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한 갈래 길
두 번째 포켓몬인 고우스트도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운 피카츄가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저 삐뚜름한 입꼬리. ‘더 강한 녀석은 없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지막 포켓몬볼을 꺼낸 유빈이 말했다.
“이번에는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겁니다.”
볼에서 튀어나온 마지막 포켓몬이 눈으로 형태를 확인하기도 전에 피카츄를 공격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이나 같은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건지, 기습으로 선제공격을 함과 동시에 피카츄의 움직임을 막아냈다. 약간의 데미지를 입은 피카츄가 고개를 빠르게 저은 뒤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앞에는 팬텀이 서 있었다.
“팬텀, 섀도볼!”
“피카츄!”
“피카피카!”
하지만 피카츄가 여태 보여준 근접 공격만이 장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됐다. 섀도볼을 피한 피카츄가 마찬가지로 팬텀에게 일렉트릭볼을 던졌다. 피하고, 던지고, 다시 피하고. 이대로는 힘만 뺄 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빈이 지시를 내렸다.
“팬텀, 교란시켜!”
공격을 멈춘 팬텀의 형상이 사라졌다가, 반대쪽에서 나타났다. 피카츄가 팬텀을 향해 일렉트릭볼을 던지자, 다시 사라지고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나길 반복했다.
생각보다 잽싸다. 속도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건만, 자꾸 공격이 빗맞는 바람에 피카츄의 짜증이 점점 올라오는 게 보였다.
“피카츄, 아이언테일.”
“피카-!”
콰앙- 소음과 함께 피카츄의 꼬리가 팬텀의 잔상을 갈랐다. 이대로라면 피카츄의 체력이 먼저 다 할지 모르는데도, 피카츄는 끊임없이 닿지 않는 공격을 계속해 댔다. 대체 어쩔 심산이지? 피카츄의 꼬리가 바닥을 세 번째 내리쳤을 때, 유빈은 공격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먼지가 일어 필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과연. 팬텀의 모습이 아닌 먼지의 움직임으로 위치를 잡겠다는 심산이군. 하지만 고스트 타입에게 숨을 장소를 내어줬다는 것부터가 실책이다. 그렇게 생각한 유빈이 외쳤다.
“팬텀, 공격해!”
“피카츄, 마무리를 지어!”
겹치는 두 사람의 목소리. 뒤이어 큰 파열음이 울렸다. 그리고 침묵. 보이진 않지만 결판이 난 것은 분명했다.
어떻게 된 거지?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 천천히 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히죽 웃으며 엉망이 된 필드에 두 발로 선 피카츄와, 피카츄의 꼬리에 거하게 맞고 쓰러진 팬텀의 모습이었다.
“스, 승자, 피카츄!”
3대0. 피카츄의 깔끔한 승리였다. 괴물 같은 힘으로 체육관을 엉망으로 만든 피카츄는,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제노에게 달려들었다. 힘이 남아도는구나, 남아돌아. 제노는 피카츄를 안아 들고 쓰다듬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팬텀.”
일격에 쓰러진 팬텀의 상태를 확인한 유빈이 팬텀을 몬스터볼로 들였다. 그리고 엉망이 된 바닥을 피해 제노에게로 다가갔다.
“자, 이건 팬텀배지. 솔직히 분한데요. 진심으로 피카츄를 쓰러트릴 작정이었거든요.”
제노는 조용히 배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곧장 돌아갈 기세이기에, 유빈은 황급히 질문을 덧붙였다.
“저기, 마지막 공격은 어떻게 받아친 거죠?”
“… 팬텀이 바닥에 숨을 걸 알았거든요.”
유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스쳤다. 먼지로 주변을 가득 메웠을 때부터, 몰아넣어진 건 피카츄가 아니라 팬텀이었던 것이다. 유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거 한 방 먹었는데요. 하지만 만약 예측이 빗나갔다면 어쩔 셈이었나요? 정말 팬텀을 놓쳐버렸다면?”
“그래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당신이 배틀을 시작하자마자 신호 없이도 팬텀이 기습을 사용한 것처럼, 내 피카츄도 항상 배틀을 시작할 때 미약한 전류를 필드 전체에 흘려 넣거든.
그것은 데미지를 주진 않지만, 전기 타입의 위력을 올려주는 역할이었다. 물론 이번엔 탐지용으로 썼다. 피카츄에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전류를 느끼는 게 더 빠를 테니까.
제노는 이와 같은 설명을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전략 중 하나인 건 둘째치고, 첫째로 아직은 잘 사용되지 않는 기술이기에.
단순한 문장을 내뱉고 입을 다물어버린 제노에 유빈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배지 한 개라곤 믿기지 않는 강한 실력. 보면 볼수록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비법을 알려주는 것 대신, 연락처를 알려주는 건 어때요?”
… 네?
*
‘유빈’. 제노가 포켓기어에 입력된 이름을 노려보며 터덜터덜 체육관에서 나왔다.
결국 번호를 받았다. 받기만 하고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유빈은 철저하게도 제노의 포켓기어에 손수 자신의 번호를 저장한 다음 자신의 것에 전화를 걸었다. 약삭빠른 놈 같으니라고.
골칫덩이2(유빈)가 생겨 한숨을 내쉬는 제노에게 골칫덩이1(실버)이 다가왔다. 심지어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원하는 대로 배지 땄잖아, 또 뭐가 문젠데.
“네가 그렇게 싸우는 바람에 가진 포켓몬은 피카츄밖에 알 수가 없었잖아.”
“대신 유빈의 구성은 알 수 있었잖아?”
“그걸 알아서 뭐 해?”
“… 너 팬텀배지 필요 없어?”
“어제 이미 받았는데.”
제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네 고집 때문에 체육관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리는 동안 너는 먼저 하고 편하게 내 배틀 관람이나 하셨다, 이 말이지?
“아무튼, 나랑 배틀할 각오는 됐겠지?”
그렇게 말한 실버가 입매를 비틀며 사악한 미소를 짓기에, 제노는 피카츄가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던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제노의 예상과 달리, 실버는 뒤돌아 어디론가 향할 뿐이었다.
“너 어디 가?”
“뭘 당연한 걸 물어, 포켓몬 센터지.”
“거기서 싸우게?”
“무슨 소리야? 네 피카츄를 회복시켜야할 거 아냐.”
묘하게 어긋나는 대화. 그제야 실버의 의도를 알아챈 제노가 말했다.
“그냥 지금 당장 해도 돼.”
“뭐? 너 지금 나를 얕보는 거냐?”
얘기가 그렇게 되나? 실버는 멍청하게 서서 자기 머리나 긁고 있는 제노를 끌고 포켓몬 센터로 향했다.
“허세 부리지 말고 다녀오시지.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착각하지는 마.”
실버가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만전인 상대를 쓰러트려야만 내 속이 후련해서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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