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무당거미

검힌. 약 하마닭

​거미 무서워하는 힌셔. 애늙은이 스포 有



하마는 뒤엉킨 줄에 걸려있었다. 꿈 속에서 나오니 집 바깥 울타리에 커다란 거미 하나가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서찰을 전해주러 들른 기사 – 후배 – 의 이야길 듣고 정원으로 내다보니 과연 대문의 오른켠의 창살 두 개를 부지런히도 이어놓았다. 

치울거야?  후배는 거실을 크게 차지한 식탁 위에 서찰 뭉치를 내려놓는다. 부츠발에 거실의 바닥까지가 흙자국으로 버물었다. 무슨 거미일까? 저건. 뜬금 없는 힌셔의 중얼거림에 어설픈 정적 끝에 잠시 생각하던 후배는 무당거미라고 답했다. 


그럼 두겠네. 공연히 해치는 거 아닐세. 특히 큰 거미 같은 건. 그런 이야기가 있긴 하지. 기사는 떨떠름하게 긍정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다리 하나를 잃었구나.  둘은 창 밖을 잠시 구경하다가 이내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린다. 아침부터 공연히 제 집에 들러준 성의를 생각해 힌셔는 그에게 차려놓은 아침상에 앉아 한술 뜨게 하였다. 식탁을 등진 그의 시선에서 물끄런함이 창 밖을 떠날 줄을 몰랐다. 


태풍의 밤을 지나며 바깥이 자꾸 신경을 끌어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있었지? 저곳에 거미가. 방사형으로 집을 지은 거미는 언제부터인가 이층의 창문을 주시하는 모양새를 했다. 그것은 긴 호우를 제자리에서 보냈다. 힌셔가 이리로 가면 가만히 죽은 채를 하다가도 저리로 가면 다리를 까닥 하는데, 분명히, 그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한갓 미물이 아니던가. 왜 하필 이 집 앞이냐. 다리 하나는 어쩌다 잃었나? 소름으로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곤 했다. 생각은 있었으나 답은 없었다. 과거의 과오가 계속 겹친다. 

기사는 그게 그냥 거미인지, 지능이나 생각이라도 가졌는지 확인할 길도 지식도 없었다. 다만 밤낮으로 가만히, 울타리에 진 쳐놓은 작은 동물을 보며 갑자기 울어버릴 듯한 기분에 젖어버린 것이다. 탁, 창문을 내던지듯 닫아버린 것이었다. 

그 근래 힌셔는 내내 우울함에 젖어 있었다. 돌아온 수도는 지나치리 만큼 바뀐 것이 없이 떠나올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곁을 스쳐간다. 길의 중앙을 흐르는 수로는 새로 공사한 것에서 역사와 전통을 품은 낡은 경관으로 변모해 있다. 평소보다 조금 긴 임무를 마쳐 동네가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 정도의 기분이었다. 길은 언제나 힌셔가 아닌 그 누구라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게며 식당이며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고 구획은 늘상 확장되었다. 검붉은 하마 이후로 한창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들은 떠들어 대고 있는데 어찌 정작 당사자인 그에겐 잘 와닿지 않는다. 그는 바뀐 풍경을 보기 위해 수챗구멍을 빠져내려가는 물이나 이방인처럼 배회하곤 했다. 수련 중에 불편하여 머리를 쪽질 때마다 생각은 점점 많아져만 갔다. 산맥을 따라 둘러친 장벽과 봉화대며 성문을 끼고 몸체가 긴 뱀처럼 세워진 성곽은 그를 덮쳐올듯 넓고 두꺼워졌다. 그 이넘은 머리 속에서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의 눈은 왜 세간의 사실들을 흉측하게만 드러내는 것인가. 다리가 일곱개로 좌우가 맞지 않는 저 거미처럼. 노력은 흔적 없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이다. 성문을 들어가고 지나칠 때마다 작은 불안들이 벌레같이 점점 그에게로 기어왔다. 현관을 지나며 매번 거미의 검은 눈과 마주쳤다. 그것의 집에는 점점 먹잇감이 걸리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고 식사법은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는 것이었다. 간혹 다 먹지 못한 곤충 머리나 몸통이 걸려있거나 탈피한 껍질처럼 쭉 빨려 허물만 남겼다. 겹눈이 많아서인지 크기가 작아서인지 통찰할 수 없는 눈에 현기증이 올라왔다. 미시적인 징그러움과 무의스러움이 그에게도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식사를 끝낸 먹이를 박제하는 고약한 습성을 가졌고, 먹지 않고 두거나 죽이지 않은 사냥감들은 작은 다리가 미약하게 박동하며 마취된 채로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걸 잔인성이라 부른다면 그 작은 세계의 포식자에게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의 세상은 식사의 잔여분들로 꾸며져 있었다. 곤충들은 까닭없이 연민스러웠다. 그것들의 변명과 한계는 비열하고 나약했음에도 힌셔는 금발에 얼굴을 묻은 채 그것들을 동정했다. 스스로 거미줄에 걸려든 신세가 몇 년 전 보아온 모습과 꼭 닮아서 였다. 거미줄 위에 살찐 몸통을 띄운 채로 긴 다리를 미끄러지는 모습은 여즉 혐오스러울 정도로 날렵했다. 차라리 죽일까? 오밤 중에 나가 아무도 모르게. 거미 하나 죽인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힌셔는 단순히 치워버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발겨서 다리를 떼어내고 경련으로 바르르 떠는 것을 지켜보고, 그 최후를 제 눈으로 직접 확살하고 싶었다. 회양목과 같은 녹색의 체액으로 울타리를 망쳐버리고 싶었다. 마치 기사들이 그의 스승을 도륙했듯이.



어이. 하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안색이 나쁜데. 뭐 켕기는 데라도 있냐?  힌셔는 데워진 식사도 커피도 식기 전에 상 위로 내려놓는다. ...나쁠 일도 없지 않은가. 검붉은 하마가 핏빛의 색을 이어받은지는 아마 대부분이 모르는 사실일 것이다. 힌셔가 마음 속으로 먹어버린 공포는 범인들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만 그는 곧 무표정을 짓는 법을 익혔다. 바쁘다는 것 치곤 꽤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나. 가져오는 소식 덕에 석간을 읽을 필요도 없어졌다. 현재의 불안은 과거에 근저해 있다. 그리고 가끔 스승은 필사적인 웃음으로 그걸 삼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신은 자신을 두려워했나? 나도 딱히 그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닌데. 대기가 자꾸 길어지기도 하고. 관록을 쌓은 기사로서의 거미는 수도의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혈통마저 남달라 어느 기사들과도 다른 위치에 거해있었다. 발 빠르게 수도로 돌아온 보람도 없고 말이지. 거미의 힘은 두려움이었지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적은 없다. 그래서 스승은 그에게 그토록... 벽공 말이다, 널 가르친 이는 누구 였나? – 말하면 알겠어? 이봐, 왜 물었는지는 알겠는데, 기대하는 답은 아니야. – 가족이나 일문은 없었느냐? – 없었다니깐. 그는 답을 듣고 한참을 손에 들린 검자루를 만지작 댔다. 눈을 맞추는 것을 꺼리던 그가 뒷말을 내놓을 때까지 후배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속이 답답하다. 

몸이라도 안좋은 것 아냐? 뭘 잘못먹든가...

그런게 아니란 걸 알잖는가.  

산책 겸 몸이라도 풀러 가겠냐는 말에 기사는 거절을 표했다. 나가고 싶은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고 습기가 그를 압사할 것 같은 상태였다.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피칠갑을 면하지 못한 벽공의 계승은 끊어져 있었다. 거미는 힌셔를 제자로 삼았고, 유일한 계승자인 힌셔는 후학을 가르친 적 없었다. 제 삼의 문파들은 기뻐했을 것이라는 불유쾌한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이야기였으나 유파들 간의 다툼을 생각하면 벽공을 누가 훔쳐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감사히 여겨왔다. 아무런 비급도 비전도 남기지 않는데 그래도 영지에는 거미의 본관이 있어 개중 몇은 그 파괴력 높은 무술을 눈대강으로 흉내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그들까지 싸잡아 문중의 속한 이들은 멸족을 당했거나 자결했을 것이다. 어쩌면 어느 생존한 무인에게서 새까만 닭에게로 그 희미한 지류를 이어왔는지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본인의 생각은 상당히 다른 것 같지만. 그를 십 년 정도 더 일찍 만나 제 손으로 기르지 못한 것에 대해 힌셔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자라면 상당히 속썩는 골칫덩이였을 자였다. 

사람들은 사제가 하나의 덩이로 묶여있다고 여겼다. 감히 힌셔에게 그가 정말 악마였느냐고 묻는 자는 없었으나 그들에겐 청출어람과 기어스에 얽힌 구전들이 명확했다. 커다란 체격과 높은 신장. 일반인의 두배는 족히 넘는 손발. 검술 또한 비슷하니 구분할 겨를이 없다. 함께하였던 사실 이외에는 거미와 힌셔 사이에는 무엇이든지 외부에서 바라보기엔 공허할 따름이다. 눈으로 보아온 스승이라는 자를, 그의 사부를, 핏빛거미라는 인간을 오직 힌셔만 알았다. 드물게도 스승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고서 제 세대의 몫을 공고히 한 듯 보였으나 그조차 피해갈 수 없는 게 있었다. 사람들은 추앙하면서도 그를 향해 수군거리겠지. 그러나 그런 몇마디로 그들 사제간의 관계를 전부 해부할 수 있을까. 인생의 절반을 같이 보내온 스승이었고 마지막까지 따르던 이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 긴 시간을 함께 지낼 수 있었을까. 그러나 동시에 스승은 하늘 같이 까마득한 존재였다. 

한 구석에 꽉 닫혀있는 상자는 기압과 같이 그를 늘 내리누르고 있었다. 기억 한 켠에서 저를 까마득하게 하는 스승의 눈으로부터 일정의 말살을 당해온 것이다. 그때는 힌셔도 어렸을 때였다. 그 시절 힌셔는 간혹 거미가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훈련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어깨에 붙은 삼각근 밑으로 안쪽에서 갈라져 튀어나온 이두근은 검을 쥐면서부터 생겨났다. 날개죽지에 난 커다란 흉을 잊을 수 없었다. 목검이 나뭇가지로 만든 것처럼 간단히 부러져 튀었다. 스승을 두려워하기 않는 데에는 오랜 세월을 소요했다. 그리고 비슷한 눈높이에서 비로소 본 얼굴은 어떻던가. 땀에 젖은 핏빛 거미의 얼굴. 얼굴의 반면만 드러나 흉측한 흉터로 일그러진 눈. 악마의 형체는 이토록 괴이하고 무해했으며 사람의 힘은 그토록 무력했다. 힌셔는 그 안에서 일찌감치 강하다는 것 이외에 거미의 다른 일면을 보았다. 온전한 두 눈이 드러난 그의 얼굴을 통찰할 때와는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어긋나있는 그 초점과 드러난 흰자가, 평소의 온화한 스승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힌셔는 그에게서 악마기사의 조짐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코 힌셔는 곱게 답할 수 없었다. 마음이 아픈 건 가책으로 인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고통이 아니었고, 슬픔이 아니었으며, 힌셔는 그의 스승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힌셔에게 삶의 의미를 가장 먼저 찾아준 자였다. 그럴 때 그는 스승에 대한 깊은 이해에 젖어 시간을 보냈다. 불쑥 찾아온 이해의 순간을 힌셔는 의미 없이 흘려 보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붙들었다. 어떤 날에는 정말이지 처절했다. 속이 활활 타오르는 그 타는 점의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 또한 불에 번져 버릴 것 같았다. 혹은 이미 전부 용광로에 부어지는 쇳물처럼, 뜨거운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고 녹아 흐를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황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이 굴었다. 스승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그에게 때론 무기를 쥐는 법을 때론 싸움의 기술을, 때론 요리나 시덥잖은 장난들을 했다. 그리고 끝내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부분은 몇 번이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내용들이 다른 의미로 떠오르다가,

한순간 말이 매듭지고 얼굴만이 보였다. 그가 웃던 모습이.

그에게 그 감정을 가르친 스승의 눈에 담기던 것이 아득하게 내리쬐었다.

 비극은 생명이 생명을 말소하고 빨아들이는 일이었다. 그것이 배신이든, 스승의 유지이든. 그런 식으로 사문을 이어나가는 일이. 그것에는 불화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피를 흘려갈수록 사문의 형태는 점점 악마와 비슷해져갔다. 감정이란 어디서 시작되어 흐르는가. 발원하기 시작한 생각이 흘러가는 것은 멈출 수 없다. 명예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정작 그 명예에 대해 무엇보다 알아야 할 기사들 중에도 그 대답을 해주는 이는 많지 않았다. 힌셔도 때로는 체득했다 여기면서도 길을 잃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극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에 대해서는 좀더 명확하게 답할 수 있겠다. 




비극이란 제자가 스승을 효수하는 일이다.




사흘이 지날 무렵 거미는 확실히 기괴한 행동들을 시작했다. 다리를 저는 것처럼 거미줄 위를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툭투두둑 무언가에 걸려 내려가는 것처럼 길이 없는 방향으로 줄 사이를 건너 뛰며 내려가는 것이다. 녀석이 튀어오르면 거미줄 전체는 흔들리곤 했다. 잡힌 곤충을 식사할 때는 여전히 우아하고 매끄러웠다. 몸통에서 뻗어나와 체중을 지탱하는 가느다란 다리의 움직임에 소름이 일었다. 
거미에 대한 의식은 공포에 계속 가까워져 갔다. 커다란 눈은 사람과는 달리 여러 겹이었다. 많은 다리가 번갈아 움직이고 입을 딱딱대며 벌리는 짐승이 그에게로 기어왔다. 꽁무니에 실을 매달고서 검고 화려한 떼를 이루어 공중으로 낙하한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배가 먹잇감으로 가득 부풀었다. 붉은 색과 노란색의 강렬한 원색이 겹친 무늬를 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에게조차 경고 하는 듯. 무늬는 태양 같기도 일그러진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즈음 꾸는 악몽은 잊고 있던 기억의 흉측한 딱지 밑을 드러냈다. 

그날은 임무를 망치고서 어렵사리 귀환한 날이었다. 쌓인 감정이 곪아있었고 스승에게 뺨을 맞은 날이었다. 폭풍우가 가신 뒷날 강가는 상류에서부터 범람해 기사마저 건너기 어려울 정도로 물살이 거세고 시끄러웠다. 힌셔의 언성은 거의 날카롭게 들릴 정도로 높아졌고 흠뻑 젖을 정도로 장대비를 맞아가면서도 언쟁은 끝이 없었다. 왜 이런 일을 시키시는 겁니까? –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는 심중에 묻어두던 말을 결국 내뱉었다. 단지 그뿐입니까? 당신이 절 제자로 받은 건? – ... 거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힌셔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단지 그뿐이야, 내가 널 제자로 받은 건. – 먼저 돌아가라. 머리 좀 식히고 있어. 

그런 싸움은, 지금 와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당시에는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어떠한 사과도 돌아온 적이 없었다. 둘 사이에 그 일은 잊힌 것처럼 거론되지 않았다. 그는 기실 힌셔에게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이중인격을 지닌듯이 그는 가끔은 너무나도 무정한 스승이었다. 미안함 같은 건 그에게 없는 감정이었다. 스승은 그에게 후회를 가르친 적이 없었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야 한다고 그의 기억이 스스로에게 되내이고 있었다....


...거미는 그를 지켜보는 듯했다. 신음과도 같은 빗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며 매장해두었던 그때의 기억들을 종용해온다. 오래된 가정의 흙을 파내서 쓸려가게 두면 무언가 달라질까? 여러 겹의 눈에서 윤기가 돈다. 그안에는 흔들리는 제모습의 상만 뚜렷했다. 그를 벨 때에 느끼지 못한 가책 또한 너무나 큰 죄책감에 짓눌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 뿐이었다. 계보니, 사제니, 그런 것에 무심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힌셔에게 기어스는 따로 있었으나 그의 기어스는 아무래도 이것이다. 평생을 연연하며 얽매일 족쇄는, 아무래도.




도시의 우물에는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미줄이 흰 천을 이루고 있었다. 왜곡과 뒤틀림과 본인의 주관에서 벗어난 온전한 회상도 있었으나 밖으로 드러날 필요는 없는 개인의 노력이었다. 거미는 자꾸만 거미줄에 거꾸로 매달리고 간혹 길에서 거미줄이 날아와 몸이나 머리에 감기곤 한다, 머리카락 같은 소름 끼치는 감촉에 기겁하며 떼어내면 빈 실타래였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날아다닐 정도로 가벼운 거미줄에 애초에 거미가 달려있을 리도 없었는데도. 어디를 가도 풀어놓은 실타래가 있어 사지를 끊임없이 감아왔다. 얇디얇은 실에 그는 질식하고 있었다. 호흡조차 어려운 밤이 연이었다. 선배, 미친, 정신 좀 차려봐- 아랫층에서 소리를 듣고 올라온 기사가 그의 어깨를 쥐고 등을 두드렸다. 좀 봐봐, 아니 무슨 밤 중에...

나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커다란 먹잇감처럼 제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바둥댔소. 그런 나를 단단히 틀어올린 스승은 허리를 때려 숨을 뱉게 하고 두 다리를 땅에 딛게 했지. 그는 언제나 행동으로 대답해주곤 했지. 학살을 거론하던 내 목청은 고통스럽게 갈라졌소.

이제 괜찮다, 됐으니까 너도 신경쓰지 말고 가서 자라. – 뭐야, 대체 언제부터 이랬어? 이불을 움켜쥔 손 위로 끈끈히 타액이 떨어졌다. 식은 땀으로 젖은 머리를 걷어올리는 손이 성가셨다. 됐다니까. 그만 가봐라. 

기어스. 기사들은, 맹세를 했다. 그러나 스승과 황제 중에 어느 누구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태양을 닮은 이에게서 비롯된 내가 어찌 밤이 될 수 있겠소. 스승의 무수한 굴레를 보아온 내가. 기사라는 이들은 전부 당신이라는 한 갈래에서 난 물줄기인것을...

제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스승이 파놓은 트랙을 좇기 마련이다. 제국의 검들이 그의 스승을 도륙했듯, 스승이 제 손에 묵직한 검을 쥐게 했듯, 최고를 입에 담은 그의 말대로 제자는 이름난 존재가 된 것이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집단이었어도 모든 기사들이 그의 계보가 아니었던가? 명성과 명예가 그들에게 남은 전부였다. 우리는 공범일지도 모르고, 지금의 기사들의 나약함을 낳은 두 항성일지도 모르지. 맹수가 되지 못한 짐승은 먹이가 되리라. 저로 인해서, 그리고 저의 스승으로 인해서.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시야가 답답하고 호흡이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더이상 기사가 아니었고 핏빛거미도 아니었다. 힌셔는 배워온 지식도, 논리도 전부 쓸모없는 것이 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런 식으로 다뤄져셔는 안되는 것들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힌셔를 기반해주었던 사제로서의 지난 나날들은. 힌셔에게 스승은 거미였다. 그리고 거미는 그의 스승이었다. 완벽한 영웅을 자아내는 사람들의 공상에서 그 사실을 지우더라도, 힌셔의 안에서 마저 그걸 잊을 수는 없었다...

스승님. 어찌하여 악마가 되기로 자처한 거요? 그리고 어째서 내 스승이 되기를 자청한 거요. 

방뚝을 터트리듯 무너진 감정은 탁류가 되어 사방을 닥치는 대로 부수었다.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들이 흘러내렸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감정을 남김없이 죽여버렸을 텐데. 양립할 수도 동질할 수도 없는 선 따위야 죽죽 망쳐버렸을 텐데. 그러나 연민하면서도 걸려든 곤충들의 숨을 끊지 않는 이유는, 그럼에도 이리 번민하는 건 분명 우리가 사제인 까닭이다. 내가 실망 시켜서 죄송하다고, 사죄라도 할 줄 알았소?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여도 스승이여, 나에게 행한 희생이란 것은 당신만은 알아주심이 옳소.

이 명예를 위해 무엇을 걸었는지…

발작 후에 찾아온 침잠이 미농지에 스미는 먹처럼 번져들었고 천둥이 내리쳤다. 인간의 심장이 그러한 박동으로 뛴다면 살 수 없는 불규칙한 박자로.


스승이 자길 사랑치 않는다고 의심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와 드는 의심은 다른 것이었지만. 당신은 나를 두려워했나? 자신과 같은 모양으로 장성해가던 제자를. 당신의 손으로 창조해낸 피조물의 전혀 다른 형태들을. 당신은 정말 악마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당신에게 나는 그저 수단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 밤 거미가 끝내 입에 담지 않은 진심이자 진실이었다. 우레가 가득하던 강가에서 홀로 섬뜩하니 푸른 안광을 드리우면서도. 감정에 사로잡혀 밑바닥을 내비쳤던 그가 끝끝내 좋은 사람의 연기를 그만 하고서 기사를 밀어냈다. 

가.

힌셔는 말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스승에게 맞은 뺨이 어느 때보다 찌릿하게 아려왔다. 

그 밤을 기억한다. 자신과 그의 사이를 칼끝처럼 찢어놓았던, 갈라놓았던 뒷면의 날들을. 그들이 아무때고 내보이지 않는 진심이 폭풍우에 밀려 올라간 파도로 뭍을 살짝 살짝 드러나던 일을. 핏빛과 악마를 연기하던 그 온건한 인간을 낙인처럼 기억할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비록 언제나 그 사실을 덮어둔 채 있더라도,

모든 이들이 힌셔라는 이를 모르는 이 장소에서 가끔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마저 불안하게 잊혀질 때마다 꺼내볼 것이다….



근래의 며칠과는 다른 아침이었다. 묘하게 표정이 밝은데. 후배는 홀로 안도 어린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제 슬슬 전적을 뒤집고 싶은데-. 몸이 근질거리지도 않으신가?  아침 식사를 마무리 할 때즘 무장을 마친 기사가 식탁의 귀퉁이를 툭툭 치며 물었다. 나보고 져달라는 거냐? 힌셔는 비가 멎고 며칠만에 당도한 조간을 읽고 있었다. 식사 후에는 가벼운 훈련을 할 심산이었다. 아니 이길 기회를 달라는 거지. 새가 소식을 물어오는 것처럼 니젤은 매일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결국 싸우자는 소리군.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거냐, 아니면 네 녀석 보다 강한 기사가 있으면 사족을 못쓰는 거냐.

에헤이, 비빌만 하니까 비비는 거지. 

... 자네는 기사가 된게 좋은가?

뭐야 뜬금없이. 며칠 골골 대더니.

아프긴 언제 아팠다고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마음 쓰고 있었나... 그럴 것 없다. 이젠 괜찮으니.

선배 오늘 따라 진짜 이상하네. 

그는 글자에서 눈을 떼고 창 밖을 살폈다. 회안이 투명한 빛을 띈다. 언젠가 스승이 그에게 보여주겠다 약속했던 세상의 전경이 비에 깨끗이 씻겨있었다. 말을 섞지 않는 자와 싸우지 않겠다는 맹약을 치르고서 살아오며 힌셔가 여전히 보리라고 기대치 않은 말그스레한 풍광이었다. 수고 많은 길 중에 기사로서 태어난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가르치며 선을 긋고 그린다. 몇 번을 만나도 그는 자신의 스승이듯이.

거미가 이슬 맺힌 실을 걷어내고 방사형을 그린 뒤 둥글게 방향을 틀며 시계 방향으로 뱅글 뱅글 집을 짓는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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