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유료

9화

한 갈래 길

식당은 유빈에게 없는 상품도 만들어 내줄 만큼 훌륭했다.

맛도 맛이지만, 뱃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곳이라더니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먹어도 먹어도 회의 축복이 끊이질 않았다. 두툼한 회에 채소를 곁들여 한 뭉텅이, 거기에 상큼하면서도 매콤한 국물의 조화가 가히 예술이었다.

채소는 아삭아삭하지, 회는 쫄깃하니 입안 가득 넣어 씹는 맛이 있지. 물에 젖은 날고기 따윈 처음 본다며 젓가락으로 그릇 안을 뒤적이던 실버도 제노의 종용에 못 이겨 한입 먹어보더니, 지금은 말없이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듣자 하니 태어났던 강으로 돌아가기 전 바다에 머무르는 물고기 포켓몬을 잡아 만든다고 한다. 제노는 선원들의 이런저런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트 모양을 한 구이 요리의 살을 발라냈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제노의 포켓기어에 메시지가 한 개 더 도착해있었다. 식탁에선 포켓기어에 손대지 말자는 주의라 지금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 아참, 제일 중요한 얘기를 잊었네요. 아마 지금 담청체육관에 도전하긴 힘들 거예요. 관장인 규리가 무슨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라고요. ] 오전 11:10

[ 그를 만나고 싶다면 빛남의 등대에 가보세요. ] 오전 11:10

현재 시각을 확인한다. 12시를 조금 넘겼다. 답장을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제노는 자판을 꾹꾹 누르곤 전송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고마워요.’

“이번엔 또 뭐야?”

“지금 체육관에 도전할 수 없대.”

“뭐? 무슨 일인데?”

“관장이 다른 곳에 있다나 봐.”

허? 기가 차단 소리를 낸 녀석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등대까지 고분고분 따라왔다. 날이 선 야생 포켓몬하고 가장 빨리 친해지는 법도 맛있는 걸 주는 거라고, 잘 먹여놓은 보람이 있었다.

*

오래된 등대를 끝까지 오르자, 거기엔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전룡 한 마리와 그 전룡을 옆에서 돌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저 사람이 담청체육관 관장, 규리겠지. 강철 타입 관장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하고 여리여리한 인상. 인기척을 느낀 그가 전룡에게서 이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은….”

“체육관에 도전하고 싶은데, 관장님이 자리를 비우셨단 얘기를 들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 죄송합니다. 지금은 상대해 드릴 수가 없네요.”

속상한 얼굴로 전룡의 손을 붙잡는 여자. 대충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실버가 와락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무어라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캡이 뒤쪽으로 향하게 모자를 쓴, 실버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두 사람이 올라왔던 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너…!”

“… 또 너냐.”

실버를 알아본 소년, 심향이 등대의 꼭대기에 올라서자마자 몬스터볼을 손에 쥐곤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실버의 옆에 선 제노와, 쓰러진 전룡을 붙잡고 있는 규리를 보곤 주춤한다.

“뭘 또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 나는 너처럼 약한 녀석과 상대하지 않아.”

그 약한 녀석에게 져서 분해하고 있던 거 아니었냐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조용한 제노와, 배틀은커녕 주머니에 손만 집어넣고 있는 실버. 묘한 상황에 심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이고 있자 규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도 체육관 도전자인가요?”

“아, 네에.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이 아이는 등대를 밝혀주는 전룡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힘이 빠져서 간신히 숨만 쉬고… 제가 빛나리의 곁을 떠날 수는 없고….”

“흥, 바보 같긴. 약해진 포켓몬 따위 내버려두면 될 텐데.”

전룡의 이름이 빛나리였구나. 실버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제노가 그를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입은 댓 발이 튀어나와선…. 다행히 실버의 혼잣말을 무시한 규리가 고개를 들고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 저, 부탁이에요! 나 대신에 약을 받아다 주지 않을래요?”

“당연하죠! 그렇지, 마그케인?”

마그케인이 강한 동의의 울음소리를 내며 몸의 불꽃을 크게 피워냈다. 곧바로 돌아온 심향의 대답에 표정이 환해진 규리가 이번에는 실버와 제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왜…? 제노가 멀뚱히 있는 사이, 실버가 심향에게 말했다.

“잘됐네. 너, 약을 가져오면서 수행을 해보는 게 어때? 조금은 자기 몫을 하는 트레이너처럼 될지도 모르지.”

잠시 무언갈 생각하던 제노가 거기에 끼어들었다.

“너는?”

“나? 내가 뭐?”

“어차피 너도 진청시티에서 배지를 딸 거 아냐?”

“당연하지.”

“그럼 같이 다녀와. 여기서 가만히 있어봤자 할 일도 없고… 조금은 자기 몫을 하는 트레이너가 될지 모르잖아?”

그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실버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실버가 화를 내기 전, 이번엔 규리가 끼어들었다.

“세 분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려요. 약은 진청시티에 있는 약국에서 받아오실 수 있어요.”

아니, 실버보고 다녀오란 얘기는 심향과 두 사람만 보낼 거란 뜻이었는데.… 하지만 제노의 의도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그까지 심향과 실버를 따라 진청시티로 향하는 중이었다. 실버가 고소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 자식이….

“저, 제 이름은 심향이에요! 포켓몬 마스터가 되기 위해 포켓몬들과 여행하는 중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해변을 걸으며, 심향이 실버와 달리 싹싹한 인사말을 건넸다. 마그케인이 자신도 소개하듯 울음소리를 내었다. 내내 실버의 싸가지만 상대하던 제노의 마음이 한순간에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제노야. 잘부탁해.”

“네! 저, 누나라고 불러도 괜찮죠?”

심향은 제노와 통성명을 하자마자 호칭을 정한 듯싶었다. 허락의 의미로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도 배지를 모으는 중이신 거예요? 쟤… 아니, 실버랑은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된 거예요?”

“어쩌다 보니 잠깐 동행하게 됐을 뿐이야! 신경 꺼!”

아무래도 천상천하유아독존쿨시크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데 라이벌에게 스승이니 뭐니 얘기를 하긴 싫었나 보다. 제노는 딱히 실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누나는 어떤 포켓몬 가지고 있어요?”

그 질문에 볼에서 이브이를 꺼냈다. 이브이는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제노에게 안아달라고 보챘다. 아무리 친밀도를 높이는 중이라지만, 포켓몬 푸드 큰 봉지 하나 정도 무게를 들고 걷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네 발로 걸어… 제노는 속으로 불평했지만 군말 없이 이브이를 안아 들었다. 신이 난 이브이가 품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목에 걸린 방울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

“우와, 이브이다! 귀여워- 아얏.”

심향이 이브이에게 무심코 손을 뻗자 앞발로 바로 쳐내어 버렸다. 그리곤 흥, 콧바람을 내쉬며 고개를 획 돌린다.

“미안, 얘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

사실 그냥 성격이 안 좋은 거다.

“헤헤, 괜찮아요. 이브이가 누나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목에 있는 방울도 누나가 준 거죠?”

“응.”

“너무 잘 어울려요. 이브이 너 정말 귀엽다~”

이브이는 심향의 칭찬에 도도하게 턱을 치켜세울 뿐이었다. 심향의 옆에서 그의 마그케인이 이브이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무시했다. 너 때문에 못살아 정말. 이브이는 오직 제노의 손길에만 반응하겠다는 듯, 제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

어느덧 41번수로였다. 해변에서 심향과 실버는 당연하다는 듯 물 포켓몬을 꺼냈다. 아 맞다, 파도타기.

“누나는 물 포켓몬 없어요?”

있어… 근데 지금 데리고 있는 애들 중엔 없어….

물론 피카츄가 파도타기를 사용할 줄 알지만, 가분수 형태로 피카츄를 타고 갔다간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제노가 머뭇거리자 심향이 먼저 라프라스에 올라탄 뒤, 손을 내밀었다.

“저랑 같이 라프라스를 타고 가요.”

“괜찮아?”

“당연하죠! 그치, 라프라스?”

라프라스가 대답하듯 짧게 울었다. 그럼 사양 않고. 제노가 심향의 손을 잡고 그의 뒤에 자리 잡자 어김없이 실버의 불평이 들려왔다.

“여행을 다닌다면서 파도타기 쓸 줄 아는 포켓몬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돼?”

1m 남짓한 엘리게이의 등에 타는 너에겐 듣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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