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86화

샛길 둘

“결국 생일도 나이도 박사님께서 정하신 건데 말이야. 그치?”

“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제노가 자신에게 묻자 피츄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동그란 머리를 제노가 쓰다듬었다.

“야, 고아.”

“….”

“야.”

“….”

“야!”

코앞에서 들리는 외침에 멍을 때리고 있던 제노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남자아이들 무리가 보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피츄를 더욱 세게 끌어안자 아이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혼자서 뭘 하길래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냐?”

“….”

제노가 대답하지 않자 우두머리 남자아이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태초마을은 관동에 있는 여러 마을에서도 작은 편에 속했다. 다른 지방 사람에게 물으면 ‘엥? 그런 마을도 있어? 너 대체 어떤 촌구석에서 온 거냐?’하고 답할 정도.

하지만 관동 내에서는 제법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오 박사의 고향이자, 그의 연구소가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작은 마을, 거의 유일하다 싶은 어린아이, 오 박사의 손자. 거기에 워낙 싸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그린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 이름과 인상착의는 널리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애가 어느 날부터 뜬금없이 검은 머리 여자애를 제 동생이라며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노는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나쁜 의미의 예시가 바로 이런 아이들이었다. 이웃 동네의 아이들로, 주변 어른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제노와 마주칠 때마다 고아라고 부르며 괴롭히기 일쑤였다. 심지어 또래에 비해 키가 쑥 자란 그린은 무서운지 그가 혼자 있는 때만 노렸다.

이런 부류는 반응하지 않는 게 제일이란 걸 알았지만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고, 제노가 입을 꾹 다물자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어쭈, 대답 안 해?”

“….”

“그린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제노는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저런 조롱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한다고 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허나 아무리 어른스럽게 군다고 해도 아직 어린 정신이 코앞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전부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떨리는 제노의 손을 느낀 피츄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헹, 비웃음을 흘린 상대가 말했다.

“아직도 그 못생긴 피츄를 데리고 다니냐?”

“….”

“딱 너처럼 생겼다. 귀가 삐죽삐죽한 게, 혼자 검은 머리인 너랑 똑같잖아.”

“….”

당연한 말이야. 상처받을 거 없어. 저들은 내 머리가 노란색이었어도 다른 트집거리를 찾아냈을 거야.

컵에 가득 담긴 물의 표면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제노의 마음을 쏟아버린 것은 이어진 말이었다.

“어른들이 그러던데, 네가 오 박사의 ‘이거’라며?”

그가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대체 저런 제스쳐는 어디서 배워온 건지. 그 모욕적인 손짓에 온몸에 힘이 들어간 제노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사과해.”

“어, 엉?”

낮고 명확한 목소리에 무리 전체가 움찔했다. 여태 제노가 반응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린의 뒤에 숨어다니는 작은 여자아이. 금세 침착함을 되찾은 우두머리가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뭐야, 너 말도 할 줄 알았냐?”

“사과하라고.”

“내가 뭘.”

“박사님에 대해 함부로 말했잖아!”

순간 큰 소리를 내자 남자아이가 눈에 띄게 한 발짝 주춤한다. 그 사실이 분했는지 그가 마치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크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이게…!”

“팬텀.”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순간 아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더니, 안에서 검보랏빛의 무언가가 머리를 내밀었다.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 그것을 마주한 아이들이 굳는다. 이윽고 완전히 튀어나온 그것이 팔을 번쩍 들며 커다란 입을 쩌억 벌렸다.

“으, 으아아아-!”

“괴물이다!!”

아이들이 제각각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제노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괴물, 아니, 포켓몬을 바라보았다. 제노와 시선을 마주한 팬텀이 혀를 베- 내밀었지만 제노는 조금 움찔할 뿐 전혀 도망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의 곁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왔다.

“호오, 팬텀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따각, 따각, 그가 걸을 때마다 나무 지팡이가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에이스 포켓몬과 비슷한 어두운 보라색의 원피스를 입은 나이 든 여성. 머리는 전부 하얗게 세고, 원래 표정이 그런지 찌푸린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여있었다. 제노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네가 제노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구나.”

“저를 아세요?”

“그래. 오용호 그놈이 손녀가 생겼다며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거라더니,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구나. 그렇게 덧붙인 국화가 품 안의 피츄를 바라보았다. 팬텀을 잔뜩 경계한 녀석이 당장이라도 내뿜을 듯 양 볼에 전기를 모으고 있었다.

“제법 좋은 포켓몬을 데리고 있지 않니.”

“네? … 아.”

“얌전한 아이라기에 용호를 따라 연구자나 될까 싶었는데, 너, 트레이너가 될 거냐?”

“그게-”

제노의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제과점의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든 그린이 뛰쳐나왔기 때문이었다.

“제노, 옆에 그 포켓몬은-! … 뭐야, 할망구였잖아.”

“여전히 예의를 모르는 말투구나, 그린.”

커다란 팬텀의 실루엣에 놀랐던 그가 국화를 보자 안심했다. 오호라, 그래도 제 가족이라고 챙기는가 보지? 그 꼴을 본 국화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숙녀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건 용호 놈이 가르친 매너더냐? 내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뭐? 제노,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야, 난 괜찮아, 오빠.”

레드에게 케이크를 떠넘긴 그린이 곧장 제노에게로 달려와 양손으로 제노의 얼굴을 챱, 붙잡곤 살폈다. 양손에 들어오는 말랑한 볼을 주무르던 그가 이내 그것을 꼬집었다.

“아야!”

“그러게 내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랬잖아!”

“그, 그히망-”

“시끄러워!”

네가 더 시끄러워, 인마. 허나 볼이 늘어난 채론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국화가 눈을 굴려 레드를 바라보았다. 마침 마주친 시선에 레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의 머리를 모자 위로 쓰다듬은 국화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튼, 유명한 과자가게가 생겼다기에 나왔다가 별꼴을 다 보는구나.”

어서 케이크나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렇게 말한 그가 손을 휘휘 내젓자 그린이 말했다.

“할머니, 내 선물은?”

“네가 내 손자냐? 얼른 썩 꺼지지 못해?!”

으악! 그 뻔뻔한 물음에 국화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그린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제노가 피츄를 고쳐 안고 그 뒤를 따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레드가 다시 꾸벅 인사하곤 두 사람을 쫓아갔다.

저 사고뭉치들, 크면 더 난리겠구만. 어쩐지 그들을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에 혀를 찬 국화가 원래 목적이었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팬텀이 스르르, 그림자가 되어 지팡이에 꽂힌 몬스터볼 안으로 들어갔다.

*

“….”

“미, 미안해, 나 때문에….”

그리고 집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상자 안을 열어보았을 때 마주한 것은 끔찍했다. 그린이 일주일 전부터 기대했던 케이크가 흔들리며 무너져 엉망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뛰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나, 제노는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두려워 절로 사과해 버렸다.

케이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린이 조용히 그것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빵과 생크림 범벅이 묻어났다. 제노가 안절부절못하며 계속해서 사과했다.

“미안, 정말 미안, 지금이라도 내가 다시 가서-업,”

제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불쑥 입안으로 무언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린이 손으로 뜬 케이크를 제노의 입안에 밀어 넣은 것이었다.

“….”

“맛있지?”

“… 응.”

“그럼 됐어, 뭐. 맛만 좋으면 됐지.”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렇게 말한 그린이 케이크였던 것을 다시 상자 안에 포장한 뒤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그가 히죽 미소 지어 보이자 그제야 안심한 제노가 제대로 케이크를 씹었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촉촉한 시트에서 그제야 시럽의 단맛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린이 책을 읽어준다고 했기에 두 사람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책에 열중해 있을 때 집에 돌아온 남나리가 케이크의 상태를 확인하고 비명을 지르는 일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