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cyanide

관측불가능성 그리고 불확정성. 레기린 ncp

230904

*133화까지 보고씀

    담청색 기린은 신입시절 미숙하여 이러저러 당황할 일들이 여럿 있었다. 어느덧 마의 3년이라 불리는 고비를 넘기고 4년차에 접어들고, 많은 선후배 기사들을 데리고 임무를 수행해오면서 거의 어떠한 돌발상황에서도 홀로 침착함을 유지하는 법을 익힌 것은, 아무래도 기사들과 함께 일한다는 건 변수 그 자체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리라. 그런 시절을 거쳐 기린도 이제는 기사들의 거칠고 단순한 손버릇에 익숙해져 여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후배기사들이 힘으로 벌여놓은 사고가 별천지에 전해지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한숨과 두통을 삼키며 일의 뒷처리를 하기 위해 한동안 자리를 비우곤 했다.

그런 담청색 기린에게 신입 시절의 필요없는 경험들을 삭제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기억 깊숙히 자리한 사건들이 있다. 기린은 지금도 임무의 끝에 고요하게 보내는 휴식시간이 주어지면, 홀로 그 일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 살펴보곤 했다. 어느 것 하나 그가 지금 같은 기사의 길을 걷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일들이었으므로. 그 중 하나는 기어스가 그의 문젯거리이던 시기에, 별다른 대책이 없는 신입기사에게 대마법사와 용의 후예라는 용병집단의 우두머리를 붙여주어 진행하던 연구의 실험대상이 된 일이다. 그의 능력을 연구하던 두 사람은 모두 소리소문 없이 수도를 떠나버리고 그 덕분에 홀로 2차 실험장소에 나타난 새까만 닭과 맞붙었던 사건은 짧은 기사일생에서도 깊게 각인된 기억이다.

똑똑,

“들어와.”

끼익- 기린은 부드럽게 밀리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정면으로 보이는 넓은 벽을 채우고 있는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 누군가의 손이 닿은 흔적이 느껴진다. 담청색 기린이 알기로는 한때 저 책들은 방 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몇 년 새에 물건들이 많이 비어 삭막해지기 이전 연구실의 모습은 이것과 사뭇 달랐으며, 방의 주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날은 후에나마 사정이 있었다며 사과를 하겠다는 레기아의 연구실에 처음으로 방문한 날이었다.

두 개의 벽을 차지하는 책이 가득한 책장을 비롯하여, 레기아의 작업실을 채운 물건들은 기사인 지우스로서는 거의 볼 일이 없는 것들이었다.

벽장이나 책상 위에 몇 겹으로 쌓아올려 정리된 온갖 실험장치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

한 페이지를 펴서 납작하게 핀으로 눌러 놓은 책들, 각기 다른 색의 끈으로 묶인 스크롤이 담긴 유리병. 그 앞에서는 제각기 다른 연구장치들이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큰 창가 앞에 놓인 책상 위에 펼쳐진 거대한 지도. 중앙 대륙 전체를 그린 두꺼운 아사천 위에 압핀들이 이리저리 꽂혀있다. 적당히 밝은 방안은 늘 시끄럽게 사람이 오가는 별천지의 사무실과는 다른 활기를 품어서 방의 주인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걸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기린은 생각보다 넓은 방 안을 둘러보며 고개를 돌렸다. 오른편으로 들어간 공간에 책상 옆으로 서 있던 레기아는 손에 들린 작은 책에서 조금 늦게 눈을 떼어 지우스를 바라본다.

“기린.”

“생각보다 책이 많지는 않군. 내가 생각하던 대마법사의 서재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서재라면 안 쪽에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지. 관심있나?

별천지의 자료실에 탑처럼 쌓여있는 것들을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니라면, 기린은 견습시절 시내에 있는 서점을 들려 기분 전환용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한 두 권을 사서 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레기아가 말하는 책이란 그런 것일리 없기에 기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과학도 공부하는 건가? 마도학자라는 건.”

“약간은. 장치를 개발할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거든.

결론은 거기 있는 사과나 이 책상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거야.”

레기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가 책상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놓인 사과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과학과 마법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갖추었어도 그의 말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같은 논리로 격기사인 기린이 굳이 레기아의 말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알아야 한다면 그가 최근에 장치 쪽에도 손을 대고 있다는 정보일까. 그리고 이전보다 말수가 늘었다는 점 정도.

정적이 흐르는 탓에 지우스는 연구실을 눈으로 살펴보았다. 창가에는 작은 녹색식물들이 소분되어 제각기 투명한 화분에 담겨있다.

“세계의 개념이란건 어떤 거지? 나도 이해할 수 있나?”

“뭐야, 관심없다더니.”

“들어나 보도록 하지.”

“세계의 개념을 이해하는 건 마법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거든. 기사들은 전혀 책을 읽지 않지.”

레기아의 말은 옳았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일 년은 커녕 평생동안 책을 읽는 일이 손에 꼽았다. 그들의 본업인 싸우는 일은 날 때 부터 주어진 본능 같은 것으로, 까다로운 무공이라면 모를까 대부분 이론과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습득했으니까. 딱히 깊이 생각할 만한 계기도 드문 것이다. 기사들이 품 속에 챙기고 다니는 작은 크기로 편찬한 검붉은 하마의 평전이라면 지우스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견습시절 이후로 손도 대지 않은 책이었다. 

레기아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사과를 집어 기린에게 툭 던졌다. 파랗게 덜 익은 풋사과다.

“이를 테면 네 손에 들린 사과는 과육과 껍질과 사과씨로 이루어져 있지. 만약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뭐라고 생각해?”

“먹을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으로 나뉘는 건가?”

“나쁘지 않군. 사과속과 외피로 나뉘지. 인간들은 그 사이를 채워둔 과육을 즐기지만. 사과라는 이 속씨 식물군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사과속, 정확히는 그 씨앗은 팽창해서 사과나무가 될 만한 재료를 갖고 있지. 적절한 조건과 양분만 제공된다면. 씨앗이라는 시스템-이게 우리가 흔히 부르는 법칙이지- 그리고 그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 그게 우리가 보는 세계라는 모습이라는 거지.”

“그렇군. 나쁘지 않은데.”

“잠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사과의 에너지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의 양이 작은 씨앗에 집중되어 있어. 나머지는 부풀려진 부분, 즉 거품에 불과한 거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 거품을 좋아하지. 누가 사과씨를 사과라고 부르겠어. 하다 못해 사과나무라고도.

기린은 사과를 몇 번 허공에 던져 올리다가 다시 레기아에게로 던졌다. 그는 그것을 거의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끝으로 받아 원래의 자리에 놓아두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사과에 대해 연구하는 게 아냐.”

“뭐라는 거냐.”

“난 제조가도 학자도 아니니까. 사과를 굴리면, 어떻게 세상을 파괴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거다. 그러다보면 이게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 수 있지. 둘은 결국 같은 스위치로 이어져 있거든. 

그걸 누를 수 있다면 세계를 멸망시키는 일도 가능하겠지.”

“…세계를 멸망시켜? 그런게 가능한가?”

지우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거대한 힘일 수록 작은 구멍에도 자멸하는 법이지.”

씨앗.

“집중?”

“그래. 압축이라는 거지.”

“이제 그만 새로 발견한 내용을 알려줄까. 실험은 종료됐지만.”

실험에서 중도하차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건 지우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애초에 두 사람에게서 그 이후로 어떤 답신이 올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레기아가 실험에서 무엇을 얻거나, 그렇다해도 정말로 공유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새삼 마법사란 존재들이란 누구나 비슷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시대에 태어나든지 자신의 할 일을 해내는 것에 시간을 보내며, 거대한 흐름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은하를 이루는 수많은 별 중의 하나로 정의했다. 이미 앞이 쓰여있는 두꺼운 책의 다음 페이지를 채우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기사들만큼이나 사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레기아는 서적이 촘촘히 꽂힌 벽장에서 검은 가죽양장으로 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기린에게 한 손으로 건넸다. 제목을 확인하지 않고 푸른 표끈이 걸려있는 부분을 펼치자 검은 구체덩어리의 주변으로 흰 원반 모양의 빛이 감싸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삽화의 제목과 설명이 밑에 작은 첨자로 쓰여있었다.

<관측불가능성>

레기아는 삽화를 보는 기린의 품에 두꺼운 종이뭉치를 안겼다. '담청색 기린의 능력에 대한 연구 결과 보고' 라는 표제로 시작하는 논문이었다. 파르륵, 몇 장을 넘겨 확인하자 정밀한 그래프와 수식과 함께 몇몇 부분에 빼곡한 필기가 되어 있다.

“능력을 쓰고 난 전후로 네 안에 에너지 파동을 측정한 거야. 어때?”

“쓰기 이전과 이후가 다를 바가 없다라.. 힘이 축적되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보다는 네 능력은 압축 그 자체라는 거지.”

“…압축이라.”

기린은 흰 소매가 반쯤 덮고 있는 자신의 손을 흘끔 보았다. 확실히 그에게 더 와닿는 표현이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 그가 느끼는 것은 그의 안에 머물러있는 거대한 힘이 아니라 그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었으므로.

“압축된 내부라는 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아. 관측할 수도 없어.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거지.. 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얘기야 기린… 네가 힘을 개방하기 전까지는.”

“그러면 다른 물질도 압축할 수 있나?”

“아니지. 압축할 수 있는 건 너 자신뿐이야. 그건 변하지 않지.”

그가 자신의 피부보다도 옅은 두 눈을 번득 떴다. 

“기어스가 네게 더 큰 능력을 주는 건 네가 힘이 약해서 일 수도 있지. 아니면 네 기어스의 기준이 남들보다 엄격하다거나.

여전히 네 기어스를 밝히고 싶진 않지. 기린?”

“당연한 소리를 하는 군.”

흐음, 레기아는 고민 어린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들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뭐 알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더 이상은 무리겠지.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실험이었어.”

기린은 책의 표지를 덮었다. 별의 죽음. 책의 제목은 그거였다. 손에서 어쩐지 희미하게 약물 냄새가 묻어나 양장 표지의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연구실의 어딘가에서 밴 것 같았다.

그 후로 레기아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유기사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기사회의가 끝난 뒤에 짧게 마주쳤으나 뒤숭숭한 분위기에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그 상황에서도 회의 내내 웃음을 짓는 레기아를 다른 기사들은 쳐다보고 싶어하지도 않았지만, 담청색 기린의 기준으로는 아직 레기아를 적대할 때가 아니었기에 스스로의 냉철함을 확인하는 꼴이었다.

“특수2기의 설립인가가 났다며. 축하해. 담청색 기린. 마법사들이 네게 신세를 좀 지겠지.”

연구실 오른편으로 들어간 공간에 책상 옆으로 서 있던 레기아가 인사를 건넨다. 책상의 배치만은 몇 년 사이에도 바뀌지 않았지만 흐린 날씨에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침침해 그 때와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건가. 그래도 내가 참여하는 건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하지만 기사들이 널 특수2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겠지.”

“내정인가?”

“내가 격기사들의 일에 관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용의 후예건으로 우리는 여전히 사이가 안 좋거든. 다만 네가 맡겠다고 하면 그들은 말리지 않을 거란 얘기다.”

레기아는 더 이상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지 않았기에 때때로 기린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종종 미래를 적중하는 말들을 한다는 걸 담청색 기린도 알고 있기에, 그의 말들은 머릿속에 넣어둔다. 금속판이 여러 개가 묶인 뭉치가 기린에게로 툭 던져진다. 역시 그 날 레기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기사들과도 관계가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견습시절의 기린은 그런 심오한 질문은 싸움과 관계 없는 얘기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두에 불과한 기어스로 특이한 능력을 얻게 된 지금은 약간이나마 긍정하는 편이었다.

“널 위해 개발한 무기도 있어. 무기라기엔 좀 무색하지.”

“이게 뭐지?”

“통신 기구 같은 거야. 아직 개발 단계지만. 멀리 있는 동료와도 통신할 수 있지.”

“마력은? 없어도 되는 건가.”

“마력이 없어도 작동시킬 수 있는게 핵심이지.”

레기아가 준 마법도구라니, 심지어 기사들도 작동시킬 수 있는. 다소 껄끄러움은 있었으나 그 효용성만은 확실한 것 같아 기린은 그것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가 직접 추진해온 특수기수 설립이 통과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봐도 될 것이다.

“마법사들이 관련될 거란 건 무슨 뜻이지?”

“사실 이번에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됐어.”

“전에 하던 연구는, 이제 안하는 건가?”

“그 일환이라고 볼 수 있지.”

완성은 아니다. 그저 일환이라고. 정말 마법사다운 말이었다.

“하나만 묻지,”

기린은 레기아가 당연히 그 연구로 정말 세계를 멸망시키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레기아가 말한 멸망은 그가 기록하는 책의 일부라고. 사실, 그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아무 조짐이나 징조 없이 혼자 연구실 안에서 어떤 일을 실현시키는게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연구실 바깥에서 레기아가 해온 유의미한 행동들이 그의 책에 어떤 방식으로 정리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수면 아래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은 그에게 기록할 가치마저 없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적어둔 제목은 정말 불투명할 것이다. '담청색 기린의 능력에 대한 연구 결과보고'를 표제로 한 보고서의 목적이 공란이었으므로. 연구의 애초부터 함께 하지 않았다면 어디를 둘의 분기점이라 불러야 할지 확실치 않다. 이미 4년 전 그의 책에 '미지의 존재로 남아있던 관찰불가능 상태를 관측해냈다', 라고 쓰인 이후의 일들은 계속 각자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자연히 그들의 첫 실험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오늘은 담청색기린이 그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레기아. 네가 맡는다는 그 프로젝트. 동대륙과의 전쟁이 터지면 쓸 거냐?”

레기아는 잠시 정적했다. 

“글쎄. 스위치를 만드는 건, 누르는 거나 다름 없는 거야. 기린.”

레기아의 웃음보다도 더 불길한 무표정.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 아마 이런 순간은 정해져있었으리라. 당시 담청색 기린의 감상은 이러했으니.

꼭 동료를 죽여본 사람처럼 말하는 군.

“만들거냐?”

“못 할 것도 없지. 거쳐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레기아, 그는 알고 있을까? 담청색 기린은 어쩌면 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걸 다행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왜 이런 기어스가 주어졌는지, 정확히는 왜 사상지평(事件地平)이 이 시대에 발생했는지에 대한 고찰과 이해를 해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레기아라는 마법사가 그런 자신을 실험하는데 성공하여 필연히 마주하게 될 것들이 그가 적은 두꺼운 보고서와 같이 기록될 것이다. 레기아는 이제 담청색 기린 없이도 결과를 도출하며, 그 결과의 중요한 점은 이해할 수 있는 가가 아닌 다시 그에게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담청색 기린은 언제나 정해진 길을 벗어나 기사의 길을 찾는 기사이고 레기아는 마법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마법사이므로.

그렇기 때문에 기린이 이 연구실에 오는 일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다음 만남에서는 그도 레기아도 이런 식으로 마주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겠지. 

“말했잖나. 기린. 세계란건 결국 시스템이라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이던 레기아의 시선은 창 밖을 내다보면서 점점 온도가 떨어져 이내 차가운 경멸은 담아 얼어붙었다. 그 표정은 기린이 흔히 알고 있는 마법사들 특유의 표정이었으며 늘 그들만의 심오한 고민에 빠져있는 바로 그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꼬리에 무언가를 향한 비웃음이 걸려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시선 끄트머리에서 책상 위에 놓인 푸른 사과가 눈길을 끌어 기린은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몇 년 전과 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사과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짙은 색의 책상이 있는 연구실에서 보니 어딘가 이질적이다. 오래 전부터 사과 안에서 들리던, 무언가 시끄럽게 진동하던 미세한 소음은 점점 커져 이내 굉음이 들리는 듯한 귀울림을 만들어 낸다. 

작업곡 

카테고리
#2차창작
커플링
#레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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