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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MN:SwSh/단델금랑&아킬야청] 짝사랑동맹

“그리고 우리는 연인이기 전에 라이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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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스타 17회, 야생의 배포전이 나타났다!에 출간했던 <짝사랑동맹> 유료발행입니다(실물회지 재고 소량 있음)

이하 글을 가필수정하여 완성한 회지이므로, 샘플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부탁드립니다!

[ 읽기 전에 ]

- 주인공이 챌린지에 도전하기 전의 시간선을 배경으로 합니다

- 인게임 및 애니메이션에 나오지 않은 모든 세부 설정은 개인적인 해석이며, 공식과 무관합니다

- 두송, 아킬의 소지포켓몬에 대한 날조가 있습니다

- 전국도감 미반영에 대한 개인해석, 태그배틀과 더블배틀의 혼용, 인게임 특유의 포켓몬배틀이 나옵니다. 특히, 포켓몬 배틀은 실전에서 활용가능한지의 여부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 마리의 칸사이벤은 지인분께서 친절하게 경상도 사투리 검수를 해주었습니다


0.

변화의 물살은 언제나 가속한다. 1차산업 위주였던 가라르 지방 일부에 알음알음 기계 산업이 발달하고, 철도가 놓이고, 자연재해처럼 여겨지곤 했던 다이맥스가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다이맥스 배틀이 도입되고, 18년의 굳건함을 무너뜨리고 가라르에는 새로운 별이 떴다. 만년 단위로 세야 하는 가라르의 역사에 대면 지난 두 세기는 별 거 아닐 수 있었다. 특히나 다이맥스에 대한 연구와 매크로코스모스의 로즈 위원장이 에너지사업을 일구고 슛시티를 건설하고 챔피언의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은 길게 쳐줘야 겨우 이십 년이었다.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 챔피언이 왕좌를 차지한 포스트 시즌 직후, 새해를 맞이하며 후계자를 찾을 때까지는 좀 더 할 수 있다는 의사표명을 남긴 포플러, 멜론, 순무 세 사람을 제외하고서는 모두가 빠짐없이 은퇴 의사를 밝혔다. 중견급 관장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으니 한두 해 간격으로 한두 개의 짐이 세대교체를 하기로 위원회 급 관장 회의에서 결정이 났다.

터프 마을의 아킬과 스파이크 마을의 두송은 그렇게 새로운 챔피언과 임기를 같이 시작한 관장이 되었다.

변화는 계속되었다. 오래도록 정체되어있던 가라르 리그는 챔피언 세대교체와 새로운 배틀방식―다이맥스 배틀에 신임관장에 힘입어 챌린저 숫자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챔피언 붐이라 불리곤 하는 이 물결 안에는 금랑과 야청도 있었다. 전문 트레이너와 그 외의 다른 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겨우 열둘의 소년소녀는 시시각각으로 바뀌어가는 그 빛무리에 눈이 멀었다. 양립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 포플러 관장도 극단오너이기도 하다. 너클 관장은 대학 강사도 겸임하고 있다. 바우 관장은 또 어떤가. 그쪽은 거기서 알아주는 선주였다. 역사서를 뒤적이던 소년은 자경단 사람들과 함께 훈련하기도 했던 제 파트너들의 볼을 챙겨 들었고, 이제 모델로서 슬슬 입지를 굳히고 있던 소녀는 낚시도구나 잡지 대신에 바다에서 뛰놀고는 했던 제 파트너들이 든 볼을 홀더에 끼웠다.

...그 해에는 쟁쟁한 트레이너들이 정말 많았다. 개중에서도 금랑과 야청은 세미파이널까지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뭐, 각자들 파티에 약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는 정체되기는 했어도 기어코 상성을 엎어 먹는 끈기와 대범한 전술을 선보였으니까. 세미파이널 결승은 금랑과 야청의 대결이었고 무지막지하게 치고박은 화력전의 결과는 엔트리에서 상성에 우위가 많았던 금랑이 가져갔다.

그리고 신 챔피언의 첫 방어전. 혜성처럼 나타난 루키와의 승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게 만든, 명승부였다. 전술적인 면에서야 가다듬을 데가 많았지만 그것을 상쇄할 정도의 눈부심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단델 하의 가라르 리그 명승부 탑 쓰리에는 드는 경기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새 챔피언, 새로운 샛별 단델이 자리를 지켜냈다. 결판이 나고서도 스타디움에는 삼 초 가량의 정적이 흘렀다가, 몇 배는 되는 함성으로 되쏟아졌다. 그 우레와 같은 환호 속에서 단델은 반짝반짝하게 웃었다. 순금을 고아 만든 듯한 눈동자가 어쩐지 눈이 부셔서 금랑은 잠시 눈을 깜빡였던 것도 같다.

첫눈에 반했다는 자각은 좀 더 나중이었다.

 

다음으로 인수인계에 들어간 곳은 래터럴 마을이었다. 동시에 바우 마을과 너클 시티는 지난 포스트 시즌을 열렬하게 빛낸 새내기 트레이너 둘에게 관장직 제안을 했고, 의욕 만만한 십대 초반의 새싹들에게 일 년 반의 견습 기간을 거쳐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반이 조금 넘는 관장들이 교체되기도 했고, 2년차 방어전을 끝낸 챔피언과 안면을 트는 것도 겸해서 리그 위원회 차원의 관장 회의가 열렸다. 명목은 바우 관장 야청과 너클 관장 금랑의 소개였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견습 기간은 챌린지를 도는 대신 체육관 업무를 배우고 시드를 받아 세미파이널에 올라갔으니 그럴 수밖엔 없었다. 어른티를 내기에 아직은 어렸던 두 사람은 살얼음처럼 굳은 채 눈동자만 도르륵 구르다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쟤 아까부터 아킬 관장님하고 필사적으로 눈 안 마주치는데?’

‘챔피언 정면 자리면서 어떻게 곁눈질만 하지?’

그건 짝사랑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동지구나. 거울을 마주보아야 발견하던 절절한 그 색채가 타인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차 있다.

챌린지 기간 중에 잠깐씩 마주쳤을 때 말을 섞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취향도 나름 맞았고, 추구하는 배틀 상도 닮은 편인데다가, 동갑내기에 같은 날에 관장이 되었다. 가뜩이나 친근한 공통점이 많은데 거기에다 하나가 더 추가됐다. 절찬리에 짝사랑 중.

관장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포케스타그램 맞팔을 했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포톡 방을 팠다. 짝사랑 동맹의 결성이었다.

 

 

1.

짝사랑 동맹이라고 해서 별다르게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남한테 쉽게 말 못할, 가슴을 꽉꽉 채워서 터져나갈 것 같은 마음을 편하게 토로한다거나 나름대로 친구의 짝사랑 상대 정보나 사진 같은 걸 공유하는 정도. 툭하면 셀피를 올리는 금랑도, 또 다른 직업이 모델이기 때문에 셀피를 찍자 해도 어색하지 않은 야청도 서로가 아킬이나 단델을 만나면 가볍게 사진이나 찍자며 말을 던지곤 했고, 그렇게 찍은 개인적인 사진은 곧장 짝사랑 동맹에 올라가곤 했다. 너클과 바우의 신임 관장이 돌연 울린 연락에 화들짝 놀랐다가 얼굴을 싹 굳히고 집무실이나 휴게실에 뛰어드는 때는 바로 그런 날이었다.

― 쨘, 아킬 씨하고 유기됐던 과사삭벌레 데려가신다 해서 한 컷!

톡이 도착한 걸 보자마자, 마켓을 둘러보던 야청은 들입다 등대 뒤편 구석으로 뛰었다. 어차피 제가 마을을 질주하는 것 따위야 마을 사람들에겐 일상이라 티가 날 것도 없다. 등대 그늘에서 로토무를 부르고 보니 그 사이에 사진은 다 전송되어있었다. 한 달 반 전에 모래먼지 구덩이 한 켠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던 다섯 마리의 과사삭벌레를 너클시티 자경단이 구출했다고 들었다. 아마 그 되먹지 않은 필승사랑고백을 위해서 잡혔다가 그대로 버려진 거겠지. 그렇게 나약한 미신에 기댈 바에야 직접 쟁취하라고! 그렇게 열을 냈던 절찬리 짝사랑 중인 두 사람이 화를 낸 게 벌써 그만큼 전이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 유기포켓몬 공고가 나갔고, 다행히 개중 둘은 너클시티 주민이 데려간다고 하여 무사 입양됐다. 그렇지만 공고가 다 끝나갈 때까지도 더는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찾아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금랑이나 포켓몬보호소 소장의 판단으로 불가처리됐다) 이를 어쩌나 싶었는데, 그걸 아킬이 거두겠다 한 게 지난 주말이다. 아킬이 입양 절차를 밟으러 너클에 오면 한 컷 기깔지게 보내주겠다 호언장담한 동맹자는 착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 아킬 씨 왔음~^0^ 09:47

출근한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온 톡에 설레이기 시작하다 못해, 감질나게 뒷모습만 찍힌 사진에 점점 기대만 부풀어서는 그놈의 정면 셀피를 마냥 기다리기엔 초조할 뿐이어서 파도 소리라도 들을까, 생활 소음에 묻혀있으면 좀 나을까 해서 나온 거였는데. 하필 타이밍이 딱.

겨우 그 거리 달렸다고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칠 리가 없지만, 야청은 괜히 체력단련이 부족하다며 제 머릿속 일정표에 아침 러닝을 늘리기로 작정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로딩이 완료된 사진을 팝업했고,

“”

그대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이라면 하이퍼보이스라도 쏠 수 있는 게 아닐까? 일부러 아킬에게 지분을 잔뜩 내어준 금랑 덕분에 스마트로토무 화면 삼분의 이는 순박한 청년이 들어차 있었다. 농사일로 다져진 큼직한 양손 위에 세 마리의 과사삭벌레가 앉아있다. 미끄메라와 비견해도 좋을 만큼 심약한 드래곤이기도 한 이들은 본래 사람을 무서워한다.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사과 뒤 꼬랑지도 꽁꽁 숨기고 빠꼼 내민 눈도 거진 다 집어넣어 버리는 유약한 성정을 떠올려보면 제 몸의 절반이 사과 밖에 삐져나와 있는 이 사태는 가히 놀라울 수밖엔 없는 거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킬 씨인걸! 상냥하고 강인한 터프 마을의 관장!!

포켓몬이야말로 인간에게 예민하기 마련이다. 와일드 에리어에서 사고가 나는 태반은 사람의 잘못이 크다. 생태도 잘 모르면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다가, 모르는 새에 위협이라도 가하는 거지. 그러므로 첫눈에 포켓몬이 맘을 놓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흔히들 선택받았다, 하는 그거. 야청은 속으로 주억거렸다. 그 애들도 아는 거지, 암! 아킬이 그들에게 위해를 끼칠 위인은커녕 좋은 보호자이며 파트너가 되어주리라는 확신.

벌써부터 입꼬리가 비식 올라갔다. 아킬 씨는 저 애들을 애프룡으로 진화시킬까, 아니면 단지래플로 진화시킬까? 어느 쪽이라도 풀/드래곤이라는 상성은 물 타입 익스퍼트인 제게는 씁쓸한 소식일지라도 공연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혼을 다 부딪쳐서 태우는 포켓몬 배틀은 얼마나 최고인가! 아까와는 완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뛰는 심장 박동은 완연하게 트레이너의 그것이다.

그래,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진성 농사꾼이 포켓몬 트레이너로서 눈을 빛내며 덤벼오는 그 순간이 최고로, 사랑스러운 거다. 그 여유 없는 모습을, 열과 성을 다해서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사귀지 않더라도 평생 배틀만 해도 좋아.

야청이 기어코 터져 나오는 맘을 주체 못하고 아킬에게 라이벌 선언을 해버리기 사흘 전.

 

2.

야청은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금랑은 왜 하필 이 골칫거리한테 사랑에 빠져서는…. 눈앞에는 쇼맨십에 능숙해져 가는 5년차 챔피언이 있다. 이 시각,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챔피언이! 당신 오늘 래터럴 마을에 일정 있는 거 아녔어?! 멍파치처럼 해맑게 웃어도 소용없다고! 그 소리를 목구멍 아래로 꾹꾹 누르며, 또래라고 말 놓길 참 잘했다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말을 곱게 할 수 있는 위인은, 누가 뭐래도 아킬 씨밖에 없을 거다. 저기 두송은 벌써 마이크로 한 대 후렸겠지, 암.

“그래서, 길을 잃어서 바우마을까지 왔다?”

“응.”

부끄럽게도 말이지, 난 분명 래터럴로 가려고 했거든? 모래밭이 보이기에 제대로 가고 있다 했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바다가 보였어. 하하하.

아무렴. 너야 똑바르게 나아갔겠지. 똑바르게 틀려먹은 길로!! 아무래도 이 천하의 길치이자 방향치는 모래먼지 구덩이를 래터럴 마을로 이어진 6번도로와 장렬하게 착각했던 모양이지.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돼? 야청은 배웅해줄 사람으로 래터럴 짐의 관장을 부르려 들었다가, 최근 후계자 교육에 힘쓰느라 눈코 뜰 새가 없던 면면들을 떠올리고선 맘을 바꿔, 금랑의 번호를 눌렀다. 어차피 바로 옆 마을이잖아. 원래 이웃마을 돕는 게 불문율이고 와중에 지고지순한 순정파 짝사랑 중인 관장님께서는 수석 타이틀도 달고 있으니 당연했다.

“야, 당장 바우마을 광장으로 와. 나대신 미아 데려다주고. 난 곧 촬영 스케쥴 가야 해.”

― 뭐?! 야청, 갑자기 그게 뭔 말이야. 이몸 일정은?!

“앗, 금랑!”

― !! 일, 일정 없는 거 참 잘 알았네~. 감도 좋아라. 금방 갈게!

SNS 중독자답게(물론 빡세게 일할 때야 안 그런다만) 두 번 콜이 가기도 전에 전화가 이어졌고 야청은 대뜸 용건만 던졌다. 당황하라고 저지른 일이었다. 스피커폰도 아닌 주제에 새어나간 목소리를 이 챔피언님께 들려주려고. 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짝사랑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저 모양이다. 알고 한 행동이긴 해도 야청은 속으로만 혀를 찰 뿐이다. 너도 참 고달프게 산다.

듣기로는 얘는 자기 짐 트레이너들한테 짝사랑 다 들켰다고 했다. 짝사랑 동맹까진 말하지 않았어도, 하여튼 자기네들은 금랑 님을 응원한다며 퍽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더랬다. 얼마 전 술잔을 기울이면서 우리 애들이 참 착하다고 헤실거리던 표정이 훤하다.

어쨌건 반쯤 찍긴 했어도 일정 비었다며 말을 바꾸는 걸 보면, 있다는 일이 아주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도중에 찰진 등짝 스매싱이 들린 것을 보아 아마 그를 가장 허물없이 대하는 동숙이 저 덩칫값 못하는 모지리를 한 대 쳐버린 것도 같다. 카랑카랑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 성도 싶다. 금방 간다며 활짝 핀 목소리로 콧노래 부르는 이 미터 짜리 순정파 씨의 모습까지도.

이제 문제는, 야청은 여전히 혼자 쾌청이나 다름이 없는 가라르 최고의 문제아를 노려보았다.

“단델, 너 금랑 오기 전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알았어?”

“그래!”

아, 못 미덥다. 시원스럽게 나온 답에 비해 신뢰는 저기 모래알 한 톨만도 없다. 소니아에게서 넘겨들은 에피소드만 벌써 수십 수백이다. 정말, 정말 차라리 내가 냐오불에게 생선가게를 맡기고 말지. 오후 스케쥴에선 포켓몬과 동행할 필요가 없으니까, 차라리 갈가부기에게 맡겨야겠다. 야청은 포켓몬배틀 외에는 도무지 못 미더운 챔피언의 곁에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를 두었다.

...촬영 사이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짝사랑 동맹 톡방에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단델과 투샷을 찍은 금랑의 셀피가 올라와 있었다. 오늘치 제일 뿌듯한 일이다.

 

3. 

두송은 스스로가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자부한다. 이런 감은 예술가 특유의 민감성이기도 했고, 배틀 도중에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좋은 무기이기도 했으나 때때로 그는 차라리 이놈의 눈치가 꼬르륵스위치처럼 꺼졌다 켜졌다 할 수 있는 성질이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다. 그놈의 짝사랑! 내가 그걸 왜 알아채 버려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요!! 포기를 하거나 집착하듯 덤비거나 모 아니면 도로 행동하는 그에게 있어서 금랑과 야청 두 사람의 삽질은 밤고구마 농장이 따로 없었다.

두소오오오오옹!!! 제 이름을 마구잡이로 불러대며 톡방에 온갖 이모티콘으로 불을 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스파이크 근처 펍 주소를 찍고 주섬주섬 겉옷을 챙겼다. 음악방송을 듣고 있던 마리가 "형님도 칼같이 끊는 편은 아이지. 잘 갔다오그라."라고 손을 흔들어줬다. 뒤이어 들어온 신임관장을 챙겨주는 것 뿐입니다, 마리. 난 귀찮은 게 딱 질색이예요. 라 답했지만, 깜찍한 동생은 “그짝은 인제 4년찬데.”라며 똑 부러지게 답했다. 두송은 그 말에는 딱히 답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단골 펍에 미성년자를 들여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두송은 술을 파니까 펍이라고 불렀을 뿐 낮에는 카페를 겸하고 있기도 한 곳이며 애시당초 약간의 일탈이라도 허용되지 않으면 저 괄괄한 애들은 벌써 사고를 쳐도 거하게 벌였을 거라고 답할 거였다. 물론 마리의 말대로 4년 동안 공인 생활을 멀끔하게 해온 금랑과 야청이 손수 돌봐야할 코흘리개 꼬맹이는 아니라지만―아,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 동생 같을 뿐이다. 막 관장이 됐던 나이의 두 사람이 괜히 지금의 마리와도 겹쳐서 그런 거다. 누가봐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어디까지나 두송의 관점이다) 거기에 대고 제가 겨우 쟤 좋아하냐고 툭 찌르니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어쩔 줄 몰라하던 그 모습을 보고서도 태연하게 등을 돌릴 수 있는 냉혈한이 있다면 어디 한 번 얼굴이나 보고 싶다.

보통 옆 동네에 사는 금랑이 먼저 와있고, 두송이 도착하고 나서 한참 후에야 야청이 오곤 하는데 오늘은 둘 다 지정석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넉넉하게 안주가 쌓여있고, 곁들인 딱 한 잔은 3도 아래의 음료수. 딱 제가 가르쳐준 대로였다. 빈 속에 알코올 붓는 거 아닙니다. 안주는 꼭 시키고 너희는 미성년자니까 3도 아래. 마시면 안 된다고는 안 할 테니까, 갑갑해서 미쳐버리겠다 싶으면 불러요. 그래, 그랬더랬지. 달에 한 번 꼴로 불러내는 미래의 술고래들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 말은 안 했을 테지만 어쩌겠나. 이미 배는 떠난 것을.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요, 짝사랑을 부르짖는 어린 양들아.”

제 발소리도 못 알아듣고 벌써부터 텐션이 올라 떠들던 두 쌍의 눈동자가 이쪽을 돌아보자마자 왈칵, 젖어들었다. 하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무리에서 떨어진 우르 같은 눈망울들을 보면 때때로는 제 동기인 아킬도 해맑기만 한 챔피언도 얄미워지곤 했다. 그래,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 편을 들어줄 테니까요.

3.5.

아킬은 정말로 야청의 맘을 모를까?

단델은 정말로 금랑의 맘을 모를까?

포켓몬 트레이너는 관찰력과 눈썰미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던가?

 

4.

라이벌이라는 소재는 시청률을 붙들기엔 안성맞춤이다. 이미 몇 년째 자타공인 라이벌 구도를 이루고 있는 챔피언 단델과 가라르의 수문장 금랑에다, 최근 반쯤 일방적인 라이벌 선언을 한 야청과 그에게서 승률을 뺏기지 않고 있는 아킬. 이렇게 라이벌 두 쌍을 초청한 PD는 이번 황금시간대 생방송에 꽤 많은 것을 걸었다. 시청률 15%는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어쩌면 순간 시청률 75%를 찍지는 않을까 두근두근한 맘으로 그날을 기다렸다.

PD의 바람은 이뤄지긴 했다. 순간 시청률 90%를 웃도는, 가라르 방송 역사 상 전무후무할 기록으로. 과연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알았다면 PD는 라이벌즈를 기획했을까?

생방송으로 진행하겠다고 부득불 우기기도 했고 아직은 챌린지 시즌이 아닌 덕분에 6시 칼퇴근을 마친 관장 셋(좀 더 멀리 사는 아킬과 야청은 5시 경에 외근 계를 내놓고 왔다)과 미아가 되면 곤란하다는 것을 이유로 점심 나절부터 내도록 슛시티 방송국에 붙잡혀 있던 챔피언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방송은 나가야겠다며 꾸역꾸역 일정을 소화한 가라르 제일의 인플루엔서와 10년차는 충분히 찍은 프로 모델은 피로한 티 하나도 없이, 날것의 송곳니를 드러내는 라이벌의 얼굴로 섰다. 저희 짝사랑 상대이며 라이벌은 언제나 그랬듯 여유로운 표정이다. 단델도 아킬도 저 태연자약한 태도는 약이 오르면서도 그러니 이 맘을 눈치 못 채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확신을 가지게 해줬다.

생방송의 묘미라고 하면 기습질문이다. 이미 공인 생활 n년 차에 접어드는 네 명이 깜짝 질문 코너라고 해서 과하게 놀라는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다. 외레 금랑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고 야청은 그에 지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어 도발했다. 라이벌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단델이나 아킬도 특별히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눈을 빛냈다. 승부처를 발견한 쟁쟁한 네 쌍의 눈동자가 카메라에 담겼고,

“그럼 네 분께 질문, 만약 누군가를 사귀어야 한다면 상대는?”

우와. 금랑과 야청은 카메라가 도는 타이밍에 맞추어 서로를 흘긋 보았다. 이런 질문에는 이골이 난지라 혹 서브 카메라가 지금 저희를 잡았다 치더라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으리란 자신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아직 관장직과 겸업 중인 일들과 포켓몬들에게만 신경 쓰느라 연애는 생각해본 적 없다는, 상투적인 답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콕 찝어 사귄다면 금랑이 좋겠군!”

“저는 야청 님일까요. 저한텐 과분한 분이시지만요.”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익숙한 목소리가 꿈에서도 듣지 못한 문장을 읊자, 짝사랑 동맹은 희게 질린 얼굴이 되어 시선을 맞추었다. 금랑이 돌연 파비코리와 플라이곤을 꺼내들고 야청이 갈가부기를 불러냈다. 토크쇼를 위해 마련된 아담한 스튜디오가 중대형 포켓몬들로 꽉꽉 들어찼다. 카메라는 무엇을 잡아야 할지 갈팡질팡 거리고, 난데없는 방송사고에 시청률은 팍팍 올라만 갔다.“

“갈가부기, 기가임팩트!”

“플라이곤! 파비코리는 야청 부탁해!”

정점은 앞뒤 잴 것 없이 스튜디오 천장을 부숴버린 야청의 갈가부기가 장식했다. 훤히 뚫린 구멍으로 금랑을 태운 플라이곤, 야청을 태운 파비코리가 날아가는 것을 카메라가 쭈욱 잡아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사실은 토크 쇼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깜짝 카메라였나? 머릿속이 희게 변해 허겁지겁 도망치긴 했지만 차게 가라앉은 저녁 공기를 맞으며 금랑과 야청은 천천히 스튜디오의 정경을 되감, 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껏 그 어떤 배틀에서도 침착하던 머리가 아주 고장이 나버렸다. 이런 때에 믿을 사람은 하나뿐이라, 두 사람은 울상으로 와다다 문자를 보냈다.

― 두송 살려줘

― 이몸 꿈일지도 모르니까 만나면 한 대만 때려줘.

그렇지만 두송에게서의 답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저희가 막 공중날기로 도망치기 시작한 그 순간에 문자가 와있었다.

― 하아, 이 멍청이들아. 와요. 카메라 피하는 데에는 우리 스파이크 마을이 제일이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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