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한 갈래 길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로켓단원의 꼬렛이 쓰러졌다. 이걸로 대체 몇 명째와 싸운 것인지 세는 것도 귀찮아졌을 정도다.
심향과 실버는 누가 더 많이 상대를 잡나 내기라도 한 듯 번갈아 가며 포켓몬들을 쓰러트렸다. 덕분에 제노와 그의 포켓몬들은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피카츄는 지루한 듯 제노의 후드 속에서 하품했다. 피카츄의 입장에선 나설 차례가 없으니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제노는 달래듯 피카츄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5층. 국장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국장의 뒷모습-
“… 에- 나는 국장이다. 오늘부터 우리 라디오방송국에서는 로켓단을 칭송하는 멋진 방송을 하게 되었다!”
…이 아니라, 이번에도 분장한 람다였다. 저 정도면 그냥 본인 취미 아냐? 셋이서 나란히 람다의 되지도 않는 연기를 구경하고 있을 때, 문득 뒤를 돌아본 람다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자빠졌다. 쿠당탕, 의자가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여, 연습 중에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람다가 허리춤에서 몬스터볼을 꺼내 들었다.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또가스. 심향이 앞으로 나서며 보송송 꺼냈다.
“누나, 여긴 저한테 맡기세요! 보송송, 일렉트릭볼이야!”
“또가스, 해치워버려!”
“심향아, 잠깐만!”
제노의 만류보다 또가스가 달려드는 것이 더 빨랐다. 일렉트릭볼을 피하고 가까이 다가온 또가스의 몸이 불길하게 빛났다. 지난번 황토마을에서의 더블배틀에선 사용하지 않았지만, 람다의 또가스는 전부-
콰앙. 큰 폭발음과 함께 눈 부신 빛이 시야를 가렸다. 충격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 반사적으로 실버를 감쌌던 제노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무의식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는 가디안의 등이 보였다.
가디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제노의 안전을 확인했다. 볼에서 멋대로 튀어나온 가디안이 리플렉터로 자폭을 막아낸 것이었다. 오묘한 색들로 일렁이는 투명한 벽 너머로 폭발로 인한 먼지가 점차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리플렉터의 범위 밖에 있던 심향의 모습도.
“심향아!”
심향의 보송송이 배운 것은 빛의장막. 물리공격인 자폭에는 효과가 없다. 순간 심향의 앞을 막아서고 자폭을 정면으로 받아낸 보송송이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약간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폭발의 영향을 받은 심향의 모습도 말이 아니었다.
“… 고마워, 보송송.”
심향이 중상을 입은 보송송을 껴안고 내려다보다가, 몬스터볼로 되돌려놓았다. 다시 자세를 잡은 심향이 모자를 고쳐 썼다. 두 눈에 어떠한 결의가 담겨있었다.
“전 괜찮아요. 맡겨주세요.”
다시 한번 맡겨달라는 말. 하지만 전과는 무게가 다르다. 책상 뒤에 숨어 자폭으로부터 몸을 지킨 람다가 팔만 뻗어 몬스터볼을 던졌다. 이번에도 또가스. 심향은 피죤투를 꺼냈다.
독 타입인 또가스는 가디안의 에스퍼 타입 공격에 취약하다. 마음 같아선 가디안에게 한 번에 쓸어버리라고 하고싶지만… 맡겨달라는 말을 믿어보고 싶었다.
제노가 진지하게 심향과 그의 피죤투를 바라보고 있을 때, 팔을 잡아 오는 손이 느껴졌다. 실버였다. 그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여전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제노의 팔을 떼어냈다. 제노는 머쓱해하며 실버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보호해 주려고 한 건데 이렇게까지 싫어할 건 없잖아.
“또가스, 날려버려!”
“피죤투, 날개치기야!”
또가스가 완전히 자폭하기 전에, 피죤투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또가스를 밀어냈다. 또가스는 허공을 굴러 책상 뒤쪽까지 도달했다. 그곳에 숨어있던 람다가 자폭을 준비하며 빛나는 또가스의 몸을 보고 기겁했다.
“아악! 안돼! 또가스, 자폭 취소, 취소!!”
“이제 같은 기술은 못 쓰겠지? 지금이야, 에어슬래시!”
공기의 칼날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타격음과 함께 강한 바람이 불어와 제노는 후드가 벗겨지지 않게 잡아야만 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완전히 박살 난 책상과 볼품없이 나자빠진 람다, 그리고 쓰러진 또가스였다.
… 저 책상 물어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된 거냐고 하면 로켓단이 그랬다고 하자, 응.
람다는 이대론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다시 볼을 던졌다. 허나 나오는 족족 심향의 포켓몬들에게 맥을 못 추고 당하기만 했다.
마지막 포켓몬인 또도가스마저 당하고, 람다의 주변엔 완전히 기절한 포켓몬들이 든 몬스터볼 여섯 개가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앞에선 심향과 그의 마그케인이 매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다. 상황 파악을 완료한 람다가 입꼬리를 파들거리며 힘겹게 올렸다.
“흐, 흥! 그래봤자 너희들, 진짜 국장의 위치는 모르지?”
인질로 잡을 셈인 건가 했더니 람다는 혼자서 묻지도 않은 정보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지하창고 아냐? 금빛지하통로의 안쪽의 안쪽의 더 안쪽… 그곳에 국장을 가둬두었지!”
“….”
“그리고 말이야, 옥상으로 향하는 3층 셔터의 카드키도 내가 가지고 있다고?!”
“….”
“나, 나는 친절하니까아, 이 두 개를 모두 너에게 주마!”
“….”
심향에게 열쇠를 건네는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심향이 말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자, 곧 람다의 두 손이 합장을 하듯 짝, 하고 모였다.
“그,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악!”
심향에게 목숨 구걸을 하는 람다의 뒤통수에 어디선가 날아온 화분이 적중했다. 가디안의 사이코 파워였다. 람다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다.
“이,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괜찮아, 기절한 것뿐이야. 게다가 저런 녀석은 내버려두는 게 더 위험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제노의 말에 동의하듯 가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용포켓몬치고는 참 매정한 가디안이었다.
심향이 한 손에는 열쇠를, 한 손에는 키카드를 들어 보였다.
“이제 어쩌죠?”
“둘로 나뉘어서 가자. 심향아, 네가 지하로 가.”
“제가요?”
현재 심향의 포켓몬은 보송송이 기절, 피죤투가 지쳐서 쉬고 있는 상태. 제노는 그가 계속해서 나아가기보단 왔던 길을 되돌아가 지하로 향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 국장님을 부탁할게.”
네, 맡겨만 주세요! 심향이 기운차게 답하곤 키카드를 제노에게 내밀었다. 제노는 그것을 받아들고 대신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기력의 덩어리와 고급 상처약이었다.
“이거, 혹시 모르니까.”
“제가 받아도 괜찮아요?”
“응. 위급할 때 사용하도록 해.”
“헤헤, 감사합니다!”
해맑게 웃는 심향의 얼굴이 퍽이나 순진해 보였다. 이렇게 보면 아까 람다를 상대할 때의 기세는 거짓말 같다. 제노에게서 받은 아이템을 가방에 넣고, 다시 모자를 고쳐 쓴 심향이 국장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누나도 조심해요! 실버를 부탁드릴게요!”
“누가 누구를 부탁하는 거야!”
“… 우리도 가자.”
아직 팔팔하구나. 제노는 걱정을 조금 덜었다.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심향의 뒷모습을 보던 두 사람은 키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3층의 셔터를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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