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미래의 챔피언!

노을 지던 그날

포켓몬 / 성호←봄이 짝사랑 / 2016년 4월 17일 올렸던 글→비문 수정 및 정발판 이름으로 수정

서고 by 예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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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통통 튀어 오르며 포켓몬들의 움직임에 맞춰 스텝을 밟던 소녀는 타이밍을 노렸다. 사람들은 콘테스트라고 하면 그저 좋은 기술과 치장된 포켓몬을 관객들 앞에서 보여주면 되는 것이라고 오해를 많이 하지만, 트레이너의 실력도 매우 중요하다. 눈에 아름다운 기술도 어여쁘게 꾸민 포켓몬도 중요하지만 포켓몬의 매력을 더욱 돋보여줄 수 있는 트레이너의 실력 말이다.

원, 투, 쓰리. 입모양으로 타이밍을 재던 그녀 봄이는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자신의 피카츄를 향해 말했다.

“피카츄! 고드름 떨구기!”

“피이…이이카아!”

봄이의 말이 떨어지자, 파란 큐빅이 박힌 리본을 하고 레이스가 달린 하늘하늘하고 예쁘장한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피카츄가 한발 앞으로 나선다. 빙그르르 작은 발을 움직여 돌면 움직임에 따라 드레스 자락이 같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고, 곧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듯 두 손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자 정말로 하늘이 기도를 들어주었는지 무대 위에 새까만 먹구름이 이고 그 속에서 거대한 고드름의 줄기가 무수하게 쏟아졌다. 전기 단일타입인 피카츄가 얼음타입의 기술을 쓰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주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이 피카츄의 고귀함이다. 피카츄의 작은 몸짓하나에도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동작은 없었고 손짓 하나에는 또 우아한 기품이 보여선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사람들은 연이어 감탄사를 쏟아냈다.

“번치코! 마무리를 부탁해……”

이 무대를 마지막으로 빛낼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곧은 의지와 당당한 풍채는 그야말로 공주님을 지키는 용맹한 기사와 같았다. 분명 이전에 봄도 콘테스트 인터뷰를 했을 때 자신의 번치코를 기사님이라고 칭하곤 했었는데 영치코에서 진화를 한 이후론 더욱 듬직해진 이 번치코는 성도 출신인 그녀가 호연 지방에서 만난 첫 포켓몬이란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한만큼 누구보다 그녀가 신뢰를 하고 있고 언제나 함께하고 있는 포켓몬이랄 수 있겠다. 본래 어리광쟁이에 겁쟁이였던 아차모가 타인을 지키기 위해 앞을 나서게 되고 성장하여 진화를 한 것도 그녀 봄이와의 여행과 경험 덕이다. 따로 입을 통하여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만큼 쌓인 서로를 향한 신뢰는 한 사람이 가진 돌과 한 포켓몬이 가진 돌을 빛나게 했다. 이윽고 따뜻한 붉은 색 기운이 번치코를 감싸 본래 가지고 있던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면, 사람들이 열광하듯 소리를 질렀다.

“바샤아아!!”

일렁거리며 타오르는 뜨거운 불꽃은 이내 거대한 새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설의 새 포켓몬이란 혹시 이런 모습일까.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모습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눈앞의 존재에 매료 될 수밖에 없었다. 관객들이 눈을 뗄 수 없는 번치코의 근사한 모습에 집중이 아니 될 수 없었다. 눈을 감기에 보는 순간을 놓칠 수 있는 그 찰나가 아깝다. 침을 넘기는 소리까지도 이 순간에 방해될까 벌린 입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을 꾹 다문다. 정적이 이 공간을 메웠다.

“브레이브버드……!!”

기술을 명하자, 번치코는 기다렸다는 듯 뛰어 날아올랐다. 번치코는 새 포켓몬이긴 했지만 불과 격투타입으로, 본래 공중전은 할 수 없는 포켓몬이다. 허나 누가 이 포켓몬에게 날아오를 수 없다고 했는가. 강인하고 또 근사한 모습은 무엇이든 해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듯 날아오른 번치코는 떨어지는 고드름을 단번에 뚫고 곧바로 자신의 기운으로 떨어지는 얼음 조각을 녹였다. 반짝반짝…… 떨어지는 물이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받아 빛난다. 마치 별가루를 뿌리는 것 같았다.

가볍게 착지를 하고 봄이와 눈을 맞춘 번치코와 피카츄는 관객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니, 무대의 끝을 알린다. 처음에는 한 사람 그리고 두 사람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두 사람을 시작으로 점차 모든 사람들의 열렬한 환성과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이번 콘테스트 무대는 아주 성공적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대성공이야~ 피카츄 그리고 번치코 정말 수고했어. 고마워.”

“피~카피!”

“그래, 그래. 오늘 피카츄의 고드름 떨구기 정말 아름다웠어. 그 기도하는 포즈는 마치 공주님 같았는데 누가 영상을 찍었다면 또 보고 싶은걸.”

“피~카? 피카피카삐.”

조금 삐친 얼굴로 볼을 부풀리며 피카츄가 그 포즈를 봄이에게 또 보여주니, 귀여운 모습에 봄이는 까르르 웃으며 피카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하하하! 맞아. 우리 예쁜 공주님은 여기에 있는데 왜 또 찾아보냐는 거지. 응응, 예뻐.”

좋은 기분대로 환하게 웃는 봄이의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그녀의 분위기도 또 이름의 이유도 있겠지만 보면 봄이란 계절이 연상이 되는 그녀였다. 따뜻한 계절, 그 포근함과 향기로움이 봄이에게 있다. 그 따뜻함은 누군가에게 안식처가 되듯,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칭찬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두 포켓몬, 힘을 내준 자신의 번치코와 피카츄를 먼저 챙겨주며 그녀는 문득 신경이 쓰였던 관객석을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찾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아쉬운 얼굴을 보이는 것을 보면 조금은 기대를 했었던 모양이다. 번치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괜찮은지 묻는 것처럼 갸웃거리자 그녀는 괜찮다며 웃으면서 말을 하기를,

“번치코? 아니야. 나 괜찮아. 바쁘시잖아. 잘 알고 있는 걸.”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눈치챈 번치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데, 봄이는 고개를 저으며 둘을 몬스터 볼에 돌려보냈다. 번치코가 하려는 말은 알고 있었다. 그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번치코는 항상 봄이가 그와 함께하려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해도 봄이는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애써 빙긋 웃어보인다. 또 다시, 였다.

바로 그때였다.

“봄이야~”

“응?”

“여~기!”

어디에선가 익숙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었다. 뒤에서 나옹처럼 살금살금 나타나 등 뒤에서 누군가 두 팔 활짝 벌려 자신을 꼬옥 품에 안으니, 봄는 갑작스러운 허그에 화들짝 놀라 얼른 뒤를 확인했다. 마음이 간질거릴 정도의 사랑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였다.

“안녕, 안녕~ 오랜만이야. 무대 정말 잘 봤어~!! 루띠, 보고 감동받았다구?”

“루티아!”

손뼉을 짝 치며 발랄하게 등장하는 이 귀여운 여자아이는 포켓몬 콘테스트의 아이돌, 루티아였다. 콘테스트도 톱을 달리고 있는 실력자이자, 봄이가 콘테스트 데뷔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봄이가 지금 입고 있는 요 귀여운 분홍 라이브 드레스도 루티아 그녀가 준 옷이다. 매번 봄이가 콘테스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던 스케줄을 모두 캔슬하고 응원하러 달려오기도 했는데 오늘도 그런 이유로 이 콘테스트 회장까지 온 모양이다.

“봄이의 번치코가 날아올랐을 때, 그 기분에 이름을 붙인다면 「귀여운 아가씨와 우아한 공주님 그리고 아름다운 불꽃의 새! 번치코 날아오르다!」려나??”

자신의 아이돌 포즈를 취하며 말하는 루티아의 칭찬에 봄이는 쑥스러운 지 살랑거리는 제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가에 호를 그렸다.

“헤헤……. 정말 괜찮았어?”

“응!! 역시~~ 봄이랑 같이 무대하고 싶어! 요즘 콘테스트 넘 뜸한데, 같이 무대 하자. 응응?? 모두 좋아할 거야!”

“미안해, 루티아. 오늘은 그러니까 그…….”

“혹시 오늘 무대 말이야, ‘바위오빠’ 보여주려고 했었던 거야?”

원래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부정을 한다고 해도 금방 눈치채니 차라리 거짓없이 하는 것이 좋다. 루티아의 말에 정곡을 찔려 몸을 움찔하던 그녀는 때문에 부정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티아가 말하고 있는 그 ‘바위오빠’란, 나성호를 말하는 것이다. 호연 지방의 챔피언이자 호연에서 가장 큰 회사인 데봉 코퍼레이션의 장남인 성호는 봄이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루티아에게는 그가 자신의 외삼촌의 친구이라는 인연이지만, 봄이와 성호의 인연이란 건 사실 보통 인연은 아니지만 말이다. 호연 지방을 여행하는 중이며 콘테스트 회장에 얼굴을 잘 비치지 않던 봄이가 오랜만에 콘테스트 무대를 하겠다고 한 이유가 설마 한 남자 때문일 줄이야. 루티아는 어머머, 제 일이 아닌데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몸을 꼬며 둘의 관계를 상상했다.

“오늘도 바쁘신가봐. 성호 씨가 와준다고 했었는데…….”

“바위오빠도 차암~! 봄이랑 약속을 했는데 안 지킨 거야?”

“……아니야. 바쁘신 성호 씨가 나 때문에 무리해서 오실 필요ㄴ”

“하아, 보. 봄이야.”

숨이 찬 목소리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달려왔는지 턱까지 찬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는 하늘푸른색 눈동자의 고요한 빛은 봄이가 좋아하는 색이다. 분명히 속상했는데도 그의 눈동자를 보노라니 너무나도 반가워서 얼굴이 먼저 화끈 달아오른 것을 보면 봄이는 무척이나 많이 그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이런 표정을 들켜버릴까 봄이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정말 늦어서 미안해. 아버지가 급하게 성도로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내가 대신 결재를 한다는 게 봄이의 콘테스트 시간에 늦어졌어. ……어떤 말을 해도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 봄이야.”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성호에게 괜찮다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건만, 그녀의 입에선 이상하게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반가운 사람이라고 해도 서운한 마음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그 콘테스트 무대는 성호가 꼭 봐주길 바랐던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바위오빠! 너무 늦었어! 봄이의 무대가 얼마나 대단했는데…… 그걸 못 보다니~!!”

“미안해. 라이브로 중계하는 건…… ……아니야.”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유구무언일 입은 다물고 조용히 고개만을 숙였다. 이처럼 착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또 봄이가 좋아하는 그의 장점이기도 했다. 허나 이런 착실함때문에 이전부터 서운한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도 동시에 있었다.

“일이 더 중요한 거면서…….”

말하면서 헉, 하고 소녀는 입을 막았다.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제가 놀라서 동그라진 눈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해버린 거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가까이 있던 성호는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봄이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앗, 봄이야~!”

“봄이야!!”

자신을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뒤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미쳤어, 미쳤어.’

얼굴이 화끈거려 만약 미쳐서 방금 전 상황을 잊을 수 있다면 미치는 게 낫다 싶었다. 금방이라도 대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얼굴은 너무나도 붉어져선 아슬아슬하게 터지기 일보 직전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람……. 성호 씨 날 철없다고 생각하실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절망적이었다.

성호와 봄이, 두 사람은 나이 차가 상당히 있었다. 성호는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른이었고 봄이는 포켓몬을 데리고 여행을 할 수 있는 나이긴 했지만 아직 열 세살로 미성년이었다. 봄이는 너무 어린 자신이 싫기만 했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호와 다르게 자신은 어린 생각을 해버린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말이다.

“그런 말을 해버리고 정말 최악이야, 나…….”

행복했던 얼굴에 또 다시 우울함이 드리운다. 어떤 얼굴도 어여쁠 것 같았으나, 그녀의 울먹이는 얼굴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이기만 했다. 훌쩍이며 나오는 코를 삼키고 시간을 보기 위해 가방에서 내비를 꺼내려고 했으나 아뿔싸, 가방을 안 가져온 모양이다. 최악에 최악이 겹친 상황이다. 절로 한숨이 나오며 다리에도 힘이 풀렸다.

“아. 그러고 보니 옷도 안 갈아입었어. 으~~”

정신없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다고 옷 갈아입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라이브 드레스 그대로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그 상황에 돌아가고 싶진 않아도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고개를 떨구고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발걸음을 다시 돌리려는 때였다. 얼굴 모르는 남자 몇 명이 회장으로 향하는 그녀를 붙잡았다. 손목을 붙잡혀버렸다.

“어?”

“봄이 씨 맞죠! 아까 무대 정말 잘 봤어요. 저~ 팬이에요!”

“하하……. 감사해요. 그런데 이 손 좀 놔주실…….”

“잠깐만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이전에 봄이 씨의 무대를 보고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요즘 콘테스트에 나오질 않으셔서!”

“저기, 곤란…….”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자신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말하기 시작하자 아무리 그녀라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나. 나오는 말마다 더듬거리며 놀란 마음에 뒤로 물러섰지만, 잡힌 손 때문에 더 물러설 수 없다. 도망을 갈 수 없다. 식은땀이 흐른다. 손을 빼려고 했지만 꽉 잡은 남자의 힘에 빠져나오기는 무리였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놀란 목엔 나올 목소리가 막혀 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고, 곤란해요. 저…….”

“그만하시죠.”

낯선 남자의 손이 일순간 떨어진다. 그리고는 다른 남자의 커다란 손이 봄의 손을 붙잡는 것이다. 상냥하고 또 따뜻한 온기에 안심이 되어 들이마셨던 숨을 내쉬었다. 익숙한 온기에 안심이 되었다.

“성, 성호 씨?”

“응??? 이 사람 분명 챔피언 나성호? 맞지, 그렇지?”

“그 데봉 코퍼레이션 후계자? 어?? 어째서 챔피언이 콘테스트 회장에…….”

“물론 콘테스트를 보기 위해서죠. 여러분처럼.”

입은 싱긋 웃고 있지만, 결코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건 도리어 억지로 올라오는 화를 참아 억누르기 위한 웃음이다. 봄이는 그 표정을 보곤 성호의 손을 잡고 안 된다고 만류하듯 크게 도리질을 쳤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봄이의 만류에도 성호는 화는 썩 눌러지지는 않는 듯했다. 그리 쉽게 제어될 화는 아니었다. 다이고는 먼저 봄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챔피언인 당신이 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봄이 씨의 팬이라고. 봄이 씨와 아무 상관없는 챔피언이 뭐라 할 자격은 없잖아.”

“마, 맞아, 우리는 그냥 봄이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 뿐인데!”

“그건 맞는 말이지만, 팬이라고 해서 스타를 곤란하게 해도 된다는 법 또한 없지.”

안 그래? 웃던 얼굴로 싸하게 쳐다보니 오싹하다. 평소 대중매체에서 자주 봤던 그의 단정함과 상냥함, 그와 전혀 다른 무서운 살기를 느낀 것만 같았다. 정말로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토록 차갑고 무서운 눈빛은 난생 본 적이 없었으니, 그들은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지만 그저 느껴지는 공포감에 몸을 덜덜 사시나무 떨듯 떠는 것이다. 몇은 그 눈빛만으로 지레 겁먹었는지 허겁지겁 줄행랑을 쳐버렸다.

“이, 이봐! 우릴 두고 가, 가버리면 어떡해….”

몇 남자는 너무 놀란 탓인지 그 자리에 굳어서 움직이질 않는데 성호가 봄이를 한손으로 품에 끌어안고선 그 옆을 스쳐 가더니, 도망조차도 치지 못하는 그 남자의 귓가에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봄이와 약속이 있어. 지나가도 될까?”

“ㄴ…네. 지나……가시죠….”

식은땀을 삐질 흘려대는 남자들 사이를 뚫고 그는 봄이를 데리고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걸음은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허나 회장에서 나가는 동안 봄이도 그리고 성호 또한 말이 없었다. 턱 막히는 공기에 숨이 답답하다. 성호가 화를 내는 모습에 봄이도 겁을 조금 먹은 듯 했고 성호도 이곳을 빠져나가는 동안만은 말을 아끼려는 듯 해보였다.

“성호 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의 살갗에 닿는다. 앞만을 보며 겉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아서, 걱정스러웠다.

“성호 씨!”

“봄이야.”

껴안았다. 서로 심장이 닿을 정도로 품에 꽉 안는 것이다. 예고없는 그의 행동에 봄이는 놀라 품속에서 버둥거렸지만 성호는 그녀의 몸짓에도 놓아주지 않았다. 끌어안고선 용서를 구하듯 그녀의 귀에 계속 반복하여 말하다가, 봄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조금 뜨거웠다.

“미안해. 내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봄이가 무서운 일을 겪게 했어.”

“아, 아니에요! 성호 씨의 잘못이…… 아닌데……”

“떨고 있었잖아.”

“성호 씨 잘못 아니에요. 아까도 늦은 이유는, 성호 씨의 사정이 있어서잖아요. 제가 철없는 소리를 했어요. 성호 씨의 잘못도 아닌데……”

또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던 다이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그가 변명같아서 더 하지 않으려던 말이었다. ……라이브 중계로 봄이의 콘테스트를 봤어.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에 봄이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피카츄의 고드름 깨기와 번치코의 브레이브버드. 다른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겠지만, 그 연기는 우리에겐 언젠가 우리가 만났던 때 그 날과 닮아있었지.”

봄이가 막 아버지인 체육관 관장 종길을 이긴 때였다. 여섯 번째 체육관이 있는 검방울 시티로 가기 위해 그 때 그녀는 유일한 루트인 118번 도로의 강을 통해가야만 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강의 끝에 성호가 있었다. 해가 지고 노을이 붉게 타오를 무렵, 그 장소에서 소녀는 챔피언을 만났다.

“라티아스를 타고 같이 하늘을 날았죠.”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니?”

그때와 같은 붉은 하늘을……. 봄이가 포켓몬과 연기한 무대는 바로 그 날을 재연한 것이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포켓몬과 밤의 검푸른 색이 하늘에 밀려들어오며 빛나기 시작하는 수많은 별들... 다른 사람은 보더라도 모를 일이지만, 둘만이 아는 이야기다.

“봄이야, 라티오스를 불러줄래?”

“……? 갑자기 라티오스는 왜요?”

“마침 노을이 지는 시각이야. 그때처럼 붉은 하늘에서 데이트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그녀가 성호가 들고 온 가방 안에서 무한의 피리를 꺼내어 불자 라티오스가 하늘에서 유연하게 헤엄을 치듯 내려왔다. 그들의 앞에 멈춰서니, 다이고가 먼저 타고선 봄이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오렴, 봄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멋진 남자가 자신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주니 가슴이 콩닥콩닥 뛸 순간이지만, 봄이는 그 손이 멋쩍은지 얼른 성호의 뒤에 앉으려했다. 하지만 봄이는 그 곳이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봄이의 자리는 이쪽.”

두사람을 태운 푸른색 포켓몬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강한 바람과 빠른 속도에 몸이 날아가버릴 것 같았지만 그녀를 뒤에서 꽉 안아주는 그가 있다. 그녀에겐 그가 있었다. 붉은 하늘을 지나고 반짝이는 별빛아래 두 사람은 날고 있었다.

언젠가 그날과 같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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