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할계
칸와
231022
*칸덴티아X와론 cp입니다
칸덴티아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성격은 아니다. 순백의 코끼리라는 이명-그리고 이명의 동물이 가진 상아만큼이나 새하얀 용모에 여름을 닮은 금발, 햇빛 속에 녹아드는 밝은 녹색의 눈동자-에 대해 들은 사람은, 황제의 호위가 으레 그러하듯 연한 색의 망토를 걸치고 위엄있고 몸에 맞게 정돈된 격식있는 기사복을 입었지만, 딱딱한 복장 위의 얼굴만은 천사같이 부드러워서 성스럽기까지한 인상의 소유자를 상상하게 한다. 더 부풀려보자면 아마 그는 문양이 그려진 갑주를 착용하거나 황제가 직접 하사한 무기를 소유할지도 모르며, 국교랄게 없는 제국에서 홀로 신화적인 신비감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러한 보편적인 기대는 칸덴티아라는 기사와 일치하는 점이 없다. 게다가 그의 포악한 성질머리를 반영한다면 성스럽다는 말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에 가깝다. 황성이 있는 제국의 수도뿐만 아니라 온 제국민들이 기사들을 알아보는 대륙의 정서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칸덴티아가 그런 고귀한 기사가 아니란 것쯤은 인지하고 있다. 칸덴티아는 강자에게도 불친절한 기사요, 약자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다부진 어깨를 드러내고 수도를 걷는 그는 누가 보아도 기사 중의 기사이지만 그 기세는 정의롭기보다는 타고난 싸움꾼의 것이다. 칸덴티아도 호위로 발탁될 때 즈음엔 이전 같이 그를 쳐다보는 이들에게 몸소 대꾸를 해주는 일은 줄었으나, 눈이 마주치면 저절로 시선을 피하게 되는 살벌함은 여전했다. 칸덴티아가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건 상상만으로도 식은 땀을 흘릴 만하다. 수도의 사람들은 가끔씩 그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 파인 보도를 보며 코끼리는 초식이지만 거구를 가진 동물이며 화가 나면 어떤 것도 짓밟아버리는 강력한 생물이라는 것을 유념하곤 한다.
그러한 성미가 정점에 올랐을 때는 그가 기사가 되고 나서 한 해를 채우고 난 뒤로, 이른바 명예놀이를 즐기는 기사들의 세계와 순백의 코끼리에 대한 세간의 혹평이 그의 공격성을 극도로 부추겼다. 반면 갓 신출내기이던 시절에 그는 아직 자신에 대한 비호의적인 태도에 무뎠으며 알았다고 해도 남을 의식하는 타입도 아니었으므로 무작정 주먹을 내지르지는 않았다.
“야. 너 뭐하냐. 지금?”
그러니까 칸덴티아가 아직 호위가 되기 이전, 수도 외곽부의 숲 속에서 넘어져 서로를 부둥켜 안은 두 기사를 보았을 때도 선제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는 얘기다. 칸덴티아는 초록색의 눈을 크게 뜨고 피가 묻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군데군데가 얼룩진 회백발에 가린 입매가 난처하다는 듯 내려간다.
“이런…”
와론은 무릎 위에 쓰러진 기사의 시체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땅에 떨어진 투구를 주워들어 머리에 씌웠다. 끼릭- 고정쇠를 잠그기 무섭게 걸어온 칸덴티아가 그의 앞에 섰다. 젖은 망토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시비조의 목소리가 그를 내려다 보며 다시 한번 묻는다.
“뭐하냐고.”
“결투인데.”
“뭐?”
“결투한 거라네. 기사 대 기사로서.”
“결투는 무슨. 지금 니가 얘 죽인 거지?”
와론은 망토를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흙덩이가 바스스 풀숲 위로 떨어진다. 한 눈에 그를 알아본 와론은 이 어린 기사가 당장이라도 제 멱살을 끌어올리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얼굴을 봤나? 와론은 잠시 신중을 기하기로 한다. 시계는 어두웠고 상대는 어리지만 괴물이라 불리고 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인데 그렇게 남의 명예를 까내리나? 남한테 무언가 물어보기 전에는 자기 이름부터 대는 거라네.”
“뭐래. 그게 살인한 놈이 할 소리야?”
“살인이 아니라 결투라고.”
“결투는 살인 아냐? 말 돌리지마.”
“그는 명예를 어겼네. 민간인을 상대로 악행을 저질렀고. 정황은 충분하다네. 내가 네게 하나하나 설명할 이유가 있나?”
검은 장화가 칸덴티아의 앞으로 터벅이며 다가간다.
“악행을 악행으로 갚는다고? 웃기네. 무슨 권리로?”
“일대일 결투는 기사의 방식이지. 아니라면, 네가 나를 처단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게 네가 원하는 기사의 방식인가?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
와론은 자신보다 한참 작은 그의 이마에 투구를 마주 댔다. 귓가에서 기사명이 불린 순간 칸덴티아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손을 대기에 기사는 놀랄 정도로 어린 외모를 가져 와론은 흠칫 놀란다. 당황이 서린 앳된 표정이 보였다. 기사라고 해도 채 십대 중반도 지나지 않은 나이. 애들과 싸울 정도로 분별이 없지는 않다. 와론은 투구를 물리고 발을 떼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명예를 어겼어.”
그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굳어있는 칸덴티아는 혼란스러운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한다.
“잠까..ㄴ”
“참, 내가 투구를 벗은 모습을 봤다는 건 비밀로 해주게. 별로 알려지고 싶지 않으니 말이네.”
와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 기사는 맞아?!”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손을 들어보이며 깜깜한 나무 그림자에 묻혀 사라진다. 난장이 된 바닥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던 시체와 남겨진 칸덴티아는 문득 주먹에 힘이 풀려있음을 느꼈다.
“…근데 이거 내가 보고해야 해?”
와론은 기본적으로 상냥한 사람은 아니다. 특히나 그가 싫어하는 기사라는 족속들에게는 한층 거리를 두었으므로 설령 그에게 상냥한 일면이 있다고 해도 기사들이 목격할 일은 없다. 그의 태도 역시 유하지 않았고 동료의 개념이 없기로 유명하므로 기사생활을 지속하고 싶은 기사라면 누구나 그를 기피한다. 그러나 그건 기사들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와론은 약자에게는 친절했으며 민간인에게는 거칠게 굴지 않는다. 물론 싸움이 얽힐 땐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그런 호전적인 면조차도 보는 이들에게 새까만 닭을 기사다움으로 상징으로 보이게 했다. 진한 색의 이명. 그리고 그 이명에 걸맞는 강자. 성문을 걸어 들어올 때의 위압감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론누. 철제에 둘러쌓여 늘 무장을 하고 있는 과묵한 그를 수도의 주민들은 은근히 선망했다. 그리고 그들의 추측은 기사들 사이의 악평보다도 어느정도 들어맞는 점이 있었다. 와론은 어떠한 명예도 어긴 적이 없는 기사 중의 기사였고ㅡ 무엇보다 그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더 유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새까만 닭. 당신 이명 맞지?”
와론은 투구를 돌려 몇 안되는 한가로운 휴식의 방해자를 쳐다본다. 얇고 옅은 금발의 한자락을 땋아 빙 둘러 반묶음을 한 이는 뜻 밖의 인물이다. 그가 있는 나무 위는 사람들의 눈에 띌리가 없는 데 어떻게 찾아낸 건지. 칸덴티아는 기어코 주변에 물어 자신의 이명을 알아낸 모양이다. 끈질기다고 해야할지. 아이들의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지.
“여. 칸덴티아. 무슨 일인가.”
“칸덴티아라고 부르지 마. 그보다 시간이 남아도는가 보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보니.”
"그것보단 상시 호출에 대기할 정도로 유능하다고 해두지."
헛소리, 칸덴티아는 손을 내젓는다.
"심심하면 나랑 같이 순찰이나 가자. 지금 나가지 않으면 정말 호출을 받게 될 걸?"
기사는 그것이 대단한 벌이라도 되는 양 씨익 웃는다. 사실상 순찰이란 시가지에서 놀고 먹는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안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이미 충분히 잘 놀고 있거든."
“그때 당신이 한 부탁. 지켜줬잖아. 아니면 여기저기 말해도 되는 거였나?”
“저번부터 방식이 별로 명예롭지가 않군. 코끼리.”
뭐? 발끈하던 코끼리는 이내 다른 패를 꺼내든다.
“그때 수도까지 시체를 끌고 온 게 누구라고 생각해."
“흠. 그건 내가 따로 보고를 올렸는데. 가만히 두면 달잔이 알아서 했을 텐데. 설마 직접 이고 온 건가? 힘도 좋군.”
풉, 와론이 투구 밖으로 가볍게 웃었다. 칸덴티아가 재차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거든?! 어쨌든 수습하는 동안 현장을 지켰다고!"
"그래, 뭐 대견한 기사님께 상이라도 드려야 할까?"
칸덴티아가 그가 앉은 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두 팔이 투구 옆을 막아서자 얼굴 간의 거리감이 일순간 급격하게 줄어든다.
“칸덴티아라고 불러.”
씨익-. 밝게 웃는 미소보다 먼저 진초록으로 반짝거리는 눈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와론은 마지못해하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칸덴티아의 뒷편으로 나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투구는 왜 쓰는 거야? 답답하지 않아?"
"그냥 멋. 요즘 애들은 이걸 이해 못하는 구만? 기사하면 무장인데 말이야. 쯧쯧. 완갑은 경량추 역할도 하고. 이게 제법 도움이 된단 말이지-."
와론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옆을 걷는 칸덴티아의 머리통에 한 팔의 완갑을 올린다. 칸덴티아가 퍽, 치듯이 그것을 걷어낸다. 튕겨나간 갑옷의 안쪽에서 얼얼함이 느껴진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원래 힘이 강하면 그만이잖아."
"아- 이래서 신참들이란. 오만하기는."
"어차피 내 경우엔 하루도 못 버티거든."
그는 픽, 웃고는 손을 허리에 얹는다. 칸덴티아가 하사받은 무기를 부러트려 먹고 마땅한 마스터피스를 찾지 못한 뒤로 그에게 시범을 부탁하는 무기가 열과 줄을 이룬다고 한다. 대부분의 무기는 그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물렀다. 와론은 대장장이가 만든 마스터피스를 파괴한다며 탄식했고, 부수지는 않았다며 다시 칸덴티아가 사나운 열을 내며 그의 말을 부정한다. 얼굴이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 묶인 머리 끝을 세차게 흔들거나 당장이라도 뻗을 듯이 주먹을 뭉친다. 이야기를 나누며 접어드는 길목마다 칸덴티아는 왜인지 지나치게 그들에게 이목이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와론님이다- 스쳐 지나간 뒤로 작게 속삭이는 얘기들이 예민한 청각에 걸려드는데 와론은 익숙한지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시판의 한 곳에서 멈춰서더니 칸덴티아에게 무언가를 사서 건넨다.
"뭐야, 이건?"
"떡꼬치. 먹어본 적은 있나?"
"너야말로 먹어본 적은 있냐? 얼굴은 죄다 가려놓고."
칸덴티아가 순순히 음식을 받아들어 입에 넣었다. 역시 아이들은 뭐든 잘 먹는 것에서 티가 나기 마련이다. 둘은 시장과 거리를 벗어나 황성으로 돌아가는 성곽에 다다랐다. 칸덴티아는 입을 우물 거리며 묻는다.
"그래서, 그 기사는 무슨 명예를 어겼길래?"
"순수하게 궁금한 거야. 날 의심하는 거야?"
"둘 다."
와론은 어느 쪽이든 구태여 자신을 찾아오려 한 점을 높이 사주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가 네게 설명해줄 이유는 없다만, 그래. 이건 칭찬이라고 해두지."
"칭찬 같은 소리 하네."
와론은 그에게 죽은 기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간 중간 혐오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딱히 분노에 차지도 농담을 섞지도 않고 설명을 곁들인다. 그러고보니 칸덴티아가 딱히 누군가에게 배울 만한 기회도 없었다는 생각 때문에 와론은 그에게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제 해결 됐나? 뭐야. 결국 내가 보고 싶어서 찾은 것도 아니었잖아."
말을 끝낸 와론이 투덜대자 칸덴티아가 그를 쳐다본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고갯짓이 어딘가 부드럽게 풀려있다. 와론은 그의 앳된 얼굴도 웃지 않을 때 보면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잖아. 혹시 내가 귀찮게 군 건가?"
"끈질긴 것도 재능이지."
와론은 그와 나란히 걷던 장화의 걸음을 멈춰 섰다.
"이젠 진짜 가봐야 해."
"그래. 또 보자."
"또 보는 거냐."
와론은 그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 가려다가 자신에게로 향한 칸덴티아의 어딘가 얄밉게 솟은 콧가를 본다. 그것만이 아니라고? 굳이 봐야 할 필요가 있나. 볼 일도 끝났고. 그는 의문을 풀었는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인데도. 와론은 이미 어린 기사들이 제멋대로 힘의 논리를 굳히며 자라나는 걸 포기한지 오래다.
"그래. 보던가."
그러나 와론은 투구깃을 붉은 혀처럼 저으며 말한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를 테면 내일 저녁?"
"넌 진짜 인사치레라는 걸 모르는 구나."
"니가 할 말은 아니지?"
다음엔 이름을 불러줄까. 마음 속으로 서늘하고도 들뜬 기분이 일었다.
"기사란거 생각보다 파견 나갈 일이 많잖아. 거의 수도에 붙어있는 법이 없네."
"흐음. 나랑 휴가가 겹친게 그렇게 좋나?"
와론은 부러 능글 맞게 묻는다. 입맛이 싹 달아난 듯한 표정이 볼 만하다.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고서도 칸덴티아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다만 체격에 근육이 더 붙고 눈썹이 전보다 사납게 올라간다. 와론이 그의 눈을 감기고 자신의 투구를 더듬어 올린다. 성급하게 포개오는 입술에 와론은 한동안 그에게 어울려 주며 간만의 촉감을 음미했다. 윤곽조차 잘 보이지 않는 어둑한 방 안에서 젖은 소리만 귀 가까이에 울린다. 한참 혀를 뒤섞고 나서 칸덴티아가 와론에게서 얼굴을 떼어낸다.
"피 맛나."
그는 망토 안으로 허리를 받친 손을 한층 끌어 당긴다. 와론이 그의 입 주변에 도장을 찍듯이 짧게 키스했다.
"입 안이 까졌으니까. 네가 물었잖나."
와론은 그가 짬 날 때 마다 얼굴을, 요구 해올 줄 알았는데.
"뭐? 이게 구라를 까네. 그렇게 세게 문 적 없거든?"
와론의 입 안이 헐은 것은 당연 거칠었던 임무 때문이다. 그의 강함을 이길 자가 없어 죽을 일에 대해 한번 걱정해본 적도 괴물 같은 체력이 극한까지 바닥 나본 적도 없는 칸덴티아는 와론 덕에 팔자에도 없는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된다. 와론은 투구를 잡아당겨오는 그 감각에 바싹 긴장을 세운다. 그에게 한 대 맞을 것을 각오 하는 데 그는 그저 다시 입을 찾을 뿐이다. 와론은 어두운 실내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그의 눈 위를 반장갑의 손으로 덮었다.
"진짜 쪼잔하게. 이럴 거야? 어두운 데서 하는 것도 질린다고. 언제까지 애 취급할 건데"
"어린 애 맞잖나."
"자기 몸 하나 못 챙기는 너보다는. 이런 것도 일일히 챙겨주길 바라냐?"
"호오. 바란다면?"
칸덴티아는 그의 어린애 취급이 달갑지 않았지만 이런 말들을 흘러 넘기지 않는 태도 또한 어이가 없어, 스스로도 자신의 말이 진담으로 느껴질 만한 여지를 주었나 싶었다. 그러나 아마 와론은 원래 이런 놈일 것이다. 해주는 건가? 그건 나쁘지 않은데. 한편 와론은 속으로 생각한다. 새까만 닭에게조차 정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되바라졌던 어린 기사.
"네 병구완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못 해줄 것도 없지. 그런 사이 아니었어?"
"? 내가 너한테 뭔가 잘못했나. 코끼리?"
"닥쳐. 처음부터 온갖 애인행세는 다해놓고."
그건 니가 어려서.. 그렇게 대답하면 와론은 대륙 밖으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떠올린 와론은 그의 착각을 정정해주려다 그만두었다. 그의 말이 맞다면 와론은 쓰레기 같은 도둑놈이 아닌가. 그래서 대신으로 그에게 얼굴을 숙인다.
"그러네. 이젠 슬슬 괜찮으려나."
와론은 느릿하게 숨을 겹치며 생각한다. 그는 와론에게 자신의 난폭한 그 경계를 무너트린다. 칸덴티아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일에 관하여서도, 그가 와론에게 발휘하는 인내심은 와론에겐 기대 이상이다. 물론 와론은 이따금씩 칸덴티아가 그날 죽은 기사를 끌어 안듯 무릎에 눕혀두었던 반백색의 그를 떠올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기사들 사이에서 비슷한 위치라는 둘 사이의 동질감은 해진 지도 한참이다. 와론. 넌 나도 사냥하고 싶냐? 와론은 차라리 칸덴티아가 그가 그런 의심을 할 줄 아는 인간이기를 바란다. ... 응. 그리고 한참을 주저하다 와론이 대답한다면, 칸덴티아는 얼굴을 구기고 그가 역겹다며 살기 어린 눈을 하고 떠날 것이라고 장담한다. 알겠어. 나도 너 역겨워 새끼야. 위협적이고 낮은 목소리로 실망했다는 투로 말하면서.
"정 싫으면, 하나씩 하면 되잖아."
"하나씩?"
아까 하던 대화의 연장이었다. 투구 밑으로 드러난 하관이 의문 서린 입매를 짓는다.
"어떻게."
"오늘만큼은 네 몸 챙겨."
하루 정도는 나도 도울 테니까. 표현이 솔직한 칸덴티아가 내보이는 태도는 곧 감정이었다. 칸덴티아의 성격에 대해 그 자신도 모르고 와론은 발견해낸 사실은,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냥하게 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대륙에 그에게 구해지는 사람들 그리고 와론 정도 밖에는 없다.
"너 밤 눈 밝다고 했나?"
"뭐 나쁘지는."
"눈."
감게. 흡, 와론은 소리가 나게 그의 호흡을 머금는다. 하나씩이라. 아니, 역시 아직 아니다. 와론은 칸덴티아에게 맨 것을 드러내 보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가 좀 더 어린애 티를 벗은 후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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