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닭] 부러진 뿔
애늙-잔불 신수기린AU 회지 <봉모인각>의 개인 파트 유료발행
2024년 9월에 제작, 10월에 통신판매했던 鳳毛麟角봉모인각 : 신수기린 앤솔로지에 본인 파트를 유료발행 해둡니다.
[읽기 전에]
- <잔불의 기사>는 물론, 전작 <애늙은이>에 나오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알고 보시면 ‘아!’ 하는 정도의 차용입니다
- 해당 유료게시물에는 후기까지 포함됩니다
- 기린닭, 즉 CP를 상정하지 않고 쓴 글입니다-만, CP탈부착은 부디 자유롭게.
1.
이 대륙에는 신수가 산다. 전래동화 같은 환상이 아니고 엄연한 실재로서의 이야기다. 창세신화는 태곳적 일이지만 유사 이래로 이 땅에서 신수의 흔적이 사라진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당장 이 땅에는 가장 오랜 신수인 오채색 네뿔산양이 살아 숨 쉬고 있으니 그렇다. 비록 그가 대륙 중앙 우뚝 솟은 산에 도사린 채로 은둔하고 있어 최근 한 세기 동안은 마주친 사람은 없다지만 긴 역사 속에서 그의 굵직한 흔적은 신뢰성 있는 증거와 함께 기록돼 있다. 특히나 지금 그 중앙에 자리한 나라의 건국사가 그러한데, 내용은 이러하다. 오채색 네뿔산양이 당시 청년이던 초대 국왕에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대가 왕의 재목이라며 오색으로 빛나는 작은 뿔조각을 받았다고 한다. 전언이야 속일 수 있다지만 건국왕이 네뿔산양과 만난 것은 틀림없는 일이라고 그 뿔조각이 증명했다.
신수의 이름은 어떤 색과 생물 명의 조합으로 이뤄진다고 세상에 알린 것도 그 오채색 네뿔산양이었다. 유일하게 지상에 남은 네뿔산양은 저와 창세를 누렸던 네 신수는 귀천했다고 설명하면서 그들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휘발되어 아무도 읽지 못하는 개념이 되었고 다시는 누구에게도 그 이름이 붙지 않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수 명이란 중복되지 않는 고유명사라고 이해했다. 신수란 저희 인간과는 격이 다른 존귀함을 받고 태어나 천명을 따르는 존재이므로 하늘 아래 동일한 이름이 있을 수 없다는 건 일견 타당해 보였다.
인간에게 신수란 신성한 의미이다 보니 고결한 영웅이나 무위를 떨치는 장군 혹은 어진 치세를 펼치는 자에게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명을 붙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 당장 북녘땅을 지키는 다랑 장군은 하늘색 너구리라는 이명으로 불리고(정작 그가 하늘색을 싫어한다고 알려져 저 이름을 처음 부른 게 병영 동료 아니냐는 설도 있다), 대륙 중앙에 우뚝 솟은 산맥이 동남쪽으로 치우쳐 뻗은 부근의 다섯 고을을 돌보는 군수 파디얀은 본명보다도 흰 사슴으로 더 자주 불린다. 하기사 다섯 고을의 군수 흰 사슴은 그 영토를 제 땅으로 하는 신수 회적색 여우와 나란히 언급될 때가 잦아 운을 맞추느라 그럴지도 몰랐다.
회적색 여우처럼 세상사에 꽤 깊이 관여해 사는 신수는 또 있었다. 여우보다 널리 알려진 신수라면 저기 서쪽 땅에 사람 좋아하기로 유명한 푸른 승냥이가 있는데, 아예 인세에 살며 쓰는 이름까지 지어놓고서 사람들과 툭 터놓고 지낸다. 그쪽 마을 아이들은 머리가 굵기 전에는 피도란스 형, 오빠하며 부르다가 나중에 좀 더 크고 나서야 그가 신수인 걸 알고 턱 빠질 듯이 놀라는 일이 툭하면 벌어졌다.
그보다 훨씬 유명한 신수가 있다면, 그건 단연 검붉은 하마다. 태고의 신수인 네뿔산양과 견줘도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덕분에 하마에 관해서는 알려진 일화가 많았다. 검붉은 하마는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로 명성을 떨치는 그노제스 가를 수호하고 있다. 실제로 첫 그노제스와 아주 친밀한 사이였다고도 하고, 그가 완성한 최초의 마스터피스를 받은 이가 검붉은 하마다. 인간이 만든 무기로 맹위를 떨치는 신수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대한 충격으로 남아있다.
그노제스 가를 지키는 까닭이 첫 그노제스에게 자진하여 맹세했기 때문인지는 당사자가 입을 굳게 다물었으므로 아무도 캐내지 못했다지만, 세간에선 아마 그럴 거라고 유추하곤 했다. 하마 턱을 무척 소중하게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검붉은 하마가 현대에는 존재가 희박해진 용과도 아는 사이라는 이야기도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물론 그가 살아온 몇백 년을 감안하면 놀랍지 않았지만. 오히려 거기에 야사로 따라붙는, 그 용과 함께 서 있다는 검은 단발머리 여성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할 정도였다.
어찌 된 일인고 하니, 야사 기록자의 할머니께서 어렸을 적 산에 올랐다가 어떤 단발의 검은 머리 여성을 만났다고 한다. 약초에 박식한 그 여성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당연히 산에서 마주한 신비한 이를 신수로 여겨 물었고, 그는 웃으며 “아니, 난 조금 특이할 뿐 인간이 맞아.”라고 답했다고 했다. 자기와 만난 걸 당분간은 비밀로 해달라는 말과 함께.
야사 기록자가 이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순전히 할머님께서 당신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제는 말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셔서였다. 그런데 웬일. 할머님의 49재를 맞이해 당신께서 생전 좋아하셨던 약재이자 야생화를 찾으러 산에 올랐다가 바로 그 사람을 먼발치에서 목격한 것이다. 증언과 똑같이 생긴,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주름살 하나 늘지 않은 그 사람을.
이 불로불사의 야사를 곧이곧대로 믿는 건 극히 일부 괴짜들이었다. 전문가는 물론이고 대다수 아마추어 학자조차 그 여성은 은둔한 신수일 것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신수가 세상과 떨어져 살기로 했다면 감히 인간이 그걸 파헤칠 권한 따위는 없으니까. 왜냐하면,
“―궁창이 다 닫히지 않아 대지와 경계가 흐린 채 한 덩어리였던 태곳적부터 신수가 있었다지. 그들은 하늘과 땅이 온전히 갈려 위아래를 분간할 수 있게 되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았고, 그 사이에 인간이 번창하는 흐름을 살폈다. 이후 천지 간에 인간이 무수히 늘어남으로 천계와 지상의 연결고리는 약해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늘이 땅과 완전히 멀어지지 않는 것은 신수가 천명을 받들어 통로가 되어서라고들 하지. 쉽게 말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하늘과 땅을 이어 묶는 기둥이 신수인 거다.”
산자락 사이에 낀, 사십 호가 조금 못 되는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서 스물 중반일 법한 청년이 일장 설화를 끝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들 앞에는 저마다 글 교본이 있지만 지금은 팽개쳐져 있다. 필기구 또한 바닥이며 낮은 상 위에 얹힌 걸 보면 다 같이 이야기를 조른 모양이다. 선생 역인 청년은 그 생떼를 이기지 못한 듯했고. 읍내만 나가도 아는 이야기를 이 정도로 작은 산촌에선 제대로 듣지 못한 티가 역력했다. 동생들을 따라 나왔을 열댓 살 먹은 애들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양을 바라보던 청년―지우스는 제가 아직 필기구를 집으라고 말하지 않아 이야기가 계속될 거라고 아는 아이들에게 본인으로서는 드디어(이 애들은 모르겠지만) 본론을 꺼냈다.
“그렇지만 신수만이 세상을 지탱한다고 생각해선 안 돼. 신수만으로도 세상이 유지됐을 거라면 하늘은 왜 인간이 태어나게 내버려 두고 이만큼 번성하도록 했을까. 인간이 많아질수록 자기와 멀어질 걸 알면 그냥 둘 리가 없지. 그건 모순이다. 그러니 신수만 중요한 게 아니야. 너희도 세상을 지탱하는 요인이다. 이 점 명심하도록.”
방금 그 말이 제일 중요하다고, 오늘 다른 건 다 잊어도 그것만큼은 기억하라고 재차 강조한 청년은 담담히 수업의 끝을 알렸고 아이들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난 공부 시간에 환호하며 뛰쳐나갔다.
봄을 맞이하고 시일이 오래지 않아 아직 여린 녹색을 한 나뭇잎을 지글지글 구워대는 한낮의 햇볕도 저 애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그 뒷모습들을 지우스는 무감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도 눈부시다는 듯 쳐다본다. 그렇다. 인간은 가능성을 잔뜩 품은 찬란한 존재다. 봄이 되면 피어나는 새순과 꽃들처럼, 사시사철에 맞추어 빙글빙글 춤추는 자연처럼. 그는 단 한 순간도 그 명제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이 땅에는 태곳적 신수가 있으며, 인세에 스스로 존재를 밝히며 사는 신수들도 있고, 추정이지만 은둔한 신수도 있다. 제각기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각자의 천명을 받들어 순리 속에서 산다. 그런 신수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더랬다.
― 그런데 역천逆天을 저질러 뿔이 부러진 신수가 있다지?
인간 또한 신수와 다를 바 없이 각자의 천명을 받고 사는 존재라는 제 생각이 정말로 역천이라면 이런 역천 따위 몇 번이라도 해주겠노라고 뿔이 부러진 신수, 담청색 기린 지우스는 재차 다짐한다. 눈을 감으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태양 아래 만개한 개나리처럼 낭랑하게 들려온다. 이것이야말로 지키고 키워나가 미래로 이을 가치가 있는 보물이다. 미래의 씨앗을 위해서는 다시금 나머지 뿔 하나를 꺾을 각오가 담청색 기린에게는 있었다.
2.
이름도 붙지 않은 작은 마을이 별일 없이 도란도란 잘 살아가는 데에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원래 이 언저리는 두 신수의 영역 경계에 있는 산자락 사이에 자리해 각자 자기네 땅이라 우겨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땅에 욕심이 많거나 호전적인 신수끼리였다면 싸움이 났겠지만, 다행히 한쪽은 회적색 여우의 땅이고 다른 쪽은 자색 비오리의 땅이었다. 어느 쪽이고 함부로 싸움 팔지 않는 성정을 지닌 신수에다, 태어난 시기가 비슷한 동기간이기까지 했다.
행정력이 애매하게 빈 그곳에 동기 신수끼리 좋은 수를 냈다. 당시에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마찬가지 동기인 담청색 기린을 거기 꽂아 넣은 거다. 여우와 하도 스스럼없이 지내서 저희 동기 사이에선 명예 신수로 통하기도 하는(가끔 “아니, 얘 진짜로 신수가 아니었던가?”라는 놈들도 있었다) 흰 사슴 파디얀이 시원스레 등 떠민 것도 있었다. “너 어차피 애들 가르칠 거라며? 내가 좋은 데를 알아. 어때, 고맙지!”하며 발랄하게 말하는 파디얀과 그 등 뒤에서 “파디 말 안 들으면 넌 여기서 나한테 얻어터질 줄 알아.”라고 눈으로 협박하는 회적색 여우 루디카 앞에서 지우스가 할 수 있는 답이라곤 딱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이 둘은 신수와 인간이 어우러져 시너지를 내는 좋은 예시라고도 생각한다. 거기에 한몫 거들 수 있다면 뭔들 못할까. 뭐, 애시당초 거절할 맘도 없었고.
그렇게 기린은 서당 선생님으로 눌러앉았다. 떠돌이 생활을 접자마자 붙박이처럼 나돌아다니질 않아 금방 친구들 사이에서 푯말처럼 쓰이게 됐다. 책상물림 선생 앞에서 보자! 정작 기린 본인은 자기가 푯말보단 창구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면전에서 “여어, 약속 장소인 선생 나으리~”하고 들어도 특유의 뚱한 얼굴을 하고서 “너, 늦었어. 하늘다람쥐 걔가 전해달라더라. 먼저 만나자고 해놓고 사흘 기다리게 할 거면 관두라고. 쫓아가려면 북쪽으로 가. 너구리 장군 있는 지역으로 간댔거든.” 하고 답하니 말이다.
전언을 맡는 정도야 수고롭지 않아서라는데 언젠가 모인 면면들이 서로 쳐다보다가 실실 웃었다. 얘도 참, 솔직하지 못하다 싶었다. 반가우면 반갑다고 할 것이지. 인세로 내려와서는 중앙 산맥에 있을 적보다 얼굴 마주하기가 어려워, 전언을 주고받거나 골치 아픈 일의 조언이나 해결책을 구하러 오지 않으면 만나기가 어렵지 않나.
오늘은 여우와 사슴이 왔다. 가장 자주 만나는 2인조다. 여우가 허리춤에 도기 병을 차고 왔는데, 보아하니 술이어서 지우스는 인사 대신으로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낮부터 술 마시자고?”
“얘 좀 보게. 그러는 너도 빼진 않잖아, 서당 선생님.”
“귀한 게 올라왔거든. 겸사겸사 전할 소식도 있고. 그런데 너 같이 심약한 녀석은 좀 마셔야 듣고 안 튀어 오를 것 같더라. 그런 식으로 귀천했다간 파디가 곤란해져.”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어깨를 늘어뜨리고도 기린이 따로 축객을 명하지는 않았다. 첫 마디를 뱉으면서 무언가 확인한 탓이다. 저만치서 해맑게 떠들고 노는 아이들과 저마다 일감을 쥔 어른들이 아무도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여우가 제 우산으로 사람들 인식을 가려 덮은 모양이었다. 장막을 내려 신수의 고유 영역을 펼쳤다면 말할 내용도 짐작이 갔다. 기린은 두 친구에게 고갯짓으로 따라오라고 신호를 줬다.
사립문을 밀고 들어간 너와집은 마을에서 제일 컸다. 방이 세 칸이기도 하거니와, 개중 하나가 집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넓은 집이다. 서당으로 쓰겠답시고 만들었고 실제로 마을 아이들을 콩나물시루처럼 앉히지 않아도 된다고 집주인은 만족했지만, 남들이 보기엔 꽤 괴상한 구조였다. 남은 칸은 여타 민가보다 못해서 더 그럴 거다.
낮은 탁상엔 마땅한 안주는커녕 삶은 감자나 콩, 개쑥떡 같은 게 올랐다. 새참거리나 다름이 없는 상차림과 신수제에 바쳐진 귀한 술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저희 사이에선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신수제에 바쳐진 술을 이런 식으로 마셔도 되는 게 맞나 싶다.”
“내 걸 내가 마시겠다는데, 뭐.”
“그럼~. 루디가 말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바쳐진 술은 신수한테 보약이라며? 넌 하도 비리비리해서 이런 거라도 먹여놔야 해. 보약처럼 한 재씩 못 해 먹이는 게 오히려 아까운데.”
“또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그 후로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갔다. 요즘 어떻게 지냈냐는 안부부터 저희 동기 중에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던 친구의 의견이 필요해 가지고 온 행정 안건이 논의되다가 또 갑자기 엉뚱하게 튀어 간만에 소식 닿은 다른 동기 소식까지 이리저리 튄다.
그러면서 가져온 술이 동났다. 기린은 여즉 첫 잔을 쥐고 있었으니, 맞은편 여우와 사슴이 다 털어먹었다. 술기운이 올라서 휘청거리는 건 정작 신수인 루디카고, 세간에서나 신수 명으로 불리지 명실상부 인간인 파디얀은 얼굴색 하나 안 변했다. 뭐, 이 지방 제삿술은 독하기로 유명했으니, 루디카가 술이 약한 건 절대로 아니다. 기린은 이런 장면과 마주칠 때마다 저희 명예 동기 자리를 차지한 흰 사슴 파디얀이 실은 신수와 혼혈인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가설까지도 조립하곤 했다. 동시에 지우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저도 술기운이 돌았다는 증거라고 조망한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저도 여우도 술기운에 먼저 먹힐 것 같아, 기린은 어차피 빈 병인 김에 도기를 치우면서 잡담을 끊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그래. 안 그러면 여우가 이대로 잘 것 같은데. 그럼 곤란하잖아, 군수님.”
“자기는 술 한 잔도 못 비운 주제에….”
“아이고, 우리 루디 서럽다고 우네. 그래그래, 쟤는 술도 못하면서 젠체한다니까 그렇지?”
술 좀 들어가서 얼콰해지니 여우가 옛 버릇으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루디카가 울먹울먹해서 우는 걸 퍽 귀여워하는 파디얀을 보면 술 핑계는 저를 위한 것보단 사슴 본인의 사심을 채우느라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하게 한다. 여하튼 들러리로 있자고 여기 앉은 것도 아니고 해서(아까 행정 안건이 본론일지도 모른다) 지우스는 이대로 별일 없으려거든 마을 일이나 도우러 나가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계속 노닥거릴 거면 나도 그만 일하러 나간다.”
“어허. 기린, 참을성이 없네. 황색 새앙쥐가 전해달라고 했어.”
“―신수 사냥꾼을 이 근처에서 봤다더라.”
딱, 일어나기만 했다. 쬐깐해가지곤 세상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방랑자 녀석과 만났다는 현상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녀석이 물어온 소식에 놀라야 할지 갈피가 안 섰다. 엉거주춤하게 멈춰 선 기린 덕에 눈물샘이 느슨해진 만큼 웃음보도 풀려버린 여우가 소리 내어 웃었다. 루디가 웃으니 자기도 즐겁다며 파디얀도 깔깔거린 것은 덤이다.
신수 사냥꾼이라 하면 인간에게도 신수에게도 악명이 높았다. 문자 그대로 신수를 사냥하는 자. 불길함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신성한 신수를 감히 죽이고 돌아다니는 존재는 때로 역병신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 그 정체가 정말로 인간인지 같은 신수인지조차 불명이지만, 오래 살아온 축에 속하는 검붉은 하마가 그와 면식이 있는 듯했고 마찬가지로 하마에 비할 바는 안 되더라도 인세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푸른 승냥이 역시 자기 젊은 시절에도 그런 애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어 모두들 신수 사냥꾼은 실은 저희 같은 신수가 아닐까, 하고 짐작했더랬다.
그리고 정말로 신수가 신수를 사냥하고 있는 거라면, 두 친구가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산골까지 날아온 이유가 설명됐다. 전투 지향적이지도 않고 뿔까지 꺾인 담청색 기린은 신수 사냥꾼의 사정거리에 든 순간 바로 모가지가 날아갈 거라며 걱정했겠지. 그렇다면 실은 술기운을 빌리고 싶은 건 저 둘이었을 거다. 죽음은 저희 셋 사이에선 꽤 민감한 화젯거리였으니까. 사슴은 저희보다 단명할 인간이었고,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누가 먼저 갈 것인가는 정해져 있지 않은가. 거기까진 서로 각오가 됐더라도 엉뚱한 일로 순번이 뒤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으니 평정심을 유지할 턱이 없지.
그래, 여기까지 걸음한 까닭은 잘 알겠다. 그렇지만 정말 걱정도 팔자다. 지우스는 처음의 놀람을 털어내고 평소 자조하는 태도로 돌아왔다. 술기운에 뒤늦게 생각이 따라붙은 거다. 보통 신수는 신수를 알아본다지만, 뿔이 꺾여 신위가 깎인 저를 신수인 줄도 모르는 신수가 태반이 넘는다. 게다가 두 사람에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촌락에서 그가 날뛰지 않으리라는 짐작도 있었고.
기린은 그 속내는 밝히지 않고서 짐짓 예사롭게 입을 열었다.
“…눈에 거슬리는 신수를 사냥하는 거면, 여기서 조용히 사는 나는 맨 마지막에나 잡으러 오지 않을까?”
“그 말도 일리 있긴 한데.”
“보통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나.”
파디얀과 루디카가 합창하듯이 말했다. 둘이 참 일심동체라니까. 보고 있자면 맘이 편해져서 지우스는 괜히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너무 염려는 마. 그런 거물이 촌동네로 올 리가 없잖아.”
3.
―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지우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겉으로 티는 안 났을 테다. 마을 중간가는 아이가 제 소맷단을 잡고 “선생님, 봐봐요. 맞죠? 이상한 사람.”하며 천진하게 종알거리는 목소리만이 마을 어귀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을 곧잘 이상한 사람하고 불렀으므로, 마침 여기를 지나던 보부상인가 해서 가벼운 차림으로 엽전이나 좀 챙겨서 따라 나왔더니 웬걸, 어귀에 세워둔 돌문에 기대어 선 이는 빨간 깃을 단 투구에 까만 망토를 둘렀다. 틀림없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신수 사냥꾼의 몸맵시였다.
저자가 누구인지 모를 아이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면 어른들에게 알리라는 말을 잘 지켰으니 칭찬해달라고 칭얼거린다. 기린은 소맷단에서 아이 손을 떼어내어 등 뒤로 슬슬 밀었다. 금빛 시선은 신수 사냥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짐작이 맞는다면 아이를 해코지하진 않겠지만, 확률이 10할이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으니 아이를 두고 내기할 수 없다. 게다가 저자는 제가 신수라는 사실을 덮어줄 의리 따위가 없지 않나. 혹여라도 정체가 발각되는 사태는 피하고 싶었다.
신수 사냥꾼 새까만 닭은 장승처럼 우뚝 섰으면서 정작 이쪽엔 영 관심이 없는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시선을 확인할 수 없으니 장담은 어려워도 갑자기 덤벼들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십 초는 충분히 관찰한 지우스가 평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잘했다. 이제 형누나하고 가서 놀고 있어.”
“네에, 지우스 선생님!”
타박타박 아이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창을 꼬나쥐어 어깨에 걸치고 있던 닭이 입을 열었다.
“새파랗게 어린 신수새끼가 날 보고도 겁을 안 먹네?”
“…제가 신수인 걸 알아차린 존재는 신수 말고는 없었는데요.”
“흐음, 내가 인간인 걸 알아봤다 이거야? 신기한 놈일세.”
지우스는 그대로 말문을 잃었다. 그걸 보통 스스로 밝히나? 얼마 전 친구 입에서 들었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나름대로 상대를 놀라게 할 수단으로 품고 있었던 정보가 당사자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는 바람에 기린 역시 맥을 못 추고 말을 우물거렸다.
“…푸른 승냥이 님과 면식이 있어서, 이야기하다가 조금.”
“아. 아아아~, 걔는 하여튼 자기 맘에 든 애한텐 입이 가벼워.”
“승냥이 님은 말할 상대를 고르시잖습니까.”
그렇다. 푸른 승냥이 피도란스 님과 어찌어찌 이야기할 기회가 닿아 이런저런 말을 나누다가 들은 거였다. 신수를 사냥하는 신수라 알려진 새까만 닭은 실은 인간이라고. 뭐, 내가 옛날에 알았던 새까만 닭은 신수이긴 했지만. 그러면서 콧잔등을 문지른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부탁해왔었다. 다른 애들한텐 비밀로 해달라고. 그 말 하나로 대강 전말이 꿰어졌더랬다. 새까만 닭이라는 신수는 실제로 존재했으나, 무슨 연유인지 천수를 채우는 대신 인간에게 자기 존재를 입게 한 거다.
저자가 인간이라고 얕볼 생각은 추호도 없고, 애시당초 싸움과는 거리가 영 먼 제가 ‘사냥꾼’이라고 이름 붙을 만한 이와 겨뤄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기린은 슬몃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 저는 산골에 있어서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만….”
“네가 뭐 정보상이라도 돼? 거 되게 자의식 강한 놈일세. 하긴 신수란 것들이 다 그렇지 뭐. 내 이명을 알고 있다면 빠닥빠닥 알아차려야 할 거 아니야, 서당 선생.”
“…모든 신수를 사냥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당신은.”
“―좋아, 배짱 합격. 머리도 잘 돌고.”
“네?”
기린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아니, 목소리 깔면서 으름장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이게 뭔 말인가. 남들과 대화하면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적은 없었는데, 새까만 닭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면 쇠투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을뿐더러 전조조차 몰랐다. 식은땀이 났다. 전력 차를 과시 당했다. 어쩐지 투구 안에서 히쭉 웃는 기색이 났다.
“내 친우를 죽인 새끼를 찾고 있거든. 좀 도와라.”
“거절하는 선택지는 없겠죠.”
“잘 아네. 그래, 머리 돌아가는 애들은 말이 빨라서 좋아.”
그러면서 창을 휘릭 돌려 자루 쪽으로 제 머리를 툭툭 쳤다.
겨우 닷새 만에 새까만 닭은 마을에 의뭉스럽게 스며들었다. 여행객이라는 사람들이 지우스의 친구를 지칭하며 찾아온 적이 많아, 그 역시 제 친구라고 말을 맞추게 됐다. 친구라고 퉁치지 뭐, 말 놓아.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아니 놓으라곤 했지만 냉큼? 그래서 뭐라고 부르면 되지? …와론. 닭이 허 참 나, 하며 투덜거렸지만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지는 않았다. 그가 밝힌 이름이 본명일지 아닐지 굳이 추론하지 않고 지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론은 특히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와론! 술래잡기 같이해!”
“아니, 왜 쟤는 선생님이고 나는 막 불러?”
“그치만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와론은 와론이잖아!”
“그치~.”
“나, 목말 태워줘!”
“내가 먼저야!”
“아니야, 술래잡기!”
“내 몸뚱어리는 하나야, 이 맹랑한 꼬맹이들아!”
까르륵 하하! 땡볕 아래에서도 몇 시간은 너끈히 뛰어노는 아이들은 곧잘 지쳐서 널브러지는 서당 선생님보다 저희들과 언제까지고 어울려 놀 체력이 되고 반응이 좋은 그를 훨씬 좋아했다. 그 모습에 지우스의 심경이 복잡해지건 말건,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의 든든한 보호자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서당 선생님은 비리비리해서 좀 걱정됐다나.
“와론 씨가 와서 참 다행이여, 안 그려?”
“고럼. 청년인지 처자인지는 몰라도―,”
“예끼, 이 사람아. 그게 뭔 상관인감. 애들 잘 놀아주고, 어, 힘도 세 가지고 이것저것 번쩍 날라다 주는데.”
…정말 심경이 복잡했다. 속닥거림을 들은 와론이 도중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지우스는 시선을 외면했다. 흐흥~, 하고 으스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여우와 사슴이 다시금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이번엔 평범하게 조언이 필요한 거라 인지를 가리지 않아 마을 사람마다 “군수님 오셨소? 오랜만이구랴.”하며 인사를 받았다.
기린은 집에 있었다. 아이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꼬마들을 내쫓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잘 됐다 하고 말았다.
“―라고 생각해. 실제로 적용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네 말인데, 맞겠지, 뭐.”
“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좀 무겁다….”
“어휴, 친구의 신용을 그렇게 표현하다니 박하다 박해!―어, 루디?”
“…조용히. 누가 온다.”
파디얀과 지우스가 행정 관련 안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루디카는 친구 둘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화롭다, 하면서. 그러다가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순간, 눈빛을 바꾸며 벌떡 일어났다. 손에는 폴스를 쥔 채다. 누가 봐도 전투 태세라 파디얀 역시 숨을 죽였다. 지우스 혼자서 멀뚱하니 있지만 얘가 인기척에 둔감(어디까지나 여우에 비해서)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닌지라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가 아니야. 피 냄새가 짙게 밴 놈.”
“음, 아이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은데.”
“저기―,”
무어라 말하는 기린을 무시하고 저희끼리 먼저 치고 가는 게 나은가를 논하는데, 그것보다 먼저 문이 열렸다. 까만 망토, 쇠로 된 투구, 그 위의 빨간 깃. 누가 봐도 신수 사냥꾼 새까만 닭이 거기 있었다. 그것도 아이 하나를 목말 태우고서. 부조리 자체였다. 왜 이 자식이 여기 있느냐는 놀람과 그 신수 사냥꾼이 왜 아이를 목말 태우고 있느냐는 황당함. 말이 안 나올 정도여서 입만 뻐끔대고 있으려니 뒤에서 지우스가 푹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말하려고 했는데….”
“뭐야, 기…지우스, 친구들?”
“와아! 루디 언니, 파디 언니! 오랜만이에요!”
“그, 그으래, 우리 귀여운 아실. 오랜만이네~.”
“…잘 있었니, 아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마를 짚은 기린과 아이를 목에 달고 있어 멈칫하며 이름으로 바꿔 부른 닭과 어른들 사이에 흐른 미묘한 공기 따위는 전혀 모르고 해맑게 두 언니에게 인사하는 아실리아와 낭랑한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리며 인사를 받아준 사슴과 여우까지.
다시 정적이 흘렀다. 겨우 2초 남짓했지만, 시선끼리 무섭게 부딪친다. 이번에 분위기를 무른 건 기린이었다.
“그래서? 다른 애들은 어따 두고 아실하고만 온 거야, 와론.”
“이 꼬맹이가 말야, 자꾸 우기잖아.”
“흥, 와론 바보. 내가 와론보다 더 오래 여기서 지냈는데 모를까 봐? 선생님, 선생님. 있죠, 리우 네 돌담 안쪽에 자라는 그 꽃이요, 그거, 5월에 피는 꽃 맞죠? 이 언니가 자꾸 4월이라고 우겨요!”
“아니, 4월 맞다니까?”
지우스가 여상하게 입을 열기가 무섭게 어른과 아이가 떼쓰듯이 거의 동시에 말을 쏟아냈다. 투구 속에서 성별이 확실치 않은 낮은 편인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그 위에 아이 특유의 높다란 목소리가 얹혀, 끝내주는 화음을 이뤘다. 옆에서 이 대화를 들은 루디카와 파디얀의 어깨가 팍 처진 것은 물론이다. 이 무슨 유치한 말싸움이란 말인가. 정작 판결을 위임받은 기린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지고 있었다. 가진 지식과 자기 기억을 대조하는 모양이다.
얼마 안 되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 꽃은 4~5월에 핀다지. 그런데 우리 동네에선 늦게 피는 편이라 5월에 피어. 리우 집의 그 꽃에 한해서는, 와론 네가 틀렸다.”
“뭐!?”
“와아!”
희비가 교차했다. 비명과 환성. 아실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 가라!”라고 외치고 투구의 빨간 깃을 잡아당겼다. 모양새만 보면 말을 끄는 듯했고, 실제로도 그런 내기였는지 새까만 닭이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그대로 내달렸다. 폭풍 같이 왔던 2인조는 폭풍 같이 사라졌다.
잠시간 멀뚱히 서 있던 친구 셋은 충분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맞닥뜨려 어이가 없어진 건 매한가지다. 루디카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냅다 기린의 멱살을 쥔 거다. 말릴 생각이 없는 사슴은 덤이다. 머리 하나 분만큼 땅에서 떨어진 기린은 하릴없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할 말도 예상이 가서 얌전할 수밖엔 없다. 오히려 목이 졸리지 않게 쥐어 올릴 정신이 있으니 머리꼭지 돌아버릴 정도로 화난 게 아닌 거라는, 여우 본인이 들었으면 그대로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생각이나 했다.
“기린 너 제정신이야?―그래, 어디 입이 있으면 말해봐.”
“….”
숨통만 덜 졸렸다 뿐이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손을 휘적거리니 재깍 알아듣고 여우가 손을 뗐다. 콜록거리며 숨을 고른 기린은 두 사람의 시선을 똑바르게 마주하며 답했다.
“내가 스스로 믿지 않은 말이나 행동, 안 하는 거 알잖아.”
“알지. 그래서 안 믿겨. 너, 저 자식을 믿어?”
“…믿냐 안 믿냐의 둘로 나눈다면, 믿지.”
존재해온 시기가 비슷한 동기가 자기 신념에 얼마나 투철한지 회적색 여우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는 반박 대신 씨근대는 숨을 몰아쉰다. 인간을 신수와 나란히 두겠다는 기린의 주장은 천명을 거스른 것으로 치부되어 뿔이 꺾였다. 그 주장을 들은 낮과 한밤 자고 났던 아침을 십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놀랐는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그럼에도 이 친구는 자기 뜻을 꺾지 않고 차라리 잘 됐다며 냉큼 인세로 내려갔더랬다.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가뜩이나 요 30여 년 사이에 탄생한 신수들은 하늘과 땅이 점점 멀어져서인지 태곳적은커녕 검붉은 하마의 세대보다 타고난 힘이 약했다. 온전한 채여도 인간을 간신히 압도하는 정도여서 일대다 쪽수로 밀리면 답이 없는데, 원래부터 싸움에 강하지 않은 놈이 힘도 잃어놓고 인세간人世間으로 향한다니. 중앙 산맥에서 부대끼며 지냈던, 이대로 잔잔히 존재하려 했던 동기들이 쟤를 어쩌냐며 우르르 따라나섰다. 남은 사람 없이 모두가 그랬다. 누구는 방랑객이 되고, 누구는 어딘가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덕분에 다양한 경험을 했다. 본래라면 존재도 몰랐을, 소중한 사람도 만났다.
파디얀과 만나게 된 계기는 틀림없이 이 애의 파격적인 주장과 그 여파이다. 빚 아닌 빚을 갚게 두지 않는, 빌어먹을 동기 놈. 루디카는 잇새로 욕을 짓씹으며 두 걸음 물러섰다.
여우와 갈음하듯이 사슴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분에 겨워 훌쩍이기 시작한 짝꿍의 손을 잡은 채다. 기린도 이번은 움찔했다. 흰 사슴은 화가 날수록 더 해사하게 웃곤 했다. 루디를 좋지 않은 일로 울렸으니, 지금 이 하얀 머리의 고덕高德한 군수님께서는 화가 단단히 났을 테다.
“지우스. 나는 너보다 사람들이 잔머리 쓰는 꼬라지를 많이 봐왔다고 자부해. 그건 인정하지?”
“…그렇지. 그런 정치판은 내 전공하고는 거리가 있으니까.”
“자, 그럼 그 점을 염두하고 대답해. 루디만큼은 아녀도 나는 널 알아. 새까만 닭이 방금 같은 상태였을 테니 잠자코 있었을 테지. 저게 위장이라고는 의심 안 해? 네가 완전히 맘을 놓고, 우리들도 경계 안 해도 되나보다, 하는 순간 돌변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난 새까만 닭을 믿어.”
“십년지기인 나보다 더? 너와 존재를 쭉 함께해 온 루디보다도?”
“…너희와는 분류가 다르지만, 그래도 확신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했건만 흔들림이 없었다. 파디얀은 가릴 생각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대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이렇게 흘러가리란 짐작은 있었다. 루디가 중앙 산맥에서 떠나왔을 당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해줬던가. 이 고집쟁이. 이래서는 저희는 저희대로 방비해야 했다. 지우스가 무르게 구는 만큼 저희가 신수 사냥꾼에게 강하게 나갈 수밖엔. 어느새 울음을 그친 루디카와 시선을 마주하면 끄덕임이 돌아온다.
바깥에는 숨기지 않는 기척이 났다. 아실을 데려다주고 온 신수 사냥꾼이 밖에 있는 듯했다.
“지우스, 그럼 이다음에 있을 일은 참견하지 마.”
“…내가 너희를 어떻게 말려. 그럴 힘도 없어.”
기린 역시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예상 가는지 뒷짐 지고 물러났다.
담벼락 위에 쪼그리고 아까는 없었던 창을 어깨에 걸친 새까만 닭은 아실이라는 꼬마가 함께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냈다. 그야 그렇다. 여우도 처음에 공언하지 않았나. 피 냄새가 짙게 밴 누군가가 온다고. 인간의 후각에는 잡히지 않아도 오감을 훨씬 예민하게 만들 수 있는 신수라면 알 수 있었다.
저를 항한 적의를 마주하고서도 닭은 태연했다. 히죽거리는 걸 보면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명 그대로 신수 하나야 일도 아니란 걸지도 모른다.
“회적색 여우, 맞지? 싸우려고?”
“필요하다면.”
“그럴 리가. 여기는 너희 친구들한텐 중립지대라며? 친구끼리 주먹다짐 좀 하려고 해도 마을은 벗어나야 할 텐데, 하물며 이 나를 상대로 마을에 피해 안 주고 싸울 수 있어? 아, 그래, 나한테 단박에 목을 따이면 그렇게 될 테지, 하하하!”
그야말로 광소였다. 도발 당한 여우는 어금니 사기질이 갈릴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 반박할 길도 없었다. 기린이 저기까지 구구절절 설명할 놈은 아니었으니, 저 자식은 몇 마디 이야기를 듣고 판단했겠지. 전부 정곡이다. 뿔이 꺾이고 신수로서의 힘을 상당수 잃어버린, 인간의 강함을 알지만 신수들 싸움 틈바귀에 걸렸다간 단번에 스러질 삶의 연약함 또한 아는 친구를 위해 저희 동기끼리 그렇게 약조하지 않았나.
그러니 여우는 무기를 겨누는 대신, 노란 눈에 살기가 쨍쨍하도록 노려본다. 시선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진작에 뜯어 발겼을 기세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숨을 몰아쉬던 그는 결국 폴스를 거뒀다. 무기는 사라졌지만, 기세는 그대로인 채로 회적색 여우 루디카는 새까만 닭에게 한 글자씩 눌러가듯이 또박또박 말한다.
“저 바보 같은 동기도, 이 마을도, 건들면 가만 안 있을 거야.”
“네네~ 그러시던가요.”
살기 듬뿍 담긴 으름장조차 가볍게 넘겨버린 새까만 닭을 뒤로 하고 사슴과 여우가 떠났다.
두 사람은 당연히 저희 동기들에게 이 소식을 돌렸다. 덕분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명목을 세워 근처에 머무는 동기 수가 확 늘었다.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친구들은 견제 목적을 겸해 발길 닿는 곳마다 신수 사냥꾼의 위치 정보를 풀었다. 제아무리 그 신수 사냥꾼이라도 쪽수는 못 이기지 않겠느냐는 거다. 허튼짓하면 여기, 결집할 무리가 있고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어 하는 외부인도 많으니까.
덕분에 세상사에 관여한 신수치고 새까만 닭의 현 소재지를 모르는 녀석은 없게 되었다.
4.
대치 상태 아닌 대치 상태는 한 달하고도 보름을 넘어섰다. 산자락 주변에 그 어느 때보다 신수가 많이 모였다. 새까만 닭이 어중이떠중이라고 칭한 그들 대부분이 기린과 여우의 동기들이었다.
와론은 내키는 대로 지냈다. 때로 “내 철천지원수 놈 정보 좀 찾고 올게”라며 이틀 사흘 사라지기도 했고, 어느 때는 일주일은 내리 마을에 붙어 아이들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기린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 행보였다.
그러던 어느 밤. 기린은 문득 눈을 떴다. 인기척 하나가 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새까만 닭은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반드시 행선지를 밝히고 움직였다. 꽤 의외롭다고 생각했고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이 점이 의심스럽지 않은지를 검토까지 했으니 틀림없다. 기척이 빠르게 멀어지다가, 흐려진다. 아차.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신수의 힘을 쓸 뿐 바탕은 인간인 새까만 닭이지만, 신수여도 당장은 인간과 비등비등하거나 못한 제가 그를 놓쳤다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다.
‘별수 없지….’
지금 따라가야만 했다. 와론을 믿지 않는 게 아니다. 새까만 닭을 믿느냐는 사슴의 물음에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믿기야 한다. 그저 친구들을 믿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일 뿐. 담청색 기린은 새까만 닭을 짐작했고 알았다. 마음을 다해 우정을 믿는 것과 해는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는 명제처럼 당연한 현상을 믿는 것은 역시 분류가 다르지 않나. 새까만 닭에 대해서라면 후자와 결이 같았다.
신수 사냥꾼은 다른 이유가 있어 저와 접선했고,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이런 촌극을 벌이고 있는 거다. 너는 나를 쫓아올 수 있을 거라고. 엉뚱한 믿음이지만, 신뢰는 신뢰로 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그의 뒤를 쫓아 답을 듣고 저 역시 숨기고 있던 손패를 밝혀야 했다.
담청색 기린은 기도하듯이 손과 손을 맞댄다. 사상지평.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비틀어 엎는다. 빛 한 점 없던 방에 새파란 번개가 난란爛爛한다. 그러면 기린에게서 한쪽만 남은 뿔이 흐리게 드러나고, 평소 풀빛인 머리칼이 맑은 옥빛으로 차오른다.
발굽이 땅을 박차고, 평소의 그라곤 생각되지 않는 몸놀림으로 저 멀리 멀어지는 까만 망토를 쫓았다.
예상대로였다. 저를 걱정하는 친구들이 없는 뒷산 언덕에서 새까만 닭은 보란 듯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허공에다 말하는 꼴은 보통은 어리둥절하겠으나, 제가 힘을 숨겼듯이 저쪽이 숨기고 있던 것 중 하나겠거니 했다. 어차피 태곳적 신수가 살던 시대는 태반이 비밀에 부쳐져 있으니까 그런 종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응, 덫은 놓았어. 슬슬 움직일 때가 됐지. 네프렌은 이모 보고 싶다고 안 해? …쳇. 아, 손님 왔다. 나중에 원흉 모가지 들고…아니, 알았다고. 농담도 못 하냐, 트루ㄷ―쯧. 성질머리 급하긴.”
가만히 기다리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던 와론이 혀를 차더니 저를 홱 돌아보고선 휘유~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이게 ‘그거’구나?”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건 그만둬, 새까만 닭. ‘사상지평’을 확인하러 온 건 아닐 테지. 네 목적 중 하나는 맞겠지만.”
“그걸 사상지평이라고 부르는구나? 어쨌든 넌 말이 빨라서 좋아. 뭐, 신수는 싫지만.”
담청색 기린은 와론에게 사상지평으로 드러났던 자신의 신수 본체를 확실히 보여주고서야 역전逆轉했던 장을 돌이켰다. 지금 그릇에는 버겁도록 넘치는 힘이라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렸다.
“날 정보원으로 쓰겠다는 건 거짓말이었겠군.”
“마을에 콕 박힌 책상물림한테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지.”
“친우에 관한 것도?”
“…난 그 애에 관해서는 거짓말 안 해. 그리고 실행범은 찾아서 조져버린 지 오래고.”
“그렇다면 그 목걸이는 유품이겠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기린이 눈짓으로 녹색 돌을 가리키자, 무의식적으로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와론이 고개를 홱 돌렸다.
“…….”
“정답인가.”
그 무언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지우스에게 와론이 으르렁대듯 위협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머리 좋은 건 좋은데 눈치까지 빠르면 싫어.”
“…실수도 아니고, 처음부터 들킬 작정이었으면서.”
“야, 넌 방금 내 말을 뭘로―어휴, 됐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드디어 본론이었다. 투구 때문에 눈을 직접 본 일이 없지만, 그의 창처럼 곧은 시선이 저와 딱 마주쳤으리란 확신은 있다. 지우스는 신수 사냥꾼이라면서 신수인 저를 내버려 두는 그의 의중을 기다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넌 네 뿔을 꺾은 게 정말 하늘이라고 보냐?”
“뭐?”
“얼씨구. 반응을 보아하니 의심한 적이 없구만. 이래서 샌님은.”
의외로운 말이었다. 여기서 제 꺾인 뿔 이야기로 흐를 거라곤 추호도 생각해보지 않아 절로 외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러면 그의 창 론누처럼 꼿꼿하게 등을 펴고 있던 닭이 껄렁한 태도로 돌아가 혀를 쯧쯧 찼다. 서당 선생님답게 아이들 예의범절의 본이 되지 않는다며 핀잔하곤 했는데, 이번은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생각이 갑자기 많아졌는지 혹은 그길로 멈췄는지 굳어있는 기린을 두고서 새까만 닭은 전대 기록자의 두루뭉술한 예언 몇 줄에 첨언을 붙이고, 가설 하나에 가위표를 친다. 이치를 뒤트는 천지명동天地鳴動하는 힘이 있다. 갈래길을 선택하라. 직접 보고 확인한바, 담청색 기린에게 내려진 사상지평은 이치를 뒤트는 힘일지언정 신수 사냥꾼이 처단할 목록에 있지 않다.
말로만 들은 네프렌의 엄마 씨가 남기고 떠난 글귀가 가리킨 인물이 담청색 기린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저의 가설뿐이다. 태고의 기록을 이어받은 두 번째 기록자 트루디아가 제공한 정보를 신수를 쭉 사냥해온 사냥꾼의 시각에서 해석하여 내놓은 단 하나.
담청색 기린은 제가 떨군 폭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연막은 잘 들었다. 사냥꾼이란 자고로 숨죽여 기다릴 때도 알고, 사냥감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미끼를 쥐고 흔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투구 속에서 백발의 여성이 초승달처럼 날카롭게 웃었다. 누구도 보지 못한 비소誹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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