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양이

말토의 탄시린과 팅크. 기사 회색 족제비

231015

*애늙은이 외전까지 스포 有

*팅크 X 탄시린 논컾

그 기사는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은 검게 죽은 피가 독과 같이 여기 저기 널려있고 보기에도 혐오스러운 핏덩이를 입에서 울컥울컥 뱉는데도 말이다.

그건 전투를 치르면서 수없이 봐온 광경이다. 그러나 죽으려 하는 자는 보지 못했다. 그에게 명예란 탄시린이 지닌 것 같이 값싸지 않았다. 그것마저 남에게 넘겨 타인의 말에 속한 무언가가 되면 팅크는 완전히 부서질 것 같았다. 그에게 단 하나 남은 고결한 것이 있다면 기어스를 어기지 않았다는 것이기에. 그는 차라리 죽으려고 하고 있었다. 

팅크. 당신은 명예를 위해 동생을 죽일 수 있나요?

생명은 깨지기 쉽다. 그러나 자기의 책임 위에 놓이면 그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걸 버리고 도망가야겠다는 최소한의 자기보호본능은 가장 뒤로 밀리고 만다.  

마법에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탄시린은 별로 기뻐하지 못했다. 성정부터가 그의 가족들 모두가 그러하듯 감정을 앞세우지 않은 까닭도 있고 뭐든지 있으면 좋다는 사고방식은 약자로서는 지나진 낙천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빼앗기느라 얼마든지 더 큰 불행을 당할 수도 있다. 그 재능을 감당할 힘까지는 가지지 못했다. 탄시린은 기사가 되기 위한 견습기관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이 적중하듯 우디온에서 동생들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망토를 뒤집어 쓴 무리가 집으로 찾아왔다.

“네가 견습기사 탄시린인가?”

그들은 말토라는 집단이었다. 이들이 가족을 구실로 사람을 얽어매는 수상쩍은 집단이었다. 그런 이들이 하는 일은 어떤 위선을 가져다 대어도, 그 목적은 정상적일리가 없었다.

“당신에겐 마법의 재능이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말토를 위해서 일해보는 건?”

당연히 탄시린이 받은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제안이다. 견습기사의 일도 계속할 수 있고 동생은 그의 하는 양에 따라 곧 돌려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몇 개월간 말단으로서 맡은 일은 잡다한 것들이다. 대부분 무력이 약하고 겁 많은 마법사들과 함께 다니며 바람을 잡는 일이었다. 탄시린은 이것을 직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납치됐던 티르는 금방 돌아왔지만 집을 나갈 때에는 그에게 다른 말을 둘러대야 했다.

“누나.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알아. 이 일은 잠시만 하는 거야. 티르.”

“무슨 일인데? 저번에 그 사람들한테 가는 거 아냐?”

언젠가라도 동생에게 제대로 말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깊은가 보구나. 걱정할 필요 없어.”

탄시린은 티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데도, 자신에게 턱을 괴고 팔꿈치를 잡아오는 손이 너무나 연약하게 느껴졌다.

말토가 비밀결사가 아니었대도 대부분의 업무는 음지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불법이었다. 우디온 근처에 머물던 중에는 티르와 몇 번 맞닥뜨리기도 했다. 일을 하던 중이 아닌데도 망토를 뒤집어쓴 채로 딱히 티르에게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티르는 그를 알아본 건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멀어져 갔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탄시린은 가족을 볼모로 잡히지 않고서야 굳이 마법사가 될 마음이 없었다. 마법을 익히고 쓰는 건 나쁘지 않았으나 그 이상도 아니다. 재능으로 모든 가능성과 한계선이 결정되는 마법사들의 세계는 그들만의 도식으로 꽉 짜였으며 고작해야 식과 장치를 개발하기 위해 평생동안 탐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탄시린의 마음에 드는 것은 불,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기사란 명예라는 무형의 가치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불가해한 존재. 견습기사가 된 건 그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 불을 오래 들여다보면, 꺼지지 않을 듯 타오르는 열감이 자신의 안으로 옮겨와 언제고 새로운 발견을 할 듯한 맥동이 느껴졌다. 

준법사가 되고 나서 견습기사마저도 그만두게 되었다. 위에서 쥐여준 하마턱이라는 무기는 차갑기보다는 미지근한 쇳덩이였다. 무엇을 배합했는지 알 수 없는 합금에서는 묘한 온도가 돌았다. 마력이 웅웅 소리를 내며 장치 안을 진동했다. 몇 백년간 대륙의 가장 추운 극지방의 얼음 덩어리 속에 잠들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처음 만들어질 때 달구었던 불을 여전히 품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무기는 사용할 사람을 선택한다고 하던가? 탄시린은 그 무기의 주인을 생각하며 쇄곯은 감상에 빠졌다.

애초에 마법의 재능 때문에 더 어린 나이에 말토에 발을 묶였지만, 그 덕에 조직 내에서 수월한 생활을 했던 건 사실이다. 탄시린 본인은 다른 이들과 같은 처지라고 여겼으나 재능이 있고 순종적이라며 준법사의 직함이 주어졌다. 그들은 탄시린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고  탄시린의 필요도 거기까지였다. 간간히 기사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어쩌면 말토의 장점이다. 밀었던 머리가 금발로 자라나 다시 어깨 위를 덮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일을 쉴 때면 조용히 기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기사들의 가쉽을 다룬 황색지는 가판대에서 몇 푼으로도 살 수 있는 싸구려였지만 말토에서 들은 이야기와 짜맞추다 보면 그럭저럭 무엇이 사실인지 분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보지 못한 기사들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오래된 취미였다.

‘새까만 닭? 이 사람이 서쪽다리로?’

기사 사냥꾼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격기사 새까만 닭은-

올해의 기사시험에 눈 여겨 볼 만한 인재 31선, 그 중에서도 주목 받는 부분은-

회색 족제비가 최근에 서쪽다리에서 돌아왔으며-

탁한 눈으로 탄시린은 지면을 덮었다. 마지막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말토에서 그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성공해 지부에 합류하면 그를 굴릴 계획을 세우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가 힘들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잘 지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구태여 그늘진 곳을 찾아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살기 힘들수록 비인간적인 인간 소굴 같은 곳으로 숨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곳이야 말로 서로를 잡아먹는 일이 빈번하고,

말토는 그 중에서도 제일 최하에 위치한 것이 틀림없다.

살아 남으려는 발버둥조차 아무렇지 않게 짓뭉갤 수 있는 집단.

아직 기사가 되지 못한 견습기사나 신입기사들은 힘만 넘치며 순진하다. 그런 이들을 노리려 기사가 되는 코 앞에 도사린 개미지옥이 말토였다. 

"팅크를 법사들만의 힘으로 제어하기는 힘들어. 조만간 마스터피스를 요구해올지도 모르고. 이유 댈 만한 건 얼마든지 있잖아."

"바보 같긴, 기사를 모르나? 그들은 우리 마법사 같지 않아. 걔넨 하나 밖에 몰라. 훨씬 멍청하다고. 워낙 강해서 그런가,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는 의지가 일반인들보다 약해. 그러니까 기어스 같은 것도 알려주는 거지."

"걔네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건 하나뿐이야. 명예."

그러나 말토의 수법 앞에서는 놀랍게도 기사들조차도 명예를 굽힐 때가 있었다. 

“그러니 새까만 닭을 붙일 거야. 여차하면 닭이 그를 처리해주겠지.”

“기어스를 알려주는 건 목을 닦아놓고 사는 거나 다름 없다니까?”

침침한 토굴에서 법사들이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탄시린은 몇 번이나 검토한 불멸자에 대한 자료를 다시 들여다 보며 한 귀로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듣는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대충 짐작을 했을 텐데도, 이들 밖에 동생을 치료해줄 자가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팅크라는 자는 기약도 없이 이용당할 것이다.

사정이 딱할 수록 말토에서는 더 철저하게 이용 당하고, 더 심한 취급을 받는 명분이 된다. 단원에 대한 서류는 길수록 좋지 않다. 그만큼 그는 조직을 위해 희생 당할 이유도, 쓸모도, 철저하게 속박할 거리도 많다는 얘기였다. 도망에 성공할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결국 정식으로 머리를 밀고 나서 말토를 탈출한 자는 거의 없다.

그는 처음 만날 때부터 후드 안에 머리를 파묻은 채였다.

“야, 알겠냐? 여기서 마법사는 귀족 같은 거라고. 내 계급은 법사. 넌 초등법사니 내 말이 절대적이다. 알아들었냐고.”

계급조직인 말토에서 마법사가 가지는 권위는 절대적이다. 파린이 딱딱거리며 그에게 지팡이를 들이대다가 머리를 후려쳤다. 멈칫하던 팅크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피가 흐릅니다.”

“아, 걱정마. 우리가 치료도 안 해주는 사람들은 아니거든. 이래 봬도 마법 하나는 제대로 한다고.”

팅크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직도 마법에 기대하는 것이 남았는지 신기하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러니 니가 정신 차릴 때까지 좀 패도 괜찮지?”

어두운 후드 속에서 색을 잃어버린 건 밝은 진홍의 머리칼만이 아니었다.

“그러게 마법은 만능이 아니래도. 바보 같기는.”

파린이 투덜거렸다. 정말로 동생을 고쳐줄 거라고 찰떡 같이 믿고 있잖아. 짜증나. 팅크는 기대에 어긋나는 일은 거의 없어도 적극적으로 굴지 않아 파린의 속을 긁었다. 그런 팅크를 굴리는 건 일종의 분풀이였고, 그를 정말로 써먹으려면 동생을 들먹이는 일이 효과적이었다. 탄시린은 파린이 왜 그 방법을 쓰지 않는지 의아했으나 굳이 나서서 그를 괴롭힐 마음은 없었다. 그저 기사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뿐이다. 간절함. 기사인데도 불구하고 팅크는 탄시린과 같이 가족애에 휘둘리는 인간이었다. 그 간절함 때문에 말토의 어떤 무리한 요구에도 응했다. 무력으로는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는 이들의 발밑에서 굴렀다. 탄시린은 이제 더는 간절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처럼 쉽지 않으니 숨기는 요령이라도 배웠지만 팅크는 늘 반응이 또렷했다. 소중한 이에 대한 간절함. 기사나 불멸의 삶, 이루고 싶은 소망. 그런 건 보여봤자 약점이 되는 세계다. 그는 탄시린처럼 체념하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무시아나 말토의 간부들과 달리 파린은 단순히 패는 쪽을 더 선호했다. 팅크에게 남은 자존심 따위는 없었지만 손을 더럽히는 일에 있어서 특히 약자가 관련된 경우에는 약간의 저항을 드러냈다. 동생까지 입에 올리게 만드는 일은 파린도 찝찝해했고, 팅크는 고문을 받는 듯한 표정을 지었기에 너는 법사지 기사가 아니라는 귀 따가운 말과 함께 억지와 무력으로 그를 타일렀다. 팅크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고집을 꺾는 일에 적응했다. 떨리던 눈에 점차 무감한 정당화가 서려갔다.

그러면서도 그가 아직도 기사라는 사실은 부조리 그 자체였다.

탄시린은 그런 그가 불쌍했다. 감히 팅크를 연민하자니 기사라는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탐이 났으며 동정 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완전히 이들에게 동조한 자신의 삶은 얼마나 쓰레기 같던가. 그건 그거고,

인간적인 감정이 솟아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팅크를 보면 자꾸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팅크는 자진하여 장군과 결투를 벌이다가 중독되어 사경에 처한 것이다.

팅크가 지금 죽는다면 더 이상 치료를 받지 못할 그의 동생을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탄시린은 그것을 하지 못해 말토에 매였다. 그렇지만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사를 버리지 못했다.

검붉은 하마를 만난 뒤 자신의 이명을 여러 번 입에 올렸어도, 그에게 기사란 이름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주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팅크는 여전히 기사였으며 탄시린은 아니었다. 기사란 대체 무엇이지? 결국 그들이 가진 하나 남은 명예를 넘겨 팅크를 살리도록 설득했다. 더 이상 같은 처지라는 동정은 들지 않았음에도, 죽어가는 그를 살린다면 이전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피어오른다.

복잡한 사고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탄시린은 자신의 손으로 팅크를 구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찾는다. 그가 터트리는 숨이 자신에게 마치 동생을 버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아가는 것이 기사라고 외쳤던 걸까. 그는 살기를 단념해서라도 기사이고자 해서 어느 때보다 절박한 모습이 탄시린에게도 옮겨 붙고 있었다.

자신은 말토의 심복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을 죽이고, 가족들의 등 뒤에서 독을 먹이고 속이며 힘을 휘둘러왔다. 그저 지독하게 현실을 직시해왔으나 그런다고 말토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도 없다. 탄시린과 티르가 여기에 말려든 것은 자신이 나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황을 좇아 사는 이들을 위해 손을 더럽히는 것보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때 기사란, 회색 족제비란 세상의 모든 사랑을 받는 총아 같아 보였다. 그러나 고통스러워하던 팅크의 눈에 어린 빛은 살기와 닮아있었다. 기사들은 완전히 선으로도, 그렇다고 악으로도 기울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사람에게 받은 정으로부터 독립하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탄시린은 그가, 회색 족제비가 이곳에서도 여전히 기사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팅크,

나는 말토를 나오고 싶어졌어요. 당신처럼 죽더라도 온몸에 족쇄를 감고 죽고 싶어졌어요.

말토였던 내가 기사가 된다면,

이곳에서 좌절하던 당신도 한번 더 기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이 다시 한번 당신에게 기댈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그런 당신을 의지하지 않을까...

결국 직접 기사가 되어 그 길을 걸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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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크는 자신에게 주어진 무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빨'

그것은 그가 어릴 적 부터 동경하던 영웅의 마스터피스와 닮아있었다.

2년 남짓을 기사가 되어 보낼 때였다. 기사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신입기사이자 촉망받는 인재에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쪽다리에서 쫒겨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말토에 들어갈 터무니 없는 자금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토에 입단하여 일할 것을 강요했다.

기사는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러나 팅크는 마치 기나긴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기사가 되고 영웅을 바라왔던 순간들은 아득한 공상의 감각으로 흩어졌다. 아니라면 이 편이 현실일지도 몰랐다. 영웅은 책 속에만 실존하며, 현실은 이토록 괴로울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자신이 산산히 사라진다는 건 비참하다,는 감정마저 무너트리고 마치 몸을 도려대는 듯했고 이상은 항상 그의 등에 대고 칼을 갈고 있었다.

영웅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 팅크는 내내 험한 꿈에 시달리며 검을 고쳐잡는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는 정신이 반쯤 사라져 알아채지 못한 새 불멸자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 불멸과 마법이 존재하는 헛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은 악당이었으나,  

“네 명예를 내게 한 번 맡겨라. 팅크.”

그 말에 대답하면 다시는 이명을 말하지 못하고 푹 꺼져버릴 것 같았다.

팅크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순수함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게 있으니까.

평화스런 이상만으로 나아갈 수 없어 칼을 쥐고 싸워나가야 하고 영웅에 대한 동경에만 머물러서는 자신도 상황도 바뀌지 않으니 가만히 멈춰서지 않는 것이 그가 찾아낸 답이다. 이 때를 버텨내 타민을 살리기 위해 그치지 않는 것. 기사로서 지킬 최소한의 수단과 방법도 여전히 강구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타민이 나을까? 이들이 타민을 언제쯤 고쳐줄까. 그때가 되면 자신은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를 떠올리면 눈 앞은 다시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사의 행세를 하는 누군가의 꿈은 아닌가.

“끝이다, 오늬.”

자신의 목소리가 지독히 타인의 것처럼 울렸다.

“…너희야 말로 잊어버린 건가.”

말토는 팅크를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이 다뤘지만 정식적으로는 조직원이었다. 오히려 동생을 볼모로 잡혀 협박 당하는 경우보다 더 치욕스러웠다. 그가 막아선 조직원들도 자신과 똑같은 처지였음을 알아서 더 거리낌 없이 칼을 찔러오고 있었다. 마치 기사가 되지 못하고 꺾여버린 이들의 울분을 서로 토해내는 양이다.

말토는 꿈이 꺾이고 명예를 더럽힌 불완전한 기사들과 견습기사들이 처박힌 무덤 같은 곳이기도 했다.

부정해보려 했지만 부인할 수 없다. 말토는 결국 손 쓸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는가. 악을 행하는 집단 안에 속한 하나하나는 아무 적의도 없이 그저 삶에 필사적이었던 결과임에도. 그런 자들을 뒤에서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자들이 있는 한 이들은 평생 칼끝을 더럽히며 살 수 밖에 없는가. 진리에 필사적이라는 이들의 결과물도 이토록 추악할 수 있는 건가. 영웅을 바라왔던 자신이 겹쳤다. 정당화는 나락과도 같다. 동생의 병환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댈 수록 밑으로 굴러 떨어질 뿐이다.

말토를 없애는 건 정의가 아니다. 자신이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건 받아들였으니까.

이들을 일률적으로 단죄하는 방법은 정의라고 불려서도 안되는 것이다. 이 편을 선택한 팅크에게 더는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팅크에게 다시 한번 스스로의 명예가 주어진다면

그는 영웅이 될 것 인가. 기사가 될 것 인가?

나는 기사.

기사는 기사

기사란…

강한 기사가 되고 싶었다.

이명을 받았던 날의 연설과 같이.

견습시절 스스로가 꾸었던 꿈과 같이.

수없이 되풀이 해서 너덜해진 책의 주인공처럼.

기사는 힘을 가져서가 아닌 강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건 어쩌면 대단히 영웅적인 일은 아니었다.

칼날이 가슴을 찌르자 팅크는 꿈이 산산히 부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면에 꽂은 송곳니의 칼날에 자신의 모습은 비추지 않는다. 

맹세는 무엇 하나 어기고 싶지 않았지만 영웅이 된다는 맹세를 지키지 못했으니.

네 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타민.

미안해.

.

.

.

.

.

탄시린은 팅크가 그런 식으로 명예를 지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마턱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갔다.

말토를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오래된 소굴은 수도에서 파견된 자들에 의해 하나도 남김없이 해체될 것이다. 조직에 속한 기사들은 공개되기도 하고 더러는 위의 입김이 있어 감추어지기도 했다.

“이제부터 어쩌시려구요.”

파린은 늘상 그러하듯 이를 딱딱대며 대꾸했다.

“글쎄 말이다-. 팅크도 죽어버렸고- 말토도 사라졌고. 젠장. 이젠 오히려 기사 놈들을 피해 다녀야 되게 생겼네. 넌 어쩌려고?

“저는”

“기사가 될 겁니다.”

“... 그래.”

완벽한 비밀은 세상에 없다는 건 말토의 조직원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파린은 탄시린과는 달리 말토에서 나고 자라 특권을 가진 법사로서 살아왔으나-그러나 그만큼 노동과 공부를 하기도 했다-이제는 탄시린과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전과자가 되었다. 한 사람의 역사는 그림자 같이 어딜가든 따라붙겠지만 더 이상 말토가 아닌 서로에게 말을 얹는 것도 참견이리라.

“뭐 동생은 이제 괜찮다고 했나.”

“...”

애초에 동생에게는 말토를 제외하곤 문제될 것도 없을 터임을 파린도 뒤늦게 떠올렸다. 탄시린은 공범이나 다름없는 그를 책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둘 다 잠시 말이 없었다.

“…보급이었다고 해도 하마턱을 그럴 듯하게 다뤘던 건 너밖에 없었으니까 말이야. 내부를 연구하겠다고 그 개고생을 해서 가져온 놈들은 제대로 감당도 못하고, 썩히자니 아깝고,”

하마턱은 겉면을 뜯지 못해 그를 이용해 마력을 연구하는 계획은 그대로 폐기 되었다.

“팔아버렸다가는 추적 당할까봐 두려웠겠죠.”

“어엉? 그런 건가?”

하긴 우리 눈으로 봤지... 파린은 고개를 돌리며 난감하단 표정으로 혀를 찼다. 레툰에서 상공 몇 미터 위로 마력을 뿜으며 동토를 부숴대던 괴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니 뭐 실제로 용을 보기도 했고... 그런게 존재한단 걸 알았으니 난 연구나 해야겠지.”

그딴게 왜 존재하는 거람. 파린은 이를 마주 붙이고 속으로 중얼댔다. 탄시린은 말토 법사에게 그렇게 얻어맞고도 그 뒤로는 어딘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 살판 났네.”

파린은 그렇게 비꼬면서도 비웃지 않았다. 그럼 잘 살아라. 둘은 핀타스에서 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트루디아와 그 일행들과 재회했다.   

“그래요? 있잖아. 탄시린. 같이 재밌는 거 하러 가지 않을래?”

“우린 지금부터 팅크네 집을 박살내러 갈 거거든.”

“뭐야. 그것 때문에 절 찾아온 거군요.”

탄시린은 그의 집이 어디있는지 잘 알았다. 트루디아가 싱긋 웃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할 이야기.

누구도 기억해서는 안 되는 싸움들.

불멸자, 용, 도시전설 같은 비밀집단의 이야기.

나약한 인간성을 가진 불멸자. 자라지 못한 용. 명예를 저버린 기사. 타락해 미쳐버린 마법사들의 이야기.

영웅 없는 영웅기사의 이야기.

목소리를 빼앗은 대륙을 버리고 떠난 가족과 그의 오빠였던 오늬의 이야기.

죽음을 앞둔 시한부 견습기사의 이야기.

세상에 이성이나 이상 따위는 없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인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격기사는 곧 자격을 갖춘 기사로, 항상 그 자격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기사이다. 탄시린은 하사된 어금니의 손잡이를 만져보았다. 새로 받은 또 하나의 그노제스제 무기는 그토록 험한 전투에도 별다른 흠집이 없이 날이 서있다. 뭉툭한 손잡이의 감촉이 손 안에 딱 들어온다.

"그대는 앞으로 기사, 옥색 고양이다. 이름에 걸맞는 명예를 행하여 업적을 쌓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그대는 그대의 명예에 따르는 한 황제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가?"

"기어스는 그대에게 치명적인 족쇄. 그대는 기어스를 감내할 것을 맹세하는가?"

"그대는 악마기사와 같이 되지 않고 그대의 목숨보다 명예를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예"

탄시린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족쇄를 짊어지는 것은 그가 평생 바라왔던 일이었다. 그가 감내하기를 바라왔으며, 맹세하기를 기다려왔던 것이다. 

이전에도 짊어졌던 족쇄가 있다. 그것에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이제껏 그의 명예가 값싸게 이리 저리 팔려도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스스로 떠받은 무직한 무게로부터는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옥색고양이 탄시린, 그대의 기어스는..."

어제까지 말토였던 고양이 하나가 기사가 되었다고 해서 새삼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미 기사일생 내내 자신을 따라다닐 오명을 각오했으며, 그럼에도 탄시린은 기사가 된다.

팅크, 당신이 살았더라면요. 분명 말토를 그만두었겠지.

난 당신이 아니었다면 평생 말토에서 썩었을 테니..

당신이 무엇을 믿고 살았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날이 오면 당신이 의지할 수 있었던 무언가를 찾아내었으면 한다. 이것은 끝이 아니므로. 당신에게 제이름을 돌려 주었던 것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때 당신은 이 말을 믿어주었으면 한다. 내가 당신이 믿던 것들을 찾아 돌려주겠다고.

탄시린은 눈을 감았다. 그는 남은 시간동안 기사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

소년은 손에 들린 편지를 구겨 가득찬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티르, 한동안은 들리지 못할 것 같아.

탄시린은 칙칙한 잿빛의 두건을 뒤집어쓰고 꺼진 눈빛으로 가끔 집에 들렀다. 인사조차 받지 않는 티르가 그를 외면하고 들어가버리면 그제서야 피곤하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탄시린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 이외에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둘의 사이는 쭉 그래왔다. 티르는 그의 복장이 마을 외곽의 골목에서 보았던 그와 겹쳐 차라리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가 되겠다는 편지를 보낸 이후로 탄시린, 누나는 묘하게 그에게 정면으로 부딪혀 왔다. 티르 역시 원하던 길을 걷는다면 언제고 그와 마주해올 날이 오리라. 그런 동생이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그를 믿는다, 그런 내용도 있었다. 오래 전에도 그에게 기사의 꿈을 심어준 사람.

그럼에도 티르는 그 사람이 기사가 된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이 마음에 걸린다는 듯 잡은 손을 떼어내기를 머뭇거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누나의 동그랗고 포근한 검은 눈에서..

티르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의 시야 안으로 유독 선명하게 자신의 상이 새겨진다. 몇 해 전인지도 모를 그것이 탄시린과의 마지막 기억이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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