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한 갈래 길
아침. 각종 새 포켓몬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노가 기지개를 켜자 품에 안겨있던 이브이가 함께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했다. 이브이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키자, 밤 동안 베개 역할 겸 불침번을 서주었던 이상해꽃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수고했어, 이상해꽃.”
이상해꽃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준 제노가 포켓몬볼로 그를 돌려보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 더웠던 낮과 달리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외투를 입고 잔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이브이와 함께 기상 스트레칭을 하자 지이익, 하고 텐트의 지퍼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실버가 조금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나왔다.
“잘 잤어?”
“어. … 너, 아니, 스… 승은?”
“… 그럭저럭 괜찮았어.”
익숙지 않은 호칭. 하지만 제가 자초한 일이다.
끄응, 소리를 내며 깍지 낀 손을 위쪽으로 한껏 밀어 올렸던 제노가 크게 심호흡하며 스트레칭을 마무리했다. 텐트 정리를 시작하자 실버가 쭈뼛쭈뼛 어설프게 돕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제노는 잠들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
“알려줘. 어떻게 하면 너처럼 강해질 수 있지?”
별이 밤하늘을 수놓고 벌레 포켓몬들도 잠드는 시간.
실버가 큰 용기를 내어 말한 것에 비해 제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부우, 부우, 야행성 포켓몬이 우는 소리만 들려왔다. 창피함을 분노로 승화시킨 실버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젠장, 들었으면 대답을 하라고! 아니면 알려주기 싫다는 거냐?”
“… 아, 아니. 조금 당황스러워서.”
식식거리는 실버를 진정시킨 제노가 잠시 고민했다.
실버를 떼어놓긴 힘들다. 하지만 더 깊게 엮이고 싶지 않다. 계획에 괜한 변수를 들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제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 모습에 이미 한쪽으로 기운 마음을 모른 척하며 제노가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알려줄게.”
“뭐…! 정말이야?”
“하지만 맨입으론 안되지.”
내 제자로 들어오면 생각해 볼게. 제노가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황당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실버가 제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고 포기하겠지. 허나 제노의 예상과 달리 한껏 인상을 찡그린 채 실버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내적 갈등을 겪는 듯한 그 모습을 제노가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 … 스… 스승, 으로 삼으면 정말 알려주는 거지?”
“….”
“착각하지 마! 네 도움을 받을 생각 따윈 없으니까. 난 혼자서 강해질 거야. 네 옆에서 강해지는 비결을 알아낸 뒤, 너를 쓰러트리고 떠나겠어!”
뭔 소리야…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말을 쏟아낸 것치곤 그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잠시 그 눈과 마주한 제노가 고개를 떨구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첫째, 내 배틀을 보며 무얼 배우건 마음대로 해. 나와 배틀을 하고 싶다면, 그것도 원하는 만큼 해줄게. 다만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 말 것.”
“… 알겠어.”
“둘째, 나에게 예의를 갖춰. 너, 아직 성인 안됐지?”
“고, 곧 있으면 되거든?”
“아무튼. 나를 스승으로 삼겠다면 그만한 대우를 할 것.”
“….”
“마지막으로 셋째.”
“또 있어?”
“너… 이름이 뭐냐?”
“….”
차가운 밤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그렇다, 두 사람은 아직 정식으로 통성명을 한 적이 없었다.
*
텐트 자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두툼한 가방을 등에 맨 제노가 신발코를 톡톡, 두드렸다. 밖에서 자느라 조금 뻐근한 걸 빼면 몸 상태도 괜찮았다.
실버를 실버라 부를 수 있게 된 뒤, 제노는 실버를 텐트 안으로 불렀다. 일인용이라 작지만 어떻게든 끼여 잔다고 하면 두 사람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버가 차라리 밖에서 자겠다며 고집에 고집을 피우는 탓에, 결국 그에게 텐트를 내어주고 제노가 밖을 택했다. 그래도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애를 노숙시킬 순 없잖아….
“슬슬 출발하자.”
부지런히 걸으면 점심때쯤에는 담청시티에 도착할 것 같았다. 계속 고생한 피카츄 대신 이브이를 꺼내어 실버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제노의 옆에 착 붙어 걷는 이브이를 실버가 흘끔거렸다.
“텐트 같은 짐이 없는 것 같은데, 평소에는 어떻게 다녔어?”
“어떻게 다니긴? 숙소를 이용했지.”
“아니, 숲이나 그런 데서 잔 적은 없어?”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 얘를 밖에서 자게 할 걸 그랬다.
*
어느 순간부터 풍겨오기 시작하던 바닷냄새는 담청시티에 다가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좁았던 길이 탁 트이고,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선 갈모매 무리가 날아다녔다. 앗, 패리퍼도 있다.
간만에 보는 바다 풍경에 정신이 팔린 제노를 실버가 포켓몬 센터로 이끌었다. 간호순에게 포켓몬을 맡긴 사이 둘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숲길을 걸어온 덕에 딱 좋게 배가 고픈 참이었다. 샤워를 마친 제노가 민소매 차림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자를 보냈는지 포켓 기어가 짧게 울렸다.
[ 어디예요? ] 오전 10:54
유빈이었다. 번호를 교환하고 처음 보내는 문자가 자신의 위치를 묻는 말이라니, 제 포켓기어를 가져가 번호를 야무지게도 등록한 사람다웠다. 화면을 확인한 뒤 다시 내려놓은 제노가 다시 드라이기를 들자, 한 번 더 알람이 울렸다.
[ 무시하면 슬퍼요 (。>﹏<。) ] 오전 10:55
[ 제가 한번 맞춰볼까요? 담청시티? ] 오전 10:55
우와, 누가 고스트 타입 관장 아니랄까 봐. 아주 귀신같네.
‘네.’하고 짧게 답한 제노가 완전히 머리를 말린 뒤, 모자를 눌러썼다. 씻는 동안 빼놓았던 펜던트를 다시 목에 걸고 외투를 걸친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아 이런 날씨에도 무리 없이 입을 수 있었다. 물론 후드를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센터의 입구로 나서자 실버가 먼저 나와 있었다. 예의를 갖추라는 말을 잊지 않았는지, 기다린 것에 대한 별말은 없었다. 표정은 제법 삐딱했지만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근처에 식당이… 잠시만.”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한 발짝을 떼기도 전에 포켓기어를 확인해야 했다. 제노가 유빈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있자 실버가 옆에 바짝 달라붙어 내용을 같이 읽었다. 얘는 이상한 데 관심이 왜 이렇게 많아.
“누구야?”
“유빈 씨.”
“유빈? … 아, 인주시티의 체육관 관장이던가?”
“응.”
“허, 당신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치곤 미련이 길군.”
누가 누구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제노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 제가 맞췄네요. 상품은 다음에 만났을 때 받을게요. ] 오전 11:08
누가 준대?
[ 아직 점심 안 먹었죠? 거기 제가 아는 식당이 있는데, 괜찮으면 한번 들러보세요. ] 오전 11:09
[ 담청식당이라고, 포켓몬 센터 근처에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오전 11:09
이번에도 네, 하고 짧게 답장을 보낸 제노가 고개를 들어 실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 갈 거야?”
“체, 어쩔 수 없지. 제대로 된 실력을 내려면 배틀 전에 힘을 비축해 둬야 하니까.”
그냥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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