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85화

샛길 둘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춥지? 빨리 씻고 나오렴. 따뜻한 물 받아놨어.”

탁, 현관문이 닫히자 집안의 따스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눈놀이를 마친 아이들을 남나리가 반겼다. 그린이 서둘러 들어가느라 마구잡이로 집어 던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 제노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제노가 이 집에 온 지 몇 달이 지나 완전한 겨울. 온화한 기후의 관동에도 싸늘한 날씨가 찾아왔다. 앙상하게 마른 가지 위에 눈이 쌓이고, 집집마다 마당을 쓸며 길을 내기에 바빴다.

다만 아이들만이 신이 나 거리를 뛰어다녔다. 작은 시골 마을, 레드와 그린, 그리고 제노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항상 같이 다니기로 유명한 세 사람이 동네 곳곳을 활보하며 자아내는 밝은 소리가 연말의 분위기를 돋웠다.

잽싸게 목욕을 마친 그린이 소파로 뛰어들었다. 늘 앉는 자리에 쿠션을 받친 뒤 담요를 덮자 따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연말 특집으로 편성된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 마찬가지로 제노가 욕실에서 나왔다. 남나리 취향의 포근한 잠옷을 걸친 채다. 때마침 나리가 머그잔 두 개를 들고 거실로 다가왔다.

“자, 따뜻한 코코아야.”

“아싸!”

“감사합니다.”

“마시고 양치질하는 거 잊으면 안된다?”

달콤한 액체 위에 적당히 녹은 마시멜로가 서너 개 둥실 떠 있었다. 곧장 그것을 받아들고 후후 부는 그린과 달리 제노는 소파에 앉지 않고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의 코코아를 한모금한 그린이 잔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라보자, 제노가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린이 습관적으로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이제 방송 봐야 하는데.”

“….”

완곡한 거절에 제노가 스르르 시선을 떨군다. 그에 그린이 작게 혀를 찼다.

제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원하는 것도, 불편한 것도 제대로 표현하질 않았다. 태생적으로 눈치가 빠른 그린의 눈엔 그것이 너무나도 답답해 보였다.

아니,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말을 하면 될 것을, 그게 그렇게 어렵나?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하고 말이야. 할아버지나 남나리는 몰라도 자신은 제노의 그런 거짓된 태도가 싫었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구나 싶어서 더 짓궂게 굴었더니, 기어코 혼자 숨을 죽이고 우는 꼴에 괜히 남나리에게 혼나기만 했다.

대놓고 한숨을 내쉰 그린이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티비의 음량을 줄였다.

“방송 시작하기 전까지만이다.”

“… 고마워, 오빠.”

그래도 곧잘 오빠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드니 봐준다.

짧은 한평생 남나리에게 어린아이 취급만 당해온 터라 오빠 역할에 심취해 있는 그린에게 제노의 여동생 위치는 제법 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다리 사이를 두드리자 제노가 그린의 앞에 자리했다.

“56페이지부터 읽어주면 돼.”

“알겠다, 알겠어.”

시큰둥하게 답한 그린이 제노의 허리를 감싸자 제법 안정적으로 두 사람이 겹쳐 앉게 되었다. 제노가 조금 들뜬 기색으로 책을 펼치고,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댄 그린이 하얀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잘 있어.’ 왕자님이 꽃에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잘 있어.’ 왕자님은 되풀이해서 말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제노는 글을 익히는 것에 열중해 있었다. 참 신기하게도 그는 듣고 말하는 것엔 뛰어났지만 어째서인지 읽고 쓰는 것엔 약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나리와 오 박사가 공부를 봐주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일로 바쁜 두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결국 제노가 택한 사람은 그린이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꽃은 가까스로 왕자님에게 말했습니다. ‘용서해 줘. 꼭 행복해야 해.’…”

그린은 아직도 제노가 처음 그의 방에 찾아왔던 순간을 기억했다. 손에 들린 아동용 서적,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눈동자. 그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 박사님께서 바쁘셔서…

- ….

- 그래서 혹시 책을 대신 읽어줄 수 있나 하고….

그때 그린은 누군가 자신에게 의지한다는 것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다. 약간의 우월감, 적당한 기쁨, 그리고 꽤나 큰 책임감.

책을 읽어주는 내내 그린은 싱숭생숭한 마음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묘한 리듬으로 두근거렸다. 이게 오빠가 된다는 걸까? 남나리는 계속 이런 기분으로 살았던 걸까?

“’그래, 난 널 좋아해. 내 잘못이었어. 너는 내 사랑을 눈곱만큼도 몰랐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린이 천천히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57페이지. 품에서 제노가 담요를 고쳐 덮으며 꼼지락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지 마. 신경질 나니까.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어서 떠나!’ 꽃은 자신의 우는 얼굴을 왕자님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토록 자존심이 강한 꽃이었습니다…”

하암, 작은 하품 소리가 들려오고 제노의 고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편하게 기댈 수 있게 등받이 쪽으로 조금 누운 그린이 생각했다. 하여튼, 애들이란.

같은 나이인 주제에 제법 건방진 생각이었으나, 속으로 그렇게 불평한 것치고 입은 착실히 책의 내용을 읊고 있었다.

지금쯤 그린이 좋아하는 방송의 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예상과 달리 조용한 거실에 남나리가 방에서 내려왔다.

“얘들아- 어머.”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소리를 죽인 채 혼자 아동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화면과, 맞은편의 소파에 앉은 채로 잠든 아이들이었다. 책을 읽어주다 잠든 것인지 그린의 품에 제노가 안겨있었다.

남나리가 텅 빈 머그잔을 확인하곤 미소 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양치질 꼭 하라니까.

그린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책을 빼낸 남나리가 두 아이를 눕히고, 담요를 가지런히 덮어주었다. 뭐, 오늘만큼은 봐줘도 괜찮겠지.

리모컨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거실의 불까지 끄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밤새 아이들의 발자국을 덮을 것인지 밖에는 다시 하얀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창밖에 내리는 눈, 잠든 아이들. 평화로운 거실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윈디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쉬잇.”

남나리가 장난스럽게 검지를 제 입술에 대자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 윈디가 소파 아래에 커다란 몸을 누였다. 마치 아이들은 자신이 보기라도 하겠다는 모양새였다.

작게 웃은 남나리가 윈디를 쓰다듬었다. 그럼 오늘 밤은 맡길까. 잘자, 윈디. 손을 흔들어 보인 그가 거실을 뒤로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오빠,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돼?”

“빨리 안 가면 다 팔릴지도 모른다니까?”

봄.

남나리가 쥐여준 카드를 든 그린이 발을 동동거리며 제노를 재촉했다. 한 손은 그와 잡고, 다른 한쪽 팔엔 피츄를 안아 든 제노가 헥헥거리며 그를 따라 달렸다. 앞서나간 레드가 가게의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따스해지자 옷차림은 가벼워졌다. 마당에 푸릇푸릇한 새싹이 올라올 때부터 들떠있던 그린은 달력을 한 장 넘기자마자 기대에 차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곳에는 남나리의 필체로 그린의 생일임이 적혀있었다.

이번에는 꼭 시내의 유명한 제과점의 케이크를 먹고마리라. 그린의 생일은 꼭 옆집인 레드네와 함께 축하했기에 며칠 전부터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남나리의 옆에서 그린이 쨍알거렸다. 케이크는 그 가게 걸로 꼭 사야 한다니까! 야, 남나리 듣고 있냐?!

아이들은 참 빠르게 자란다. 제법 덩치가 붙기 시작하자 말투가 건방져진 그린을 이마에 딱밤을 날린 남나리가 그의 손에 카드를 쥐여주곤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 그럼 네가 사와! 카드 잃어버리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건 덤이었다.

당연하단 듯 레드와 제노를 대동한 그린이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딱히 거창한 건 없었다. 1. 최대한 빨리 시내의 제과점으로 향한다. 2. 원하는 케이크를 산다.

아직 어린아이의 계획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덕분에 제노는 팔자에도 없는 장거리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또래에 비해 식사량과 움직임이 적어 체력이 약한 제노에겐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힘겹게 커다란 제과점의 입구에 도착한 제노가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유리문에 붙여진 포켓몬 출입 금지 표시였다.

당연했다. 빵이며 과자가 전시된 가게 안에 털이 풀풀 날리는 포켓몬을 들일 순 없었다. 그린이 그것을 바라보며 초조한 표정을 짓던 때, 제노가 선뜻 말했다.

“밖에서 기다릴게.”

“괜찮겠어?”

“응.”

피츄는 아직 제노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품에 꼬옥 안겨 오는 포켓몬을 제노가 고쳐 안았다. 마찬가지로 제노를 자신과 떨어트려 본 적 없는 그린이 그것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손님들이 지금도 여러 종류의 빵을 구매하고 있었다. 계속 시간을 끌다간 정해진 수량이 모두 팔릴지도 몰랐다. 결국 그린이 레드와 함께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당부했다.

“여기서 움직이면 안 된다, 알겠지?”

“응.”

“딱 가만히 기다려야 해?”

“알겠다니까.”

고작 생일이 몇 달 빠르다고 남나리 언니 흉내를 내긴. 입술을 비죽인 제노가 그린의 모습이 가게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곤 발걸음을 옮겼다. 오가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기에 조금 옆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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