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별
.התפללו עבורנו
"-은 꺼뜨렸다."
"미안해."
"…하아. 쿨럭, 커흑."
투둑-
"쿨럭! 쿨럭!!"
쿠릉-!
"……선생, 님."
싸락눈이 흩날리던 밤, 그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가매
"혈흔이 이곳에서 끊겼습니다. 정황상"
"흥, 정황은 무슨. 내가 봤소. 눈이 쌓였다곤 해도 이런 절벽에서 굴러떨어졌으니 필히 죽었겠지."
"…그 몸으로 여기까지 도망치다니. 괴물이라 불린다는 게 뜬소문은 아니었나 보군."
검은머리 용병
잿빛머리 기사
백발의 원로
별을 쫓은 세 사람.
먼 옛날 동방의 박사들은 어린 왕의 탄생을,
오늘 그들은 이른 별의 죽음을 보았다.
"잘 안 들렸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가지. 불길 속에서 죽은 녀석이 시신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예."
"커헉-"
그리고 그 죽음은 그들 외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됐다.
거들먹거리던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원로는 고개 숙인 기사의 발아래, 새하얀 대지가 붉게 물드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발길을 옮겼다. 용병은 그제야 피 흘리는 검을 갈무리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이리 놈을 놓친 건 성에 안 차지만 그래, 수고했네. 보고는 모레까지 해도 좋아. 기쁜 날 가족들과 함께하는 걸 막을 만큼 야박하진 못 해서."
"감사"
"몇 안 남은 이들끼리 그렇게라도 봐야지. 안 그렇나?"
"…예. 감사합니다."
불길이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재마저 죽은 밤, 자그마한 눈이 비처럼 내려와 두 쌍의 발자국을 마저 지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벼랑 끝에 몰린 사내는 무너져 내린 절벽과 함께 굴러떨어졌다. 추락하며 받은 충격 혹은 그 전부터 계속되던 출혈로 정신을 잃은 그는 뽀득- 눈 밟는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소리가 작고 가볍다. 들짐승 혹은 체구가 작은…'
힘겹게 눈을 뜨니 흐린 시야임에도 코앞의 날붙이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인간.'
그는 곧장 삐걱대는 몸을 던져 정체 모를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 상대는 들고 있던 무기를 놓쳤다. 체중을 실어 쇄골께를 눌렀다. 낭패였다. 목을 노린 공격이었으나 아직 변한 거리감이 익숙하지 않았다.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몸 상태 때문에 힘도 몹시 부족했다. 그러나 제압하지 못한 상대의 오른팔이 그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버둥대기만 할 뿐 일어나지도 못했다.
'……작아.'
벌린 손바닥이 상대의 상체를 거의 덮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체구가 작은 여성이라 해도, 그의 손이 큰 편이라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어지러운 시야에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약간 빠른 심장 박동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적의가 줄어든 걸 느꼈는지 조금씩 가라앉는 고동을 따라 그의 호흡도 안정되었다. 멈췄던 머리도 점차 돌아가기 시작했다. 핑 돌던 시야도, 웅웅대던 청력도, 둔해졌던 촉각도 서서히 돌아왔다. 괴물이라 불리는 짐승의 감각이 하나둘씩 돌아오면서 점차 확실해졌다. 체구가 작고 가볍다. 허나 인간이다. 여자가 아니다. 성인도 아니다. 어린애. 굶는 게 일상인지 비쩍 곯아선 발육도 부진한, 열 살 남짓한.
'아니. 그것보단 더 먹었나?'
그는 한층 누그러진 기색으로 어깨를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올려 아이의 목을 졸랐다. 거둬진 압박에 작게 콜록대던 아이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손을 떼어내고자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깨진 손톱이 그의 오른손을 마구잡이로 할퀴어댔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그시 가는 목을 더 깊게 압박했다. 컥컥대는 소년의 얼굴은 끔찍했다. 작은 손에 힘이 빠져 점점 느려져 갈 무렵, 돌연 남자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그는 찌르듯이 아픈 머리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 했다.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호흡은 되려 그가 목이 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몸을 웅크렸다. 너무나도 추웠다. 작게. 더 작게. 울면서 숨을 몰아쉬는 저 아이보다도 작게. 그는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만 같았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다리를 양팔로 감싸고 눈을 감고 들이쉬는 족족 피 섞인 기침을 내뱉는 입을 다물며 숨을 참고 무형의 두꺼운 벽 너머로 들리는 파동에만 집중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늙은지 젊은지, 높은지 낮은지, 애초에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지. 언어, 소음, 울음소리.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다. 사라진 문자가 그의 머릿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역류했다. 그는 눈을 떠 그가 토해낸 것을 보았다. 핏덩이. 어린애 주먹만 한 질퍽한 덩어리는 그가 웅크렸던 몸을 움직이자 눈 쌓인 땅 위로 떨어져 뭉개졌다. 그 형체는 심히 역했다. 마치 다 자라지 못 한 태아 같
웅- 우웅-
그의 허리춤에 간신히 매달려있었던 검이 크게 진동하며 그의 상념을 끊었다. 거세게 흔들리는 것이 진노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충동에 휩싸인 이유를 알아챘다.
"…이제 괜찮아. 이리 와."
그가 손을 뻗자 끈이 끊어져 저 멀리서 나뒹굴고 있던 새하얀 검이 날아왔다. 해가 저문 데가 저와 똑같은 색의 눈 위에 떨어져 있었기에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 손안에 들어오자마자 어지럽던 머리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적막 속에 들리는 것은 오로지 어린 아이의 쌕쌕대는 가쁜 호흡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인가."
그리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덮었다. 목을 조르던 이와는 아예 다른 사람인 양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אֵש"
작은 속삭임에 겁에 질린 눈이 흐려지더니 스륵 감겼다. 그는 기절한 아이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작은 손에 제 검을 쥐여주었다. 자아를 가진 무기는 그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웅웅대기도 하고 버둥거리기도 했으나 그의 한마디에 저항을 멈췄다.
"이브. 네 아이를 지켜."
Eve.
세계가 만들어낸 첫 번째 지성체의 갈비뼈.
첫눈보다 새하얀 그것은,
그 검은 이리의 상징이었다.
제가 선택한 어린 아이를 알아보았는지 이브는 얌전히 그 곁에 누웠다. 오랜만에 한 부탁인 것도 이유였지만, 그것의 저의를 알아챘으니 그가 더 이상 그런 같잖은 충동질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승낙을 받은 그는 비틀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리! 정신 차려!!"
"불은 꺼뜨렸다.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까 타조랑 나가."
"그 분께 전해줘."
"미안해, 이리."
"넌 내가 죽인다."
겨울밤과 어울리지 않는 온기에 그는 눈을 떴다. 그것이 일러주는 대로 걷다가 얼마 못 가 쓰러졌던 거 같은데….
"아.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해가 진 터라 불만 피우고 가도 될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이상한 길로 간다 했더니 이걸 노린 거였나.'
검은 머리, 검은 눈. 아저씨라고 불리기엔 너무 어렸다. 익숙한 수염이 없어서 더 그래 보였다.
'나견도 없이 혼자 도끼를 들고 있길래 예상은 했지만, 진짜 그때였나? 그런데 왜 혼자지?'
"선생님은…."
"선생님이요?"
'아, 그건가.'
변수. 그의 개입이 다른 결과를 냈다. 장갑의 찢어진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그는 몇 번 부른 적 없어 어색한 이름을 작게 말했다.
"……루얀."
"…그 이름"
"그쪽네들은 어머니라 했던가."
친절한 낯을 하던 라우룬이 얼굴을 굳히고 일어났다. 더 정확하게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그가 적당히 피했다. 아무리 몸 상태가 안 좋다고는 해도 열 살 가까이 어린 애의 견제 공격 정도는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당신. 뭐야. ……하. 그 기사놈들이랑 한팬가?"
"기사는 맞는데, 그쪽이 말하는 놈들은 몰라. 난 걔들이랑은 안 친하거든. 애초에 누구를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라우룬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선생님께 용건이 있는 입장에서는 심히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용의 후예,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오랜만이고 자정이 넘은 지 오래라 어두워 가는 길을 몇 번 헤매긴 하겠지만 동트기 전에는 무조건 도착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눈앞의 남자에게로 그를 이끈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했을 땐가? 그 후보 쟁탈전? 뭐라고 하셨더라?'
"신뢰를 주려면 자기소개가 먼저겠죠?"
"난 이거 오글거려서 안 좋아하는데. 하… 격기사 검은 이리 나진. 선생님, 그러니까 어머니께 용건이 있다."
그리 말하며 나진은 걸치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뒤로 젖혔다.
"……!"
"아까 피할 때 눈 감았다고 자존심 상해한 거 같은데, 보시다시피 어쩔 수가 없었거든. 뭐 안 이랬어도 그 정도야 충분히 눈 감고 피할 순 있지만. 선생님은 지켜드려야 하지 않겠어?"
"협박인가."
"아니. …음? 어쩌면? 만약 나만 보냈다가 내가 미쳐서 날뛰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제 그쪽이 제일 강한 거 아니었나?"
팍-
라우룬이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전에 단단하게 뭉쳐진 작은 눈덩이가 그의 손을 때렸다. 둔탁한 소리에 돌이라도 넣었나 봤더니 손톱만 하게 산산조각난 눈 알갱이만 얕게 쌓인 눈 위에 흩어져있었다.
"어떻게…?"
"가는 길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기다려주는 이유가 뭐겠어? 온건하게 가자. 여기서까지 혼나고 싶지는 않거든. 봐봐, 나는 무기도 없잖아. 몸수색해서 이미 알고 있으려나?"
"그런 건 안 했,"
'말렸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그를 보며 나진은 상의부터 부츠까지 다 보이게 들추고 있던 재투성이인 로브를 놓고 손에 딱 달라붙어 손목까지 덮는 무광의 흑색 장갑을 낀 손을 쫙 펼쳐 보였다. 오른쪽 손바닥이 찢어진 것 외에는 수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작게 얼굴을 찡그리자 붉은 눈이 몇 번 깜빡이다 다시 뒤집어쓴 갈색에 가까운 짙은 붉은색 후드 아래로 사라졌다.
라우룬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안개가 낀 것처럼 의지가 길을 잃고 어그러지는 것을 본 루얀은 당장 그를 붙잡기 위해 따라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마을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흩어졌던 의지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들의 교차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먼 미래였다. 이제까지 그 끝을 가늠할 수도, 알 수도 없던 의지가 얽혀 고개를 뒤로 젖혀도 다 보기 힘든 커다란 그림을 만들어냈다. 누군가의 의지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짜낸 태피스트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가 아는 얼굴이 보였다. 모르는 얼굴도. 왠지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탁- 탁-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할수록 모르는 얼굴과 기시감이 드는 얼굴이 늘어났다. 마치 그녀가 아는 이들의 몇 년 후의 모습일 것만 같은….
루얀은 뛰었다. 소리가 커질수록 그림을 보기 힘들었다. 달릴수록 멀어져만 갔다. 이 두루마리를 짜내는 이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는 한 명이 아니었다. 누군가 나타나 북을 반대편으로 밀고 사라졌다. 누군가 나타나 바디를 끌어내렸다. 또다시 북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한 줄을 만들어냈다. 바디가 내려가면서 씨실을 고정했다. 그들은 매번 달라졌다. 언젠가 한 번은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그녀는 두려웠다. 숨이 너무 차 결국 주저앉았다. 그간 외면해온 끔찍한 그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사방이 붉고 검었다. 희망이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돌리려고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림의 어디에도 없는 하얀 실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이 짧디짧은 올 하나를 잡아당기는 순간 의지가 그려낸 미래가 완전히 망가질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로 인해 끝없이 이어져 온 긴 역사가 어디까지 풀리게 될지, 그 모든 순간을 다시 짜낼 수 있을지, 이 결정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그 무엇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을 뻗었다. 이 간섭이 최악의 결과를 낳지만 않길 바라며. 그런 그녀의 팔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당신은,"
"나 좀 도와주시죠."
그녀에게 기대듯이 가볍게 안긴 그는 튀어나온 올을 주욱 잡아당겼다. 아니 그 가닥을 쥔 건 그녀였다. 그가, 그것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가 본 모든 미래가 올올이 흩어졌다. 동시에 멀어졌던 감각이 한 번에 돌아왔다. 어떻게 안 들린 건지 모를 만큼 크게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라우룬이 그를 거칠게 뜯어냈다. 그녀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붉은 로브를 붙잡았다.
"이분은, 제… 손님입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보였어요. 내쫓아서는 안 됩니다."
"저 자의 무얼 믿고 들인단 말입니까, 어머니."
다들 외부인을 껄끄러워하는 걸 알지만 그를 놓쳐선 안 됐다. 수상한 사내를 들여야 한다는 루얀의 말에 몇몇이 반기를 들었다. 외지인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지 않던 이들도 방금 일어난 소란 때문인지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가 조급해할수록 반발은 점점 더 거세졌다.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루자 용의 어머니라고 할지라도 더 자기만의 의견을 밀어붙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민을 끝낸 라우룬이 그녀의 편에 서면서 기울었던 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임시여도 수장 제 1 후보인 그였다. 어머니와 차기 수장이 뜻을 같이하는 상황에서 무작정 반대를 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돌파구를 찾았다는 듯 당당하게 외쳤다.
"라우룬. 라우준은 어디 있지? 분명 그 애를 데리고 오겠다고 한 건 너였을 텐데?"
"어머니께서 일러주신 장소엔 그 애가 없었습니다. 하여 그 주위를 더 찾아"
"라우준이 적통 후계라는 자각은 있는 건가? 어떻게 해서든 해가 지기 전에 찾아냈어야지. 이 겨울날 그 어린애 혼자 뭐가 있을지 모를 숲을 헤매고 있을 것 아닌가!"
"그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수색을 진행했어야지! 라우준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잠깐."
과열된 언쟁 중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다툼의 원인임에도 여태 뒤로 물러나 관전만 하던 이가 그와는 상관도 없는 얘기에 끼어든 것이었다.
"그쪽끼리 싸우는 데 말 얹을 생각은 없었는데, 라우준은 멀쩡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글쎄. 나는 어머니를 뵈러 온 거라. 대화가 끝나면 알려드리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도 시간이라는 게 없거든."
"무슨 그런 억지가"
"그럼 알아서 열심히 찾던가. 당신들 말처럼 나는 '외부인'이니까. 말해줄 이유 따위야 없지."
나진은 그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유유히 어머니의 방에 들어갔다. 그림자에 가려 확실하진 않았지만 루얀은 왠지 그녀를 뒤따라오는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단둘이 대화하고 싶다는 어머니의 청이 있었으나 당연히 반대에 부딪혔고, 이번엔 라우룬도 반대했기에 그가 문 앞에 서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면 바로 들어가 개입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방을 둘러보던 그는 준비가 되셨냐는 듯 고개를 돌려 어린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
"……네."
"선생님께선 예언 능력은 아니라 하셨지만. 일어나선 안 될 미래를 먼저 엿본다는 건, 그럼에도 바꾸지 못 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에요."
"아."
"의지의 흐름이니 교차점이니. 애초에 의지라는 거 너무 모호하지 않아요?"
"아으, 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인지 아니면 뭐라도 했을 때의 결과인지 그런 거라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가 한 발자국씩 천천히 다가올수록, 한 마디씩 말이 쌓여갈수록 그녀의 머리가 아파졌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봤던 때처럼 들어선 안 될 것을 듣고 있기 때문일까? 거리가 좁혀지고 있으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심장의 고동을 이렇게 크게 느껴본 적이 있던가?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의 자신을 겹쳐본 것인지 그녀가 옷깃을 부여잡고 주저앉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장난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 맞다 이런 말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음 그래도 여기선 처음 말한 거니까 한 번만 봐주실래요?"
"저는, 당신을, 아, 아니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군요."
"그리고 일어날 일이죠. 선생님, 아니 당신은 나를 제자로 둔 적이 없으니 뭐가 좋을까요. 어머니? 나는 당신네들의 일원이 아니니 조금 그런가요?"
"…원하시는 대로."
조금 괜찮아진 것을 본 그는 열심히 연습했던 방긋 웃는 얼굴을 그만두고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좋아요. 선생님께서 어린 그대에게 선물을 보냈어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그는 왼손에 낀 장갑 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를 꺼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조금 두꺼운 종이는 뒷면에 화려한 문양이 있는 것과 달리 앞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거짓말이에요. 이건 나의 의지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하얀 공백에 수많은 그림이 떠올랐다 지워지길 반복했다. 그건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들이었다. 더 이상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엔 의지를 건드리는 손이 보였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손의 주인은
"아윽, 아, 아아!"
"길 잃은 어린 양을 인도할 구원자께서 곧 나실 거예요. 지금 그대가 보았듯. 아, 각성이라 하는 게 더 나을까요?"
한 어린아이였다.
"낭만, 안정, 그다음에 뭐였더라."
의지가 나아갈 길을 바꿀,
"있죠. 솔직히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사실 지금도. 음 내 앞의 작은 어머니도 이해 못 하겠죠? 같은 사람이라도 선생님의 생각은 아직 모를 테니까요. 그냥, 뭐랄까… 그래 고해성사라고 생각해요."
바꾸지 못한다면 태워버릴,
"나진을 죽여요. 그 애 앞에서. 공교롭게도 몇 없는 내 사람들이 바라보던 미래엔 언제나 그 애가 필요하더라고."
"하지만,"
그만을 바라보는 그의 사도가 자신을 가리던 천을 벗었다. 왼쪽 얼굴을 뒤덮은 화상은 있어야 할 점을 지웠다. 녹은 눈꺼풀은 반쯤 붙어 그의 왼눈을 감겼고, 입가에는 토해낸 피가 그대로 굳어있었다. 낮게 묶어 등허리를 타고 꼬리처럼 살랑대던 금빛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잘려 일그러진 얼굴을 겨우 가렸으나 그리 큰 효과를 볼 순 없었다. 팔을 들어 올리며 보인 옆구리는 축축해 보였다. 압박하지 않은 자상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는 듯했다.
"보시다시피 난 실패했거든. 유망주네 뭐네 하도 떠들어대서 나도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아니요. 난 불쏘시개에요. 재를 잔불로, 잔불을 아주 아주 큰 화마로 키워낼 작디작은 계기. 내 역할은 그것 뿐이에요. 내 몸을 태운 불을 우리 영웅님께 전해주는 것."
힘겹게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올린 그는 그녀의 손을 감쌌다. 그는 남은 한쪽 눈을 감고 기도하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어린 양을 이끄는 목자를 보라. 그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다."
툭. 투둑.
눈을 뜨고 코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피를 멍하니 보던 나진은 피곤한 얼굴로 철퍽 쓰러졌다.
그의 손이 떨어진 그녀의 손안에는 그가 보여준 종이 대신 반지가 들려 있었다. 반지를 손에 끼우자 철컥- 머릿속에서 열쇠가 맞물려 돌아간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녀는 잠겨있던 감각이 열린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에게 전해준 것이 무엇인지도 자연스레 깨달았다.
길라잡이. 그것은 수많은 의지의 교차점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루얀, 용의 어머니는
그녀 자신이 아픈 미래를 보았고,
언젠가 이곳에 퍼질 알 수 없는 전염병을 보았으며,
새카만 밤마저 태우려는 새빨간 불길에 휩싸인 그들의 터전을 보았다.
다시 모든 걸 잃은 그들의 어린 수장과 그를 노리는
"…변수, 불의 아이."
수상한 낌새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라우룬이 곧장 붉은 천을 향해 검을 겨눴으나 그 어디에도 검은 이리는 없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돌려 루얀을 쳐다본 그때, 그녀가 등진 창에서 아침이 밝아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만큼은 행복하길."
댓글 1
빽끼 창작자
성탄 전야(크리스마스 이브 밤)~성탄절 새벽이 배경입니다. + 외전 있는데(나진이 떨어지기 전 이야기) 언제 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번주 안에는 다 써서 올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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