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하마닭] 후회하지 마
진단메이커가 점지해주었음
* 진단메이커가 점지해준 하마닭(+에 기린닭 진짜 한 꼬집) 어느 쪽도 CP로 쓰지 않았습니다, 만 CP 탈부착은 모쪼록 자유롭게.
당신은 하마닭(으)로 「후회하지마」(을/를) 주제로 한 420자의 글 or 1페이지의 그림을 연성합니다.
https://kr.shindanmaker.com/444945
* 잔불 141화와 146화의 공백을 진단메이커로 멋대로 버무리기+애늙은이 내용이 일부 포함될 수 있습니다
* 스스로 캐해가 썩...?인 감이 있긴 한데, 언젠가 미래의 내가 뜯어 고쳐놓겠지요...아마도...
* 마무리가 애매하게 끊겼다 싶은 것은... 당장 제 머리로 정확히 뭐가 오갔을지 짐작이 안 가서()
* 오탈자 및 비문은 미래의 나에게 맡김()
새까만 닭은 겪으면 겪을수록 참 특이한 이가 아닐 수 없다고, 검붉은 하마 힌셔는 몇 번이고 새삼스럽게 그리 생각한다. 먼 미래에 옮겨 심어진 제가 처음 만난 이 시대의 기사. 그러나 동 세대와는 결이 다른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예로운 기사.
니젤에 머물며 그에 관한 수많은 새까만 소문들을 들었으나, 힌셔 본인은 언제나 스스로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 판단하는 자였으므로 (특히나 통찰의 눈은 힌셔에게 다른 시각을 안기곤 했다) 쭉정이나 다름없는 말은 대체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가 아는 새까만 닭 와론은 호전적이나 호전적이지 않고, 불명예스럽게 굴고 있으나 명예를 알며, 차라리 풍랑 이는 바다와 닮았다고 여겨지는 자였다.
언젠가 보았던 겨울 바다. 그래, 그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겉으로 포말이 이는 파도가 몰아치고 있으나 그 아래는 잠잠하여 일관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여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순간 미간을 노리고 창이 찔러 들어와 검붉은 하마는 거리를 벌리는 대신, 하마 턱 자루로 빗가 뜨렷다. 곧, 눈앞에서 서늘한 조소가 난다.
“쓸데없는 잡생각 할 틈도 있나 봐, 힌셔?”
“글쎄. 그대가 먼저 밍숭하게 굴어 그랬나 보지.”
“우와, 막 긁어대네.”
“바쁘다 한 사람을 막아 세운 건 그대잖나.”
그랬다. 벌써 열 합은 오간 참이었다. 드디어 찾았다며 저를 불러 세웠던 와론은 창끝을 제게 들이대었고 그 끝에서 적의라기엔 묽고, 우호라기엔 불온한 감을 느꼈으므로 검붉은 하마는 하마 턱을 고쳐 쥐었던 거다.
그러나 서로가 한때 생사결도 불사했던 사이기에 힌셔는 지금 와론이 대체 무얼 위해 저를 막아 세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한 시간 끌기라고 하기엔 그런 건 저자가 꾸밀 계책이 아니며, 또 한바탕 놀자고 조르러 왔다기엔 낌새가 너무 달랐다. 검붉은 하마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는 이래저래 힘을 쓰는 기사이지 지혜를 짜내는 전략가는 못되었다. 다만 그는 제가 알았던 다정하고 현명한 이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쫓아보기로 한다. 부여받은 기어스처럼, 우선은 타인의 말을 듣고 그 후에 반향 하기로.
“…그래. 할 말이 있어 날 찾은 거겠지. 말해보게.”
하마 턱을 갈마쥐고 한쪽 어깨에 걸치는 것으로 대련도 못 되는 걸 치워버린 힌셔는 지금까지 저희 싸움질이 미칠 여파에서 떨어진 데에 가만히 서 있는 다른 기사를 일별했다가 새까만 닭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닭 역시 하마가 전투 태세를 풀어버리자 움켜쥐었던 론누를 대강 갈무리하고선, 이쪽도 제 뒤편에 서 있는 이를 흘끔 보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그냥 말한다? 그러면 너 내뺄 수도 없어.”
“알아. 그러겠다고 했잖아. 너는―,”
“닥쳐. 또 그 말 꺼내면 진짜 가만 안 둬.”
이쪽을 본 채로 말하는 바람에 순간 새까만 닭이 제게 말한 줄 알았던 힌셔는 방금 그 말이 제가 아닌, 저 기사에게 한 말이란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새까만 닭이 저자에게는 드러내는 감정을 잔뜩 꾸미지 않는다는 것도. 그건 꽤 의외로우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예우였다. 새까만 닭은 그가 늘 투구로 모든 것을 가리듯, 그의 반경에 멋대로 침입하는 것을 무척이나 꺼리므로.
저쪽 기사가 입을 다문 것을 모종의 대답으로 여겼는지, 새까만 닭이 투구 안쪽에서 이쪽을 보는 낌새가 났다. 통찰의 눈을 지닌 자는 다시금 시선이 맞으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무언가를, 언어라기엔 육감에 가까운 것을 느끼며 닭의 말을 듣는다.
“어쨌든, 이제야 남 말을 들을 여유가 생겼겠지, 힌셔―생각도 없이 들이받고서 후회하지 마. 널 부른 놈들은 네가 거기 있게 되는 것만으로 많은 걸 없애버릴 작정인 거니까.”
“…그대야말로, 아니, 묻는 건 잘못됐군. 와론 그대는 이런 소식에 늘 정통했지.”
힌셔는 저를 불렀던 전갈의 내용을 떠올리며 운을 뗐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새까만 닭과 기사 사냥. 수도에 도착한 이래 빼곡하게 들었던 소문 중 하나다. 저자와 합을 섞지 않은 채로 들었다면 어쩌면 저 역시 그럴 가능성이 크다며 내심 수긍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이전 트루디아 일행과 함께하기로 했을 무렵 봐서 알듯이, 자기에게 필요만 하다면 수상한 집단과도 거래하곤 했던 새까만 닭이므로 제가 헤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기사 사냥은 단순한 분풀이도 아니고 같잖은 영웅행세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방금 제가 반사적으로 입에 담은 것은 우문이었다.
닭은 꽤 넉넉히 굴었다. 따로 화를 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깨나 으쓱해 보인 게 전부다. 가끔씩 인내심이 짜리몽땅한 양초처럼 짧게 휘발되곤 하는 것치곤 그랬다. 힌셔는 속으로 곱씹는다. 후회할 일을 하지 말라고. 서로 과거사를 툭 까놓은 것은 아니나, 저자는 통찰의 눈 없이도 제게서 무언가 알아챈 듯했다. 제 안에 깊숙이 박혀 영영 녹지 않을 만년설 조각이 있음을, 그러므로 또 그런 걸 조각하지 말라는 충고다. 이런 순간엔 출생년도를 따졌을 땐 절대적으로 연하일 그는 마치 저보다 십수 년은 더 산 연상처럼 굴었다. 나이로 위아래를 따지면 제가 모종의 교란종임은 이해하나, 새삼스럽게 그와 저 중 살아온 햇수가 긴 건 누구일까, 따위의 헛생각도 났다.
검붉은 하마는 이 짧은 대화로 제 속에 초조하게 타던 건조감이 가라앉았음을 깨달았다. 그 전갈, 직접 오셔서 확인하시라는 내용을 보고서 겉으론 담담하게 굴었으나 속으론 바작바작 탔던 거다. 제 스승처럼 지나치게 먼 미래는 볼 깜냥이 못되었던 나쁜 버릇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그노제스는 그런 제 우둔함을 우직함이라며 보듬었지만, 그는 이제 없고, 간사한 자가 넘치는 이 시대에는 차라리 닭처럼 정면에서 제게 일갈하는 자가 귀했다.
그래, 이 세계는 그노제스가 한 켠을 담당해 지킨 세계였다. 세월이 떨어진, 당최 어떻게 연결된 지도 모를 (따지라면) 사매 녀석이 말한 대로 검붉은 하마는, 힌셔는 더는 후회할만한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 설원에서 잠깐이나마 영혼을 부숴버릴 뻔했던 감회만으로도 충분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리운 이들 앞에서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돌아온 이후 젊고 어렸고 혈기 넘쳤던 스스로의 명예관 갈피에 그 한마디를 끼웠으니.
“좀 더 이야기를 들려주게. 나도 아무것도 모른 채 행동했다가 후회하고 싶지는 않군.”
곧, 새까만 닭이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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