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한 갈래 길
옥상으로 향하는 길.
“거기 서요! … 어라? 당신은, 3년 전에 우리를 방해했던…!”
로켓단의 간부, 랜스와 마주쳤다. 얘들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거야.
… 아니지. 나라도 누가 오 박사님의 프로젝트며 연구실을 박살 낸다면 3년은 무슨, 죽기 직전까지 두고두고 원망할 것 같긴 하다.
제노가 딴생각을 빠르게 배틀이 시작되고, 랜스의 포켓몬 두 마리는 실버에게 모두 당했다. 랜스는 분해 보였지만 실버가 노려보니 아무런 불만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파티원에 도련님이 있으니 이런 버프가 있구만.
5층의 엘리베이터 앞에선 아테나와 마주쳤다.
“어머, 너… 황토마을의 아지트에서도 만났었지? 그때 못한 복수, 이번에야말로 해주마!”
아테나가 손가락으로 제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명이라니, 이것 참 영광인데. 어차피 이 앞에 마지막 결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괜히 실버가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제노는 실버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아테나의 포켓몬들은 독 그리고 악 타입. 가디안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악 타입에게 에스퍼 기술은 소용이 없지만 페어리 타입에 대한 학회의 공표가 나온 지금, 가디안은 곧 에스퍼/페어리 타입으로 분류되게 된다.
그 말인즉슨 페어리 타입 기술로 악 타입 포켓몬에게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 가디안에게서 뿜어져 나온 환한 빛이 아테나의 마지막 포켓몬을 날려버렸다.
“… 유감이야. 도련님이 너 같은 사람과 같이 다니다니.”
누가 들으면 내가 애를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줄 알겠다. 이제는 도련님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낸 실버가 아테나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서 전망대로 올라간다는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어라, 결국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도련님, 꽤 우수한 트레이너가 되셨군요.”
드디어 마지막 간부, 아폴로. 그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실버를 돌아보며 전국을 향해 로켓단의 부활 선언을 할 것이라 말했다.
“그렇게 하면 어딘가에서 수행 중인 비주기 님도 분명히 돌아오실 테죠! 그 옛날의 영광을 되돌리는 겁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로켓단은 은빛산에 라디오 전파가 닿지 않길 바라야 할 거다. 그랬다간 그 옛날 한 소년에게 박살 났던 일이 다시 반복될 거니까.
제노 또한 이제 와서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실버 역시 아폴로를 막으려는 듯 전투태세를 취하고, 아폴로가 외쳤다.
“아무리 상대가 당신이라도 방해하도록 두지 않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배틀. 앞선 두 마리가 각각 골뱃과 포푸니에게 당하고, 아폴로가 마지막 포켓몬을 꺼냈다. 악/불꽃 타입의 헬가. 실버는 엘리게이를 꺼냈다.
헬가는 네 발로 섰음에도 엘리게이보다 커다란 덩치를 가졌다. 마주 보고 선 엘리게이가 위협하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강철톤을 앞에 두고도 겁먹지 않았던 녀석인데, 상태가 이상했다.
“… 알았다, 째려보기야!”
“이제 눈치채봤자 늦었습니다! 헬가, 스모그!”
날카로운 눈초리로 겁을 주어 상대의 방어력을 낮추는 기술. 불꽃 타입의 특수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물리공격으로 타격할 속셈인듯했다. 짙은 보라색의 연기가 주위를 감쌌다.
“엘리게이, 상대의 기척을 느끼는 거야!”
연기 속에 숨어있던 상대를 낚아채는 것은 이미 한 번 겪어본 상황. 실버의 명령에 침착하게 헬가의 위치를 찾아낸 엘리게이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허나 강력한 턱 힘은 허공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엘리게이가 당황한 사이 헬가가 엘리게이의 옆구리로 달려들었다. 단단한 뿔에 부딪힌 엘리게이가 연기를 가르고 실버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엘리게이!”
“상성이 우위라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되죠!”
악 타입 물리공격인 속여때리기. 아폴로의 실력도 다른 녀석들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큰 데미지를 넣을 줄은 몰랐다. 과연 라디오타워 이벤트의 최종보스.
푸르르르, 고개를 털고 다시 일어나 자세를 잡는 엘리게이에게 실버가 말했다.
“녀석에게 물대포!”
헬가가 자신을 향해 뿜어지는 물줄기를 재빠르게 피했다. 계속해서 빗맞고 있음에도 실버는 몇 번이고 물대포를 명령했다. 물기 때문에 연기가 사라지자, 아폴로가 외쳤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화염방사!”
엘리게이의 물대포와 헬가의 화염방사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희뿌연 수증기가 퍼지고, 그 사이로 세찬 불꽃이 물살을 이겨내고 뿜어져 나왔다.
심향의 마그케인이 보여주었던 불꽃세례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 놀란 엘리게이가 불꽃을 피하자, 또다시 헬가가 달려들었다. 한 번 더 뿔에 부딪힌 엘리게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엘리게이가 속여 때리기의 타이밍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에 실버가 엘리게이를 볼로 되돌리려는 찰나, 엘리게이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실버를 한번 올려다본 녀석이 매섭게 울며 헬가를 노려보았다.
“… 엘리게이, 다시 한번 물대포!”
망설이던 실버가 외쳤다. 엘리게이가 지시에 따라 물줄기를 뿜어냈다. 그것에 대응해 헬가가 화염방사를 사용했다. 잠시간의 접전. 이내 엘리게이의 물대포가 밀리기 시작하더니, 정면으로 불꽃과 마주한 엘리게이가 세 번째로 나자빠졌다.
온몸에 그을리고 부딪힌 흔적이 남은 엘리게이가 일어서려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실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결정 난 승부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대체 어째서-
- 전 괜찮아요. 맡겨주세요.
- 강해져서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 꿈을 이루고 싶다, … 자신이 있을 곳을 찾고 싶다.
- 너는 왜 강해지고 싶어?
문득 실버의 머릿속에 심향과 제노의 말이 스쳤다. 자신의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어째선지 제 포켓몬들이 강해지고 싶은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강해져서… 곁에 있고 싶으니까.
그때, 엘리게이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눈 부신 빛이 가라앉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원래의 두 배에 가까운 덩치를 가진 장크로다일이었다.
크르릉, 낮게 목을 울린 장크로다일이 실버와 적의 사이를 가리고 섰다. 그 커다랗고 단단한 등을 바라보던 실버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엘, 아니, 장크로다일, 물대포야!”
“진화했다고 해서 판세가 뒤집힐 거란 생각은 마시죠! 헬가, 화염방삽니다!”
물 타입 기술과 불 타입 기술의 격돌. 두 포켓몬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쥐어짜 내던 그때, 장크로다일의 물줄기가 화염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특성이 급류라지만, 저건…
“… 하이드로펌프잖아.”
제노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거의 폭포와 같이 세찬 기세로 쏟아진 거대한 물줄기가 헬가를 밀어냈다. 전망대의 유리 벽에 강하게 부딪힌 헬가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며 바닥에 쓰러졌다. 엘리게이가 당당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푸릉,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 이럴 수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폴로가 헬가를 몬스터볼로 돌려놓았다.
“역시 나로서는 무리였나요. … 크윽, 비주기 님,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
아폴로가 혼잣말처럼 속삭인 말에 실버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 목소리에 아폴로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알겠습니다. 비주기 님이 그러셨듯이, 우리 로켓단은 여기서 해산하지요.”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