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간밤에 불던 바람에

보이고 들리지 않는 사람. 목주와론

230913

*135화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글

나는 노래를 듣는 듯이 귀를 기울인다. 바깥에서 맞이하는 밤에는 늘 질리도록 금속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던 세상이 한꺼풀 벗겨져 주변의 사물이 더 잘 보이고 또렷해지는 일이 있다. 그 느낌을 위해 혼자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바닥을 치우고 수풀 속에 들어가 몸을 뉘인다. 마찬가지로 하루종일 두들겨 맞는 금속이던 것을 차갑게 머리에 대고서, 밝지 못한 세상이나마 더 둘러보려 하다가 풍경이 피로에 녹아내리며 서서히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어느 날엔가는 주변을 채우는 적막하고 습기찬 소음들이 아니라 팔에 댄 귀 안에 갇힌 공기가 웅웅대는 소리, 차가운 금속의 소리, 아래의 흙바닥이 하나의 거대한 돌이 되어서 사방을 회전하는 소리가 고막을 에워싼다. 머리 밑의 바닥 속에서 돌과 바위사이로 무언가 후두둑 떨어지고 흘러내려 깊은 지하에 빈 공간이 자리했음을 알게 되고, 어두운 공동 안을 천천히 헤집는 진동이 누운 나에게까지 땅을 거슬러와 심장께로 모여든다. 쿵- 쿵- 심저를 뛰게 하는 땅의 울음. 그 빛 하나 없을 심연으로부터 전해지는.

찌르르, 뾰족한 광석의 촉감이 손바닥을 찔렀을 때 새까만 닭은 눈을 뜨고 옆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 반장갑을 금속의 건틀릿이 마주 잡아왔다. 기사가 된 이후로는 누구도 그의 손을 이런 식으로 잡은 자가 없는데 어둠 속에 흐릿하게 사람의 형체가 잠겨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유령일지도 모르고 와론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새에 물이 고여 자신을 반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희미한 윤곽이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와론은 간밤 가만히 자신을 찾아온 그를 보며 그가 예토를 거려하는 넋으로 남았나 했다. 그러나 다시 만난다면 간절하게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고 보러 온 건지도 모른다.

광석이 박혀 그의 몸의 일부가 되었을 때처럼 오래 전에 벗어난 자신의 일부를 찾은 듯이 지반이 속을 그렁거렸다. 

쿵- 심저를 지나는 박동은 느릿하고 무거워진다. 

땅에 가까이 누운 그 사람은 몸에서 숨이 흩어진지 오래되어 생기 없는 얼굴은 모래같고 흙과 같아 살아있을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검은 피들을 앞 뒤로 휘감고 진창을 베고 늘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망가진 갑옷에서 보이는 명백한 전투의 흔적. 하얗게 질린 입술. 파리하게 져버린 달과 같이 투명하고 희미해진 그 사람. 표정에 섞인 고통이 대부분 희석되어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의 밖으로 아무 감정도 새어나오지 않아, 한꺼풀 장막이 가리운 것 같았다.

무겁게 젖혀진 고개가 하늘을 향해 뒤집혀 있었다.

주위의 넓은 사방은 깨지고 파헤쳐졌다. 창날이 투로를 그리며 바닥마저 밀려난 반원을 만들고  피를 흩뿌려 엉망이다. 어느 것이 최후의 공격이었을까? 가까이에 난 좁은 구멍이 유독 깊이 찍혔다.

귀를 기울이듯 희물그레 고개를 기울여 떼어내지 못하는 시야가 번져간다. 한때 생기와 초록으로 가득했던 모습이 이제 자신을 떠난다는 건 너무나 허무해서, 보아도 희미해져버린 현실 속 마지막을 맞이한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다.

여러 의미를 담아 공들여 포장한 기억들은 깊게 균열이 생겼다. 틈새로 자르랑하게 흐른 감정들이 그대로 사라져 원형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어떤 말이었을까. 그건? 그가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채로 당부한 말이었나?

비명하게 사라지는 것조차 수긍해버린 사람. 세계가 그들에게 준 힘은 원한다면 어떤 정의도 세울 수 있을 만큼 거대해서 그 사람은 스스로를 저버리지 않는다. 지지 않을 신념이 그의 일신을 채워 그것을 담아 휘두른 날끝이 나긋하고도 선명한 빗금을 그었다. 사라지지 않는 포말을 일으키던 그 사람에게 명예라는 것은. 무너지지 않는, 굽히지 않는.

희미할지언정 꺼트리지 않는. 부숴질지언정 망가지지 않는.

설령 그 모든 것이 아니라해도 그는 기사를 사랑했을 것이다. 무엇으로부터도 갈라져 아무 이해 없는 자욱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그러니 그는 와론의 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방랑하는 기사로 남은 와론은 나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온전이야말로 그에게 가치를 지닌 것이며 목표이며 창을 휘두르는 이유였으므로. 와론은 온전하지 못한 것은 나약하다고 여겼으나 사랑할 수는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래 마음을 두고 바라보았더랜다. 그 생명력 넘치는 무쇠로 된 기사를. 그의 단단한 미소를. 정작 명예가 그들을 목조르고 그가 세워온 정의가 사그라들어도 결코 지워지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와론은 아무 허락없이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 하나를 빼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들어올린 천이 머리를 스치고 갑옷의 몸통 앞을 텅텅 때리던 무게가 가슴 앞으로 떨어졌다. 처음으로 만지는 광석이 지나치게 가볍고 작아 그의 몸에 남은 구멍을 바라본다. 그 무게와 촉감을 지니던 그가 이제 없어도 그것만이라도 평생 자신을 비추어 주길 바라며, 

들고 갈 수 없는 것을 쓸어담고, 주변에 서린 자색의 풍광을 전부 그러모으려 했다. 두 눈을 채운 그의 마지막 모습을 새기고 싶어서. 하나의 광석에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까지 담고 싶어서.

이 목걸이, 내가 가져도 돼?

죽어버린 목소리로 속삭이며 물었다. 목걸이는 가슴에 박혀 한 겹 옷 위에서 쿵쿵 뛰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은 생과 사를 결정하는 문제였으므로 언제나 전투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와 와론은 느슨한 공방을 펼쳐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잊어달라는, 덧없는 외로움에 그를 두고 가면서도 끝내 홀로 일어서 달라는 부탁. 그의 마지막은 직접 듣지 못했어도 부수어져 내려가는 흙이 바위 사이로 떨어지며 가늘고 기나길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너무 미안하게 만들지 말아줘.

그는 받아들일 수 있었나. 그가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기사가 아닌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자리는 메워주지 못한다. 아무것도 없는 손에 기껏 가져본 하나란 그렇게 간단히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때 진정 사랑했던 마음이란 이토록 허무하게 진 뒤에도 버려지는 게 아니다. 그만이 홀로 걸어 내려가는 것을 아득하게 지켜보며 희미한 물이 옆얼굴로 흘렀다. 이제는 가느다란 윤곽만 남은 사람. 숨이 스치는 가슴의 윗부분을 툭툭 치는 조각으로만 존재하는 사람. 바라왔던 모든 것을 잃고 미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여도 움켜쥔 손은 단지 광석 위를 머물렀다. 이미 굳어버린 과거는 어느 날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새겨진 가슴의 자국을 번복할 수는 없다. 눈에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깨져버린 채로는, 와서는 안 될 미래를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슬러 올라가다가 결국 그와 만나지 못하는 삶을 살았을까봐.

그래서 와론은 이 싸움에서 언제나 질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그와 싸우는 일에는 진심이 아니었으니까.

기사란 무형의 맹세 이외에는 어쩌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가혹한 자들이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보다 더 깊은 것이 그에게 박혀있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일 자의도 허락받지 못했다. 그렇게 세우려는 정의가 완전해질 수 있다면, 끝이 있는 것이라면 세계라는 시스템에게 배척받는다. 그에게 준 힘을 가장 섭리적으로 돌려받기를 원할 것이다. 그 사람이 치러야 했던 값과 같이.

그때나 지금이나 와론은 세계가 인정하는 형태의 완수를 기준으로 삼지 못한다. 그의 부탁은 여전히 떠돌고 있는 중이다. 상실에 흘러나온 밑바닥은 그런 와론을 나무라는듯 했다. 이미 죽은 무언가를 끌어당기고 손짓하며 그를 늘 투구 안에 새기고, 밖으로 비치는 세상에 행여 그가 남아 있는가 조그마한 틈으로 내다보면서, 돌이키지 못할 그 순간의 후회를 어떤 형태라도 풀고자 싸움을 찾고 전장을 찾는 자를. 그러나 진심으로 기사가 사라지기를 원하느냐고? 그 사람이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든지 남길 원한다. 하염없이 그리울 그가 그것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떠나더라도. 이제와서 거절한대도 그는 들을 수조차 없어, 결국 말하지 못한 진심은 깊이 파고들어 뿌리가 되었음에도.

그러니 너까지 날 미워하지는 마, 와론은 약간 입을 움직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직접 허락 받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건넨 목걸이 하나라는 사실이 비참하거든.

그래도 네가 나를 과거에 가두는 건 아니다. 투구 속에 가두는 것도.

내가 너를 이 작은 목걸이에 가두고, 어둠에 머무는 너를 늘 부르면서 함께 해달라고 빌고 있는 거니까.

시선이 교차하는 곳에 빛이 들어와 반들하게 닦인 물체만 놓여있다.

자홍빛의 하늘 밑에 선 와론은 피가 목걸이 옆을 지나는 것을 느낀다. 동맥을 흐르는 온기, 어둠에 잠겨 있는 길다란 길을 통과하는 피는 창을 잡은 손의 끝으로 내달릴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밖에 서린 차가운 자하를 만난 피가 노을빛에 섞여 자신의 후회 같이 식어가던 사냥은 죽은 새에게서 다시 그의 모습을 보는 일이다. 푸른 진동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광석을 힘주어, 딱딱한 건틀릿을 마주 쥐자 그것은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도로 그를 찔러온다.

창백한 피가 손끝에서 흘러내렸다. 눈 앞에 고인 인영이 어렴풋해져가고 팔 아래의 지하에서는 여전히 바위가 울린다. 차가운 투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만이 역할이므로. 얼굴을 차갑게 적시는 서리와 목걸이 역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가 여기에 없기에 와론은 항상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고, 남긴 말에 닿을 수 없는 대답을 전하고 싶어 속이 이지러진다. 그의 말이 유언이 되어 끝내 들려주지 못한 대답을. 그럼에도 지난 밤 조용히 벌어진 입 속 그의 그리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둘 사이의 장막을 걷고 들려올 것 같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수많은 밤에 속삭였지만

정말 들려주고 싶은, 들어주었으면 하는 그 마음도 온전한 치기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손끝을 저려와서…

OST를 못 골라서 작업곡으로

* 심저 心底 : 마음의 깊은 속. 혹은 심장의 위쪽 넓은 부분.

+ 잔상

“매번 고민하시네요. 어차피 같은 색으로 고르시면서.”

“냅둬라. 기사님 마음 고객 마음이지 뭐."

새까만 닭은 오늘도 투구깃을 진열해놓은 선반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다. 그가 결국 항상 같은 것을 사가면서도 색을 고르는 데 목을 메며 오래 서 있는 것을 아는 대장장이들과 직원들끼리 이야기가 오간다. 검은 깃과 빨간 깃을 앞에 둔 새까만 닭에게 한 직원이 반쯤은 결정을 도와주려, 반쯤은 예의상 말을 건넨다.  

“이명과도 어울리니 이번엔 검은 색으로 하면 어떠세요? 때도 덜 타고 새로 들어온 술이라 오래 갈거예요.”

새까만 닭은 그의 말에 투구 끝에 손마디를 대고 소리를 낸다. 

음.

그래도 역시..

감긴 눈 밑으로 녹색의 휘광이 진한 색을 남겼다.

“결정했네! 빨강으로 주시게.”

여느 때와 같은 대답에 직원의 표정에 익숙하다는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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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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