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사랑이 커피라면 당신은 only ice, 개최악 콜드브루

힌셔와론 배우 au.

231227

*힌셔X와론 cp

*힌셔가 5년 정도 촬영차 미국에서 배우생활을 하다가 복귀했다는 설정입니다.



공항은 언제 와도 밤에는 비가 내렸다. 와론은 온몸으로 그리움을 내치고 있었다는게 적절하리라는 모양으로 차체 옆에 서있었다. 저녁 날씨는 추적하고 부드러운 밤비가 공기 중에 빛을 퍼트리며 가볍게 떨어져 내렸고 차가운 가죽 점퍼 위로 이리저리 비추는 공항의 이층 승강장을 빠져나가는 차들의 야간조명에도 음영진 얼굴은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10월 3일의 화요일 저녁. 그는 바쁜 일정을 비집고 구태여 시간을 내어 차를 몰아 30분 전 이곳에 도착했다. 온통 검은 옷을 빼입고 큰 키의 훤칠하게 잘잡힌 체격은 가만히 서있어도 시선을 끄는 모습이지만 날렵하다기보다는 펑퍼짐하게 떨어지는 옷자락이 거친 공백을 머금었다. 다행히 저녁비가 내리고 도로의 헤드라이트와 조명이 어지러히 반사되는 탓에 행인들은 그가 누구인지까지는 알아보지 못하고 비를 피해 바쁜 걸음으로 터미널 안으로 들어간다.

십분이 채 지나지 않을 무렵 가벼운 짐을 끌며 개찰구에서 나오는 장신의 여성이 그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넨다.

“와론!”

“여 힌셔.”


모처럼 동향 사람이 그리워진 힌셔는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출입 게이트를 빠져나오며 부르는 음성에 저도 모르게 반가움이 섞였다. 와론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후드를 타고 젖은 목덜미로 비 몇 방울이 새어 내린다.


“용케 안 헤매고 나왔네?”

“아, 당연히 직원이 데려다 줬지. 공항은 출입구가 하도 많아서 말이야.”

힌셔는 안심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말에 시원스럽게 웃어보이며 답한다. 십 개월만에 보는 얼굴이다. 캐리어가 차 앞에서 멈춰서자 카라가 거의 없는 롱코트가 날림 없이 툭 떨어지고 위치가 미묘하게 높은 와론이 그를 코끝으로 내려다본다.

“그동안 많이 바빴나?”

“그걸 말이라고. 선배가 옆집에 살았어도 못 보러 갔을 걸.”

힌셔가 이번에는 호탕하게 웃고 그들은 짐을 정리하고 차에 올라타며 얘기를 이어간다. 멈춰있던 차에 시동이 걸리고 어두운 조수석의 벨트를 익숙하게 찾아매는 힌셔를 보면서 와론은 무어라 할 수 없는 안정감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보고 싶었네, 와론.”

“바보야. 리허설은 어제부터 들어갔다고. 당장 촬영까지는 몇 주 걸리겠지만, 괜찮겠어?”

“그럼! 물론이다!”

듬직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은 뭇영화팬들을 설레게 하는 그 모습이었으나 와론은 그가 잔뜩 신난 거라고 평한다.

“그래, 주말에 놀러라도 가자고.”

후드에 가린 와론의 얼굴에도 조금은 즐거운 미소가 번진다. 달리는 차 밖은 불꽃놀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여러 빛깔들이 터지곤 사라진다.



두 손 가득 소품을 들고 걸어가던 스탭이 앞을 보기에는 산처럼 쌓인 물품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ㅡ 아니면 혼자 들고 오는 일 자체가 애초부터 아슬아슬 했거나. 어쨌든 간에 와론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후배가 정면으로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어어, 조심.”

다행이 둘 다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사방으로 무너지듯 촤르륵 쏟아져버린 소품들에 후배는 물건을 도로 주워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와론도 그의 곁에 쭈그리고 짐을 정리하고 챙기는 걸 도왔다. 바쁜 일이 있었으면 두고 갔을지도 모르고.

“나도 돕겠네.”

문득 들리는 소리에 옆을 보니 바닥으로 무릎을 숙이고 쭈그린 이의 목선이 가까웠다. 헐렁한 핏의 넥라인이 둥글고 깊이 파여 여성스러우면서도 잘 어울린다. 잘 입지 않는 카키색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모습이 육감적인 구석이 있다ㅡ 그게 첫번째 감상이었고,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맞닿았다. 와론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찰나에 곁눈으로 일자로 뻗는 어깨라인까지 시선이 타고 올라가던 와론은 눈을 깜빡할 새 시선을 바로했다. 깨끗하고 두께감 있는 목선이 두 쇄골 사이에서 움푹 들어가고 두꺼운 빗장뼈의 장면이 찍어낸듯 시야에 선명했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머릿속은 그것대로 영사기처럼 생각이 돌고 있었다. 와론보다 피부색이 살짝 어두운 그는 옷을 입으면 검은 색은 검은 색대로 섹시한 매력이 있었고 정장은 정장대로, 형사역을 맡거나 일상적인 씬에서 입는 캐주얼은 또 그것대로 소화해내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모든 연기자들의 로망이었다. 무슨 옷이든지 힌셔가 입으면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목이 드러날 정도로 묶은 포니테일이 와론의 취향에 가장 가깝달까. 그가 지내다 온 LA도 뉴욕도 위도가 이곳과 비슷해 이 부근과 일조량은 다를 바 없을 텐데. 힌셔가 탄 건지 본인이 햇볕을 쬐지 않았던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의 색이 와론과 확연히 달랐다. 바닥으로 숙인 힌셔의 낮은 포니테일을 보며 와론은 괜시리 달아오른 뒷목에 멋쩍게 손을 올렸다.


그대로 자리를 뜨려는 와론의 뒤에 대고 힌셔가 가볍게 묻는다. 

"와론, 이 뒤에 촬영은 많이 남았나?”

와론은 그를 흘끗 보며 묻는다.

“아니. 왜?”

남은 일정은 비교적 간단한 씬들이라 금새 끝날 예정이다.

“같이 어디 좀 가지.”



“음악 들을래?”

“음? 그래, 좋다.”

“내 핸드폰.”

와론이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 건넨 핸드폰을 받아 연결하자 순식간에 조용하던 차에 광광 울리는 락이 가득찼다.

“…끌래?”

"그래..."

“미안. 혼자 있을 때 듣던 거라.”

힌셔는 이렇다 말을 거들진 않았으나 볼륨을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까지 낮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음향이 어째 옆에 사람이 있으니 지나치게 크고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감정이 얽히면 유독 예민해지는 사람이었다. 특히 수많은 인맥과 비인맥이 교차하는 촬영장이라는 일터의 특성상 휴식에서만큼은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 대인관계를 원했다. 자연히 가까운 사이에선 단체보다는 소수의 만남을 선호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엔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바쁜 스케쥴에 떠밀려 가족들의 존재는 스크린 너머로 잊혀진지 오래였다. 이미지를 만들고 표현하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능숙하기 마련인 동업인들과 반대로 세트장 이외의 장소에선 얼굴을 내보이길 극도로 지양하는 그는 그들 사이에서도 별난 존재였다ㅡ그렇다고 와론이 소극적인 성격이라는 말은 아니다ㅡ폐쇄적으로 구는 건 아니었으나 사람을 가린다는 점에서도 그런 구석이 명확했다. 그런 와론에게도 막을 도리 없는 쓰나미처럼 친근하게 들이닥친 상대가 있었는데, 같은 배우계에 그보다 먼저 들어와 오래 몸을 담아온 힌셔다. 이십을 조금 넘고 나서 처음으로 만난 힌셔는 와론마저 경계심을 허물고 먼저 다가갔던, 말하자면 만인의 인기를 끄는 선배였다.


불현듯 나타난 힌셔라는 인간이 와론의 복잡하게 뒤얽힌 미로 같은 속내를 뚫고 스트라이크 존을 강타할 줄은 본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작은 필름 조각들을 이어 붙이듯 어느새 흐르는 감정 속에서도 분명히 계기는 있었다. 투영된 감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어렵게 깨달은 후에도 당사자는 저 멀리로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고 말이다. 와론은 복잡한 차들이 시가지 속으로 행렬을 만들어 내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응급구조라도 받는 것처럼 차오른 숨을 길게 불어낸다.

차는 쭉 뻗은 도로 위를 달리다 사이에 난 분기점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힌셔는 가끔 자라난 잿빛의 머리카락의 튀어나온 귀밑머리가 신기하다고 했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색이 맞기는 하느냐고.

"새.."

"새치 아냐."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나. 자연적으로 흰머리를 볼 거라곤 생각도 안해봤네."

"흰머리? 어감이 별론데. 흰색도 아니잖아. 

선배는 잘 알 거 아냐, 많이 봤으면서 그러네."

와론은 범퍼 너머의 전방을 보면서 그의 말을 받는다. 

"노인이라고 해서 모두 진짜 머리가 흰색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라네. 실제론 회색에 가까운 경우도 많고..."

"선배? 나 차 돌려? 돌아갈까?"


힌셔는 성격도 인상도 부드러운 편은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화가 났나 싶을 때도 많았으나 와론만큼 그런 분위기를 무시하고 그를 막 대하는 이도 없다. 그는 인공암벽도 아닌데 와론은 일터에서 연차가 꽤 나는 힌셔에게 자꾸만 기어올랐다. 드문드문 떨어지는 콜사인 사이의 지루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다양한 것들이 유행했는데,   

"이래도 되나?"

"안 걸리면 장땡이지." 

누군가 시작하여 촬영장에서 돌고 있는 미니게임에 와론은 힌셔를 상대로 연승을 올리는 중이었다.  

“힌셔. 나한테 그만 져줘도 돼.”

“아니. 져주는 게 아니라 진짜로 지는 거지.”

“져주는 거잖아.”

“아닐 걸.”

“그럼 좀 이겨보려는 노력이라도 해.”

“오늘따라 까부는 구나.”

“한번 더 까불어도 돼?"

장난기 넘치게 깐죽대는 와론을 정색하고 보던 힌셔가 입꼬리를 비쭉 올린다. 

"이번에도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주마."

"오? 굳이 나서서 내 일일셔틀을 자처한다고?"

"내가 이기면 너는..."



그날 촬영을 끝내고 세팅이 눅눅해진 회색 머리는 다시 후드 안으로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후드의 정수리 부분을 잡아오는 손에 전방을 주시하던 와론은 기겁을 하며 피한다.

"뭐하는 거야, 위험하게,"

“잠깐 나한테만 보여주면 안되나?”

“아 왜 이래, 내 얼굴 어떻게 생겼는지 알잖아,"

그는 보채는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뉘앙스로 투덜댄다. 

"그렇게 잘생겼냐.”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나?”

와론에게 얼굴을 요구할 수 있는 희박한 기회를 힌셔로서는 놓칠 수 없었으니 그가 내기에 건 내용은 뻔한 것이다. 친구는 잘생긴 놈, 적은 똑똑한 놈이라는 고래의 말에 따르면 와론은 어디에서도 얻기 어려운 친구였으니까. 그래봤자 그는 힌셔의 칭찬들을 넘겨들었고 지금도 반은 못마땅한 듯이, 반은 즐거운 듯이 말한다. 

"보고 싶으면 이겼어야지."



그다지 많이 취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미완의 시나리오와도 다름없는 그걸 우발적으로 입 밖에 내버린 날엔. 와론이 힌셔를 만나러 매번 비행기를 타고 LA나 뉴욕에 가는 일도 한계가 있기에 잠깐 동안 그의 얼굴을 보고나서 몇 개월, 길면 일 년 단위로 만나지 못한 채 흐르는 기간이 쌓여가다보니 수압을 이기지 못한 방죽이 터져버리듯이 도저히 입 밖으로는 못뱉을 감정들이 술김에 넘쳐 나왔을 뿐이다. 그의 인내심에도 바닥은 있다. 실제로 그를 보는 감질 맛나는 시간보다 스크린 속에서 완벽한 힌셔를 그리는 시간이 더 길었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이미 한번 차였던 경험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와론은 잠시 동안 귀국했던 힌셔와 술잔을 마주하다 내던진 발언은 치명적인 실수이기도 했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떡하냐, 나, 선배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와론도 답지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는 취기가 올라와도 멀쩡해 보이는 타입이다. 

“아. 난 미국에 애인이 있어.

고맙지만 그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

그렇게 대수로울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도 듣기는 퍽 진지하게 듣고 제대로 딱 잘라 대답을 했으니 우와, 이거 알아서 정리하라는 건가 싶을 정도의 깔끔함이었다. 술기운이 확 가시는게 자신이 방금한 말이 대사 연습이었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눈치가 없었다. 친구나 실연 당한 사람의 입장이 되기 이전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단념하는게 옳은 선택일지도 몰랐지만 와론은 그 뒤로도 내킬 때마다 힌셔에게 종종 구질거렸다. 그런 감상이 들었다는 거지 실제로 힌셔가 그에게 정리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다만 좋아한다는 말 만큼은 다시는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성을 되찾아 와론. 그가 힌셔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건 힌셔는 그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인맥이 되버린 탓도 있는데, 당장 힌셔가 없다면 와론은 누구와 심야 영화를 보고 삼삼한 노가리 안주로 같이 속을 달래며 밤새 시간을 보낼 것이며ㅡ힌셔가 아니면 누굴 따로 연락해서 불러내는 것도 골치 아픈일이다. 매니저는 불러봤자 와론이 투정을 받아내는 입장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ㅡ 주말에 교외로 나가 슬쩍 일반인들 틈에 섞여서 소도시들을 돌아보고 ㅡ둘은 긴 휴가를 받으면 같이 해외로 나돌았다. 힌셔는 낚시를 좋아하는 것만 빼곤 구하기 힘들 정도로 꽤 괜찮은 여행상대였다ㅡ 와론의 취미에 이것저것 동조하며 어울릴 수 있겠는가.  

하여간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적을 뿐이지 곁에 사람 두기를 좋아하는 와론으로서도 그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다. 의식과 복잡한 계산 없이도 붙어있을 수 있는 상대란 귀한 인간관계다. 와론이 그에 대한 성욕만 참을 수 있다면. 그래. 이게 문제지. 대체 왜 평범한 지인끼리 성욕 같은 걸 느끼냐고.


감정이 섞인 대인 간의 관계란 무엇이던가. 그게 적정한 친근감을 넘어서 상대가 정해준 방호벽과 선을 지나서 일방적으로 차선을 이탈하는 느낌이 그를 비틀었다. 인간 힌셔와 그를 안팎으로 자극하는 그가 좋아하는 힌셔 사이에서 와론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해야 하는 건, 젠장 그가 미치게 좋았다. 역시 이게 맞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 몰고 있는 벤츠도 원래는 힌셔의 것이었는데 이곳을 떠나있는 동안 맡아달라는 식으로 와론에게 주고 간 것이다. 각진 대형 세단은 나쁘지 않은 취향이었지만 와론으로선 타고 다니던 바이크를 백배는 더 선호했다. 젊은이로서의 혈기에도, 그의 남다른 성미에도 바이크는 부응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맡아달라 한 걸세. 그 험한 운전으로도 자네도 바이크도 여전히 멀쩡한 걸 보니 믿음이 가서 말이야.”

“그래~ 근데 난 괜찮고 바이크만 바꾼 거란 생각은 안해봤어?”

"그런가? 전에 몰고 다니던 그 바이크 그대로가 아닌가?"

"음..."

처음에는 주차장에 박아두고 며칠에 한번 몰아주거나 관리를 해주는 정도였지만 점점 와론이 직접 타고다니는 일이 늘어 나중엔 아예 운전자 보험을 들게 되었다. 전화로 대충 얘기를 꺼냈을 때 힌셔가 드디어,라는 식으로 웃었던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거다. 

그렇게 오히려 늘 타고 다니던 바이크 쪽이 차고 신세가 되어 어쩌다 한 두번 도로 위로 나섰다. 하루는 한몸과도 같던 애마를 달래준답시고 몰고 나갔다가 그대로 폐차장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와론이 살아난 건 순전한 천운이었다. 

"뭐. 사정이 있어서 바꿨지."

"자네 설마..."

"디자인이 질렸다고나 할까..."

힌셔는 어이없다는 듯 그의 말을 곱씹는다. 바이크 자체를 즐기는 맥락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타는 걸 즐기는 와론이 디자인에 연연할 리는 없어 보였고, 힌셔가 보기에는 자기파괴적인 열정이었다.

"그러고도 다시 샀다고? 철들려면 멀었군."

"이봐 힌셔, 그렇다고 네가 철드는 걸 논할 처지는 아니지."



두 세계가 충돌하고 무너져 내리는 경사면 같이 바깥에선 불꽃놀이 같은 헤드라이트들이 터지고 주위에선 차 안의 어둠이 담요처럼 그들을 쓸어내린다. 

명백한 을. 와론이 매달리고 바라봐 달라고 애걸할 수 밖에 없는 관계. 남 사랑할 줄 모르고 이웃사랑할 줄 모르고 평생 유아독존 혼자서도 잘만 살 것 같은 와론에게 계획 없이 들이닥친 첫 연애는, 그런 무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끓는 마음을 제대로 쏟아내지도 못하다가 헤어지고 나서야 그게 사랑인 줄 깨달아 허무했다. 지독한 자괴, 사랑 받지 못하던 시절이라 여겼으나 정작 카페인이나 니코틴처럼 사랑 없이는 못 살겠다는 마음에 뼈저리게 저항할 때즈음, 와론은 이런 것은 이제 때려치기로 결심했다.

다음에 연애를 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가정에 불과한 말은 됐고, 때려친다고 이제.

그러나 힌셔는...

와론은 사랑도 뒤에서 하다가 나중에는 푸념도 뒤에서 했다. 만만한게 카마이나였다.

“그러니까 힌셔님한테 성욕을 느낀다고요?”


그러나 와론에게 성욕이란 날고기에 흥분해서 개떼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다 그를 음울하게 하고, 위장 어딘가에 달라 붙어 한없이 아래로 쳐지게 하는 구부정한 뱃속의 어떤 기관 같은 거였다. 음습하게 지하로 파고드는 감정의 최하점에 위치한 그로테스크한 욕구. 그는 힌셔에게 달라붙고 싶은 욕망과 떨어지고 싶은 마음의 지옥 같은 양가감정을 오가며 속에서부터 너덜거릴 대로 너덜대며 뜯겨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성욕이라 하냐고.”

“그럼 뭐라 해. 얜 또 왜 이래. 너 초등학생이냐? 성인 아니야?”

또 뭐 내 윈터솔져한테 그런 표현 쓰지 말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는 붉어진 얼굴로 말하는 카마이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본다.

“물론 나도 영상 같은 거 보면 힌셔 선배 엉덩이에 눈길이 가긴 하는데요. 그거 때문에 여러번 돌려보기도 하고? ㅡ 이거 전하면 진짜 죽을 줄 알아요 ㅡ 그건 제삼자도 아니고 스크린 안에서 얘기잖아요. 현실에서 가까운 사람한테 끌리는 걸 보통 순수한 성욕으로 단정 짓진 않지.”


“…그러니까 너도 힌셔한테 성욕을 느끼는 거냐?”

“당신 취했어?? 진심이니까 나가 죽어버려.”

“그럼 넌 뭐라 하는데.”

카마이나는 흥분한 김에 술잔에서 흘러 넘쳐버린 술을 닦으며 자리에 도로 앉는다. 저 성질 머리 하고는. 잔이 깨지지 않은 게 천운이다.

“그걸 뭘 물어봐요. 당신 같은 인간이 어떻게 연기를 하지?”

“뭐래. 1억 2천 주제에.”

“아 지금 진짜 해보자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처럼 이마에 핏대가 솟아오른 카마이나를 보며 와론은 실없이 켈켈 웃는다.

“야.”

“왜요.”

“너 애인있냐?”

“…설마 나한테도 관심있는 건 아니지 당신?”

이렇게 냉랭한 표정도 지을 수 있다니. 과연 표정이 확확 바뀌는게 놀리는 맛이 있어 그나마 저 성질머리도 감수할 만하다. 코끝이 빨갛게 얼어오는게 나가 죽기에는 날씨가 좀 추웠다.



“이 부분 리딩 때 했던 것처럼-…”

“네 여기 2번 카메라 보고 갈게요-“

“오케이. 굳. 쉬었다 갈게요. 감독님 있잖아요-”

누군가 촬영장에 부른 커피 트럭은 유례없는 대호황을 맞는다. 이날 촬영은 야외에서 한파 비스무리한 추위와 함께한 데다가 유독 참여인원이 많아 인기 메뉴는 금방 동이 나버린다. ㅡ야 다른 팀 얘들 데려온 사람 누구야ㅡ천막의 간이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와론은 가져다 준 라떼를 홀짝이며 눈은 대본에 정신은 다른 곳에 가있다. 며칠 전 카마이나와 그렇게 헤어질 때즈음 인사불성이 된 건 드물게도 와론의 쪽이었다.

 ㅡ누구한테 전화 걸어 줄까요?

응? ㅁ뤄라고?

누구 부르면 되냐고, 택시 불러요?

그를 끌어내다시피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온 카마이나의 물음에 와론은 잠시 망설였다.ㅡ

와론은 메신저 창으로 그에게 연락이 몇 개 온 것을 확인한다. 그나마 문장의 구색이라도 갖추는 와론과 달리 카마이나의 메신저는 늘 단답일색이다. 어쭈.

ㅡ여보세요, 네 장매니저님. 이 선배 자식 저랑 마시다가 쓰러져서요. 괜찮아요 주소만 불러주세요. 네네. 담부터는 카톡프로필에 주소 적으라 하세요 이 새끼. 네에, 쉬세요ㅡ

그게 그날 마지막 기억이었다. 가만히 쳐져있는 꼴 보기 싫다며 막 먹여댄게 누구더라. 하여간 웃기는 자식. 와론은 핸드폰 액정을 보며 피식 웃다가 누군가 천막을 걷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한참 만에 돌아온 힌셔가 흰 입김을 내뿜으며 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들어와 그의 옆의자에 앉는다. 힌셔는 쓴 맛이 도는 커피는 즐기지 않는다.

“아ㅡ 그러니까 왜 좋아하지도 않는 걸로 받아온거야?? 애초에 선배 달지않은 커피 잘 먹지도 않잖아.”

“라떼가 모자란데 어쩌겠나... 그렇다고 성의가 있지 마주치고도 안 받아오는 것도 예의가 아녔네.”

결국 와론이 몇모금 마신 음료는 그대로 힌셔의 손으로 넘어간다. 어차피 누군가는 그에게 라떼를 권했으려나. 모자라 보이니 무리해서 수량이 넉넉한 음료로 받아온 게 분명하다.

“그럼 마시던가.. 아 나도 아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걸 미련하다고 해야 해, 그러면서 와론은 힌셔가 먹던 아메를 들어서 남은 양을 흔들어보다가 뚜껑을 열고 한입에 털어넣는다.

“윽 써.”


“두 분 저거... 간접...”

“냅둬. 사람들 없는 데선 마우스투마우스도 할 걸?”

“예? 정말입니까?”

“농이지. 그걸 믿냐? 본 사람은 없으니 우리끼리 얘기지만.”

“둘이 너무 잘어울리잖아.”

“헤에.. 네...”

둘의 오순도순한 케미는 촬영장에서 심심하면 엮는 재밋거리 중 하나였다. 힌셔가 와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와론이 파드득 떨더니 툭닥거리는게 그들이 서있는 위치에서도 보인다. 잘 어울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배우 와론을 저런 태도로 굴게 하는 건 확실히 저 조합 밖에는 없다는 걸 방송 경력이 짧은 그도 알 수 있었다. 방송이나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는 와론의 자연스러운 표정은 보는 사람의 넋을 사로잡는 데가 있었다. 어느새 와론이 힌셔의 목덜미에 편히 팔을 내리고 어깨에 턱을 걸쳐 놓고서 둘은 촬영장 한 구석을 가리키며 저들끼리만 아는 얘기를 떠들고 있다.


몇 시간의 촬영을 마치고 천막으로 되돌아온 와론은 라떼의 뚜껑을 벗기고 다시 음료를 먹는다.

“앗 차거.”

손 안에 들어온 커피는 미지근함을 넘어 주변의 냉기에 동화되어 식어있었다. 난로 위에 올려두고 간다는 걸 잊어버렸다. 그가 아니라 그의 선배가 말이다.  

“이동할게요ㅡ!! 차량 탑승해주세요!”

와론은 컵에 입을 댄 채로 다른 차로 향해가는 힌셔를 흘끗 보았다. 그러는 동안 저편에서 소품을 잔뜩 인 스탭 하나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주변이던가? 전에 왜 촬영차 왔던 곳."

와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그들이 일 때문에 잠시 지방에 머물렀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호숫가 말이야."

"웬 호수? 그거 바다거든."

아. 이제야 제대로 생각났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여튼. 같이 바람이나 좀 쐬고 가지."

와론은 어깨를 으쓱거린다. 마침 그도 약간은 심심함을 느끼던 차였다. 

"끝나고 차에서 기다려." 



"조감독님, 저흰 알아서 갈게요."

"왜? 어디 놀다 가시게요?"

"들릴 곳이 있어서요."

스탭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와론은 주차해둔 차 옆에서 기다리는 힌셔에게로 돌아갔다. 오랜만이네. 정말로. 저도 모르게 이름 모를 부둣가에서 극적으로 재회한 연인들 같은 대사를 읊는다. 선명한 옥외 조명의 하이라이트가 정리되고 난 아래로는 모든 것이 고만고만하고 부드러웠다. 


차를 끌고 도착한 곳은 근교의 바다였다. 적당한 대로변에 차를 대고 둘은 해변가의 야시장까지 걸었다. 육사시미ㅡ이게 정말 먹고 싶어서 말이야ㅡ한 접시로 배를 채웠고 뒷편으로는 예전에 함께 작품을 찍었던 낮고 바랜 골목 거리가 쭈욱 이어졌다. 

와론은 모래사장에 서서 찬바람을 맞았다. 추위처럼 피해갈 수도 있노라면 이런 상황자체를 만들지 않는 편이 자연스러웠지만 말이다. 자신의 감정이라고 해서 연기도 아닌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본인으로서도 확신조차 없었다. 여태까지 그는 바다에 올 때마다 바다보다 그 건너편에 대해서 생각했기에 어떤 식으로 짠내가 풍기고 파도가 일그러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힌셔를 어떤 식으로 대하던지 그 방식이 문제는 아니었듯이...

와론은 그 건너편에 머무는 단단한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금발이 부드럽게 흐르고 물결치듯 웃음으로 숱많은 눈썹이 구겨지고 와론으로선 결코 채워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종류의 웃음을 짓던 힌셔에 대해서.

어쩌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이 흐트러트리는 무거운 바다의 요동을 보며 다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더이상 저 건너에 가지 않아도 그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수없이 색채를 채워주는 이 순간에 의지해나가며 그간 단단했던 다짐을 다른 방식으로 정의해버리면 끝나는 게 아닐까.


촥, 그런 사색도 혼자 걸을 때나 즐길 만한 것이지. 갑작스레 뒷편에서 튀겨오는 차가운 바닷물에 와론은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본다.

“뭐ㅎ, 으걱, ”

그대로 힌셔에게 떠밀려 바다까지 내려간 와론은 발목을 넘는 파도에 바지를 적셨다. 발끝으로 들어오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차고 짠 물을 그대로 힌셔가 서 있는 쪽으로 걷어찼다. 모래 사장 위로 튀기는 물벼락을 피해 힌셔가 그를 비웃듯이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아니 그러니까,… 도망가지 말라고!”

와론도 그를 쫓아 달렸다. 마주 불어오는 해풍이 뺨을 베일 듯하고 호흡이 거칠어졌으나 둘 다 거저 쌓아온 액션 경력은 아니라 술래잡기는 쉽게 끝나질 못한다. 잡히면 죽었어ㅡ 결연한 의지를 품은 다리가 푹푹 빠지는 모래를 아랑곳 않고 앞을 뛰어가는 이를 잡기 위해 질주한다. 

“힌셔--!!”

“악, 여기서 이름 부르지 말게--!!”

비명에 가까운 톤으로 소리쳤으니 행인들에게 들린다해도 알아듣기 힘들지 않나 싶다. 바람이 차가운 파도덩이를 해안가로 밀어올렸다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



드라이브를 하다가 둘은 시트를 기울이고 차 안에서 선잠을 잤다. 사람들이 해변에서 떠드는 소리에 눈을 뜬 힌셔는 옆의 와론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걸 보았다. 장시간 일을 마치고 운전까지 하니 피곤했는지 눈 위로 캡모자를 덮어 쓰고 곤히 자는 모습에 그는 조심히 자켓 하나를 더 덮어 주었다. 차에 볼륨을 줄인 음악을 틀고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배,"

바깥에선 사람들이 폭죽을 터트리는 소리가 차체를 넘어 들려온다. 깨어난 와론이 나지막히 소리를 내고 평소보다 무방비하게 경계가 풀려 살짝 드러난 눈빛이 낮게 가라앉아있다. 그 조명과 습도와 주위의 환경들이 힌셔에게도 와론에게도 어느 같은 날을 떠올리게 해 힌셔는 문득 거짓말처럼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말을 입에 올렸다. 

"와론. 솔직히 말해봐라. 전에 자네가 나를 찾아왔을 때 자네는 내 몸이 목적이었던 거 아닌가.”

“미쳤냐,"

와론은 속으로 비속어를 한가득 집어 삼킨다. 카마이나가 자신의 표현에 질색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자꾸 눈길이 가니 더 미칠 지경이었는데 와론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멀리서도 이따금씩 자신이 힐끔 대는 걸 알고 있었나.

"그땐 네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무뚝뚝하게 굴었지만 나도 이제는 알 것 같다. 가끔 네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어도 널 보면 심박이 올라. 고작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는 얼굴을 보고 싶어하는 나 역시 네 몸이 목적이었다는 걸. 네 기분이 이해가 된다."

뭘 이해해. 그걸 왜 이해해. 와론은 허튼 생각들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일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져주는 거 맞다. 네가 이기면 웃는다는 걸 아나?”

“뭐?”

“아.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도 정말이지 너랑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군. 후배들이 떠드는 대로 너랑 내가 잘 맞는 이유가 확실히 있는 것 같아. 일부러 지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건가?”

나지막한 발성이 귓바퀴를 쓸고 지나가고 끝을 웃음기로 뭉갠다. 심해류를 가득 퍼올리는 것처럼 폐에 꽉 들어찬 숨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이건 시덥잖은 게임 얘기다. 

“네가 웃는 걸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져서 말이야.”

아닐지도 모르고. 내려오지 않고 곡선을 그리는 비현실적인 입매를 바라보며 동공이 확장된다. 불꽃인지 유성인지 모를 모래사장 위로 피어오르는 꽃들이 덧없이 진다. 



확실한 건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힌셔가 좋았다. 시발. 와론은 반쯤 차가워진 라떼를 잡고 멍하니 보다가 말했다. 잿빛으로 뭉텅이씩 쏟아지는 눈이 마치 먼지덩이 같이 음울한 하늘을 채운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같이 돌아가던 카마이나가 생뚱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본다.

“...선배 욕하는 거 처음 봐요.”

“아, 그래?”

“비속어 안 쓰시잖아요. 연기 할 때 아니면...”

와론은 약간 우울한 채로 목도리에 입을 파묻는다. 만나는 이마다 그에게 백색증이 아니냐고 한번씩 묻는 잿빛 머리는 놀랍게도 천연으로 그가 입으면 희한히도 눈에 띄는 검은 옷과 함께 채도를 극한까지 빼버린 듯한 조합이다. 검은 패딩 자락이 그림자 같이 강풍에 물결친다. 이 계절에 보면 마치 도시의 회색 눈과 함께 찾아온 계절성 우울을 직격으로 맞은 사람이나 다름 없는 모습이다.

“그렇지. 아 별로 안좋은 영향만 끼칠 것 같네. 지금 기분이 더러워. 떨어져서 걸어라.”

“됐어요. 저도 어차피 화나면 자주 쓰거든요.”

와론은 그 당당한 대답에 그를 얇은 눈으로 본다. 자랑이다. 그의 욱하는 성질은 불 같은 정도를 넘어 건드리면 덤비는 사나운 대형 사냥견만큼이나 참을성 없고 산발적으로 터지곤 해서 이미 /개조심/ 이라는 표어가 붙은지 오래다.

“너랑 다니다 내가 옮았나.”

“뭐요?!”

이거 봐. 네 발화점이 낮은 건 휘발유도 인정하는 사실이라며 와론은 그를 가볍게 타박하곤 라떼를 다시 한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높은 상공의 냉각기관에서 내뿜는 눈조각이 차가워지는 우유폼위로 떨어져 흰 거품층의 온도를 서서히 낮추며 이내 흔적을 감춘다.




“나도 다시 보게 되어서 정말 기쁘군...네가 연기하는 걸 말이다.”

“아, 그러셔.”

"와론, 이젠 날 쳐다봐주지도 않는건가?"

"그만 쳐다봐. 그리고 그만 마셔라."

와론은 심드렁하게 음료를 들이킨다.

"자기도 마시면서. 고맙다, 아직 멀쩡하다."

"선배 걱정하는 거 아니거든? 뼈 빠지게 수습할 미래의 나를 걱정하는 거라고."

와론은 그렇게 말하며 상 위의 안줏거리를 아무렇게나 집어 힌셔의 입 안에 쑤셔 넣는다. 우물우물 음식을 씹으면서 힌셔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고, 오디오 감독이 취해서 붉어진 얼굴로 술잔을 감상하는게 초점 바깥으로 들어온다. 아까는 잘 듣지 못한 ㅡ와론도 카메라를 헷갈릴 때가 있구나ㅡ 심술 맞은 촬영팀의 지적에 어디 다시 한번 말해보라면서 친절하게 그의 입에도 쌈을 구겨 넣어주었다. 청양고추의 끝맛이 끝내주게 매웠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회식도 서서히 끝날 기미가 보인다. 피곤한 몸으로 늦은 시간까지 과음한 탓에 다들 맛이 간 상태다. 

“와론씨 취하신건가?”

와론은 완전히 힘을 빼고 힌셔에게 기대있었다. 힌셔는 붉어진 얼굴로 자신은 와론만큼은 아니라며 큰 소리로 호언한다.

“걱정마라! 내가 책임 지고 데려갈테니!”


그러나 현관에 도착했을때 즈음에 힌셔는 와론에게 거의 업힌 상태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현관의 신발장을 겨우 넘은 묵중한 덩치 둘이 쓰러지고 힌셔가 센서등의 불빛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 와론에게 입술을 들이댄다.

“으읍,”

츄읍, 입술을 빨아들이는 물기젖은 소리가 울리고 와론은 무거운 힌셔에게 붙잡혀 숨을 쉬려고 버둥댄다.

“어라라 선배. 나도 지금 완전 취했다고.. 흡,”

알아서 피할 테면 피하라는 듯 그를 묵살하는 손은 빠져나가라는 것치고는 단단하게 그를 붙든다. 힌셔에게 취하면 키스하는 버릇이 있던가. 아니면 날 다른 누구로 착각하고 있나. 취기에 산소까지 빼앗기니 자꾸 이성이 흐려져 와론은 힌셔의 옷 솔기를 붙들고 가까이 당겼다. 힌셔가 쉽게 끌려오며 입을 더 깊게 겹쳤다. 마치 야생 다큐에 나오는 하마들처럼, 크게 벌린 입에 입술이 먹히고 사이로 들어오는 말캉한 살이 콧속에 닿을 듯 입천장을 간질인다. 하아, 변태새끼. 존나 잘하네. 몸이 목적이라고 한 건 진심이었나? 모자라는 호흡 속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 하나도 기억 안나.”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던 해장국을 데우고 수저를 뜨던 힌셔가 문득 고개를 들어 묻는다. 핸드폰으로 연락과 아침 뉴스를 들여다 보던 와론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마주본다.

“혹시 내가 자네한테 무슨 짓을 했나?”

아침이어서 그런지 지나치게 말이 없던 와론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빌려입은 셔츠 위로 삐딱하게 팔짱을 낀다.

“내가 선밸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까진 기억 나십니까?”

“글쎄ㅡ근데 왜 갑자기 존댓말이냐.”

“아무 일 없었으니까 걱정 마시죠. 모두가 당신처럼 제정신이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는게 좋잖아. 선배.”

“그래. 자네 같은 이들도 있는 법이니까.”

“뭐어? 내가 어때서 이 양반이.”

“주정으론 널 따라올 사람이 없지. 여행 갈 때마다 왜 자꾸 밤에 안자고 나까지 붙들어 깨우는 건가?”

“어제 나 데려가겠다고 했다가 자기 집 현관에서 쓰러진 사람이 누구더라. 애초에 왜 그렇게 될 때까지 마셔.”

“나올 때까지는 분명 제정신이었다.”

와론은 알코올이 들어가면 금방 깨고 불면증이.. 아 이건 어제 말했던가.

“여튼 신경 끄시죠 선배님. 내가 데려온 건 맞으니까 나중에 절이라도 하시던가.”

“선배로서 챙겨준 걸 그렇게 고마워하지는 않아도 되는데. 해준다면 받겠다.”

“받을 때마다 한 살 추가.”

그러고 다시 숟갈을 뜨는 와론을 따라 힌셔도 마저 숟갈을 든다. 기분탓인지 역시 평소보다 묘하게 날카로운데 힌셔에게라기 보단 다른 무언가에 화가 난 것 같아 보인다.



촬영 사이의 시덥잖은 이야기들이야 말로 힘든 스케쥴을 마무리 한 뒤에 느껴지는 구체적인 여유였다. 하루 쉬어가는 요일. 피디도 촬감도 들여다보지 않아 조감독들만 모여서 느슨하게 떨어대는 수다에 와론은 난로 앞에 다리를 꼬고 슬쩍 후배들의 흥미진진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다. 음향팀의 막내 하나가 조감독에게 묻는다.

“선배, 저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힌셔 배우님은 키스를 잘 하실까?”

“아니 이건 뭐, 해본 사람한테 물어보는 수 밖에 없잖아.”

“촬영 말고요, 평소에.”

“그건 왜 궁금해.”

“저 진짜 진심이라고요.”

“사생이냐?”

그보다는 연차 있는 후배가 대화에 끼어든다.  

“힌셔 배우님은 그 왜 입술도 두껍고.. 잘하실 것 같은데.”

그 말에 와론은 전날 떨어지지 않고 입술 위를 뒤덮던 촉감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입술이 빨아먹는 사탕이라도 되는 양 위로 기울여 오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붙었다. 끈끈하게 섞이던 입김을 생각하니 머릿속에 핀조명이라도 켜진 듯 순식간에 기억 회로가 달아올라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용히 식혔다. 

“손 못봤어? 엄청 예쁜데 크기가 장난 아니잖아. 뒷통수 잡히면 정신을 못차릴 것 같은데.”

“아니 잘하지 않으시려나? 누구 총대 맬 사람?”

“무슨 총대를 매.”

“가서 해달라고 해.”

잘하던데. 그 취한 와중에도. 경험이 적지 않은 와론도 숨쉴 틈 없이 밀어 붙여진 데다가 별로 저항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차마 와론에게 직접 묻지는 않지만 은근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후배들에게 그는 선배의 연기 품평이나 어젯밤 둘의 사고 경력을 읊는 대신 괜찮은 먹잇감 하나를 팔았다. 

“선배 키스신 촬영 하나 있을걸?”

“네?”

“왜 여기서들 난리냐. 그때 가서 보면 알겠지.”

"헉?! 누구 일촬표 있어?"

"미친 이걸 왜 못봤지."

"선배 제발 저 그날 마이크 안 잡으면 안돼요?"

"와 감독님 진짜... 우리 로맨스 장르였어?"

"선배 제발요..."

"나 누구랑 말하니."

바로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힌셔의 촬영일정이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꽤나 긍정적인 타협의 분위기가 인다.



그렇게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특별한 대화나 스릴도 없는 며칠이 흐른다. 크랭크는 매끄럽게 진행되었고 차곡차곡 잘린 장면들이 순조롭게 쌓여갔다. 날씨도 스케쥴도 적절히 따라주었고 몰입감도 괜찮았지만 와론으로서는 어느새 촬영이 종료된 뒤 일어날 일들에 더 빠져있었다. 힌셔는 영영 돌아온 건지 어떤지 아직은 언질도 없었다. 영화에서 힌셔는 유채라는 인물의 역으로, 이날 찍은 것은 와론이 피분장을 하고 쓰러진 유채에게 다가가 이름을 두 번 불러 깨우는, 대사 세 줄의 지극히 짧은 샷이었다. 와론은 다급하게 카메라의 오른쪽에서 뛰어들고 의식을 잃은 유채의 연기를 하는 힌셔의 어깨를 잡는다. 팔 안에서 힘없이 쳐지는 유채의 얼굴을 보는데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얼굴의 사선으로 흐르는 붉은 분장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덮힌 눈꺼풀은 평범하게 깜빡이는 행동과 다르게 완전히 감겨있다. 정말 자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저도 모르게 감싸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채,

유채.

"죽지마..."


컷ㅡ. 외치는 소리가 난 뒤 와론은 그에게 고정된 자신의 눈빛이 떨리고 있는 걸 느꼈다. 마주한 얼굴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반사판 너머로 서있는 스탭들이 전부 숨죽이고 있는 게 느껴져 그제서야 와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직후에 다가온 감독은 그의 액팅이 조금 애절한 편이기도 했다며 주의사항을 전했다. 와론도 그렇게 대사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약간은 당황한 채로 대답하며 얼빠진 감각에서 헤어나오려 애썼다. 스스로도 유채로서 그에게 몰입했던 건지 힌셔에게 이입했던 건지 분간이 어려웠다.

“잠깐 쉬어요? 아님 계속 할까요?”

다행히 이름까지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와론의 오케이 싸인을 보고 촬영장이 다시 분주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ㅡ 천하의 와론도 대사를 틀릴 때가 있네. 힌셔가 죽여주긴 하나봐."

그와 그다지 사이 좋지 않은 감독 하나가 작게 ㅡ그러나 들으란 듯이ㅡ빈정대는 게 귀에 꽂힌다. 저리 꺼져, 와론은 그의 앞을 지나가며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내곤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저저, 후레자식..!!"

촬영을 속행 한다는 감독의 지시가 메아리친다. 카메라 앵글이 번잡하게 돌아간다. 날선 눈에 빛이 돌아오며 역으로 정신이 차려지는 게 넌센스 코메디가 따로 없다. 그러면서도 뇌리에 아까의 장면이 박혀있는 건 힌셔의 놀란 표정이 연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수로 열을 식힌 와론은 막 물기를 떨어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조명을 어둡게 한 대기실 뒷편의 소파에 앉은 힌셔가 그가 얼굴을 닦는 광경을 지켜보며 말한다. 기다란 검은색 진이 편하게 서로 꼬여있다.

“괜찮나. 아까는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솔직히 좀 의외였네." 

"그럴 리가 있냐?"

와론은 수건에 얼굴을 묻으며 핀잔을 준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말하는 걸 처음 들은 셈이군."

"그래, 재밌냐? 그 감독새끼가 하는 농담도 웃기지, 아주."

"됐다, 그건."

힌셔는 여전히 거리를 벌린 채 가림막에 기대선 와론을 응시한다. 모로 기울인 고개에 머리칼은 아직도 끝이 조금 젖었다. 

와론은 그가 돌아오질 않길 바랐나? 기실 힌셔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의 감정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지구 반댓편에 있는데도 소식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는 판에 떨어져 있는다고 감정이 정리 될 리가 없었다. 그가 돌아와도 와론이 느끼기엔 여전히 불안정한 관계였다. 오 년의 시간 내내 오히려 틈만 나면 비행기를 잡아타고 그를 보러가려는 걸 주체하느라 애를 먹었던 걸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구도다.  

"뭐, 선배 없었으면 내가 유채역이었어."

"그건 좀 섭섭하군. 다른 사람이랑 주역에 캐스팅 됐을 걸 생각하면."

그건 힌셔의 말이 맞다. 환상의 케미라느니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느니, 역으로 생각하면 와론 역시 아닌 척해도 꽤나 열 받아 했을거다.

"... 너랑 다시 연기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말이다."

"오. 칭찬 감사. 그럼 앞으로 좀 잘 아껴 주시던가."

"그래보겠다. 너만큼은 어렵겠지만." 

"하하. 아주 히어로 답잖아."

"고맙구나." 

"그래," 

힌셔의 배역은 어디서든 대부분 히어로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를 보며 보냈는지 힌셔는 알지 못하겠지만 와론도 스스로의 농담에 웃어 보이다가 건조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얘기를 꺼낸다. 

"동경했거든...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을. 네가 지금보다 열 살만 더 차이났어도 나도 너한테 이러진 않았겠지. 짐가방이나 양산이나 들어주겠다고 쫓아다녔을 거야."

"동경이라... 사랑이 아니라?"

와론은 진심이라는 듯 말한다. 

"사랑을 했으면 감독을 했겠지."

"당연히 주연은 나였겠지? 네가 얼마를 주면 받아줬으려나."

"하하. 그럼 비싸게 부르고 벌레 요리 먹는 연기나 시켜야지."

"난 굳이 따지자면 인디아나 존스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벌레 요리 맛이 궁금하긴 하군."

그는 완벽한 미소를 그리는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뜬금없이 내뱉었다. 

"선배는 자기 생각 좀 하고 살아."

"하하, 고맙네. 그래도 이게 내 대답일세."

힌셔는 이타적인 편은 아니었다. 남의 일에 전부 끼어들거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의지하게 되는 면이 있어서 전체를 이끄는 역할을 했고 누구나 힌셔를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으로서 힌셔. 라는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기주장이 모두 공익을 향해 있었고 반대를 할 지언정 싫다는 거절은 하지 않았다. 타고나길 대중의 사랑을 받는 성품의 힌셔는 배우가 아니었다 해도 어딜가나 비슷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 그 애정이 쏟아지는 법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어딘가 헌신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얼마 없는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마저도 독점하고 싶어 하다니 정말 최악이잖아. 내 소유욕. 

감겼던 필름이 촤르륵 손 안에서 도로 풀려오는 게 느껴진다. 대본처럼 흘러가는 활기찬 대화를 웃음으로 마무리하면서 와론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좋아, 다 관두자."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그편이 그에게도 힌셔에게도 적절한 일이다. 

“야, 힌셔.

나 솔직히 아직도 선배 나오는 영화 잘 못봐. 특히 영화관 같은데선. 선배는 저 멀리 대륙 반댓편에 있는데 내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잖아. 너무 좋아하는 것도 우울하더라. 아니, 내가 선밸 좋아하는 건지 선배 연기에 몰입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어 이젠.. 미안. 근데 하필 같은 촬영장에서 마주칠 건 또 뭐냐고.”

말을 마칠 때즈음에 그의 입매는 다소 딱딱히 굳어있었다. 힌셔는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리는 투로 말문을 떼었다. 톤의 어딘가가 미묘한 고조감으로 차올라 있다.

“감독님한텐… 내가 네 캐스팅 얘길 꺼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고.

와론. 나도 모른다곤 하지 않겠다. 넌 잘 숨겼지만 날 보고 힘들어하는 건 티가 났으니까.”

“허, 그렇게 좋아죽진 않아.”

맞을지도 모르고. 와론은 뒷말은 삼켜낸다. 그렇게까지 힌셔가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나? 그 예리한 감이 그에게까지 작용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난 너에게 무관심했는 줄 아나? 나라고 네 작품이나 영상들을 안 찾아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보고 싶었다고, 이미 몇 번 말하지 않았나?”

무게추를 단 것 같이 무거운 말들이 와론에게 떨어져 내린다.

“그게 네겐 가볍게 들렸다면 유감이군.”

목소리 끝에 서린 진심은 분노에 가장 가깝다. 힌셔가 여기서 얼마든지 그를 더 밀어붙일 인간이란 걸 아는 와론은 정면으로 성큼 거리를 좁히고 다가오는 셔츠에 시선을 고정한 채 표정을 굳혔으나 둔탁한 촉감이 어깨를 치고 그대로 뒤로 지나쳐 간다. 그는 낯선 모습으로 방문을 열고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갔다.



딱히 갈 곳도 없이 한적한 길가 아무 곳에나 차를 세워둔 와론은 시동이 꺼진 차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 레코딩 표시처럼 홀로 깜빡이는 계기판을 들여다 보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미안하단 말을 바랐나. 그가 배웠던 것들 중에 포기는 가장 어려운 종류의 일이다. 그 단순한 하나를 못해서 그동안 그렇게 어려운 길로 돌아가고, 돌아가고, 좁은 골목에 5인승 오프로더를 쑤셔넣듯이 들이박고, 막다른 낭떠러지 앞에서야 털털거리며 후진기어를 넣는 꼴이다. 물론 그의 차가 오프로더란 얘기는 아니지만.

와론도 힌셔가 그를 그리워했다는 말이 영 거짓이 아니란 건 어렴풋이 느껴왔다. 보고 싶었다고 그래봤자 넌 우정이잖아, 난 아니라고. 종류가 다른가? 아니 깊이가 다른가? 와론은 힌셔에게 닿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 욕구를 끊어낼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에 대한 생각조차도 끊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니 그를 놓는 일에도 자신감이 뚝뚝 잘려 자잘하게 조각이 났다. 


핸드폰의 진동이 전화가 왔음을 알리며 액정의 불빛이 일순 밝아진다. 와론은 이 타이밍에 전화를 건 발신인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간결하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새어 나오는 빛이 얼굴의 일부에 반사되고 듣기 좋게 풀린 제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왜, 무슨 일이야."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와론."

"나 길을 잃은 듯 하다."

“…어쩌라고.”

“데리러 와라. 그러니까 여기가..”

“나 지금 밖인… 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얕게 뜀박질 하는 소음이 그의 신경을 흐트러트린다. 스피커로 한겹 덧씌워진 경우라면 거절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상대방의 단호스러움이 그로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는 벽처럼 다가온다. 집중. 집중해. 지금 통화중이잖아. 와론은 수화기를 얼굴에 가까이 붙이며 한팔을 운전대 위로 기대고 소리 없이 한숨을 내뱉는다.

“여기 ooo 이라고 적힌 카페가 있다.”

“ooo..”

와론은 네비게이션을 틀어 힌셔가 말한 이름을 다시 불렀다. 목록을 위에서 뜨는 것부터 부르자 힌셔가 개중 하나를 짚는다.

“여기구만.”

다행히 그다지 멀지 않은 근교였다. 버스를 탔다하면 환승할 줄을 모르는 그는 무작정 종착 가까이 가버리곤 했다. 보아하니 지나는 노선도 몇 개 되지 않는 곳을 무슨 수로 찾아갔는지 와론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진짜 오프로더가 필요한 건 이 인간이고. 이참에 선배 핸드폰에 미아 찾기 어플이라도 깔아야 되나.

“그 안에서 기다려. 20분이면 가니까.”

“알았다. 천천히 와라.”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그의 마음과는 반대 방향으로 그는 기어를 돌리고 페달을 밟았다.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정말 당신이 사라진다면 이것 하나 해주는 정도의 마음은 스스로 내는 편이니까. 무거운 차체가 엔진음을 남겨 놓고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거리로 접어들어 카페 바깥에 주차를 하고, 부드러운 라떼 하나를 들고 테이블로 다가가 태평하게 휘핑을 잔뜩 올린 모카를 마시는 이의 맞은 편에 내려놓고 앉는다. 이 날씨에 아이스. 적어도 추위는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나보다. 도시 근교의 카페 바깥으로는 버스 정류장 하나만 서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 논밭과 공장지대의 광경이 무색 어둠 뒤에 진부하고 어스무레했다. 인공적인 공장기관의 실루엣이 컴컴하게 정전된 도시 같이 보인다. 와론은 바깥을 감상하듯이 한참 노려보다가 입을 연다.

“커피는. 뜨거울 때 마시면 못 먹겠고 그때가 지나면 금새 뎁혀졌던 온도를 잃어 맛과 향기가 달라지지. 결국 입천장을 데고 껍질이 벗겨져 나오는 걸 각오하고 한입 털어 넣으면 목 뒤로 진득하게 넘어가 따뜻한 향이 올라오는데 그제서야 속이 편해지고 안심이 된달까. 혹은 식을 때까지 참지 못하는 성향이어서거나.

몇 번을 먹어도 입안을 데는 건 어쩔 수 없더라. 그냥. 알아버린 뒤엔 너무 늦는게 아닌가 하고.

힌셔." 

와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힌셔를 바로 본다. 

"5년이란 말이지... 난 그냥 네가 애인을 만드는 걸 귀찮아 한 거라고 생각했다."

뭐, 그런 것도 있고. 그는 커피와 함께 독백을 목 뒤로 삼킨다.   

"넌 너하고 싶은 대로, 나는 나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말은 했지만 결국 또 함께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이 일을 제안 받았을 때 난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억지로 날 받아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도 성급하게 욕심을 부렸지. 그때, 네가 촬영장에서 실수했을 때... 네 표정은 엄청 흔들리더군. 내가 그토록 화났던 건 배배 꼬여있던 네 탓도 있다. 그리고 결국 넌 날 달가워 하지 않은 게 말이다."

"그래서 관두자고 했잖아. 이런 거. 나도 선배한테 강요할 생각은 없다니까. 차라리 망해버려서 속이 시원한 걸."

와론은 뒤로 몸을 젖히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힌셔는 자신의 열 손가락을 맞물려 겹치다가 그에게 대꾸한다. 

"와론. 난 그래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는 몸이 목적이라면서, 변태야."



힌셔는 계산을 하고나서 한참 뒤에야 밖으로 나온다. 와론은 입 밖으로 흐르는 흰 연기의 무리를 보다가 힌셔의 손에 들린 걸 보고 입을 벌린다.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다.

“또 샀어?”

“응. 쓴 건 입에 안 맞아서 말이네.”

힌셔는 한 손에 든 커피를 와론에게 건넨다. 와론은 넓적하게 펼쳐진 건너편의 한적한 정광을 조망하면서 그가 준 커피의 폼을 몇 모금 들이킨다. 

“잠깐.”

“뭐를,”

와론은 말하며 입에서 컵을 띄우는 순간 기습적으로 힌셔의 고개가 다가온다. 얼굴과 컵의 사이의 좁은 틈의 뎁혀진 입술 위로 다른 감촉이 겹친다.

한 손을 음료에 봉쇄 당한 채로 와론은 그를 먹을 듯이 달라붙는 키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곧 입을 벌리며 들어오는 혀를 양껏 빨아당기며 탐한다. 힌셔는 그의 혀끝을 주무르듯이 입술 안으로 머금어 하나하나 음미하다가 길게 빼어낸 혀뿌리를 찾아 들어와 잔뜩 타액을 떠넘긴다.

“읍, 으,…”

입가로 타액이 새는 것도 아랑곳 없이 호흡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진득하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며 숨과 입안의 온도를 상대에게 섞었다. 고개를 틀며 벌어진 틈새로 연기 같은 김이 뿜어나온다. 음료의 잔열을 머금은 입술이 살짝 식은 입과 만나 물컹임과 적당한 이물감을 드러낸다. 딱딱한 치열을 벌려낸 와론에 비해서 크고 말랑한 혀가 입안을 온통 채우며 예민하게 입 속을 맛본다. 


끈적한 입맞춤이 떨어지고 와론은 말없이 입가를 정리한다. 추위와 거칠어진 호흡에 금발에 묻힌 얼굴이 븕게 상기된 건 힌셔도 마찬가지다. 그가 목도리에 얼굴을 묻어내다가 와론을 향해 장난스레 묻는다.

“설마 내가 진짜 기억 못할거라 여긴 건 아니지?”

“뭘,”

와론은 순간 기억을 꿰뚫는 듯한 발언에 머리를 커다란 오함마로 얻어 맞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티를 팍팍 내는데. 오죽 볼 만해야 말일세.”

“힌셔, 난 널 이대로 파출소로 데려가면 될까?”

“좀 봐주지 그러나. 이번엔 둘 다 제정신인데 너도 가만히 있었고.”


눈이란건 하늘에서 뻗어나와 서서히 느려지며 찬찬히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어둑한 전경 어디에도 아직 쌓인 적설이 없어 검은 배경인데 그들이 서있는 가로등 아래로만 떨어지는 가볍고 허술한 눈송이들은 와론의 감성에도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전체가 흐릿한 흑백필터를 씌운 것처럼 무딘 가운데 빛에 번지는 힌셔의 모습과 얼음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의 결정이 기어코 그를 흔들었다. 힌셔가 전등빛의 테두리를 넘어 발걸음을 옮기다가 뒤에 남은 그를 돌아본다. 

“…와론?”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전등의 원 바깥에서 목소리만 들려오던 힌셔의 옷자락을 끌어와 낮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그의 머리 위로 잿빛과 거의 분간이 가지 않는 눈이 쌓이고 기댄 뺨의 체온이 찬찬히 식어내렸다. 힌셔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괜찮은 거냐고 속삭이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차가운 돌풍이 그들의 귓가를 에이고 지나가며 잿빛과 눈의 정렬을 흐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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