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O.C.] 별이 총총 뜨고
네 눈에도 별이 내린다
* 포타/투비로그에 올려져 있던 걸 조금 가필수정해서 이쪽으로 이전함.
* 자갈님 네 드라고스테 투르바 a.k.a. 드라고와 우리집 루벨 (의조카-의고모) 연성교환
* 자의적 해석이 멧챠쿠챠
* 포켓몬 배틀 관해서는, 애니+포케스페st를 생각하고 썼습니다. 사실 말이 되는지는 신경 안 씀.
* 우리집 루벨은 저에게도 자기 성별 안 알려준 친구에요. 아마 논바겠거니….
* 랜선의조카가 정말 귀여운 건에 대하여.
** 연성교환 받았습니다! 우리 의조카 드라고 마지텐시!!!!
너클시티는 유서 깊은 마을인 만큼 역사를 중히 다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서관 숫자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너클유니버시티에만 대학 중앙도서관을 비롯하여 제1부터 제5 도서관이 있고 각 테마에 맞추어 장서를 꾸려나가는 분과도서관들이 있었으며 너클시티 구역마다 시립분과도서관을 찾아볼 수 있음은 물론이요, 몇몇 헌책방들은 작은도서관의 역할도 분담하고 있었다. 오죽해야 너클시티의 탁아소는 도서관이라는 농담까지 있을까. 하여튼 요는 너클시티 주민이라면 누구나 일 년 내내 여러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한 소녀가 있다. 밀키루비 마휘핑이 연상되는 분홍색 머리칼과 저기 바우마을 먼바다처럼 깊은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품에 한가득 책을 안은 채 종종걸음을 걷는다. 양장으로 된 너덧 권은 여느 전공 서적을 뺨치는 두께다. 몸집에 비해 들고 있는 책이 무겁긴 했던 모양인지, 한숨을 폭 쉬었다. 얼핏 벨트처럼 착용한 볼 스트랩에 시선이 닿지만 거기는 텅 비었다. 이런 때 파트너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투덜거림이라기엔 아쉬움만 가득한 혼잣말이 겨우 동이 터 오는 이른 아침에 흩어졌다.
보통 이 시간에 책을 들고 가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너클 유니버시티 대학의 중앙도서관을 향할 텐데, 쭉 뻗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발은 그쪽을 향하지 않았다. 아직은 시간이 일러 시티 언저리의 도서관은 문을 열지 않았을 텐데도 그랬다.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한 주민 두엇이 그와 엇갈려 지나갔으나 서로 못 본 채하고 지나갔다. 인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분홍머리의 그는 괜히 긴장했던 저를 달래듯이 어깨에서 힘을 빼더니 곧, 아침이 부지런한 구구처럼 바지런히 걷는 걸음을 보채어 가며 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시티 외곽에 자리한 역사 전문 분과도서관 사서 에인츠는 파트너인 에나비가 문가 앞에서 뱅글뱅글 도는 것을 보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도서관 개장 시간은 15분쯤 남았지만,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올 사람이 짐작 간 탓이다. 과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에나비가 폴짝 뛰어올랐고,
"아, 책! 으앗! 하하, 간지러!"
"드라고, 책은 괜찮으니까 우리 애 좀 잠깐 놀아줄래?"
11kg의 포켓몬이 품에 뛰어드니 별수 없이 책을 우수수 떨어뜨렸던 드라고는 책을 주우려다 말고 제 얼굴을 핥아대는 간지러움에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운 좋게도 책은 입구에 깔린 러그에 떨어져 상한 데가 없었다. 에인츠는 제 에나비가 드라고의 품에서 고롱고롱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애를 대신해 책을 집어다가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오늘 아침도 빨랐네. 전용석에다 저번 주에 말했던 책 가져다 놨으니 확인해보고. 자, 여기 코코아."
"네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분과 사서가 될 생각은 없어?"
"에이, 저 나이도 안 돼서 고용 못하실 텐데요."
"그건 그렇지."
사서는 카운터에서 따스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와 담요를 건넸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냥 살포시 얹히는 반쪽짜리 농담이었다(사실 반은 진담이랬다. 정말 진지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제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서는 그때부터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쁘지는 않겠지만, 정말 그렇게 되었다간-. 드라고는 고개를 휘휘 젓고 계단을 올라갔다.
에인츠가 말한 드라고의 전용석이란 2층 구석에 있는 작은 창이 난 자리를 말했다. 서가가 있는 구역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희박해 인기척이 드물었고 창문도 썩 크지 않아 밖에서 이쪽을 식별하기 어렵다는 것이 드라고는 맘에 들었다. 뭐, 여기서 바깥 구경하기도 어렵긴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저를 발견하지 못하리란 점이 훨씬 중요했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중앙도서관을 마다하고 성벽 외벽 근처에 있는 분과도서관으로 온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거다. 중앙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으로 갔다간 암만 구석진 자리를 잡더라도 부모님의 제자나 제자의 제자라거나, 하여간 일방적으로 저를 아는 이들과 면을 부딪치기 마련이니까.
저 자신이 아니라 부모의 빛과 이름으로 판단되는 경험은 정말로 유쾌하지 못하다. 크게 흠잡을 데가 없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부모는 말라죽지도 잠겨 죽지도 않을 정도의 애정을 단단한 밧줄로 엮어 친친 감는 데에는 선수였다. 너무 교과서적인 로프법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드라고는 가끔, 아니, 실은 자주 단정하고 빡빡하게 조여드는 애정에 숨이 막히곤 했다. 나는 진열장에 놓인 전시품이 아니에요! 그렇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저를 향해 또렷하게 쏘아지는 눈동자(그 안에 담긴 애정과 연민이란)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부족함 없이 부어졌으나 틀림없이 무언가 결여된 어떤 것.
그러니 활자 위에 펼쳐진 세상은 얼마나 광활한지. 지난 것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반질반질 윤을 내며 고아한 자태를 내보이는 역사학을 들여다보면, 제 고민 따위는 티끌처럼 변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우주를 보며 그리 느낀다지만 그건 그 사람의 경험이고. 사실 드라고는 우주 같은 걸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나오는 비유며 상징이 부모·자식 간의 인력을 떠올리게 할 때가 있어 거부감을 가지는 편이었다.
인력을 벗어나 저 자신으로 설 순간을 위해, 지금은 그냥 활자 사이에 파묻혀서 때를 기다린다. 모든 어린이가 합법적으로 집을 나설 수 있는 챌린지 기간을. 올해, 드라고는 챌린지에 도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앞으로 조금이다.
단순히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신청한 챌린지는 생각보다 성에 맞았다. 정해진 시간 내에 여덟 개의 스타디움을 모조리 돌아 배지 여덟 개를 모으라는 명확한 목표는 논술 시험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다.
지식과 간접경험이 실제로 체현되는 과정은 놀랍기까지했다. 알고 있던 포켓몬 배틀 지식을 어떻게든 짜내고 조합해 전략을 먹혀들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 이토록 생생할 줄이야. 드라고의 파티에 있는 오뚝군과 거대코뿌리, 초반에 만난 쌍검킬―길은 초반의 세 체육관과는 상성이 영 애매모호한 탓도 있어서 여타 챌린저보다 머리를 싸매고 고생했더랬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릴 수 있는가. 상대의 빈틈은 어디서 물고 늘어져야 하는가. 터프 스타디움에서의 처음 도전은 지독하게 고지식한 전략이어서 갈아엎어졌고, 두 번째 도전은 아슬한 데에서 실패하였으며, 마지막 세 번째에는 기어코 배지를 쟁취해냈다. 그 순간 찾아든 희열과 전율이란. 짐 리더가 지도배틀을 한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휘발될 정도였다. 답지 않게 방방 뜬 게 아닌가 싶어 머쓱해하던 제게 처음 틔운 싹은 기쁠 수밖에 없죠, 말하며 따라온 아킬 씨의 순한 웃음은 여전히 생생하다.
바우 스타디움도 비슷한 흐름이었다. 길은 방어적 우위와 일부 구간의 유리한 타점이 있긴 했지만, 오뚝군의 공방 상성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게다가 바우 짐 리더는 터프 스타디움의 주인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어서 준비해온 교체와 다이맥스 타이밍을 그대로 실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끝의 끝에는 악바리처럼 붙들고 늘어져 어떻게든 해냈지만. 주변 다른 챌린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야청 님이 배지를 넘겨주면서 꽤나 분에 겨워했다던데, 제 쪽에는 꽤 유한 모습을 보였던 게 차이면 차이일지도 몰랐다. 끈질기고 집요한 애들을 싫어하지 않는다나 뭐라나?
오히려 역습당한 건, 엔진 스타디움이었다. 오뚝군이 처음으로 상성 우위를 잡은 곳이어서 방심했던 걸까. 엔진 스타디움이 어중이떠중이를 걸러내는 곳이라더니 괜한 헛소문은 아니었던 거다. 한 번의 패퇴에 드라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쯤 오니 이 정도로 진심이 될 생각이 없던 챌린지였지만, 정말로 명실상부하게 챌린지가 되어있었다. 인생의 첫 경험이다. 드라고스테 투르바의 전 생을 통틀어서 오롯하게 저 혼자 힘으로 쟁취해나가는 시간이 활활 타오른다.
"질 수야 없지. 안 그래, 얘들아? 다음엔 절대로 이길 거야."
게다가 배수진이다. 챌린지 기간을 꽉 채워서 집 밖에 있고 싶다는 마음 역시 절실함에 불을 질렀다. 바우 짐리더가 포기하지 말라고 언외에 일렀던 응원은 분명 이걸 말한 거였을 거다. 포기하지 말라고? 이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만했다. 아니, 목이 졸리는 것보다야 훨씬 무조건 낫다. 여기선 머뭇대며 멈출 필요도 괜한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온 힘을 다해 부딪히고 외치고 싸워나가면 된다. 버티고 싸우고 이겨내면, 집 밖을 벗어난 지금처럼 기회는 반드시 온다.
엔진 배지를 얻고 도시를 떠날 때에 저를 마중나온 면면들을 보며 드라고는 그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그들은 지금 트레이너이자 챌린저인 드라고스테 투르바를 본다.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드라고의 파티는 매번 상황에 맞게 바뀌었다. 원년 멤버는 그대로지만, 남은 자리는 도전하는 짐에 따라 새로 잡고 키우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기존 파트너들이 래터럴부터 아라베스크는 상성이 맞는 편이라 수월한 편이지만, 이들만으로 후반부의 짐을 돌파하는 데에 무리가 있으니까.
여타 트레이너가 택하지 않는 방식은 타고난 재능과 쌓아온 지식에 맞물려 빛을 발했다. 일곱 번째인 스파이크 마을에서 난데없는 클래식 배틀을 할 때가 특히나 그랬다. 대부분 트레이너는 고정된 파티를 다이맥스 전에 걸맞게 키워내다 보니 스파이크 스타디움에서 좌절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포켓몬 협회 가라르 지부에서 발간하는 통계만 봐도 분명했다. 그에 반해 매번 파티를 갈아치우며 왔던 드라고는 원맨 체제가 아니라는 강점이 있었다. 처음 경기에서 클래식 배틀에 익숙하지 않아서 졌을 뿐이라는 생각에 마침 너클 시티에서도 멀지 않다는 이유로 에인츠를 비롯한 사서 친구들에게 클래식 배틀 자료를 몽창 받아서 공부하고 설욕전에서 당당히 배지를 차지하지 않았던가. 첫 패배 이후 겨우 사흘만의 일이라 스탠딩 마이크에 기대어 선 두송이 혀를 찼다. 너클 시티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이냐는 투덜거림과 함께. 마지막 스타디움에서 마주한 금랑 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하니 저희네 지킴이 용은 그 큰 키를 거의 반으로 접어서 깔깔 웃었다.
"두송은 그런 비주류인 사람, 꽤 좋아하거든-. 파이널에서 보자고, 챌린저."
가라르의 왕좌에 도전하기 위한 티켓은 오로지 한 장. 그를 위해 여덟 명의 도전자가 세미파이널 토너먼트를 치른다. 하나둘 자격을 갖춘 트레이너가 갖춰질수록 가라르는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모두가 왕좌를 노리며 저 하늘의 태양이고 별을 쳐다보는 중에도 드라고는 예나 지금이나 우주며 천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더 오래, 더 멀리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을 뿐.
드라고의 첫 챌린지 성적은 파이널 토너먼트 2회전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뚝군이 파이널 직전에 점토도리로 진화하면서 자기 몸집 변화에 적응을 어려워했음에도 이뤄낸 쾌거다. 올해도 가라르 왕좌에 도전한 것은 너클 시티가 자랑하는 용이다.
드라고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꾸준히 챌린지에 도전했다. 처음부터 준수한 성적을 뽑아냈으니(혹은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모는 별다른 말 없이 그를 배웅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이 벌써 네 번째의 챌린지다. 두 번째 챌린지를 지나며 오뚝군은 이제 제 몸피에도 확실히 익숙해진 훌륭한 점토도리가 되었고, 저 자신도 이제 배틀 직전에 몬스터볼을 쥐고 긴장하는 초보자 티는 벗은 지 오래다. 초반의 세 스타디움 돌파는 훨씬 수월했으며 배틀 중에 여유롭게 서로 대화를 나눌 만큼도 됐다. 심심풀이에다 표면적인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은 토막들이었지만.
그런데도 초반의 세 관장님은 제 목표가 저 먼 왕좌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배웅할 때의 말이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랐다. 드라고 씨의 열매는 분명히 열릴 거예요. 뱃길은 넓게 보는 거야, 알겠지? 느긋하고 오래도록 가는 불길도 있단다, 얘야. 세미 파이널에서 여러 번 부딪힌 다른 트레이너들을 슬쩍 떠보아 이야기해보면 확실했다. 그 애들에게는 부동의 왕좌에 대해서, 높다란 데에서 빛나는 별을 말하며 배웅했댔다. 지나간 역사와 그걸 활자로 고정한 책을 사랑하는 이에게 건네는 응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달았던 날, 드라고는 과연 가장 초심자 트레이너를 자주 많이 보는 이들다운 안목이라며 탄식했다.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운 태도로 짐 전에 임했다 한들, 결코 대충한 적이 없는데도 꿰뚫어 본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모든 짐리더가 마냥 친절하게 받아주지는 않았다. 아니, 뭐, 스파이크 짐리더가 누구에게 살갑게 말하는 상대는 그의 여동생이 유일하긴 하지만. 당신, 엇나가고 싶은 겁니까 아닌 겁니까? 반항하려면 똑바로 하십쇼. 갈팡질팡하지 말고 제대로 생각해보라고요. 그게 한 서른세 바퀴는 꼬아서 말한 걱정이라는 건 다섯 번째 챌린지를 할쯤에야 깨달았고 알자마자 미친 듯이 웃어댔다. 당연히 이 이야깃거리는 제 고향의 짐리더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쳐졌고, 그다음 해 챌린지에서 드라고는 두송에게 그걸 왜 말했느냐는 엄청나게 사나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매 해 세미 파이널은 거뜬하고 파이널에도 꼬박꼬박 드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트레이너가 된 드라고는 스파이크 배지를 받아들고서 남아있는 챌린지 기간을 셈했다. 한 달 조금 넘게 여유가 있었다. 마지막 한 주는 파이널 전 조정 기간이라 치면 삼 주를 남은 챌린지에 쓸 수 있다. 그 전에 여덟 번째 짐인 너클 스타디움의 더블배틀을 위해서는 파티를 조정해야 했고 휴식할 때도 되었으니, 이 주 정도는 와일드 에리어에서 느긋하게 보내면 될 듯했다. 그렇게 일정을 셈한 드라고는 배낭을 짊어졌다.
챌린지 시즌은 자경단이 특히 바쁜 때다. 엔진시티고 너클시티고 가릴 게 없다. 삼사 개월 남짓할까 싶은 그 기간에는 칼 같이 그어둔 행정구역도 의미가 없었다. 포켓몬 협회의 스태프들까지 동원해야 간신히 사건․사고를 그럭저럭 억누르는 게 고작이다. 심약한 포켓몬이 주로 사는 와일드 에리어 남부는 그 낮은 난도에 힘입어 초보 트레이너들이 온갖 곳을 들쑤시며 누비다가 토박이들을 자극하고 그런 야생 포켓몬의 날뜀에 당황한 초보 트레이너는 자기도 모르게 맞불을 놓기 일쑤다. 그렇게 예민해진 포켓몬은 평소에 잘 지키고 있던 본인들의 구역을 넘기도 하며, 인파를 피해 북쪽으로 향한다. 남쪽에 비해 거친 친구들이 많이 서식하는 북쪽 에리어는 그런 영역침범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물어뜯고 날뛰며 침입자에게 더더욱 자비가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당연히 북상하던 트레이너들이 위험해진다. 사람이고 포켓몬이고 할 것 없이 난장판이 되는 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너클시티 자경단 팀장급인 루벨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극악의 로테이션을 돌고 있는 단원 대다수가 죽는소리를 내고 있건만, 자경단 본부로 돌아올 때마다 루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 팀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우와, 루벨 팀장님 얼굴 하나도 안 퀭해. 이건 사기야!"
"뭐 따로 챙겨 먹는 거 있어요? 왜 혼자 이렇게 멀쩡해?"
"정통 레인저 출신을 얕보지 말라, 이거야-. 아니, 근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매화 씨도 그렇고, 라일리 부팀장도 쌩쌩하잖아! 단장님도 그렇고!"
"그 두 사람도 우는소리쯤은 하거든요? 아, 그리고 단장님은 논외죠. 완전 그건 반칙."
"그럼그럼. 단장님은 논외지."
이제 곧 자경단 본부를 나서야 하는 티미엔과 가우스는 한참을 징징대다가 볼 홀스터를 점검하고 챌린지 시즌 전용 구급 백팩을 메고서 다녀오겠다며 밝게 인사했다. 우는소리는 잔뜩 해댔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이 일에 자긍심을 가진, 똑같은 녀석들 뿐이니까.
모교가 있는 아르미아 지방이나 태어난 고향인 호연 지방에서 레인저를 했어도 괜찮았을 테지만, 루벨은 이런 순간마다 가라르로 이민해 정착하기를 잘했다고 새삼 생각한다. 여섯 구의 파트너를 두고 다른 것을 향해 싸워나가는 트레이너와 단 하나의 파트너를 두고 야생의 포켓몬과 협력해 사건을 해결하는 레인저, 그 둘의 절충안이야말로 루벨이 바라던 삶이다. 투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그렇다고 단 한 마리만을 파트너로 삼기엔 조금 외로웠을지도 모르는 성정은 이곳 너클시티 자경단과 딱 어울렸다. 호연의 카이나 타운이 출생지이지만 이쯤이면 가라르의 너클시티 토박이 아니냐고 자만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시간짜리 휴게시간을 여유롭게 즐기던 도중에 신고가 들어왔다. 역린호수 쪽으로 잔뜩 흥분한 갈가부기 다섯 마리가 몰려갔다고 한다. 역린호수는 꽤 위험한 지대이기 때문에 출입을 신고받는다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인지라, 모든 트레이너가 이 지침을 지키는 건 아니다. 특히나 챌린지 기간은 누군가 한 명쯤은 있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야생 포켓몬과의 전투는 스타디움 필드나 스트릿 배틀처럼 상호 간에 협의한 채로 싸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트레이너에게도 포켓몬에게도 해가 된다. 역린호수를 찾아갈 정도면 꽤 준수한 트레이너이기 마련이고, 자기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에 흥분한 야생 포켓몬이 있다면 덤벼드는데 그러다 보면 익숙치 못한 상황이 생기고 결국은 패닉에 빠지기 마련이다. 공격받은 야생 포켓몬이 더더욱 날뛰는 건 덤이고.
"내가 갈게요. 주변 단원 중에서 자원자 셋 뽑아서 보내줘. 트레버, 역린호수까지 전속력으로 부탁해."
루벨은 의자에 걸어뒀던 트랙 재킷을 걸치며 파티의 막내인 음번, 트레버를 불러냈다. 음번은 제 트레이너가 등에 확실히 탄 걸 확인하고 한 번 길게 울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갈가부기는 확실히 역린호수에 산다. 주요 서식처가 아닐 뿐이지, 비오는 날에 드물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포켓몬임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어야 한다. 오늘은 쾌청하지 않았나. 부스터가 돌무더기 사이를 유유히 누비는 것까지도 봤는데. 이런 날에는 코뿌리가 주도를 잡는 편이라 여기에 갈가부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게 뭐야?! 길, 킹실드! 점토도리, 사이코키네시스!"
역린호수가 와일드 에리어 중에서 위험한 구역에 속하긴 해도 서식하는 포켓몬들을 굳이 자극하지 않는다면 인적이 드물어 휴식하기 좋은 곳이다. 같은 지역의 베테랑 트레이너에게 들은 내용이기도 하고 금랑 님도 가끔 찾아간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그 정보가 틀리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네 번째 챌린지 무렵부터 이맘쯤에 매번 꼬박꼬박 여기서 캠핑하며 컨디션 조절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이런다고?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곳의 다이맥스 스폿이 활성화되어있지 않다는 거다. 눈 뒤집힌 채 달겨드는 갈가부기 다섯 마리가 다이맥스까지 한다? 그건 이미 재앙이다. 전설 속에 있는 블랙나이트보다야 이쪽이 훨씬 가깝고 선명한 재앙이지. 바쁘게 행동을 지시하는 드라고도 그걸 이행하는 파트너들도 기가 빨렸다. 가뜩이나 지금껏 소모가 많아 휴식을 위해 늘어져 있던 터라 파티 멤버 전원의 반응속도가 반의반 박자쯤 느리다. 갈가부기가 아주 빠른 포켓몬은 아니고, 쓱쓱이 발동할 비 오는 날이 아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 옹골진 턱에 씹혀서 몇 군데 잘려 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레 영역을 침범당한 코뿌리가 콧김을 내뿜고 발을 구르며 불편한 심기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날뛰는 갈가부기들, 심기가 불편해진 코뿌리, 그 틈바귀에 낑긴 저. 최악이다. 갈가부기들이 온몸에 물을 두른다. 아쿠아브레이크다. 코뿌리들 주변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돌이 떠오른다. 이건 스톤엣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지만 이 이상 뭐를 어떻게 할지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 수라장을 뚫고 나갈 수가 있나. 그렇게 고민하는 찰나에,
"―트레버, 열풍! 오웬은 스톤샤워!"
하늘에서 누군가 뚝 떨어졌다. 어느샌가 제 앞을 가로막은 대짱이가 스톤샤워로 코뿌리의 스톤엣지를 상쇄했고, 하늘에서는 넓은 범위의 열풍이 불었다. 음번의 열풍은 쾌청한 날씨와 맞물려 아쿠아브레이크의 물을 증발시켜 단순한 몸통박치기로 만들었다. 어느 쪽이고 공격은 불발. 찐득한 체리색 머리칼의 트레이너는 그 틈에서 몬스터볼 다섯 개를 던졌다. 튀어나온 건 전부 훌라훌라 스타일의 춤추새다.
"춤춰!"
알로라 지방의 춤추새는 공식전에 출전할 수 없는 포켓몬. 그게 다섯 마리씩이나 있다고? 거기에 조금 전에 꺼내 든 포켓몬 둘을 포함하면 벌써 일곱 마리로 소지 수가 넘어가는데? 혼란한 드라고를 내버려 두고 상황은 척척 나아갔다. 느슨한 표정의 분홍빛 몸체를 지닌 춤추새들이 느긋하게 춤을 추자, 도감 설명에서처럼 야생 포켓몬들이 진정됐다. 우선은 코뿌리가 정신을 차리고 각자 자리로 돌아갔고, 머리꼭지가 단단히 돌아갔던 갈가부기들도 여전히 씨근거리긴 했어도 아까처럼 무턱대고 들이받을 기세는 아니었다. 곧 세 명의 트레이너가 합세해 달콤한 향기며 이것저것 보조 기술을 이용해 갈가부기를 마저 진정시키고 그 애들이 좋아할 법한 음식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도록 유도했다. 그제서야 드라고는 깨달았다. 이 사람들, 너클시티 자경단이구나! 우리 마을 자경단을 못 알아볼 줄이야! 우와, 어디 가서 너클시티 토박이라곤 말 못하겠다! 조금 엉뚱한 포인트에서 얼굴이 홧홧해진다.
"응, 그래그래. 우리 예쁜이들. 수고했어."
제일 먼저 나타났던 자경단 사람은 자기 앞에 옹기종기 모인 춤추새들에게 간식을 주고 쓰다듬고 볼에 되돌렸고, 오웬과 트레버를 각각 끌어안고 쓰다듬고 한참 귀여워하다가 몬스터볼에 되돌렸다. 그 짧은 사이에 공포를 가라앉힌 드라고는 너클시티 자경단 초소 앞에 '역린호수 방문 시 출입 기록을 남길 것'이라는 문구를 돌연 떠올리고는 희게 질렸다.
루벨은 의도적으로 여기 있던 분홍 머리 트레이너에게 늦게 말을 걸려고 했다. 역린호수에 캠핑을 올 수 있는 트레이너들은 보통 눈썰미도 상황판단력도 좋아 이 정도의 시간을 주면 알아서 진정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한, 겁먹은 소곤룡 같은 표정을 보고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얘는 어쩌다 겁을 집어먹었담. 루벨은 천천히 몸을 낮추고 구급 백팩 옆구리 쪽에 꽂아둔 보온병을 꺼냈다. 겁을 집어먹은 야생 포켓몬이나 사람이나 그 경계심을 푸는 방법은 똑같다.
"괜찮니? 일단 이것부터 마실래?"
알로라 지방에서 가져온 마시멜로를 넣은 코코아야. 그러면서 접근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온병을 굴려 밀어서 직접 집을 수 있게 한다. 여전히 너는 이 상황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았고 신체의 자유도 있다는 알림으로. 트레이너는 파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보온병을 받아 아직도 신경이 곤두서있는 포켓몬들에게 몇 모금 마시게 하고서야 본인도 코코아를 컵에 따라 입을 댔다. 잠깐 눈이 빛났다. 그러다가 이제 설설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연다.
"그, 명부 작성. 문제가 될까요…?"
"하하, 그게 뭐 큰 문제라고. 권고사항이야. 포켓몬 협회 지침."
잘려 나간 말은 읽기가 쉬웠다. 루벨은 호쾌하게 웃으며 손으로 OK 사인을 냈다.
"기록으로 남거나, 그러진 않나요?"
"전혀. 그렇게 치면 금랑 관장님 이름이 제일 많이 적힐걸?"
출입 미기록이 범법도 아니고 따로 기록도 안 남는다는 말에 그제서야 습격당했던 트레이너가 온몸에 힘을 빼며 안도했다. 루벨은 슬슬 제가 짐작한 바를 던져도 될 거라 생각해 슬쩍 떠보기로 했다.
"드라고 양 맞지? 우리 너클 시티의?"
"…네."
이름을 대니 또다시 경계심이 슬그머니 차오르는 게 보인다. 그야 유명한 교수님과 검사님 딸이긴 하지만? 루벨은 금방이라도 다시 튀어 나갈 것 같은 트레이너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은 관심도 없었고, 친구 녀석이 떠들던 애와 인상착의가 똑같아서 그랬다.
"네가 에인츠 녀석이 그렇게 입 마르게 떠들던 도서관 매니아구나? 우리 조카하고 나이가 비슷해서 기억하고 있어. 아, 이것도 인연이지 않을까? 너 내 조카 할래?"
"네?"
눈이 휘둥그레진 모양새가 나이보다 조금 어려 보여서 루벨은 깔깔 웃었다.
거의 반강제나 다름이 없는 스마트로토무 번호교환에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경단 본부에 와 있지를 않나, 거기 사람들한테 자꾸 저더러 "내 조카야, 그러니까 의조카이긴 한데, 뭐 결국 같잖아?"하면서 소개하지 않나. 그야말로 뭔가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 얼떨떨한 와중에 드라고가 간신히 물은 건 하나였다.
"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
"응? 누구를? 혹시, 나?"
"그럼 누가 더 있겠어요!"
"언니, 오빠, 삼촌, 고모, 이모 아니면 이름. 뭐든 편한 걸로?"
"네에?"
지금 장난하나 싶어서 주변 자경단원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다들 그냥 웃고만 있지 누구 하나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하도 난처해 보였는지 근처 책상에 걸터앉아있던 자경단원 한 명이 거기서 휙 내려 루벨의 옆구리를 팍 찌르면서 설명했다.
"루벨 팀장님이 원래 이래. 자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맞혀보라지 뭐야?"
"나 루벨 씨가 메타몽 같은 거래도 믿을 수 있어."
"와, 너무하네. 올리버. 날 그렇게 봤단 말이지? 여하튼, 내 조카 히아신스는 날 그냥 이름으로 막 부르거든. 그러니 드라고 너도 편한 대로 불러줘. 호칭이 날 바꾸진 못하니까."
호칭이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며 윙크해온 청보라빛 눈동자는 있지도 않은 친척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청색과 청보라색은 색상환에서도 꽤 나란히 있지 않던가. 분홍색이나 체리색도 붉은색에서 파생된 색들이고. 드라고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계속하며 우물우물 말을 꺼냈다.
"그, 그러면. 고모, 로 할게요."
"그으래, 우리 조카!"
그렇게 드라고에게 고모가 생겼다.
드라고의 챌린지는 그다음 해가 마지막이었다. 어색하던 고모라는 존재도 그럭저럭 익숙해져 채팅이나 문자나 부재중 전화가 띄워져 있답시고 놀라는 일도 사라졌고, 무엇보다도 드라고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 트레이너인 자신도 좋았지만 역시 고고학과 역사를 읽고 공부하고 알리는 것이 훨씬 재밌다. 그러니까 루벨 식으로 말하자면 ‘트레이너 드라고스테 투르바’나 ‘큐레이터 드라고스테 투르바’나 어느 쪽이고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은 거다. 둘 다 포기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톡 던져준 말이, 지금까지 챌린지를 거듭하며 관장님들이 이야기해준 응원과 어우러져 그의 등을 밀어줬다.
드라고는 여전히 부모님이 어렵고 집안 분위기는 교과서를 방불케 하는 딱딱함이 목의 타이처럼 붙어있지만 숨통을 조금이라도 트일 곳이 생겼다. 아직 그 다른 장소에서도 때때로 습관처럼 숨죽일 때가 있긴 해도. 루벨과는 만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먼저 연락을 넣는 건 주저된다. 그렇지만 바쁘면 어떡해? 구조 활동이 내 전화보다 당연히 급한 거 아니야? 팀장이면 서류도 처리할 거 많잖아? 그 온갖 물음표에도 고모는 그냥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못 받을 상황이면 로토무가 알아서 받아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오늘은 정말로, 정말 너무나도 집에 가기가 싫은 날이다. 닷새 연속으로 부모님과 부모님 아는 사람들과 점심이며 저녁을 같이 먹어야 했던 거다. 저처럼 부모 모임에 끌려 나온 애들끼리는 이 자리 정말 질리지 않느냐는 눈빛을 교환하기도 했고, 이런 자리가 맞는 애들은 그런 애들끼리 모여서 떠들었다. 얼핏 들어보면 하늘 위의 별을 쫓는 애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게다가 여기에는 챌린지에 도전했던 애들도 많아서 드라고는 파이널 토너먼트 정기 엔트리였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질문 세례를 받았다. 여기서 대답해주지 않았다간 부모 면을 깎는 거겠지 싶어서 전부 받아줬더니 이제는 정말로 지쳤다. 어디에다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이다.
그래서 오늘은 새벽에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서서 도서관에 한참 박혀있다가 폐관 시간을 삼십 분 넘기고서(오로지 에인츠 씨의 호의다) 사서와 같이 나왔다. 이제는 갈 데가 없는데. 아니지, 신발 코끝을 바닥에 문대던 드라고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제 스마트로토무를 불렀다.
"헤이, 로토무."
[ 어디로 연락할까로토? ]
와일드에리어는 오늘 전부 쾌청. 훈기를 머금은 저녁바람도 이제 슬금슬금 온도가 내려갈 때다. 이것저것 재고만 있던 드라고가 마침내 눈을 꽉 감고 어느 어드레스를 불렀다. 알겠다로토! 경쾌한 대답과 함께 콜이 울린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울리고서 안 받으면 그냥 갈 거야. 그렇게 맘을 먹은 순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고모."
[ 우리 조카! 와, 무슨 일이야? ]
"우리, 캠핑 가요."
[ 그럼, 좋지. ]
뭉근하게 끓여오던 고민에 비해 루벨의 대답은 휘발성 있는 알코올처럼 가볍게 흘러나왔다. 용건은 끝나도 루벨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수화기 멀리 소리가 들린다. 나 오늘 밤하고 내일 낮 시프트 빼줘. 어차피 내일은 쉬시잖아요. 뭐야, 무슨 일 있어요? 조카하고 캠핑, 부럽지? 하하하, 패트롤 돌면 맨날 하는 게 캠핑이구만. 이건 조카하고 데이트지, 일하고 같아? 암요. 가족하고 가는 건 각별하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대로 퇴근. 수고하셨습니다. 먼 데서 들리는 대화에 드라고가 피식 웃었다. 자경단 사람들한테 얼마나 우리 조카, 우리 조카 해댔으면 새로 들어온 신입 단원은 제가 정말로 루벨의 친조카인 줄 알았더랬다. 옛날의 저였다면 그 말에 괜히 아파했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피가 이어진 친조카 아니면 뭐 어때. 고모한테 나는 조카 맞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등 불에 긴 그림자가 졌다. 바람 소리는 조금 뒤늦게 온다. 이제는 익숙한 트레버가 저를 보고 반갑다는 듯 삑 울었다. 루벨은 그 등 위에서 드라고에게 손을 건넸다. 드라고는 고모의 손을 잡고 트레버의 잔등에 탄다. 이곳 가라르에서는 포켓몬에게 직접 공중날기를 시키는 예는 적지만, 루벨을 비롯한 자경단원들에겐 익숙한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드라고 역시 익숙해질 수밖엔 없었다.
"그럼 갈까? 집에다가는 고모가 연락 다 해놨어. 내일까지 자경단에서 진행하는 캠핑 프로그램에 협조해주기로 했다고."
"엄마아빠가 그걸 믿어줬어요?"
"안 믿었으면 벌써 뭐라고 했겠지?"
"고모 진짜 대책 없다."
"임기응변은 레인저의 중요 덕목이란다, 조카야."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은, 새까맣게 보이는 와일드 에리어와 지평선 위로 덮인 새까만 밤과 그 장막에 총총 박혀있는 달과 별. 하나만 택하라는 법 없이 전부가 어우러진 풍경이 드라고의 눈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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