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綠音)

새까만 닭 와론

230611
- 이전에 발행한 careless comfort contact 어쩌구에 있던 0번 단편입니다

- 애늙스포, 목주와론 ncp


 

1   錄音  테이프나 판 또는 영화 필름 따위에 소리를 기록함. 또는 그렇게 기록한 소리.

2  綠陰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또는 그 나무의 그늘.

새까만 닭은 다수의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살의를 품고 달려들고 있었다. 마치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를 이제와 멸하듯이. 생명을 위협하는 움직임에 몸은 즉각적으로 살기로 대응한다. 공기는 호흡을 내리누르며 무거워지고 따끔해진다. 살인의 목전에서도 무감각한 무기같은 적들을 론누와 시야를 바꿔가며 빠르게 바라본다. 

목적이 없는 싸움이다. 대체 왜 이들을 죽여야 하지. 의미없는 질문은 와론의 의식을 먼 곳으로 데려간다. 이곳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그 날에, 그 사람 또한 혼자 그들 가운데 서 있었을 것이라. 

와론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였다. 자신은 너무 늦었다. 창 한 자루와 그의 전부였던 목걸이 하나만이 여전했다. 그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했으리라. 그는, 홀로 마지막을 맞이 했으리라. 그는 아마도 와론이 자신을 보지 못하기를 바랐으리라.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는,  

너는, 

깡, 창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너의 명예가 더럽혀졌다고, 너를 불명예스럽게 취급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서, 너는 대체 무슨 기분이었던 걸까?

목걸이 끝에 달린 초록색 광석을 아무리 꾹 쥐어 봐도 대답을 들을 수는 없다. 단지 너를 정죄하고 심판하던 자들이,너를 해치면서 기사를 자처한 자들이, 너보다 약해 빠졌으면서 늘 너를 못 마땅해 하던 자들이... 사방에 내 목숨을 뺏으려고 혈안이 된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너를 죽이려고 하는 기사라는 작자들에게 둘러쌓였을 네 마음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들었다. 

아무리 알고 싶어도 추측해보는 도리 밖에 없는 거였다. 목숨을 걸고 있는 오늘은 조금이라도 더 닿기를 바랄 뿐이다.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한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너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게 이 순간에도 나를 죽이고 있다. 

처음부터 기억 속에서 너는 항상 얼굴이 없었다. 너는 언제나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있고, 네 가슴에는 론누가 잔인하게 꽂혀있다. 한때 내 곁에 서 있던 단단하고 광택없는 갑옷의 가슴께가 우그러져 있다. 그 광경은 계속해서 나를  난도질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 차라리 네가 사라지는 고통을 나는 견디기로 했다. 다시 볼 수 없는 네 얼굴이 사무치게 나를 부를 까봐. 네 이름을 너무나도 부르고 싶은 나머지 너를 위해 해야 할 복수와 분노를 포기하고 슬픔에 덮여 쓰러질까봐, 차라리 사라지고 싶어질까봐. 나는..

네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첫 사냥을 하며 손에 피를 묻혔을 때에는 여전히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네 얼굴을 덮어도 너에 대한 사랑은 덮을 수 없는 것인지 투구를 벗으려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렸다. 함께 하지도 나누지도 못 하는 데 여전히 사랑이라 부르는 꼴을 자조했다. 기사 사냥을 반복할 수록, 끝에는 공허함이 덮쳤다. 투구는 밑에 누운 시체와 하늘로 위아래를 오가다가 결국 땅으로 떨궈졌는데, 처음의 마음이 무뎌지며, 이미 잊어버린 네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내리자 눈에 보인 것은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였다.

목걸이는 언제나 기억 속 그의 상냥한 눈이 이런 색이었지 하고 생각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8월의 우거진 초록을 볼 때도 너의 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차갑고 깊은 녹색의 계곡 속에서도 너를 보았다. 길 옆에 늘어선 풀잎에서도, 어떤 녹색 눈을 가진 알지 못하는 이에게서도, 한 낮의 햇빛의 스펙트럼 속에서도, 빛이 닿고 반사광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녹색을 띈 생명체라면 무엇이든지 다. 

네가 너무나도 떠올라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어느 장기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네가 물었다. 그때에 나는 햇병아리였고, 론누가 없었고 그래서 묵직한 투구도 쓰지 않던 때였다.

[ 와론, 내가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어? ]

그 목소리는 기억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속삭였다.

[ 와론,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

네가 보고 싶지 않았냐고? 

[ 뭐? 항상 옆에 있는데 뭐가 보고 싶냐고?

그것도 그러네. ]

 

[하하, 나야 뭐. 이젠 임무는 못 맡잖아.]

[그래, 정말 잘 다루네. 역시 너라면 그 창이랑도 잘 맞을 거라 생각했어.]

[와, 자홍색 매를 상대로 이겼다고? 대단한데-]

[비가 오는 날에는 실내에 머무는게 어때. 동료들이 걱정하잖아. ]

[십대일이라고? 직접 봤어? 그게 진짜였구나..  ] [네가 관심을 가지는 신입이라니, 코끼리 이후로 처음인걸?]

 [... 수고 했어.]  [요새는 거친 임무가 잦네. 그걸 대비한 훈련들이었지만,]

[...] [힘들 때는 쉬도록 해.]

[와론.] 

[무슨 일 있어?]

[내가 네 곁에 있는 데 여전히 보고 싶은 거야?]

... 그렇구나 ]

그때 내가 대답을 안 해줬던가? oo?

[와론, 정말로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하하, 그 목걸이는 이제 네가 하고 다니는 거야? 그래, 나도 네가 그걸 하고 있어서...]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기뻐.

oo. 나는 너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 기사면 된다는 게 그들의 정의이다. 

그들이 말하는 기사라는 것은 내게 죽여버리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존재이고. 그들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만 기사들에 대한 증오심을 떨칠 수 없는 건 나일 것이다. 그들과 같은 기사로 나를 판단하는 게 역겨워서.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는 사람들과, 그런 자들의 눈에는 기사로 비치는 역겨운 새끼들이 넘쳐난다. 결국 그것들이 너를 죽인 자들의 정체이다. 

칼날이 목을 스치고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온몸을 빠른 속도로 데우며 순환한다. 전방에서 접근하는 적은 이미 방향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가속했다. 바닥에 내딛은 다리에서 강한 반동이 전해져 복부를 타고 올라오며 등과 어깨에 폭발적인 힘을 실어주었다. 힘껏 비틀었던 관절들이 한 순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뒤틀려 가공할 회전력을 내며 론누가 쏘아졌다. 앞을 바라보던 시야는 순식간에 날아가는 론누로 전환된다. 나린기의 시야는 가끔 현실과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 안에 비친 투구를 쓴 기사는 얼핏 그를 닮아 보였다. 

ost 추천(40초부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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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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