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한 갈래 길
텅, 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자판기의 바닥에 음료 캔 두 개가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꺼낸 제노가 바로 근처의 벤치로 다가갔다. 가로등이 벤치를 비추고 있었고, 그 불빛 아래에는 실버가 있었다. 그에게선 소독약 냄새가 묻어났다. 하나를 실버에게 건넨 제노는 그와 거리를 조금 두고 벤치에 앉았다. 침묵 속에 캔을 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삼킨 제노가 흘끔, 곁눈질로 실버를 살폈다. 그는 음료 캔을 손에 꽉 쥐고 제노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뭐지, 오렌지 주스 안 좋아하나. 설마 알레르기가 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고민하던 제노는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왜 날 구한 거지?”
이 싸가지. 말허리를 잘린 제노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었다. 오냐, 이 자식아,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곱게 대답해 주진 않으마. 제노는 실버가 원하는 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널 구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간호순에게 물어봤어. 검은 모자에 검은 외투. 후드를 뒤집어쓰고, 피카츄를 한 마리 데리고 다닌다더군.”
간호순 님… 이렇게 남의 정보를 쉽게 흘려도 되는 겁니까…. 잠시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제노는 질문을 이었다.
“나를 찾은 이유는?”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야. 내 질문에 대답해. 왜 나를 구했지?”
아, 그런 규칙이 있었어? 언제부터?
갑자기 생긴 암묵적인 룰을 강요하는 실버에 제노는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냥. 대부분의 사람은 딱히 이유가 없어도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도우려고 할걸?”
“하, 다들 서서 구경만 하던 거 안 봤어? 그런 상황에 나선 건 너뿐이야.”
“나랑 내 피카츄만 할 수 있는 일이었나 보지.”
피카? 갑자기 이름이 불린 피카츄가 귀를 쫑긋 세우며 제노를 올려다보았다. 제노는 피카츄의 동그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피카피-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뱉는 피카츄를 실버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귀 한쪽이 뾰족한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네 피카츄가 혼자서 셋을 쓰러트렸던데.”
“….”
“너… 강하냐?”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상한 부분에서 치고 들어오는 상대에, 이번엔 실버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제노는 농담이란 말과 함께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질문에 답했다.
“강할걸?”
“무슨 대답이 그래?”
해줘도 난리….
“네 강함의 기준을 모르겠어서.”
“너, 트레이너지? 배지는 몇 개냐?”
“음… 한 개.”
“하안 개애?!”
아 깜짝이야. 실버는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늦은 탓에 주변에 사람이 많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실버를 버리고 도망쳤을 테니까.
제노의 품에 안겨있던 피카츄가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 손을 휘젓자, 그제야 실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도 안 돼, 이제 겨우 배지 한 개인 트레이너가 셋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고? 그것도 고작 피카츄 한 마리로?”
그거야 난 신참 트레이너가 아니니까. 제노는 잠시 관동지방과 신오지방에서 모은 배지의 수를 가늠했다. 뭐, 성도지방의 배지는 한 개이니 거짓말은 아니지.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버는 더 자세히 따지고 들었다.
“무슨 배진데? 윙배지? 아니면 인섹트배지?”
“라이징-”
“거짓말하지 마!”
아, 얘 또 내 말 잘라먹네. 어처구니없는 제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버는 자신의 말을 하기에 급급했다.
“초짜 트레이너가 제일 먼저 이긴 관장이 검은먹체육관 관장이라고? 너, 혹시 라이징배지가 뭔지 모르는 거 아냐?”
“알아.”
“아- 그래, 거짓말인 게 틀림없지. 허세도 정도껏 부려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치는 실버에, 제노는 주머니를 뒤져 라이징배지를 꺼내 보였다. 그제야 실버가 조용해졌다.
딩동딩동, 귀뚤뚜기가 더듬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치 있는 여름밤.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에게로 불어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실버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건 제노 쪽이었다.
“혹시 그놈들이 다시 찾아올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경찰에게-”
“경찰은 안돼!”
제 입으로 말하곤 실버는 당황한 듯 입을 합, 다물었다. 아 맞다, 쟤, 연구소에서 포켓몬을 훔쳤었지.
그런 일을 겪고도 경찰을 꺼리는 것은 충분히 수상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실버 자신도 그것을 인지했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눈알만큼이나 바쁘게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제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사정인지 묻지 않을게.”
“….”
“그래서… 아까도 물은 거지만, 나를 찾은 이유는?”
“팬텀배지를 딸 거지?”
아니, 도라지시티로 가는 길이라 딱히 관심은 없는데….
허나 그 침묵을 무엇이라 해석한 것인지, 실버는 혼자 멋대로 얘기를 진행했다.
“네가 인주체육관 관장을 이긴다면, 나와 배틀하자.”
내가 왜…. 거기다 왜 굳이 체육관 배틀이 끝나고 나서지? 내 포켓몬들의 기운을 빼놓은 다음 날로 먹으려고…?
“나와의 배틀에서 승리하면, 네가 강하다는 걸 인정해 주지.”
결국 배지 한 개로는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말이군. 제노는 실버의 눈을 바라보았다. 투지로 타오르는 눈. 어째서 이 세계의 주인공들은 모두 저런 눈을 하고 있는 걸까. 과거에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이를 잠시 떠올린 제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놈들은 배틀을 하지 않고서 그냥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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