으로 드러난 손을 바라보던 그가 살며시 그것을 잡아 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굳은살이 아니었다면 모험을 하는 이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본인의 덩치를 고려하지 않은 성호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자꾸만 손바닥을 간질이는 감각에 제노가 손을 움츠렸다. 성호는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아, 죄송해요. 이걸 보고 계셨죠?”
성호가 직접 옷에서 핀을 떼어 제노의 손에 쥐여주었다. 제노가 오묘한 색으로 빛나는 스톤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드릴까요?”
“네?! 그치만 메타그로스를 메가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거 아닌가요?”
키스톤이 탐나긴 했지만 남의 것을, 그것도 챔피언의 것을 뺏고 싶진 않았다. 제노가 황급히 핀을 다시 돌려주자 그가 작게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어, 진짜 훔쳐 가는 수가 있어 총각. 가디안이 든 볼이 불길하게 작은 진동을 뿜어냈다.
“메타그로스에게 메가스톤이 있다는 걸 아시는군요.”
“… 챔피언의 경기에 관심이 많아서요.”
제노가 습관적으로 거짓을 입에 담았다. 다행히 별다른 의심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성호와의 대화는 항상 답하기 힘든 주제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고의는 아닌 것 같고, 그냥 감이 좋은 건가? 혀를 살짝 내밀어 조금 마른 입술을 축인다. 긴장한 탓인지 목울대가 원치 않게 크게 움직였다.
천천히 제노가 입은 외투의 가슴께에 라펠 핀을 꽂은 그가 계속해서 물었다.
“제 경기에?”
“네. 챔피언의.”
“…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네? 작지만 명확한 요구에 제노가 되묻는다. 성호는 말실수를 한 게 아니라는 듯 조용히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다르게 연한 빛의 눈은 묘한 압박을 담고 있었다.
제노가 홀린 듯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배틀을 할 때에는 이름으로 부르셨잖아요?”
“….”
그랬던가. 너무 흥분한 상태였던 나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제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성호 씨.”
그제야 조금 멀어진 그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착하네요, 작게 속삭인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윤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노가 생각했다. 저게 그 불순한 눈빛인 걸까? 일순 느껴진 불안한 느낌에 등에 소름이 돋았다가, 괜한 걱정이라며 떨쳐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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