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나견+와론] 화전火田
“이름을 속인 게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23.05.10.에 투비로그에 올렸던 글을 이쪽으로 고스란히 옮겨왔습니다
이 글은 잔불/애늙 익명 글러 합작에 참여한 작품입니다. 다른 분들의 보배로운 글은 아래 링크에!
* 멋진 자리를 마련해주신 주최자 님과 함께 해주신 참여자 분들께 다시금 감사인사를 올리며
* 해당 글은 최신 유료분이 113화였을 때 플롯이 확정 났으며, 이후 유료분의 내용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립니다
* 글의 시점은 양 대륙 간 전쟁의 도화선은 당겨졌지만 본격적이지는 않은 어느 시기의 if
* 애늙은이 외전 <투구의 기사>에 나오는 내용과 그에 따른 개인적인 해석 중 하나를 사용했습니다
* 논CP글입니다. 이 글은 CP탈부착이 되지 않습니다.
정세는 어지러웠다. 문자 그대로 난세인 셈이다. 이제 어느 마을을 지나치더라도 주민의 표정에는 농담의 차이만 있을 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확실한 신호에 어찌어찌 겨우 유지되어 이제는 정찰대이자 유격대의 임무를 명령받은 특수 2기의 면면은 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저희끼리의 야영지에서야 한숨을 푹 쉬었다. 제각기 출신이 다른 터라 원래부터 삶은 전쟁이었다는 시큰둥한 반응부터(물론 그의 명예를 위해 서술해두건대, 벌어질 전쟁을 얕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거대한 일을 앞두고 뻣뻣한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이까지 모양새는 다양했지만, 모두가 거대한 전란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게 받아들인 채다.
지금은 반 이상의 기사가 차출되어 국경수비대의 전력을 보강하거나, 일반 정찰병이 대응하기 어려운 곳의 수비 등을 담당하고 있더랬다. 물론 이는 기사의 특수성 때문이다. 머릿수가 더해지면 오히려 전력이 깎이고는 하는, 지독하게 강하면서 보통을 초월한 존재들은 도무지 묶어 써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뭉쳐서 활동하는 특수 2기는 감히 특수라고 이름 붙은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누군가 ‘실적을 내는 광대’라고 비웃은 것처럼 황실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패를 알뜰하게도 부려 먹었다. 제아무리 마법사들이 부려둔 수가 있다지만, 이곳은 오래도록 기사에 의한 무력으로 치안을 유지해온 대륙이었으므로 일반인 사이에서 기사가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약해진 치안이며 골머리 앓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사람들의 불안을 빠르게 가라앉히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마저 전쟁의 기미를 읽어 민심이 크게 흔들리는 이때이니 더더욱 잘 먹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필이면 책임감에 들러붙은 것이 민초였던지라, 허례허식을 싫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새까만 닭조차 기어코 입을 다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역시 기사인지라 허망하게 꺼지는 목숨은 두고 보지 못했던 거다. 물론 저희끼리 있을 때야 불평불만을 떠들기는 했고, 때로 인솔 기사(이제 더는 이렇게 부를 이유가 없으나, 입에 붙은 말이었다)끼리의 대련을 빙자한 화풀이를 해대긴 했어도 이 정도면 남는 장사이긴 했다. 그야, 투구의 기사는 굳이 피보호자를 끼워 기사를 강화하려던 얄팍한 수작에 크게 날뛰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햇병아리들이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며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특수 2기는 그대로 해체됐을 거다.
그렇게 우여곡절 한 바퀴를 돌아, 이제는 그럭저럭 하나의 사단으로 작동하는 특수 2기는 특별한 목적지 없이 전 지역을 떠돌며 사람들을 수런수런하게 만드는 온갖 사건․사고 담당 반이 됐다. 낮에는 각자의 기동 거리에 맞추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간단한 일은 현장에서 처리하고 그럴싸한 정보는 그날의 야영지로 돌아가 취합해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모닥불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제각기 보고를 끝내고, 굵직한 건에 거수로 투표를 붙이는 시간이었다. 저마다 든 손이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숫자를 헤아린 기린이 입을 열었다.
“결정됐군. 미치광이 정령들이 날뛰는 땅이라.”
저희가 마력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기는 하나, 피해가 극심한 곳이다 보니 과반수도 거뜬히 표를 받은 곳이었다. 이미 인근 마을은 공포에 질려 아예 무인촌이 되었다고 하니, 더더욱 빠른 정리가 필요했다. 표를 던졌던 몇몇도 그 찜찜한 자들에게서 받은 마도구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걸리는 표정이었으나, 피난민의 일그러진 얼굴을 도무지 잊지를 못하겠다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타민이 눈꼬리를 순하게 내려 웃었다.
“가서 봐야겠지만, 고양이 님이 마나 감지를 그럭저럭하시니까 문제 되는 장소만 마법사들에게 알려주면 될 거예요. 마도구 사용은 최후의 수단이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만 생각해요.”
옥색 고양이 탄시린은 이래저래 기특한 후배 기사에게 눈길을 주고서 몇몇 맞닿은 시선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개중에는 동생도 있었다. 영 싸늘한 시선이었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아는 척을 아예 않던 때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말토 출신이긴 해도 한 사람의 마법사라고 불리기엔 모자랐던 어중간한 실력이 이런 데에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줄은 몰랐더랬다. 뭐, 일단 출신부터 밝힐 일은 없지만. 소문을 종합해 추론해보면, 마도 전쟁 무기 개발의 여파로 마나가 흐트러져 자연의 균형이 깨진 탓일 테니, 운이 좋으면 정말 제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을 거였다.
무거운 공기도 한순간이었다. 야영지는 곧 왁자해졌다. 세부 지침을 의논하는 기존 기사들과 정찰조마다 오늘의 일과에 대한 잘잘못을 검토하기도 하는 둥, 제각기의 이야기로 흩어진 거다.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라. 지금 골머리 앓아봐야 해결될 일도 아니고, 어차피 직면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니까.
사람이 늘어나 좋은 점이라면 불침번 서는 시간은 짧고,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길다는 것이다. 푹 잤다가 동틀 즈음이 되어 마지막 불침번을 섰던 루지안은 지평선 위로 햇살이 치솟기가 무섭게 널브러져 자는 동료들을 큰소리로 깨웠다. 그렇게 잠시간 부산스럽던 면면은 자리를 정리하고 곧 출발할 채비를 했다.
산기슭에 자그맣게 모여있던 촌락들은 만나는 족족 비어있었고, 그때마다 체력과 기동성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두 사람―담청색 기린과 나진―이 자기들의 체력 배분을 몇 번이고 다시 계산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이제 저 산을 넘어 펼쳐진 울창한 숲이 문제의 땅이다. 선두에 있던 새까만 닭과 옥색 고양이가 동시에 멈췄고, 그 뒤로 우르르 멈춰 섰다. 둘의 행동 때문도 있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녔다.
“와, 이건….”
“낌새가 영 아닌데요.”
“법사 아녀도 알겠다.”
공기가 찌르는 듯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자연재해에 의지와 인격이 있고 그와 대치해야 한다면 느낄 법한 종류의 위협이었다. 여기가 저 숲이 그어둔 마지막 선일 테다. 이제 어젯밤에 역할을 나눴던 조에 맞추어 움직이려는데,
“안돼!”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돌이켜보면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아무도 분간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야 의아한 점이기도 하다. 결국 그게 누구였는지도 찾지 못했고. 어쨌거나, 그때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적의가 나침반이 한 극을 가리키듯 모여서 쏘아지더니 일순간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들을 덮쳤다.
그리고 나진, 아니, 나견은 눈을 떴다. 마력은 느끼지 못해도 피부를 꾹꾹 누르던, 습습하고 무거운 숲의 공기 대신, 바싹 말라 폐를 지져버리는 열기가 숨통을 타고 들어온다. 맡아본 적 있는 공기는 원근을 가늠하기 어려운 기억을 되살렸다. 불에 타는 마을, 불에 타는 집. 순간 구역질이 몰려와, 견은 웩웩거리며 헛게웠다.
숨을 헐떡이며 시큼한 입가를 대충 문지르고서 견은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머리가 생각을 정리해 제동을 걸기도 전에, 오감으로 자극받아 튀어나온 과거의 기억이 몸의 제어를 흔들어서 그렇지, 지금 본 것 자체는 어느 정도 예측한 범위 안에 있었다.
― 그건, 그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 그 숲에서 돌아온 후로 그 사람, 겁에 질려있더니 얼마 안 돼서 가족들 데리고 마을을 떴습죠.
피난민이나 아니면 살던 땅을 떠나지 못한 이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취합했을 때, 그곳은 뭔가 환각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느냐고 이야기가 모였고, 그건 과거의 편린에서 비롯했으리라는 가설까지 세운 후였으니까. 그러니 무엇을 보더라도 정신을 잘 붙들라고 출발 직전까지 떠들지 않았나. 그 가설을 세우는 데에 적게 잡아도 위에서 세 번째로 공을 세운 나견이 이 모든 것이 가짜이고 환각임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핀다. 굵기가 좀 있는 나무들이나, 잔돌과 모래를 섞어다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든 집 몇 채가 타고 있다. 무턱대고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높다랗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그렇다. 이건 너른 대지 위에 펼쳐진 불의 바다다.
‘내 기억보다 과장된 것 같은데. 어릴 때 것도 섞여서인가?’
가짜임을 깨닫기가 무섭게 열기가 가셨고, 견은 이제 더더욱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서 주변을 조망했다. 자, 악몽처럼 꿈이 꿈임을 안 순간 깨어지는 것도 아니라면, 이 일대는 일종의 수수께끼의 장으로 변모한 건 아닐까. 출제자가 누가 되었든, 문자로 된 질문이 없으니 답안도 없는 상황일 수는 없다. 이미 평범한 사람도 숲에서 빠져나온 전례가 열 손가락도 차고 넘치게 있었다. 견은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는다.
불, 그것은 태곳적부터 인류와 함께하며 물리적 실체뿐 아니라 다양한 함의를 지니게 된 개념이기도 하다. 불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기도 하며, 들짐승으로부터 몸을 지킬 무기이고, 식생활의 풍부함을 보장한 도구다. 동시에 모든 것을 태우는 화마이며, 사람을 가장 고통 속에서 죽게 할 수도 있는 살인 도구이고,
‘―복수를 상징할 수도 있지.’
집이 활활 타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으면, 이제 제 왼편으로 진의 모습이 서 있다. 얼굴 한 면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이제는 점점 알 수 없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서. 나린기 허깨비가 저의 상념을 읽어 재현한 것인지, 이것도 미친 정령의 작품인지 굳이 판단하지 않고서 견은 웬일로 아무 말이 없는 반쪽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렇게 된 게 맞는구나?”
갑자기 불쑥 목소리가 끼어든다. 견은 채 비명도 되지 않아 무음이 된 아우성을 속으로 꾹 눌러 삼키고서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파드득 몸을 돌렸다. 그러면 거기에는 붉은 불길에 비추어 발갛게 보이는 투구가 있다. 누군지는 자명하다.
“새까만 닭 님이, 여기 왜?”
“이야, 우리 싸가지 없는 후배한테도 모르는 일이 있어?”
“…그야 저도 사람인데.”
“그렇지.”
“그래서 답은요.”
“진짜 이 싸가지.”
척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에 돌아온 게 사람을 살살 긁는 비꼼이라 뚱하니 대답했더니, 냉큼 말을 잘라버리는 꼴이란. 그래서 부러 모나게 굴었는데 이번엔 이게 뭐가 재밌다고 낄낄 웃어댄다. 이 작자도 설마 내 충격적인 기억 중 하나인가를 진지하게 의심하려고 들자, 돌연 웃음소리가 뚝 멈추더니 새까만 닭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곤 덜컥 어깨동무해서 견을 앉혔다. 어정쩡하게 주저앉은 견이 이게 무슨 짓이냐 묻기도 전에, 새까만 닭은 아까까지의 가볍고 유쾌한 태도를 싹 벗어던지고서 입을 열었다. 무거운 목소리다.
“자, 하나만 맹세해라, 꼬마야. 우리는 여기서 서로 보고 들은 걸 밖에서는 허락 없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닭 님, 그거 되게 안 좋은 버릇 같은데요. 저한텐 선택지가 없는 걸 서로 알면서도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요?”
“분위기를 못 맞추네, 나견.”
“하아. 그래요. 지금 이런 거. 그게 사람을 열받게 하는 거라고요.”
자신이 나진이 아니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린과 닭 두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왔던 탓에 견은 빠르게 인정하고 이 쓸모없는 군더더기를 빼려고 들었다. 물론 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데 놀랍게도, 와론은 거기서 더 말꼬투리를 잡지 않고 선선히 본론으로 주제를 옮겼다.
“자, 그럼 이 와론 님의 등장으로 의문은 하나 풀렸지?”
“네. …우디온은 산을 끼고 있으니, 이런 평원은 없죠. 닭 님이 살았던 곳인가요? 유목민이었어요?”
“살았다고 하면, 글쎄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그건 상황 봐서 말하든가 말든가 하고―너랑 나는 왜 지금 같은 심상 세계에 있을까. 이건 생각 안 해봤나?”
와론은 딱히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듯, 견을 보는 대신에 자기 쪽에 펼쳐져 있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 평원을 쭈욱 훑었다. 거기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견은 그 모습을 눈만 끔뻑이며 조용히 지켜본다. 꽁지깃을 세운 공작새와도 같던 존재감이나 위압감은 거기 없다. 무게감 없이 새까만 어둠처럼 부유하는 것. 견은 문득 그 역시 저처럼 누군가를 잃은 전적이 있는가 하고 생각한다. 아주아주 가까워서, 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할 정도의 것을. 그래서 견은 한참을 주저주저한 끝에야 간신히, 뻣뻣하게 굳은 혀 위에 단어 몇 개를 올릴 수 있었다.
“누군가, 죽었나요. 그 평원에서.”
“10점 만점에 3점. 아니, 다른 때처럼 의외성 있는 소리를 할 줄 알았더니. 재미없게. 뭐, 말 자체는 정답이긴 한데, 아까 내가 물은 질문의 답은 안 된단다.”
갑자기 점수를 매기는 통에 견은 아까까지의 우수에 젖은 감상을 깡그리 날렸다. 당신은 그런 사람의 죽음을 가볍게 다룰 수 있느냐고 울컥하려는 찰나에, 언제나 그의 론누가 그러하였듯이, 와론의 말이 비수처럼 틈을 후볐다.
“이름을 속인 게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지금 무슨 소리를. 등줄기를 타고 전격처럼 흐르는 충격에, 견은 눈만 부릅뜬 채 허연 얼굴을 하고서 새까만 닭을 돌아보았다. 죽은 이의 이름을 빌려온 사람이 너 하나겠느냐고. 그 반문은 왜 그와 저의 심상이 겹쳤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극명한 대답일 것이다. 그건 그렇다. 마음의 지분이 큰 이가 명을 달리한 사람이라면 현 특수 2기 내에서도 못해도 다섯은 뽑아 들 수 있는 상황이다. 거기서 다시 단둘이 추려졌다면 더더욱 확고한 이유가 있을진대, 마음이 흔들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다.
“정말로요?”
“진짜 얼빵하게 구네. 신입 시절 기린 녀석도 딱 이런 식이었지~. 너무 놀라서 아무것도 생각 못할 때면. 그래서 아까 내가 말했잖아. 서로 여기서 보고 들은 건 이야기하지 말자고.”
“…….”
“네가 믿던가 말던가는 상관없고, 난 지금부터 하고 싶은 말 그냥 할 거야. 일종의 오지랖인데, 뭐, 나도 기사니까 그 정도의 오만은 부려보는 것으로.”
눈앞의 저자가 새까만 닭 와론이라는 건 확실하지만, 견은 순간 목구멍 끝까지 치고 올라온 “당신, 가짜지?”라는 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새까만 닭이 기사를 자처하는 말을 하다니. 그가 기사다웠던 순간이란 언제나 행동으로 나타났고, 혹 그렇게 일 처리를 했더라도 생색을 내며 자신의 행위를 부러 폄하시켜오던 것을 보아온 탓에 의식하지도 않고 말이 튀어나왔다. 정작 와론은 그럴 줄 알았다며 낄낄 웃었을 뿐이지만.
“그래, 네가 아는 새까만 닭 와론이라면 절대 입에 담지 않았을 말이지. 여기서 네가 나견인 것처럼, 여기의 나는,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까. 투구 속의 사람으로 치렴. 어차피 여길 나가면 잊힐 이름인데.”
어느샌가 그의 손에는 론누가 들려있었다. 별 뜻 없이 휙휙 휘둘린 창을 투구 쓴 자는 땅에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그걸 가만히 바라본다. 나견 역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그 곁에 섰다. 그러자, 마법처럼 무언가 둥실하고 바닥에서 떠오른다. 허깨비가 동작한 거다. 옆에서는 “오, 설마 했는데 이게 되네.”라고 감탄사가 들린다. 심상 세계가 겹쳐 있으니, 어쩌면 내 머릿속의 뭔가를 네 그 나린기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시도했다는 가만가만한 말에 견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새까만 닭의 진의를 예측하는 것은 원래 불가했으니, 그가 무언가 보여주고 말하려 한다는 의도만 알면 충분했다. 그는 분명히 제 뜻을 실행해내는 사람이고, 얌전히 기다리면 전부 알게 될 거다.
그림자 같은 면이 부풀고 창에 가슴을 꿰뚫린 누군가의 형상을 만들었다. 어째서인지 얼굴은 윤곽만 남고 잠겨있다. 눈두덩 주위만 또렷한 듯도 한데, 그럼 눈동자는 확인이 될까 싶지만 허깨비의 그가 눈을 감고 있으니 요원했다. 안타까움을 담은 탄식이 옆에서 났다. 견은 부러 쳐다보지 않는다.
“아. 네 허깨비, 이게 조건 중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릴 것이었나?”
“네. 명확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해요…. 원래라면 안 됐을 텐데, 여기라서 된 것 같군요.”
“아직도 나진의 말투? 뭐, 됐어.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그건 그렇고…. 이렇게 보니까 얘도 퍽 작았네.”
“얼굴이 기억 안 나는 거예요?”
“아마도. 그거 아냐. 세월은 무섭다? 절대 잊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소용이 없더라. 아, 넌 쌍둥이랬지. 그런 점에선 부럽네.”
솔직한 새까만 닭이라니 자꾸 멈칫하게 됐지만, 어째 딴 때보다 어조도 풀린 것이 모든 이야기는 나가면 없던 것으로 한다는 전제를 상기시켰다. 구두 약속이어도 기사끼리의 언약을 맹세로 취급하겠다는 말이겠지. 설마 어기면 죽일 건가, 하는 생각마저 스쳐 지나간다. 아니, 설마가 아니다. 그는 그러고도 남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와론은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몇 번 더 기웃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나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투구 안의 눈과 분명히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저 불이 뭐를 태우려고 하는지 잘 생각해봐.”
네가 싫어하는 게, 복수할 대상보다는 너 자신이 아닌지. 걔 말고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말야.
덜컥, 숨이 멎었다. 타닥타닥, 화마가 주위를 야금야금 뜯어먹는 소리가 이명으로 울린다. 손에 쥐어졌던 검 손잡이의 감촉이라거나, 날붙이에 기대어 축 늘어지던 반쪽의 무게가―.
“야, 야! 어이구, 이거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하잖아?”
어찔하게 비틀렸던 시야가 뺨을 툭툭 치는 손길에 다시금 초점을 잡았다.
“나도 자기혐오의 전문가이긴 한데, 이래서 머리가 좋은 놈들의 삽질은 못 따라간다는 건가 싶다. 야, 정신 차려. 네가 빌린 건 이름뿐이야. 뭘 해도 넌 걔가 못 돼. 내가 절대 그 애가 못 되는 것처럼.”
당신이 뭘 아느냐는 외침은 곧 여전히 허깨비가 비추고 있는, 얼굴 없는 사람을 보고 멈췄다. 견은 이제서야 그 사람이 와론과 같은 목걸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지, 반대다. 견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어 정정한다. 저건 유품으로, 저 사람에게서 새까만 닭에게로 옮겨간 거다.
그리고 앎은 언제나 시야를 바꾸고 각도를 바꾼다. 새까만 닭. 이름대로 새까만 망토로 온몸을 휘감은 자. 기사 명의 색과 본인의 색을 맞춰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면 그의 저 검은 차림은 상복인가. 기사 명을 짊어지고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장례를 계속해나가는 건가. 이제 견은 당황을 넘어 아연해지고 말았다.
“증오가 널 잡아먹게 두지 마. 걔가 널 살렸다면 더더욱.”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쉽지 않은 건 당연히 알지. 나는 이런 날이 올 때까지 얼마 걸렸을 거라고 생각해? 근데 누군가는 말해줘야 하거든. 다 타버리기 전에. 나야 그 애가 빚어준 외갑 덕에 견뎠지만, 너 계속 그대로면 그냥 홀랑 다 타버린다?”
네가 아닌 재만 남는 건, 결국 두 사람이 죽은 셈이라고. 걔가 살린 나견을 네 손으로 다시 죽이면 어쩌자는 거야. 단전께부터 뜨거운 뭔가가 솟는다. 갈 곳 잃은 분노와 설움이 날카롭게 벼려져 전방위로 튀어 나갔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나더러 복수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의 죽음을 그냥 묻으라는 건가. 견은 절로 낮게 긁히는 목소리를 굳이 고치지 않고 말을 쏘았다.
“그래서, 복수를 관두라고요? 남는 게 없으니까?”
“엥? 아니. 내가 언제 하지 말랬니?”
“네?”
“아, 설마 너도 그거냐? 흑 아니면 백. 답이 극단적으로 안 갈리면 만족 못하는?”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궈져 부풀던 모종의 분노가 바늘로 콕 찔러 터지듯이 푸스스 몸피를 줄였다. 누가 저를 줄에 매달고 위아래로 마구 흔드는 것 같아, 견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탈력한 듯 보이는 후배 놈의 모양새에 와론은 어처구니가 없다며 혀를 쯧쯧 찼다.
“아니구만. 야, 착각도 정도껏 해라. 내가 좀 평소하고 다르게 굴었다고 해서 알맹이가 성인군자로 바뀌겠냐. 게다가 득도했으면 내가 기사를 왜 해. 신전이나 들어가서 성직자 하지.”
“그건 그렇죠. 그럼 닭 님은 복수한 거예요?”
“엉. 기사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쓱싹했지. 새까만 닭 와론. 그 이름으로 말을 걸었을 때 보여줬던 반응이 최고였어. 그야, 그 자식들 입장에선 죽은 놈이 기사가 되어서 돌아온 거니까?”
상상이 갔다. 기사 명단에 새로 추가된 이름 중 자신이 과거에 죽인 사람의 이름이 껴있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공포일 텐데, 정말 자신을 찾아와서 과거의 죄를 추궁하면 맨정신이기는 어렵지. 그게 비록 투구로 얼굴을 가려 정말 그 사람인지 확신을 못하더라도. 게다가 저 새까만 닭이 벌인 일이다. 지금보다 덜 능숙했을지는 몰라도 분위기 잡아서 겁을 잔뜩 집어먹게 하는 건 저 사람의 특기이기도 하니, 끝내주는 두려움 속에서 숨을 다 했겠지.
“그래서, 어땠어요. 끝내니까.”
“그야 속 시원했지. 실제로 남는 건 없어도 이제 끝났구나, 하는 감회도 들고. 게다가 사람이 죗값은 치러야지. 기사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피하면 쓰나. 그런데, 그때 알았다? 나한텐 죽이고 싶은 놈이 하나 더 있었다는 거.”
“…….”
견은 침묵했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매분 매초의 자신이 그러하므로.
“그 자식들을 죽이려고 일직선으로 달렸는데, 그래, 걜 못 구한 나도 죽이고 싶더라고. 쭉 그래왔던 거야. 분노 중 몇 할은 내 몫이었던 거지. 거기서, 이름을 빌려온 이 친구가 날 한 번 더 살렸어. 여기부터는 말 안 할 거야. 이건 나랑 걔의 이야기니까.”
어차피 자신에게는 불필요한 내용일 테니 캐물을 필요도 없었다. 말해줘 봐야 제게는 적용이 안 될 이야기여서, 말하지 않은 거겠지. 이건 그가 익히 아는 새까만 닭의 화법이라 견은 이면의 뜻을 손쉽게 읽어낸다. 그 사람과의 추억이, 그 사람이 이야기했던 말이, 기억 속에 남은 모든 것이, 삶을 마저 견디게 했다는 음각의 고백.
나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익한 대화였다. 비록 밖에서는 일언반구도 내비치면 안 되지만(새까만 닭에게 개기는 건 담청색 기린으로 족하다. 그 인간은 정말 미쳤다), 까맣게 눌어붙었던 정신의 어느 면이 벅벅 긁어 떨어져 나가 그럭저럭 멀끔한 꼴을 갖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에게는 나머지 삶이 있음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는 뜻이다. 물론 복수는 복수대로 그 자신의 분명한 마침표를 찍으면 된다는, 상쾌하기까지 한 각오도 덤이다.
평원과 산지가 멋대로 뒤섞여 불타오르는 대지를 다시금 요모조모 뜯어본다.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아름드리나무조차 까맣게 타서 재로 변하는 땅. 저 자신마저 다 태워버릴 영겁의 화마. 어쩌면 그것조차 어떤 인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견은 이제 이 환각의 답을 안다. 그가 허깨비에 손을 얹는다. 이름과 존재의 불일치 때문에 애매모호하게 겹쳐 있는 공간은 이제 명확하게 정의되기에 ‘와론’의 모습이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그는 그의 심상세계로 갔을 거다), 하늘에 짙고 무거운 회색의 먹구름이 피어난다.
견은 여전히 곁에 서 있는 저의 반쪽을 보았다. 표정이 없는 반쪽은, 곧, 그가 알던 방식으로 웃었다. 화상자국 때문에 뻣뻣하긴 해도 제가 알던 미소다.
“진아, 네 복수는 꼭 끝낼 거야. 그리고, 너랑 같이 보고 싶었던 장소를 차근차근 구경 다닐래.”
나진은 말이 없다. 그야, 죽은 자는 본래 말이 없는 법이니까.
곧,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허깨비가 만든 가상의 비가 정령들이 날뛰는 마력을 엮어 만든 가짜 땅 위로 퍼붓는다. 흰색에 한없이 가까운 회색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그리하여, 재가 무성한 대지는 다시 싹을 틔울 수 있는 땅이 된다.
“이따 눈 뜨면 보자고, ‘나진’.”
매캐한 기운을 머금은 수증기가 시야를 모조리 가린 속에서 새까만 닭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먼 데서부터 흩어졌다. 견은 그 부름에 고개를 끄덕였고,
눈을 뜨니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처음의 언덕 위에 널브러져 있는 채다. 눈만 굴려 주위를 살피고 있으니 주변에서 에고고 하면서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 듯한 버스럭거림이 들렸다. 그리고 한둘씩 정신을 차리더니,
“어?”
“뭐야.”
라고,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음습한 기운을 끌어안고 있던 숲의 공기가 훨씬 가벼워졌으니까. 육안으로도 보였던, 과하게 어두웠던 그림자가 다 가신 후였다. 마나에게 조금이라도 사랑받은 이들은 그 멀미 나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저마다 보고했고, 정보를 취합한 사령탑을 위시한 인솔 기사들 역시 서로 몇 마디 주고받고는 결론을 내렸다. 마법을 쓸 수 없더라도, 그들의 지식은 열렸으니 현상과 이론을 조합하면 그 정도쯤이야 가능하니까.
넘쳐서 날뛰던 마나가 단체로 정신력 좀 있다 하는 집단과 부딪혀 소모되면서 자연히 균형점을 찾은 듯하다고. 어차피 명확한 것은 정말로 마법사 집단이 와서 해석해야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보고를 올릴 수는 있었다.
꽤 비장하게 왔던 것에 비하면 수수한 끝이라고도 볼 수 있었으나,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얼굴들이 많다.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곧 생존에의 길이었던 나견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훑었다. 다들 무엇을 보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쇠심줄 같은 신경을 가진 기사들이 이 정도라면 주변 거주민들이 두려워서 피한 것도 이해가 갔다. 여전히 저의 표정 없음을 멀쩡함으로 아는 견습 동기들은 너는 그런 걸 보고도 멀쩡하냐며 몇 마디를 했고(다 꾸며낸 것인데 어련하겠냐 싶지만), 거기에 대충 말대꾸하고 있자니 저만치서 새까만 닭이 손을 까닥였다. 못 갈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 불편한 대화에서 벗어날 길이어서 그는 별다른 불평 없이 걸음을 옮겼다.
“왜요.”
“허이구, 말뽄새 봐라. 다른 사령탑이 너 찾아서 불렀다. 이런 거 할 땐 재깍재깍 와야지. 아직 너네가 병아리긴 하지만, 일단 기사 나부랭이에 꼈잖냐. ‘나진’.”
투구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는 꽤 장난기가 섞여 있어, 견은 슬며시 눈을 흘기며 받아쳤다.
“계속 그럴 거예요? ‘와론’ 님?”
“으, 가끔 네가 기린보다 더한가 싶을 때가 있어.”
“먼저 시작하셔놓고선.”
“말을 말아야지, 아주. 야, 확실히 해두겠는데, 나는 네가 인생 조지든 말든 신경은 안 써. 나머지는 네 선택이야. 이제 진짜 끝―여어, 기린, 우리 싸가지 데려왔다.”
“뭘 속닥속닥, 아니 됐어. 시답잖은 잡담이겠지. 여하튼, 나진. 네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이제 진짜 끝이라는 말 이래, 새까만 닭 와론은 이전까지 그가 알던 ‘예측 불가능하지만 어찌어찌 예측 가능한 범주’의 그 사람으로 돌아갔다. 그가 ‘나견’에 대한 확신을 이대로 묻어버릴 것은 자명하다. 와론은 여기 모인 그 어떤 기사들보다 약속과 맹세에 엄격하므로. 겹친 심상 세계에서의 모든 말이 진실이기에, 와론은 스스로에게도 가차 없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을 터였다.
담청색 기린이 종합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조립하고, 예측하면서도 한편으론 맘 한 켠이 후련하여 나견은 계속 제 발이 지면에 제대로 붙어있는지를 확인했다. 어쩐지 붕 뜨는 느낌이다. 사고회로의 어디 한 줌이 딴 데 가 있는 게 훤했지만 할 일은 명확히 하고 있으므로, 기린은 나진의 미묘한 집중력 없음을 탓하지 않고, 지우스가 그걸 눈감아 준다는 사실을 나견도 안다. 그는 의외로 남의 선을 멋대로 딛는 걸 꺼리는 편이었고, 그런 점은 대다수 기사보다 더했다. 이전이라면 그냥 문장으로 나열해 지나갈 사고의 단편이 오늘은 어쩐지 조금은 안락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가. 저 자신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질라치면 번뜩 섬광처럼 쌍둥이 형제가 불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 제게 증오를 일갈했으나, 지금 제 머릿속에 검붉게 타오르는 불길은 그런 식으로 끓어 넘치지 않는다.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자기혐오였고, 이대로 마구잡이로 내달려 복수와 함께 자폭하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을. 그런 기분 자체는 크게 변한 바가 없는데, 제삼자처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안정되다니. 저와 비슷한 삶이 있고, 복수를 끝내고서도 삶은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는 사실 하나로 이럴 수가 있나. 제 삶을 통틀어서 어른에게 도움을 받은 전례가 희박했던지라 인생 선배 따위의 말을 조소하며 살았는데, 아무래도 그 인식을 고쳐야 할 것 같았다.
‘그게 하필 저 작자라는 게 열 받기는 하는데.’
시선을 주지도 않고, 나진은 이제 완전히 정리된 앞으로의 계획에 몇 마디 말을 더 얹었다. 골자는 같되, 세부가 다르다. 매번 입이 닳도록 ‘상궤를 벗어나는 기사로서의 시각’에서 보지 말라고 말하면 뭐 하나. 원래 사람은 자기가 인지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물이라 매번 도루묵이다. 어디 목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마법 도구가 있을 법도 한데, 그거나 구해달라고 해서 잔소리에 쓰는 기력을 좀 줄일까도 싶다. 하긴, 잔소리하니까 생각나는데, 이 사람들이 어디서 남한테 충고를 들을 인종들이 아니긴 하다. 내가 뭐라고 중견 기사들이 이토록 경청해주나. 이것도 제 쌍둥이 나진이 진짜 이곳에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특수 2기의 인솔 기사들이 ‘나진’의 머리를 가장 높이 샀기 때문에, 나견이 나진을 입은 이래 외부에서 ‘나진’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서 생긴 일이겠지.
이 회의 원진에서 삐져나와 듣기만 하는 와론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땅에 묻힌 그 사람과 지금의 와론은 분명 다르겠지. 그런 삶도 있는 거다. 타인의 이름을 입고서, 영원히 그를 추모하는 삶. 나견은 다시금 자신의 나침반을 복수의 별을 향해 똑바르게 맞춘다. 일단 복수를 끝내고, 그다음을 어떻게 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어쩌면 기사라는 신분으로 온갖 데를 돌아다니다가, 어디 인적 없고 경치 좋은 곳에 제 형제의 이름 없는 무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지금으로선 전혀 상상도 안 되는 결정을 할지도 모르지. 삶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곤 단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처럼.
어쨌거나 복수 이후로도 자신의 삶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나진과 나견, 두 사람 분량의 삶일 테다.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을 전부 불사르는 화마가 아니라, 불에 타서 까맣게 된 땅에서 새로운 밭을 일구듯이.
글 분위기 해칠까 저어되긴하지만, 저는 낡은 오타쿠라 큰 건 끝내면 후기쓰는 옛날 사람입니다()
툿타래로 차례를 마치는 것으로(내부 연결된 썰은…나중에 백업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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