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두 갈래 길
묘한 분위기를 깬 건 전화벨 소리였다. 제노가 주머니에서 포켓기어를 꺼냈다. 화면에 뜬 숫자를 보니 포켓몬 센터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번호였다. 잠시 실례할게요, 그렇게 말한 제노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진 장소로 이동했다.
“여보세요? … 네, 맞습니다. 네, 네…. 네?!”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답하던 목소리가 급격히 커졌다. 테이블에 남아있던 두 남자가 일어나 조르르 제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실버의 물음에 포켓기어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가린 제노가 말했다.
“포켓몬 센터에서… 짐을 뺐으니 최대한 빨리 찾으러 오래.”
실버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고, 제노의 얼굴은 조금 울상이 되었다.
포켓몬 센터는 치료는 물론이고 숙소를 제공해 주는 곳. 제대로 트레이너임을 입증한다면 무상으로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트레이너란 계속해서 모험을 떠나는 자. 한 사람이 포켓몬 센터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야만 다음 트레이너에게 방을 제공할 수 있으니까.
제노가 무로마을에서 머무른 기간을 가늠해 보았다. 혼자 지내는 동안 그의 수면 패턴엔 다시 문제가 생겼다. 자고로 사람은 해가 떴을 때 일어나고 졌을 때 자는 것이 좋았지만, 수면을 위해 센터 안으로 술을 밀반입하다가 걸려 쫓겨나는 불명예를 안고 싶진 않았다.
새벽에 눈을 떠 한참이고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제노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고대 포켓몬들과 메가진화에 대한 자료나 더 읽어보자.
그렇게 낮인지 밤인지 모르고 방에 틀어박혀 지내기를 며칠. 그리고 해가 뜨자마자 바위동굴에 들렀다가, 태홍의 연락을 받고 이끼마을로 향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생각해 보니 지금쯤 방을 뺄 때가 되긴 한 것 같았다. 제노가 흔들리는 눈으로 실버를 바라보았다.
“어떡하지, 지금부터 이끼시티로 출발하면….”
“어떻게 갈 건데. 당신 비행 포켓몬 없잖아.”
“올 때처럼 배를 타고….”
“이끼시티에 도착했다고 쳐. 그래서, 돌아올 때는? 배도 차량도 오밤중에 움직이는 건 거의 없다고. 센터에서 짐을 되찾은 다음엔 어디서 하룻밤을 보낼 건데?”
“… 노숙….”
“장난해?!”
붐볼 실버가 기어코 폭발했다. 그래도 대폭발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잔소리를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는 제노에게, 옆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성호가 손짓했다. 포켓기어를 달라는 말 같았다. 제노가 별생각 없이 그에게 기어를 넘겼다. 전화를 받아 든 성호가 수화기 너머의 간호순과 얘기를 나누었다.
“네. … 네, 그럼 한 시간 뒤에 가지러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그에 두 사람이 성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사람을 시켜서 이쪽으로 짐을 가져오게 할게요. 그러면 문제없죠?”
“어… 그래도 괜찮은가요?”
“물론이죠. 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자신의 포켓내비를 꺼내든 성호가 이번엔 실버에게 물었다.
“실버 군은 지금 어디에서 지내고 있어?”
“일단 해안시티의 포켓몬 센터에.”
“그럼 그곳에 있는 짐도 이쪽으로 가져오게 시킬게.”
“뭘 멋대로 진행하는 거야.”
당연하다는 듯 하는 말에 실버에게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그런 반응을 예측이라도 한 듯 성호가 덧붙였다.
“기왕 협력하게 된 김에 두 분 모두 저희 집에서 지내시죠. 마그마단에게 얼굴이 알려진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고요.”
난 얼굴 드러낸 적 없는데.
하지만 그런 제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실버가 말했다.
“내가 당신 어떻게 찾았는지 알아? 항구에서 온통 검은색 옷에 피카츄를 데리고 다니는 수상한 트레이너를 봤냐고 물으니까 다들 알려주더라.”
“….”
*
성호는 두 사람에게 각각 게스트룸을 하나씩 내어주었다. 방문을 열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연 그 방과 침대의 크기일 것이다.
그리고 침대 위에 놓인 돌멩이들도.
“죄송해요, 방이 너무 어질러져 있죠.”
성호가 뺨을 붉히며 허둥지둥 돌들을 치웠다. 이걸 어질러져 있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노는 그것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손에 집힌 성인의 주먹만 한 돌을 바라보았다. 표면은 반들반들하고, 자연적으로 새겨진 기이한 무늬가 제법 독특했다. 제노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성호가 말했다.
“그게 마음에 드시나요?”
“아, 네, 무늬가 참 예쁘네요. 챔피언께선 돌 수집이 취미이신가 봐요.”
“네! 그것도 제법 힘들게 구한 컬렉션 중 하나예요. 이걸 구하기 위해-”
돌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자마자 성호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우다다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실버는 도저히 그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겠단 기색이었으나, 원래 그 취미를 알고 있었던 제노는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이 아이와 만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던 성호의 입에서 값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제노와 실버는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뉘 집 가디 이름도 아니고, 상상도 못 한 금액이 불렸기 때문이었다.
… 그거 지금 당장 내려놔. 실버가 나직이 말했다. 제노는 군말 없이 손에 든 돌을 성호에게 고이 넘겼다.
방 정리를 마치자 곧 두 사람의 짐이 도착했다.
성호는 친절하게도 너무 크지 않은 포켓몬이라면 자유롭게 꺼내놓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자신 또한 집에서 쉴 때는 포켓몬들과 편하게 시간을 보낸다고.
족히 성인 셋은 굴러다녀도 될 크기의 널찍한 침대에 걸터앉은 제노가 제 무릎 위를 차지한 피카츄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포켓기어를 만지작거렸다. 태홍에게 마그마단의 본부 위치를 묻는 문자를 보낸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습관적으로 수신함을 살폈다. 쌓인 메시지의 주인들의 이름이 주르르 화면에 떠올랐다. 가장 위에는 실버와 심향,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난천, 그리고 그다음에는…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노의 몸이 조금 움찔거렸다. 황급히 포켓기어의 화면을 끈 그가 문 너머를 향해 외쳤다.
“네, 들어오세요.”
이윽고 문이 열리고, 모습을 보인 것은 실버였다.
“짐 정리는 다 했어?”
“당연하지. 내가 누구처럼 제 몸만 한 가방을 챙겨 다니는 것도 아니고.”
뚱한 표정으로 답한 실버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했다. 제노가 가볍게 제 옆을 두드렸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금 떨어져 나란히 앉았다.
그래도 함께한 기간이 좀 된다고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그다지 어색하진 않았다. 제노는 그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옆얼굴을 타고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실버가 말했다.
“…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
갑자기? 제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다.
“내 장크로다일 말이야. … 사실, 리아코일 적에 연구소에서 훔친 거야.”
“….”
제노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가 왜 그것을 자신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곁눈질로 제노를 살핀 실버가 되레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뭐야, 별로 놀라지 않네?”
“어… 놀라야 해?”
“당신한텐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괜히 긴장했다며 한숨을 크게 내쉰 실버가 뒤쪽으로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고개를 젖히며 머리카락이 비켜나고, 그의 얼굴이 밝은 형광등 아래 완전히 드러났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연구소엔 다시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했어. 포켓몬을 돌려주고 죗값을 받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박사, 이젠 장크로다일이 된 리아코를 보더니 용서해 주겠다고 하더라.”
웃으면서 돌려줄 필요도 없다고 했어, 이상한 사람이지. 실버가 입술을 비죽 내밀곤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공 박사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제노는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실버는 훌륭하게 성장했다. 그를 보면 그가 포켓몬들을, 포켓몬들이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박사도 그것을 느꼈기에 실버를 한 명의 트레이너로 존중해준 거겠지.
- 실버가 저렇게 변한 데에는 누나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해요.
문득 심향이 한 말이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없었어도 실버는 성장했을 거다. 그리고 완전히 진화시킨 리아코를 데리고 공 박사에게 찾아갔겠지.
그것이 세계가 정한 당연한 수순이다. 그 안에서 제노가 굳이 해야 할 행동은 없었다, 자신의 역할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야기의 끝에서,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의 한 부분에서 실버가 자신을 택한 것에 의문이 들었다. 정말 이상했다.
벗어버린 모자 대신 제 앞머리를 매만진다. 기다랗게 드리운 속눈썹이 눈동자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제노가 떨리는 호흡을 감추며 그에게 물었다.
“… 그걸 굳이 나한테 왜 얘기하는 거야?”
“어?”
“내게 네 치부를 일부러 밝힐 이유가 없잖아.”
그 말에 실버가 제노를 바라보았다.
“그냥, 당신한텐 말하고 싶었어. 그래야 내가 당신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 같았거든.”
“….”
“기억해? 강해지고 싶은 이유가 뭐냐고 물었던 거.”
그렇게 말하는 실버의 눈동자가 그날의 얼음 수정을 담고 빛났다.
“아직 확실하게 알아내진 못했어. 하지만 목표는 생겼어, 당신에게 인정받을 거야.”
“… 실버는 충분히 훌륭한 트레이너야.”
“그런 적당한 말 말고!”
“애초에 왜 굳이 나한테 인정받겠다는지 모르겠어….”
말끝을 흐린 제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반응에 실버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솟아올랐다.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고.
그 어쭙잖은 작별 인사 이후로 나는 당신의 흔적을 쫓고, 당신을 따라 훈련하고, 강해진 나를 당신이 돌아보고, 나를 등진 걸 후회하면서 바보 같은 얼굴을 하는 것만을 상상했는데.
그렇게 당신만을 생각했는데.
실버가 분에 찬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왜냐니, 그거야-”
당신이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려던 그가 순간 멈칫했다. 저의 뒷말만을 기다리는 제노의 말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그러니까, 지금 내가 당사자 앞에서 당신을 줄곧 찾아다녔다던가, 당신만을 생각했다던가, 뭐 그런 말을 지껄이려고 했다 이거야?
여전히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물빛 눈동자에 실버의 피부가 목 아래서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아쇠가 된 건 이마까지 벌게졌을 때 들려온 가벼운 노크 소리였다.
으아아! 실버가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에서 튕겨 나갔다. 그 큰소리에 벌컥, 문을 연 성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제노와 무릎 위의 피카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쓰러져있는 실버였다.
성호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 제가 민 거 아니에요. 제노가 작게 말했다. 순간 자리에서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난 실버가 검지로 제노를 가리키며 외쳤다.
“아, 아무튼!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쓰러트릴 테니까!”
“….”
“각오하고 있으라고!!”
그리곤 식식거리며 성호를 밀치고 방에서 도망치듯 나갔다. 무릎 위에서 졸고 있던 피카츄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졸지에 붐볼에게 어깨빵을 당한 성호(강철 타입이라 튼튼한 듯)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제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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