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두 갈래 길
쿠웅-. 마그마단이 내놓은 마지막 포켓몬인 폭타가 쓰러졌다. 마적이 이 상황이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갑자기 나타난, 챔피언 옆의 수상한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선 우리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니….
그때, 벨 소리가 울린다. 마적의 포켓내비다.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쿠아단이 굴뚝산에…? 쯧, 알겠다. 내가 직접 그곳으로 향하지.”
“마그마단, 또 무슨 속셈이냐!”
성호의 외침에 마적이 불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성호를 바라보던 시선이 제노에게로 향했다.
“챔피언… 그리고 이름 모를 트레이너.”
꽤 좋은 눈을 하고 있군.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란돈을 깨워 대지를 늘린다, 그렇게 해서 인류를 발전시킨다. 그것이 우리 마그마단의 위대한 계획!”
무언가에 심취한 듯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곤 멋대로 떠나가기 위해 뒤돈 그가 제노를 흘깃 바라보았다.
“다음번에도 방해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거기 서!”
“폭타-”
분연이다. 성호의 외침에 대한 답으로 마적의 명령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쓰러진 폭타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맞받아치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한 제노가 입을 열었다.
”샤미드,”
“하이드로펌프.”
순간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이내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쏘아졌다. 그것이 폭타가 뿜어낸 불꽃과 맞닿으며 순식간에 수증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흰 연기가 가라앉고 사위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마그마단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한 수 배우고 싶을 정도다. 옆에 선 성호가 분한 듯 그 빈자리를 노려보았으나, 지금 제노에게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었다.
제노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직 조금 남은 연기를 헤치고, 누군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삐딱한 자세, 뒤에 선 커다란 장크로다일, 그리고- 언제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붉은 머리.
미묘하게 보랏빛을 띠는 눈동자가 제노를 내려다보았다. 찡그리듯 미소 지은 그가 말했다.
“내가 살면서 받아 본 것들 중에 가장 성의 없는 답장이었어.”
“….”
“뭘 바보 같은 얼굴 하고 있는 거야?”
뭐, 놀란 표정을 보니 여태 고생한 보람은 느껴지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미소가 짙어진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성호가 제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소년… 우리 편이죠?”
“그러는 너는 뭐야?”
곧장 실버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의 싸가지없는 대답에 제노는 정신을 차렸다. 챔피언에게 시비 거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일단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꼬르륵,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큽, 옆에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성호를 바라보자 그가 붉어진 얼굴을 하고 그 시선을 피했다.
“죄송, 크흠, 죄송합니다.”
“….”
제노가 계속해서 울리는 제 배 위에 한 손을 올렸다. 어흠, 어흠! 성호가 그 소리를 가려주려는 듯 큰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마음은 고마운데 그쪽이 더 비참하니까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마그마단의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여기로 온다고 점심을 못 먹었다. 제노가 눈알을 도르르 굴렸다. 실버에게서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결국 상황을 마무리한 건 성호였다.
그가 말했다.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제노예요. 이쪽은 실버.”
“저는 성호라고 합니다. 협력해 주신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은데, 일단 저희 집으로 가시겠어요?”
싫은데….
그런 제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방긋 웃은 성호가 치명타를 날렸다.
“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네.”
아싸, 밥이다! 제노가 곧장 긍정의 답을 꺼내자, 성호가 부드럽게 제노를 센터의 밖으로 에스코트했다. 실버가 잽싸게 그 앞으로 끼어들었다.
명백한 경계와 거절. 잠시 실버와 시선을 마주한 성호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자. 실버 군도 함께 와주지 않겠어?”
“….”
작게 혀를 찬 그가 앞장서 밖으로 향했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사람이 잘 챙겨 먹어야지. 성도지방에 있을 적 그렇게 말한 제노가 자신에게 자꾸만 뭘 먹였던 것을 떠올린다. 이건 못 말릴 것 같았다.
*
성호의 집은 그가 가진 재산에 걸맞게 넓지만 어쩐지 휑하고, 수상할 정도로 돌들이 많았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는 사이 성호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바람에 식탁에는 제노와 실버, 둘만 남게 되었다.
성호 씨, 대체 언제 돌아오시나요. 실버의 따가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던 제노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
“어, 뭐….”
그 말에 실버가 왼손으로 길어나온 옆머리를 매만졌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따뜻해지면서 거추장스러워진 터럭을 한 뭉텅이 잘라낸 자신과 달리, 실버의 것은 로우번으로 묶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또 키가 조금 자랐나. 맑은 물빛의 시선이 그를 머리끝에서부터 찬찬히 훑었다. 날렵한 콧대를 지나 턱밑에 닿는다. 선이 약간 굵어진 것 같기도 하고.
제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상을 찡그린 실버가 말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아니, 어디가 바뀌었나 해서….”
“새삼 새로울 게 뭐가 있다고.”
새침하게 내뱉은 실버가 흥, 작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제노는 답하는 대신 후식으로 나온 조각 케이크를 괴롭히는 쪽을 택했다. 작은 포크에 힘을 주어 누르는 것에 따라 겹겹이 쌓인 생크림과 제누와즈가 뭉개졌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파란 꽃 패턴이 그려진 예쁜 접시 위의 생크림 범벅을 퍼먹던 제노가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손수건은?”
“어?”
“만나면 돌려준다고 했잖아.”
“아, 그거.”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게, 이미 돌려줬다고나 할까…. 말끝을 흐리는 바람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잃어버렸다는 말인 것 같았다. 제노가 무심하게 포크로 케이크의 꼭대기를 장식한 딸기를 찔렀다. 실버가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이제는 필요 없다느니 그런 말이나 하고 말이야.”
“잃어버린 건 실버잖아?”
“누가 잃어버렸다고 그래? … 뭐, 됐어. 약속은 제대로 지켰으니까.”
“무슨 말인지 통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렇게 불만을 웅얼거리는 제노에게서 실버가 대뜸 포크를 빼앗아 갔다. 아니, 조금 뭐라 했다고 딸기를 못 먹게 하는 건 무슨 경우야. 황당하게 쳐다보는 사이 실버가 비어버린 제노의 오른손을 잡고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쫘악 펼쳤다. 딱히 눈에 띄는 흉터는 없이 깨끗하다. 그가 손의 주름을 하나하나 읽기라도 하듯이 바라보았다.
손바닥 뚫리겠어, 이놈아. 이번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실버를 대신에 제노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뭐 하면서 지냈어?”
“당신이 시킨 대로 배틀이나 부지런히 했지. 뭐, 그 덕에 관동지방의 배지도 모두 모았지만 말이야.”
그 말에 제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상체가 앞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석영고원에, 리그에 도전했어?”
“당연히 했지.”
“어, 어떻게 됐어?”
꿀꺽. 침을 한 번 삼킨다. 실버의 답을 기다리는 눈동자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제노의 손바닥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 실버가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제노의 머릿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했다.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들에 감정이 뒤엉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실뭉치가 되어버렸다.
원래라면 심향이 목호를 꺾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그렇다면 실버의 도전 상대는 자연스레 심향이 된다.
그가 과연 심향을 이겼을까? 그럼 챔피언은 실버가 되는 거야? 그래도 되는 거야?
제발 졌기를. 아니야, 누구 밑에서 배웠는데 당연히 이겼겠지. 아니, 져야 해! 이겨! 지는 게 당연한 거야!! 그래도 이겨!! 근데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건데?!
실버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던 실버의 표정이 뚱해지더니, 그가 대뜸 말했다.
“안 알려줄래.”
“뭐?”
그게 뭔 헛소리야, 지금. 제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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