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man
목주와론
240122
악개빠님의 snowman 연성을 기반으로 한 3차 창작입니다. 녹아버릴 것 같이 아름다운 연성... 멋진 연성에 감사를 보냅니다.
나무가 엉겨들어 추위를 막아내기 위한 방벽을 세우고 숲아래 부근을 지켰으나 벌목할 듯이 수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헐거운 버팀이다. 섬세하고 투명한 눈조각이 그 결대로 얼어붙은 가지들이 위나 아래로 늘어져 그를 농락하는 바람에 따라 손을 젓고 휘었으며 숲 전체에 깔아둔 낙엽이 바스락대는 소음들은 겨우내 두텁게 내린 폭설 속에 잠겨 순식간에 사라졌다. 숲은 시간이 새어나간 백지가 되어 무엇도 오래 머물 수 없는 장소가 된다. 투구를 쓴 기사의 귀로 돌풍이 스쳐지나가며 무수한 비명을 질렀고 붉은 깃을 띄워 어깨 앞으로 잡아당기고 저 위로 날아간다. 머리와 팔에 두른 쇠로 된 무구에 켜켜이 서리를 달고 이미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이 은백색으로 버문 망토를 투구의 절반을 가리어 전신에 휘감고서 그는 걸었다. 간신히 바깥만 살필 수 있도록 내놓은 면갑에 난 숨구멍으로부터 좁고 길다랗게 흰 김이 새어나오고 재와 같은 눈발이 틈으로 들이쳤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설각의 솜이불이 거칠게 부수어지고 점차로 저녁마저 저물어 가고 있다. 새하얀 숲이 어스름으로 황폐해질 무렵 폭풍으로부터 작은 피난처는 그에게는 드물게 찾아온 행운이다.
눈에 묻히지 않도록 석조 위에 지은 주인 없는 통나무집의 주변은 온통 인적이 끊겨 있다. 문간에 편액 하나 달아놓지 않아 적적했고 이름조차 필요 없는 용도에 걸맞은 모습으로 다소곳이 서있었다. 산 중턱에 깊숙히 위치해 오래 머물어 살 곳은 아니나 한철을 나기에는 충분한 장소다. 겨울 사냥을 나온 사냥꾼들은 가끔 눈보라에서 길을 잃으면 바깥세계의 악천후가 잠잠해질 때까지, 혹은 마을에 내다 팔 정도로 충분한 사냥감을 잡아 남은 겨울의 생계로 근근하게 삼을 때까지 몇 박을 지낼 것이다. 눈밭 위를 질질 끌려다니는 동안 의복자락에 자란 서리를 털어내는 손길이 거칠었다. 비어있는 집안의 곳곳을 둘러보는 기사의 시선은 근시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괴괴하다. 신에 붙은 빙결을 부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마루의 중앙에서 한기에 시달리던 바닥화덕을 발견케 되고 마른 종이처럼 얇은 물건 하나를 품에서 꺼내 구겨 던져 넣었다. 온기는 하나 남아있지 않은 실내의 나뭇결은 튀어오른 푸른 빛으로 을씨년스러이 물들었다가 곧이어 어린 불꽃이 벽면을 차례대로 두르며 붉은 너울을 친다. 유사시에 가구를 부수는 일이 없도록 이전 머물렀던 사람이 한켠에 해다 놓은 장작은 마찬가지로 재에 파묻힌 불이 옮겨 붙는 위치의 화덕에 넣는다. 기사는 얼마 되지 않은 남은 가재도구들을 살피었고 얼음을 녹일 양철통 몇 개가 한 켠에 찌그러져 있었다. 불빛이 비추지 않는 구석에 뭉쳐있는 더미는 이상한 모양새로 쌓여 낡은 침대 옆을 차지했다. 산장에 버려진 연고 모를 시체를 보는 일과 동굴을 찾다가 동면을 취하던 야생 불곰을 깨우는 일 중에 생존의 방향은 두말 할 것 없이 전자로 기울겠지만 결국 덩어리의 형태는 화덕에서 나온 벽의 그을음이 어둠 속에서 만들어낸 착시였다.
- 산간에서 폭설을 맞닥뜨린 것 치곤 운이 좋았어.
으레 이 계절에 깊은 산지방에선 무더기로 쏟아지는 눈을 만나기 마련이다. 영하 삼십도까지 얼어붙는 괴벽스런 날씨는 여상 눈이 내리는 동안 한결 꺾여갔다.
사람이 나무 사이에 숨겨놓은 한 채의 거처에서 밤을 새면 기운 천장의 울음과 가죽과 잡다한 흔적이 뒤섞인 냄새가 생물이라기엔 퀴퀴하고 잡란스러워 정체 모를 공간이 주는 두려움이 있다. 정작 나무와 틈새가 풍족한 곳에 으레 존재하는 벌레들 이외에는 나무 곰팡이 냄새와 지루한 기다림 정도가 이곳의 전부였고, 보이지 않는 들창과 마루 판자 밑에서는 나방이나 집게 벌레가 알을 까고 며칠 째 죽은 것이나 다름 없이 잠을 잔다. 거미는 진작 추운 대들보에서 거미줄을 걷어내고 따뜻한 나무 기둥의 파인 속을 찾아들어가 다음 계절을 날 새끼들을 기르고 있을 터였으며 그런 다소간의 지식들로 인해 기사는 혼자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룻밤 묵어가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 높게 난 천장의 어둠에서 고고하게 내려 앉았다. 깨끗한 냄비를 찾아 찬장을 뒤적거리다가 이전 일행이 놓고 간 마른 줄기와 저장품이 나와 화덕가로 돌아와 습기가 스미지 않게 품 속에 넣어둔ㅡ이전까지 기사가 배낭이나 주머니를 가진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ㅡ 행장을 풀어낸다. 고드름을 끓인 물에 줄기를 우려 차를 내고 다른 냄비에는 몇 가지 식재와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끓인다. 따뜻하게 달아오른 화덕이 좁은 공간을 데워간다. 불꽃은 한번 마른 나무들을 가무리자 손을 놓지 않아 화염의 투명한 위장에 들어가다시피한 나무가 조금씩 기멸하고 있었다.
방랑이 주는 가벼운 느낌과는 다르게 일상으로 이어지는 고독은 순례와 같은 기사의 생활의 대부분을 점철했으며 수도의 딱딱한 건물들이 주는 낯설음은 안정감은 아니었던 까닭으로 기사는 오늘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진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정착 없이 외처의 이곳저곳을 지내다가 가끔 도회의 삶 속에 섞여들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길과 들판을 집으로 여기는 자들이었다. 그의 오래 된 사정을 통틀어보면 기사에게 집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과거에 한 군데 쯤은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도연히 여기면서도 잔웃음이 많은 기사는 속으로 그 자신에게 실없는 웃음을 보낸다. 거대한 격자로 얽혀있는 수도의 거리는 마치 감옥과 같이 다가오고 오히려 지금 유배되어 있는 이름 모를 지방의 산장의 공기는 사색과 자유를 안겼다. 구체성과 색과 향을 가진 사색은 상당히 최근의 기억에서 비롯하고 있다. 수도에는 돌고 있는 우스운 소문처럼. 사실 새까만 닭은ㅡ
- 아무도 얼굴을 본 이가 없대. 그래서 원래 새까만 닭은 죽고 기사서임을 받았던 이 하곤 다른 사람이라는 거여.
- 말이 되는 소릴 하게. 그럼 지금 멀쩡히 수도를 나댕기는 그 기사가 새까만 닭이 아니면 대관절 누구라는 건가.
- 나야 모르지.
-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이고? 뭔, 백날 늘어놓아 봤자 헛소리 밖에 더 되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귀가 있다는 수도에서 그런 소리를 늘어놓던 이들의 무지는 같은 가게 구석에 새까만 닭이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인즉슨 그다지 허무맹랑할 것 없다. 얼굴을 모른다는 건 본모습을 모른다는 것이고,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며 나이도 성별도 아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이 부정확한 얘기를 기반으로 확장한다. 결국 기사는 저를 상상하는 자들에게는 망상과 추측으로 이루어진 연기 같은 존재가 되어 정형하지 못하는 화염과 비슷한 처지이다. 사람들이 기사를 두려워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를 정말로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건 제 자신뿐이었고 동시에 돌아가는 매너리즘의 톱니에 빠져들어 바깥의 설죽은 녹색이 그를 물들여 가는 것을 느꼈다. 아늑한 저녁을 보내게 되었으나 오늘 같은 날에도 어김없는 개같은 생각을 덜어내고 싶어도 그의 동행은 종일 추위를 막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투구가 다였다. 방열로 달아오른 투구를 달칵, 들어올리고 벗겨내 옆자리에 내려 놓았다.
빈 투구는 종종 명치 앞에서 귀에 들리는 울음을 낸다. 하늘이 서서히 명멸과 죽음으로 사라져가고 저녁의 찬바람이 아까까지 떨리던 미세한 생의 진동을 앗아간다. 지금보다는 훨씬 낮은 높이에서 내려뜬 시선이 대지에 위태롭게 나자빠진 모가지를 응시한다. 죽었나? 죽은 건가? 언제 숨이 멎었는지 모르게 고요해진 흙더미의 위를 덮으면 시체의 처리가 끝난다. 언젠가 들판이 그 품 안으로 저를 집어 삼키는 날이 오리라. 필생을 걸고 자신을 갈고 닦아도 그 시절에는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이상 살아남기 위해 살아있는 것 역시 아니었다. 이 저녁은 가벼운 한숨에 불과하더라도, 그들보다 강한 존재는 사라지지 않으며 찰나에 식는 저 낙양과 같이 그도 마지막 숨을 쉬는 날이 오리라. 그런 약육강식에 골몰해 있던 기사ㅡ당시엔 기사가 아니었던ㅡ와 달리 그의 벗은 끊이지 않고 연속되며 저녁 한때의 저물어가는 황혼을 금속이라 하기엔 더없이 무르게 받치고 서있었다. 무겁게 발하는 빛이 아래로 처지며 지평과 어깨를 잡아당긴다. 벗은 언제까지나 들고 있던 투구의 무게를 그의 목 위에서 내려놓았다. 덜 말라 색이 다른 생흙은 이미 그의 안중 어디에도 없었다. 곧 꺼져버릴 것 같이 짙은 습기를 가진 숨을 내쉬고서 벗은 쓰게 웃었다. 필사의 그것이 고뇌였다는 사실을 기사가 알게 된 건 뒤늦은 일이 되었다. 투구의 완벽한 가장은 아래에 어떤 얼굴을 해도 티가 나지 않으니까. 그 사람이었다. 기사에게 생존이 아닌 생명을 준 사람. 심홍의 짧은 환상으로 물든 삶은 찬란한 것이었으며 또한 원인 모를 고통이었다. 그가 받혀온 결의는 비운하고 그들을 찢어놓는 있어서는 안될 종류의 비정한 감각이었다. 한끝조차 물기를 떨구지 않는 밝은 청색의 눈은 내일이라도 비가 되어 흐를 것 같았다. 곁에 있는 기사에게만은 무연한 고통이 찌르듯이 다가와 가슴에 박혀서 미약하게 달래는 말을 일렀다.
- 네가 원한다면 기다릴게. 와론. 죽을 때까지 네 곁에 있을게.
방향을 머금고 세운 창끝은 여즉 온기를 품는다. 손이 익숙한 광석의 촉감 위를 맴돈다.
이곳을 떠나는 벗. 대체 무슨 권리와 핑계로 그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가능성을 접어버린 거절에 박혔던 한기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제 벗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떠나지 말아 달라고 그를 잡을 필요는 없었겠지. 태양이 사라져도 잔양은 지속되며 밤은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소름끼치게 높은 쇳소리로 우는 새가 그 밤 정적을 깨어낸다. 그 날부터 그는 새로운 불면을 얻었다. 그의 웃음이 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 였다. 관습적으로 몇 백번의 낮과 더불어 스쳐가도록, 희미하게 여명이 밝고 황혼이 울고 의미 없는 박명이 맴돌도록 지나가던 밤의 무리 중에 유독 선명한 밤이 있었다. 그래, 꼭 이런 밤이다. 기민한 청력에 파몰아치는 눈 사이로 희미하게 굉음이 어리고 있었다. 그는 이제 기사가 되었고 괴기를 즐기지 않았고 으레 찾아온다는 것들을 믿지도 않는다. 몸이 안식을 요하지 않듯 대개 그의 편이 아닌 운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힘을 가졌다는 건 우연만큼이나 운명이나 거시적 존재에 의지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연과는 실리를 준 만큼 대가를 받는다. 그는 죽인 기사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더이상 얼굴조차 필요하지 않은 처지가 되었다. 마치 가짜 눈코입을 붙여놓은 겨울철 잠깐의 눈사람처럼.
그러나 필요 없는 무의를 때때로는 주체하고 싶지 않았다. 둔탁한 소음이 나무 위의 눈가루를 털어 떨어트린다. 음산함이 불기운에 녹은 몸을 오싹하게 훑고 지나간다. 어렴풋한 확신이 서린 손은 추위가 덜 풀린 채로 재빠르게 난롯가에서 물을 흘리는 투구 위에 얹는다. 쇠에 겹친 손등 위로 수 개의 기억이 삽시간에 겹쳤다. 밖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새하얀 파도처럼 깔렸다. 어떤 눈사람은 철로 지어져 햇빛 아래에서 광반사를 일으키곤 했다. 그리고 오두막의 덧창에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불빛에도 그 매끄러운 표면을 보여주곤 했다. 어떤 눈사람은 돌로 만들어져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외투를 가졌고, 안으로는 웃음과 안정과 따뜻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단단하고 붉은 끈이 머리와 목을 서로 꽉 붙들며 매여있을 뿐이다.
기사는 폭풍이 이는 밖을 살짝 내다 보았다.
어두운 창문 밖에는 그가 서있다.
쿵쿵,
무거운 소리에 지붕에 쌓인 눈이 흔들리며 작게 먼지와 잔재들이 떨어져 내린다.
깊은 눈 산에 헤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발자국도 남지 않은 길 없는 나무 사이를 보고 우연히 찾아올 리도 없다. 거의 호흡을 참은 채로 문의 잠금을 풀자 나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경첩을 젖힌다. 바람이 헝크는 대로 미처 개키지 못한 붉은 깃과 실내의 열기가 삽시간 크게 일어나 의복의 젖은 틈으로 비현실스런 한기가 파고든다. 구슬땀 같이 고드름이 언 가지가 기이한 형상과 소리를 낸다. 그의 하룻짜리 집을 방문한 손님은 유령과 괴물이 아닌 병자 같이 흰 안색의 얼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철면으로 기사를 혼란의 냄비 안으로 밀어넣는다. 도저히 산 사람의 기색이 아니었으며 차라리 그 안에 든 백골이 갑옷을 뒤집어 썼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든다. 무쇠를 얼려낸 강철로 된 눈사람이 모호하고 흰 숲과 불투명한 대기를 비집고 설산에 돌아왔다. 주춧돌을 밟을 때마다 철커덕 철커덕 하며 숨구멍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숨을 뱉어낼 때마다 하루짜리 생명을 연료처럼 소모한다. 기어코 마주친 무쇠가 감정 없는 투구로 웃으며 피할 수 없는 물음을 물어온다.
- 기사양반. 싸우기 좋은 날씨지. 나랑 한판 하러 갈래?
한겨울에 산 중턱의 불빛을 찾아 온 눈사람. 녹은 눈 위에 눈이 겹쳐 다시 얼어붙어 생명을 가지게 된 눈사람. 매서운 격정이 갈기갈기 찢어버린 갈색의 천무더기를 두른 눈사람. 눈뭉치라도 생명은 있다고 가장 좋아하는 계절에 말했던, 가장 추운 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간의 세계로는 차마 건너오지 못한 그 속의 존재가 영하 건너편에서 기사를 불렀다.
이것은 기사의 자학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주먹을 다시 쥐고서 기사는 저도 모르게 말끝을 떨었다.
- 와론, 나야.
- 너였구나. 얼굴이 안 보여서 다른 사람인줄 알았네. 그 투구가 아니었으면 다른 기사라고 생각했을 거야.
- 정말 너야? 왜 온 거야? 같이 있겠다고 했잖아. 난 널 지켜주지 못했어,
- 그럼 오늘은 같이 가자.
- … 어디로 ?
그야 물론 너랑 한판 하기 위해서지. 오늘은 내 부탁을 들어줄 차례야. 금속의 손가락을 철그럭 대며 인사하듯 들어올려 까닥인다. 통나무집의 열기에 무쇠에 서린 서리가 약간 녹는다. 뚝뚝 마치 땀을 흘리듯 쇠의 표면에 물이 맺히더니 또르르 흐르는 것을 보고는 기사는 창을 들고 그를 따라 나선다. 실외로 나가자 덜 마른 검은 망토를 쥔 손이 창백하고 투명해진다. 눈이 개기 전에 가야 해. 밖은 기사의 특기인 별을 보고 방위를 관찰하는 일마저 할 수 없는 혼돈이었다. 마치 만장 하나 붙지 않은 쓸쓸하고 이름 없는 관 같은 나무집이 등 뒤로 깜빡이며 멀어지고 있었다.
희무레한 설연과 같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두 기사는 나란히 얼음에 젖은 산책을 나섰다. 앞서 걷는 와론은 손을 잡듯이 움켜진 론누를 세우고 눈 속의 눈덩이 사이에 파묻히면 밀어내는 동작을 반복하고, 사고의 암흑들에 흰 천같은 눈보라가 투구를 휘감는 내내 시야가 깜빡인다. 잔잔하게 숲바닥에 고여있던 눈마저 불어 닥쳐오는 광포한 눈폭풍이 되어 숲 사이로 휘ㅡ 하고 소리를 내어 빠져나가는데 날씨가 이리 된다면 싸우지 않고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둠은 만개하여 강설이 그토록 숱하고 가느다란 광선이 먼지 같은 눈발의 날림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눈이 내리고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간간히 빛이 없기도 하여 출렁이는 검은 자락이 모습을 감추었다가 드러냈다가 한다. 한 걸음. 귀 없는 투구와 뾰족한 신발등이 기어코 눈 사이를 찍어내고 그저 온기없이 도는 피는 겨울 속에 단단하고 햇빛에서 숨을 거둔다. 그같은 추위에도 눈사람은 조금씩 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물기가 응고한다. 어는 점 아래에 존재하는 최저의 극점을 찾아 나아갔다. 한탄스레 흩어지는 입김이 없는 기사야말로 살아있어도 무존재한 사람. 그가 벗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언덕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북국의 추위 속에 그가 스러지거나 아침의 여명이 눈사람을 녹일 때까지 폭풍 속을 서릿발로 춤추듯이 간다. 그가 원하는 대로. 추위에 물러서지 않으며 비보다 느리게 떨어지는 눈은 시간의 반류 같이 팔 아래서 흘러간다. 밤은 그만큼 길고 짙어져 더이상 추적을 피하거나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었다. 탐색도 은둔도 필요 없는 가파른 눈보라 속에서 오직 달 같은 발걸음만 따라간다. 눈이 나무들의 밑동을 집어 삼킨다.
부주의하게 발을 헛디디다 기사는 바로 미끄러운 눈이불 속으로 처박힌다. 도리질을 치며 고개를 들어보니 당연하다는 듯 철완이 그에게로 건네져 있다. 일어나, 짐짓 그를 놀리는 듯한 의뭉스러운 웃음에 기사는 정답게 내밀어진 한 손을 잡는 대신 다른 화해를 선사한다. 기사의 포옹에 넘어진 사람의 수가 둘로 늘어난다. 어쭈, 선빵도 칠 수 있게 된거야? 하하,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검은 기사는 무거운 체중에 실려 눈 속에 다시 한번 푸욱 파묻히고, 자기를 내리 누른 차가운 흉갑의 뒤로 두 팔을 잠궜다.
- 이러고 있으면 녹고 말텐데.
그는 장난스럽게 위협한다.
- 괜찮아! 설마 추워서 그러는 거야?
얼어붙은 서리 틈으로 보이는 그보다 시리고 푸른 시선이 움직임 없는 북극성을 떠오르게 한다. 끼기기익 숲이 신음하고 눈은 하염없이 쏟아진다. 바람의 모양대로 굳은 순록의 수염 같은 가문비 가지들이 울적하게 덮힌 하늘 속의 시린 별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았다. 정북을 가리키며 날아가던 창날이 되돌아와 그들을 풀어 헤친다. 소리가 휘파람에 묻히자 검은 기사는 목청을 높인다.
- 추위 같은 건 안 탄지 오래됐다고. 너야말로 무서우니까 도망가는게 아니야?
눈사람은 기사를 따라오고 기사는 눈사람을 따라가며 갑옷이 즐겁고 낭랑한 소리를 울린다.
- 많이 변했네. 그 뒤로 기사가 된거야?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고,
- 내가 기사 시험을 봤을 거라 생각해? 기사들이 날 잘도 얌전히 뒀겠어.
- oo, 그럼 왜 나를 따라했어?
내 말 때문에 그런 거야? 앞으로 달음박질을 치는 이를 기사는 입속말로 조용히 동정하다가
- 내가 기사가 된 게 기쁘지 않구나 와론. 적어도 이런 식으로 바란 건 아니어서 그래?
- oo. 네가 꼭 기사가 되었어야 한다면, 사실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
- 매번 그렇게 말해놓고선.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비추는 벗의 미소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친애하는 이여.
나는 아직도 자네를 어느 곳에서나 본다네.
동틀녘에 사라져 녹아내릴 무구를 쓴 눈사람. 눈사람 속의 기사. 그리고 끝내 서리 얼은 흰 속눈썹 밖으로 작은 유빙같이 빠져나가는 결정 어린 눈물로부터. 오래 전에 길 잃은 재회를 일깨우는 귓가를 횟도는 호루라기의 날카로운 소리.
- 하하하. 거짓말이야. 순전히 책임 때문은 아니지. 나도 기사가 되려고 했어. 물론 너의 곁에서...
산을 타고 투구를 타고 반향이 귓가로 돌아온다. 산양 같이 빛나는 웃음이 습관처럼 눈꼬리를 훑는다. 백색의 땅을 박차고 투구의 틈새로 들이친 서리를 내뱉고 닦으며 서로를 일으킨다. 얼음이 엉망으로 엉겨 붙은 숲을 지나서 그들은 갔다. 철갑은 미끄러지듯 숲의 결속을 뚫고 달리고 뒤따르는 기사는 백안으로 그 등을 응시한다. 그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관목줄기들이 눈을 객혈해낸다. 싸라기 눈이 공기 중에 빙결을 퍼트려 숨을 쉴 때마다 공기를 호흡하는지 눈을 마시는지 알 수 없었다.
낮의 빛이 닿지 않는 높고 좁게 솟은 침엽수들은 돛대 같은 어깨를 마주댔다. 노간주. 구상나무. 흰싸리나무. 거미줄 같은 노송 가지 위로 부러질 듯 눈을 쌓은 나무들의 밀집이 어느 왕국의 기념절을 생각케한다. 흰 눈이 상승하며 나리고 조명이라 해도 좋을 만큼 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는 은백색의 자잘한 조각들이 달을 대신해 무수히 떠올라 검은 어둠 속에 설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빨갛게 열매 익은 나무 숲은 상상에나 나올 법한 만찬이 열린 식탁 같았다. 초록색 보석 같은 상록수가 다리라도 달린 것 마냥 두 기사의 옆을 반대로 달려가고 휘파람은 뒤처져 길 없는 사이를 헤치는 그들의 뒤를 붙잡을 듯 쫓아온다. 드문드문 앞에서 내린 물방울이 기사의 면갑을 두드렸다. 도망가듯 질주하는 기사를 좇으면서 그는 진즉 닦아주지 못한 눈물들을 쓸어내리고 싶었다. 아직 태양이 비춰보지 못한 북국의 경계는 안락한 망명의 구석이 되어 그를 차갑게 얼려줄 것이다. 와론은 눈사람 답게 웃었다. 치기 어린 행동은 사랑의 도피가 되어 그를 즐겁게 하는 것처럼. 어느 눈사람에게 모자를, 목걸이를 씌우고 이름을 지어주던 옛날의 이야기는 주인공 없이 불완전한 소설의 한편 같았으나 투구 위로 박힌 눈과 코. 초승달 같은 입은 웃음을 짓는다. 같은 뜀박질에 발을 맞추었다. 그는 기사가 벗을 위하며 지내고, 또 기사 자신을 위하면서 그와 함께 지내곤 하던 유일한 집이었다. 언제고 창문을 열어둔 집. 그는 더이상 기사가 외로움에 차오르지 않도록 했으니까. 다리부터 서서히 녹아오르는 그에게 피에 지저분해진 얼굴로 잠잠하던 모습이 겹쳐와 검은 반장갑을 낀 손이 눈사람의 등을 계속 떠민다.
왜 이래, 천천히 가자. 아니야라고 되내이는 듯한 걸음이 더 많은 눈 속을 급하게 밟고 생명의 징후를 찾는다. 눈사람에겐 눈보라가 호흡이고 철그렁 대는 목걸이, 고막에 울리는 이명이 맥박이라고. 맞잡은 손은 끝도 없이 점점 더 시려온다. 한파가 기사의 감각을 무디게 했어도 아무것도 그들을 멈추지 않아 가빠오는 숨이 안심이 된다.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양철 갑옷을 입어서. 다리가 없는 건 무릎까지 쌓인 눈에 파묻혀서 였다.
오솔길을 따라 검은 지평선이 드러난다. 멀리 시리우스와 조금 옆에 떨어진 북극성이 시야에 담긴다. 그를 지대의 경계에 버려둔 채로 눈사람은 붉은 목도리를 날리며 극광이 지워진 설원을 몇 걸음 더 걸어간다. 녹을 자리를 고르듯이 어느 곳에 발자욱이 끝이 난다. 약해진 눈보라가 그쳐있다. 귀 옆을 조이던 노름쇠를 풀고, 수구린 고개에 숨을 섞으면서 머리에서 투구를 벗어내렸다. 동쪽의 산벼랑에서부터 조금씩 사방이 분열하였다. 미명이 곧 첫닭을 울리고 구름새를 밝힐 낌새를 드러낸다. 아침은 밝지 않은 적이 한번 없었음에도, 얼음은 그토록 강고해도 열 앞에 버틴 적이 없었음에도. 조금씩 감퇴해가는 미소 속에 하나의 팔이 사라지고 다리서부터 점차로 밤이 희미해져간다.
- 와론!
미안해. 내 잘못이야, 수없이 번복된 사과는 한번도 전달되지 못했다.
- 왜 나를 덮어주려고 했어?!
이제 너는 혼자서도 괜찮은 거야? 기사는 또 한뼘 옅어진 아래를 보며 외친다.
- 이젠 너를 oo라고 부르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니. 투구도 조금 아쉬운 걸.
와론의 차가운 푸른 눈은 여전히 바라보는 무엇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더이상 사명감이 서려있지는 않다. 기사는 두 번 다시 마주하지 못하리라 했던 그 눈을 응시한다.
- 너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 다행이야. 내가 죽고 네가 남아서 . 해가 떠오르기 전에 가. 기다리지 말고. 이번에는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돼.
바람이 깊은 설원으로 들어와 눈을 뿌렸다. 무언으로 전한 인사를 끝으로 그가 돌아서려 할 때 숲의 경계를 터덜터덜 벗어나는 걸음이 한순간 엉망으로 무너지며 앞을 향해 쏟아진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온기를 품고 떨던 손이 그를 세게 감싸안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텅텅 거리며 투구가 홀로 지면을 구르고, 가볍게 휘날리는 옷자락이 딱지 같이 단단한 무구 위를 덮는다.
- 와론,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네...
금빛 햇살을 뒤집어 쓴 채로 같이 누워 사라지는 시리우스를 보았다. 해가 올라오고 겨울철 가장 빛나는 별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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