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두 갈래 길
수면이 규칙적으로 흔들린다. 다 같은 파도 같아 보여도 사실은 전부 달라서, 제각기 다른 소리를 조용히 집중해서 듣는다.
“설마 자?”
…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 없었어도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대답하지 않자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하여간 집요한 녀석 같으니. 제노가 느리게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실버가 뚱한 표정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충 하나로 묶은 붉은 머리가 흘러내리며 아침햇살을 받아 빛났다.
잿빛도시에서 아쿠아단의 리더를, 날씨 연구소에서 이연을 놓친 뒤로 며칠이 흘렀다. 경찰의 수색이 계속되었지만 어디로 숨은 것인지 영 진전이 없었다.
조무래기 한 명마저 자취를 감춘 지금, 곳곳에서 일어난 습격들이 거짓말인 것처럼 호연의 도시들은 금방 원래대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각 도시의 관장들이나 성호, 윤진 정도의 관계자들만이 미묘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제노는 태홍이 보낸 정보를 떠올렸다. 124번수로 위에 찍힌 아쿠아단 본부의 위치와 함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심어두었던 정보원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즉, 더 이상의 정보 제공은 무리라는 뜻.
몸조심하라는 형식적인 문장과 함께 끝난 메시지는 깔끔하게 삭제했다. 멍하니 머릿속에 집어넣은 정보들을 취합하고 있자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온다. 태평해서 좋겠네, 하는 말은 덤이었다.
태평하다, 그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복잡한 머릿속과는 반대로 제노는 며칠간 잘 먹고 푹 쉬고만 있었으니까. 정신이 영 딴 데 가 있는 듯 멍한 얼굴을 보면 절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찰 조사에 호연지방 사람이 아닌 트레이너가 끼는 것도 모양이 좀 그랬다. 성호는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즉시 알려줄 테니 그동안 체력 비축에 신경을 써달라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던 듯, 성호는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찾아왔다. 매번 사람과 포켓몬들을 위한 간식이 양손 가득이었다.
제노가 모래사장을 뛰노는 피카츄를 바라보았다. 간식 조공 몇 번으로 완전히 성호에게 마음을 연 녀석은 그 며칠 사이 토실하게 살이 붙은 것 같았다. 파블로프의 개 포켓몬도 아니고, 이제는 성호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정도였다.
말랑한 피카츄의 뱃살을 조물거리던 제노는 생각했다. 기왕 바다 옆에서 지내는 거, 애들 운동도 시킬 겸 모래사장에 풀어놓자. 그렇게 아침마다 해변으로 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따라 나오지 않아도 된다 몇 번을 말했는데도 따라붙은 실버 또한 그것의 한 부분이었다. 인적이 드문 이른 시간, 이제는 익숙하게 님피아의 그르렁거림을 무시한 그가 마기라스와 함께 모래 위를 뒹구는 한바이트를 바라보았다.
누가 땅 타입 포켓몬 아니랄까 봐, 헤엄을 치거나 발을 담그며 바다를 즐기는 포켓몬들과 달리 아예 모래밭에 상체를 처박고 있던 녀석이 푸르르, 머리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따라 모래알들이 사방팔방으로 퍼지며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일순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눈이 마주쳤나 싶던 그때, 높게 울은 한바이트가 폴짝폴짝 뛰며 실버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너 이제 딥상어동이 아니야아악-!!”
도망을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으나, 그보다 한바이트가 빨랐다. 비명과 함께 실버가 뒤로 넘어갔다. 일어나는 흙먼지에 제노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물렸다. 성인 한 명의 몸무게에 육박하는 한바이트가 온몸으로 실버를 내리누른 채 그를 꼬옥 껴안았다.
끄응, 앓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그것을 떨어트린 실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동댕이쳐진 주제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바이트는 바닥에서 누운 채 온몸을 모래 위에 비비고 있었다.
검은 티셔츠가 온통 모래범벅이 된 것을 확인한 실버가 작게 혀를 차며 그것을 털어냈다. 움직일 때마다 모래알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손짓 몇 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냥 갈아입고 와.”
“…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넌 내가 무슨 유치원생인 줄 아니.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으나 분명 매서운 눈초리가 쏘아질 것이었기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실버가 발걸음을 옮기자 포푸니라가 곧장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비우기 전, 제노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네, 네.”
“금방 돌아올 테니까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알겠다니까.”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난 뒤에야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포푸니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제노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하얗게 일었다 보글보글 사라지는 포말을 한참이고 쳐다보고 있을 때, 다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금방 돌아온다더니, 벌써 왔나? 그러나 당연히 실버일 것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인 것은 다른 얼굴이었다.
막 모험을 시작했을 게 분명한 앳된 얼굴,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것을 보여주는 잘 그을린 피부. 송화산 정상에서 처음 보았던 호연지방의 주인공이었다.
제노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자 그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멀리서 여자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게 멋대로 뛰쳐나가지 말라니까!”
“누나, 그때 송화산에서 본 누나 맞죠?”
뒤쪽에서 한 소녀가 모래를 밟으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곤 제노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제노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안녕. 또 보네.”
“봄아, 그때 그 누나야!”
“안녕하세요! 전 봄이라고 해요.”
“전 휘웅이에요!”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누나도 포켓몬 트레이너예요? 저기 저 애들이 누나 포켓몬들이에요? 우와, 처음 보는 포켓몬도 있어!
한번 봤던 얼굴이라고, 금세 경계를 푼 두 아이가 제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응, 응, 맞아. 제노는 한두 질문 정도를 겨우 알아듣고 답하기에 바빴다. 그때 봄이라는 소녀가 님피아에 관심이 있는지 빨간 도감을 꺼내 들었다.
달칵, 화면이 열리고 도감이 님피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브이의 페어리 타입 진화형인 님피아야. 여기, 이 리본 모양 더듬이에선 마음을 온화하게 하는 파동을 내보내고 트레이너의 기분도 읽을 수 있지.”
제노의 설명이 끝나자 도감에서 거의 동일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우와아! 두 아이의 눈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도감을 다 외우고 계신 거예요?!”
“대단하다!”
“고마워….”
“누나는 신기한 포켓몬들을 많이 데리고 있으시네요!”
“언니, 혹시 다른 지방에서 오신 거예요?”
“응, 관동에서-”
“우와 멀어! 저도 한 번쯤 다른 지방에 가보는 게 꿈이에요!”
“난 신오지방에서 개최되는 윤진컵에 참가해 보고 싶어!”
감탄한 아이들이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소리가 들리니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혼을 쏙 빼놓은 아이들이 제노의 손을 사이좋게 하나씩 잡고 이끌었다.
“누나! 호연지방은 처음이신 거죠? 저쪽에 저희들이 잘 아는 다이빙 포인트가 있는데, 구경시켜 드릴게요!”
“그래요! 호연의 바다는 무척 예쁘다고요? 원래 저희끼리만 아는 장소인데, 언니한테도 보여드릴게요!”
가요, 가요! 작은 새 포켓몬들처럼 조잘대며 아이들이 제노를 바다로 이끌었다. 어어… 얼빠진 소리를 내며 이끌려가던 제노가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얘들아, 난 물 타입 포켓몬이 없어서 바다에는 못 들어가.”
“네에? 그럼 수로는 어떻게 지나오신 거예요?”
“비행 타입 포켓몬으로.”
그것도 남의 포켓몬이었지만. 제노가 뒷말은 삼켰다. 잠시 찾아온 침묵은 봄이가 친 손뼉에 의해 깨졌다.
“그럼 제 대짱이를 타고 같이 가요!”
“그래, 그러면 되겠다!”
대짱이, 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봄이가 몬스터볼에서 대짱이를 꺼낸다. 대짱이가 울음소리로 긍정의 의미를 전달했다.
벌써 바다에 들어간 휘웅이 패리퍼의 등에서 두 사람을 재촉했다. 봄이가 대짱이의 위에 올라타 손을 내밀었다. 제노가 그 손을 잡으려던 찰나, 포켓몬 한 마리가 다가왔다. 실버의 후딘이었다. 녀석이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제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근처라고 하니까, 금방 다녀올게.”
우리 애들을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한 제노가 대짱이의 등에 올라탔다. 제노와 두 어린 트레이너의 모습이 바다 너머로 사라져갔다.
여기서 꼼짝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왠지 실버의 고함이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후딘이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보관함에 소장 가능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