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폐된 드래곤은 유리구슬 너머로 무엇을 보나 -1-
-prologue
사람과 포켓몬 가릴 필요 없이 혈기를 왕성히 발산하며 시끌벅적한 학원 생활이 이어지는 블루베리 아카데미. 바닷속에 가라앉은 유리구슬처럼 차갑고도 영롱하게 빛나는 테라리움 돔과 달리,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전력을 부딪히는 배틀 코트의 존재 때문인지 뜨겁게 달궈진 입구 로비는 오늘도 사람이 가득했다. 배틀을 진행하는 포켓몬이 트레이너의 지시에 맞춰 기술을 사용하는 소리, 양지에 나와 있는 덕에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피부를 시원하게 식혀주었고, 코트에서 떨어진 주변 거리에선 전술에 대하여 의견을 주고받는 목소리가 분분하며 여러모로 떠들썩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할 일에 집중하는 와중, 한 학생이 입구를 가리키자 점차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깥과 학교를 잇는 길고 긴 다리 저 멀리서부터 특이한 실루엣이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 학생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외부인이라도 방문한 걸까. 호기심을 담으며 집중된 시선은 점점 가까워져 인영이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앗. 저기, 지금 들어오는 두 사람...”
“어... 맞네, 맞아! 다시 학교로 돌아왔나 본데?”
바쁘게 오가는 학생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 친구와 마주 보며 자기가 본 사람이 ‘그 남매’가 맞는지 수군수군 떠들기 시작했다.
여러 의미로 유명 인사였던 카지와 그의 누나인 시유가 긴 휴학을 마치고 블루베리 아카데미에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
한때 승리에 눈이 멀어 유약한 자신을 버리고자 했던 소년은 강해져야 한다는 집착을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밀어붙여 모두에게 상처를 줬었다.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과육 속에 썩어갈 정도로 고인 꿀처럼 질척한 승부욕을 속에 품고 있던 카지는 학교 내에서 가장 강한 트레이너라는 명성을 지닌 제빈을 꺾고 챔피언 자리를 차지한 채 '역린'과도 같은 폭정을 이어왔었다.
하지만 인연이 깊은 '교환 학생'에게 쓰디쓴 패배를 맛본 뒤, 잠시 동안 떠났던 여행에서 원래부터 간직해온 상냥한 마음을 회복한 카지는 후에 학교로 돌아와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스스로의 랭킹마저 포기할 정도로 진심을 보여준 사과는 카지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사면해주진 않더라도 다른 학생들이 그를 용서할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학교에 다시 돌아온 지금, 리그부 내에선 여전히 그를 무서워하는 학생은 존재했지만 완전히 배척하고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번 역변하고 다시 이전 모습을 되찾았지만, 완전히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물론 비단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던 앞머리를 위로 시원하게 까뒤집어 묶은 머리 스타일만 두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말도 잘 못 꺼내고 타인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했던 카지는 더 이상 누나의 등 뒤로 숨지 않았다.
돌아온 걸 축하한다는 환영인사를 받은 그는 처음엔 본인의 과거 행적을 떠올렸는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등 부원들을 상대하면서 대단히 겸연쩍어 했다.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면 화들짝 놀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카지는 어느덧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부원들 앞에서 효과적인 전술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눌 정도로 그들 사이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이전의 모습을 되찾으면서도 거기서 한층 나아가 장점만을 갖춰 더욱 성장한 모습.
쇼파에 누워 자는 척을 하던 제빈은 평소 가면처럼 얼굴에 뒤집어쓴 능글맞은 미소도 띄지 않은 채 칠판에 앙증맞은 그림을 그려가며 열심히 부연 설명을 하는 카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무에게나 데이트 신청을 하는 실없는 남자라 정평이 나 있지만 항상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붙임성 좋게 다가가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인기인. 주어진 역할도 귀찮아하며 한껏 해이한 태도로 만사에 열의가 없어 보이지만 포켓몬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확실한 드래곤 타입 트레이너. 카지가 그를 이기기 전까지만 해도 챔피언이었고, 챔피언 자리에서 물러난 뒤라 해도 사천왕이라는 직함 때문에 전교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카지를 바라보는 제빈의 얼굴은 널리 퍼진 가볍고 친근한 이미지가 무색하게. 누구도 감히 말을 걸 시도조차도 하지 못할 정도로 차가웠다. 일 년 내내 엄동설한이 몰아치는 폴라 에리어에서 어떻게 고작 반팔 자켓 하나만 걸치고 그 추위를 버티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서늘한 응시였다.
따뜻한 햇살을 연상시키는 노란색과 차가운 얼음을 연상시키는 파란색이 섞이면 과연 무슨 색이 나올까. 냉기인지 열기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한순간이라도 닿으면 화상을 입어버릴 무언가가 눈 안에 서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눈동자 안에 깃든 감정을 숨기듯 눈을 감은 제빈은 야돈처럼 크게 하품을 한 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하~암~~ 으음... 응? 아니 이게 뭐야. 무려 전 챔피언님께서 강연을 하고 있었잖아? 어디 가서 돈을 주고도 들을 수 없는 흔치 않은 기회인데, 이 몸도 좀 깨워주지 그랬어~"
"아, 제빈 일어났어? 미안, 안 깨우려고 목소리를 낮추긴 했는데... 이게 아니라, '전 챔피언'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하하, 미안 미안~ 전혀 미안한 마음이 안 느껴지는 어투로 사과한 제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에 보였던 냉기는 마치 신기루였다는 듯, 뻐근한 어깨를 푸는 제빈의 얼굴은 한껏 늘어진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나한테만 사납네에. 제빈 님 상처~ 아, 옆자리에 앉아도 되지?"
"응, 물론이지!"
“어째서 제빈한테만 이러는 건지 생각이란 걸 해보는 게 어때?!”
제빈은 카지가 씩씩거리며 화내는 걸 상큼하게 무시했다. 훤칠하게 쭉 뻗은 다리 덕분에 세상 느긋하게 걸음을 걸어도 금방 빈 좌석에 도달한 그는 옆에 앉은 부원에게 허락을 구한 뒤 의자를 끌어 뒤로 뺀 뒤 자리에 앉았다.
부실에 아예 상주를 하는 건지, 들어올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마주하게 된다는 ‘일렉트로빔을 쏘는 브리두라스 자세’를 취한 제빈은 그대로 책상 위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아이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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