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두 갈래 길
“이연은?”
“그게, 아직….”
“… 쯧, 출발한다!”
리더, 아강의 외침에 따라 아쿠아단 단원들이 크게 대답했다. 몇몇은 그를 따라 잠수정의 안으로, 또 다른 몇몇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입구를 경계하며 자리에 대기했다.
그때 굉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아니, 박살 났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끈질기게 아쿠아단을 방해했던 꼬맹이 둘… 이 아니라, 뭐야, 하나가 더 늘었잖아.
“각오해라!”
한 녀석의 외침과 동시에 그라에나 다섯이 달려들었다. 트레이너들의 지시가 그 뒤를 이었다.
“대짱이, 파도타기!”
“나무킹, 리프블레이드!”
순식간에 발밑에서 일어난 물줄기가 커다란 파도가 되어 포켓몬들을 집어삼켰다. 높게 뛰어올라 그것을 피한 그라에나 몇몇에겐 곧 나무킹이 달려들었다. 팔에 자란 잎사귀를 휘두르자 그 예리한 날을 따라 푸른 궤적이 남고, 그라에나들이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찰박, 찰박. 바닥에 남은 물기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라에나들이 힘겹게 그 몸을 일으키는 순간, 조무래기들의 앞으로 누군가 나섰다. 커다란 근육을 자랑이라도 하듯 하의만 갖춰 입은 남성. 아쿠아단의 간부, 해조였다.
그가 두 어린 트레이너들을 바라보았다.
“오호! 역시 왔군. 여기까지 도달한 녀석은 네놈들이 처음이다!”
마치 대견하다는 듯이 말한 그가 과장되게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잠수정의 주변을 채웠다.
“하지만 아쉽게 됐군. 배의 개조는 완벽하게 끝났다! 봐라, 저 드릴! 저것만 있으면 해저 동굴의 봉인이라는 녀석도 한 방에 KO다!!”
발진을 시작하려는 듯 모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잠수정이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자 두 주인공이 당장이라도 그것을 막아서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해조가 말했다.
“아강 형님은 배 안에 있다… 빨리 나를 때려눕히면 쫓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말이다, 나와 네놈의 승부를 끝내지 않으면 안 되지!
문장을 끝냄과 동시에 해조가 던진 몬스터볼에서 샤크니아가 튀어나왔다. 주변의 그라에나들도 다시 이를 드러내며 다리에 힘을 줬다.
휘웅과 봄이의 앞을 막아선 나무킹과 대짱이또한 날카롭게 기세를 버렸다. 잠시 긴장감과 함께 침묵이 흐른다. 그라에나들이 발톱을 세운 순간, 해조가 외쳤다.
“…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아앗!!!”
가라, 샤크니아, 힘이 다할 때까지 해보자아아! 그것을 신호로 포켓몬들이 상대를 통째로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대짱이와 나무킹이 양팔로 그라에나를 두 마리씩 막아내고, 나머지 그라에나 한 마리와 샤크니아는 님피아와 가디안의 문포스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머드숏!”
“우린 시저크로스야!”
휘웅과 봄이의 연계는 죽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대짱이가 머드숏으로 시야를 가지면, 나무킹이 적들의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빠르게 그라에나를 베어냈다. 딱히 나서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에, 님피아와 가디안은 흥분한 어린 트레이너들이 놓친 사각에서 덤벼드는 놈들만을 제압했다. 님피아의 표정이 지루함을 띠고 있었다.
조무래기의 그라에나들은 완전히 지쳐 쓰러지고, 해조가 가진 세 마리 포켓몬 또한 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잠수함이 머리 꼭대기를 물속으로 가라앉힌 후였다. 두 트레이너의 표정이 참담해졌다. 해조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강 형님의 꿈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며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악당다운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아지트 밖으로 나오는 길. 리더가 떠나가서 그런지 더 이상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녀석은 없었다. 어쩌면 인공적으로 쪽빛구슬을 만드는 기계를 박살 낸 가디안의 힘을 보고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어쩌죠?”
암울한 얼굴로 앞으로의 행동을 묻는 휘웅에 제노는 담백하게 답했다. 따라가야지, 이대로 포기할 거야? 그에 정신을 차린 봄이가 손뼉을 한 번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해양 관장님이 그러셨잖아, 초고대 포켓몬이 잠들어있는 둥지가 128번수로에서 발견되었다고!”
“그거야! 아쿠아단의 목적지는 그곳에 있는 해저 동굴이 틀림없어!”
휘웅 또한 금세 기운을 되찾으며 답했다.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면 따라잡는 것만이 남았다. 이미 마그마단을 해치웠지만, 아쿠아단까지 확실하게 막아낸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제노가 아이들을 따라 기지 밖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뭔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무슨 일이지?”
봄이가 던진 의문에 제노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켓몬 배틀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큰소리는 출구에 다다를수록 빨라졌다.
이윽고 밝은 빛이 시야를 가리고,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채 바깥의 풍경을 마주했을 때 제노는 소음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윤진과 성호가 도망치는 아쿠아단의 잔당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실버도 함께였다.
아, 맞다, 실버. 그는 제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굴에는 깊은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에 제노가 꼴깍, 침을 삼켰다.
순간 실버가 손을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조심스러운 손길이 뺨에 닿아왔다. 제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한 그가 이번에는 어깨를 잡고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한숨과 함께 나직이 말했다.
“뭐,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으니 됐어.”
“실버….”
실버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사실에 감동받은 제노의 마음이 말랑해지려는 찰나, 그가 코를 꼬집어왔다.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시간차 공격에 제노의 표정이 곧장 억울하게 변했다.
됐다고 했잖아! 됐다고 했잖아!!
*
드넓은 바다 어딘가의 해저 동굴.
아강이 단원 몇몇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한다. 무언가에 홀린 듯 빠른 발걸음이 향한 곳은 동굴의 안쪽, 빛을 발하는 어딘가다.
“하하! 드디어 찾아냈다고!”
멈춰 선 그가 흥분을 참지 못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를 향해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여럿 들려온다. 소리의 주인들을 이미 알고 있는 아강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챔피언, 그리고 관장 하나에 꼬맹이들. 투지로 가득한 눈동자 하나하나를 전부 마주한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정말 대단하군.”
짝, 짝, 짝. 느릿한 박수 소리가 공간을 울렸으나, 누구도 그에 호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활약을 칭찬해 주는 의미도 담아서 이 세계에서 살고있는 놈들 중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내 파트너를 소개해 주마….”
초고대 포켓몬 가이오가다!
아강의 외침과 동시에 모두의 눈에 해저 동굴의 더 깊은 곳, 그 안에 잠들어있는 거대한 포켓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봐라! 유리 색의 바닷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다운 모습, 석상처럼 굳어있는데도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과 전혀 맞지 않는 그 표현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럼에도 아강은 무언가에 심취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날이 오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도를 넘은 욕망에 의해 자연과 포켓몬을 업신여겨 온 인간 놈들, 거기서부터 만들어져 간 잘못된 세계!”
그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릴 원시가이오가의 힘을 손에 넣는 이날을!
그때, 장엄한 연설 속 그의 이름을 외친 누군가가 뒤늦게 합류했다. 그자의 얼굴을 확인한 아강의 두 눈이 커진다.
“… 이연?”
날씨 연구소에서의 독단적인 행동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아쿠아단의 서브 리더, 이연이었다. 모두의 주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온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제 그만둬!”
“뭐라고?”
“당신이 바라는 세상과 가이오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거란 걸 왜 몰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이연의 입에서, 전혀 원치 않던 말이 나오자 아강이 되물었다. 잠시 숨을 고른 이연이 침착하게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것을 설명했다.
“날씨 연구소에서, 조사했었어. 원시 가이오가가 눈을 떴을 때 정말로 당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가 실현되는 건지, 원시 가이오가의 힘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연구원들에게서 원시 가이오가가 만들어낼 이상기상에 대해 같은 설명을 들은 성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나 아강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미로운데 그래.”
“이 앞에 기다리는 건 피할 수 없는 재앙이야! 이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건 원시 가이오가가 만들어내는 바닷속에 가라앉을 뿐이라고!”
그 말에 아쿠아단의 단원들마저 술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눈을 감았던 아강이 다시 이연을 등진다.
“이연, 너만은 알아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쪽빛구슬을 꺼내들었다. 그에 누군가의 표정은 기대와 긴장으로, 누군가의 표정은 다급함과 절망감으로 물들어갔다.
제노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가디안에게 쪽빛구슬을 뺏도록 지시할까? 약간의 피해는 있겠지만 무력으로 그를 제압하고자 한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어린 트레이너들-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이 세계는 정해진 수순대로 흘러간다. 자신의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정말 여기서, 아쿠아단마저 막아버려도 괜찮을까?
아주 잠깐의 망설임. 그 틈을 타 아강이 쪽빛구슬을 높게 들어 올린 팔을 휘둘렀다.
“자- 가이오가, 쪽빛구슬에 숨겨져 있는 모든 힘을 흡수해라!”
“아강 안돼!”
이연의 비명과 동시에 모두가 경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제노만이 태연하게 구슬이 날아간 포물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저 자식은 아쿠아단을 만들 게 아니라 야구선수를 했으면 세상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쪽빛구슬이 가이오가와 반응하더니, 커다란 빛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 가운데에서 가이오가가 돌처럼 굳어있던 몸을 깨우기 시작했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초고대 포켓몬이 굉음을 내지르고, 그에 따라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광경.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가이오가가 깨어나며 방출된 에너지에 공간 전체가 진동하고, 부서진 종유석 조각들이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동굴이-
“동굴이 무너지고 있어!”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다들 어서 움직여!! 윤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휘웅과 봄이가 그를 따라 재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자, 두 사람도 빨리! 성호가 실버와 제노를 재촉하고, 아쿠아단이니 뭐니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제 살길을 찾는 데 급급해졌다.
진동이 점점 거세지고 동굴의 안에 물살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커다란 충격이 일면서, 가장 뒤에서 따라오던 성호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성호 씨!”
“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세요!”
하지만 말과 달리 그는 제대로 서지 못했다. 아무래도 발목을 접질린 것 같았다.
위에선 계속해서 자잘한 돌덩이들이 떨어졌다. 순간 성호의 이야기가 주인공과의 챔피언전을 마치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끝나버리는 상상을 했다. 제노가 서둘러 다가가 부축을 시도하였으나, 키 차이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에 성호의 만류와 제노의 시도가 오가던 찰나, 답답함에 제노가 소리를 내질렀다.
“이렇게 하면 되죠?!”
그와 동시에 제노가 성호의 무릎 뒤로 팔을 넣어 그를 안아 들었다. 자신의 생각을 한참 벗어난 자세에 성호가 멍하니 제노를 바라보았다. 가늘다고만 생각했는데, 제 등을 받친 팔이 제법 든든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에 물방울이 튀어 반짝반짝 빛났다.
“꽉 잡으세요.”
엇, 어어, 어…? 성호가 얼빠진 소리를 내는 것을 무시한 제노가 그대로 동굴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