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강우(降雨)

새까만 닭의 장례

230508

* 애늙 포함

* 날조 주의

- 와론이 죽은 뒤에 와론의 비밀이 밝혀짐

[크흑... 큭큭 이렇게,죽는 건가.. 하... 드디어..]

기린은 일순 숨이 멎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새까만 닭이 비틀거리며 복귀했다. 싸움에서 이겼지만 부상을 심하게 입은 닭은 기린의 앞에서 쓰러지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새까만 닭의 투구는 한쪽이 심하게 패였고,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닭이 숨을 거둔 것을 안 견습기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기린이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투구를 벗겨내자 회백색 머리카락과 안의 얼굴이 드러났다. 떨리는 손으로 새까만 닭의 눈을 감겨 주었다. 빗물에 섞인 피가 창백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끔찍한 생김새도, 흉터도, 무언가에 미쳐버린 얼굴도 아닌 수려한 미모는 어딘가 소년 같은 면이 있었다. 다만 조용히 눈을 감고 자는 듯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기린은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투구를 씌웠다. 

새까만 닭을 오두막으로 옮겨 특수 2기들과 함께 뒷뜰 땅에 묻었다. 비를 머금은 공기가 추적하게 가라앉았다. 전쟁 중이었기에 수도에 데리고 갈 수 없어 그들은 나무로 관을 만들었다. 장례식을 대신해 조용한 묵념이 이어졌다. 

새까만 닭이 죽은 지 한참 뒤 전쟁이 마무리 되고 기린은 새까만 닭에 대해 조사할 수 있었다. 그의 유족을 찾아내어 연락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느 겨울이 시작되는 날 기린은 별천지를 찾았다. 새까만 닭의 가족이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겨진 자료가 거의 없었다. 사실상 기사가 되고 나서의 기록이 그의 전부였다. 

'신입기사 시절조차도 거의 알 수 없고... 이건 뭐지?'

기린의 눈에 새까만 닭의 보호자로 추정되는 이의 연락처가 들어왔다. 펜으로 쓰지 않아 오래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주소 같았다. 

수도에서 벗어나 주소에 적힌 장소에는 오랫동안 살지 않은 것 같은 집이 있었다. 여기가 맞나 싶어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집주인은 기사였는데 죽은 지 10년도 더 지났을 거라고.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역시 먼지가 가득하고 살림살이라고는 거의 없어 누가 살았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없는 물건들을 뒤져보니 빛바랜 액자를 하나 찾았는데, 그 안에는 회백색 머리의 소녀와 그보다 나이가 약간 많아보이는 갈색머리 여성이 함께 있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기린은 사진을 보자마자 소녀가 와론이란걸 알아차렸고 옆의 여성이 새까만 닭의 보호자이자 집주인이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사진으로 보아 둘은 아마 같이 살았거나 가족인 것으로 보였다. 이 사람은 새까만 닭보다 훨씬 전에 죽은 건가.. 액자 뒤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름을 보고 마을 공동묘지로 찾아간 기린은 묘지에 종종 꽃이 놓여있더라는 주민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묘하게 익숙한 묘비의 풀네임을 보고 수도로 돌아가 같은 이름을 가진 기사를 찾아냈다.

'기사 갈색 스라소니.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더라니..' 

스라소니는 기린이 기사가 되기 전에 죽은 기사였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뒤에 남아 싸웠는데, 그것이 기어스를 어기는 일이 되어 복귀한 뒤 동료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달잔은 말해주었다. 역시 새까만 닭이 기사사냥을 시작했던 이유는.. 사진 속 스라소니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는 새까만 닭의 유품이자 지금은 기린에게 있었다. 심적인 동요가 있을 때마다 새까만 닭이 만지작거리던 물건이었다. 기사 사냥으로 추정되는 결투현장의 보고서와 피해기사들의 행적을 찾아보면서 기린은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사냥의 대상은 스라소니 사건으로 부터 파생되어 비슷한 사건에 연류된 기사들로 점점 범위를 넓혔던 것으로 보였다. 복수? 아니, 기사 와론으로서 행동한 건가.. 새까만 닭의 행적은 전혀 명예롭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기사로서 한 행동은 다른 기사라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 이러나 저러나 새까만 닭이 기사였으며 동료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기린은 서류실에서 밤을 새며 글자 사이의 새까만 닭의 기록들을 읽어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새까만 닭의 무덤으로 찾아갔다. 닭의 묘지는 수도에서 약간 떨어져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기린의 어두운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다. 산을 올라오느라 긴 부츠는 흙탕물 투성이었다. 기린은 탁한 눈으로 무덤을 바라보다가 묘비 밑을 조금 파내어 닭이 늘 지니고 다니던 목걸이를 넣어주었다. 

[새까만 닭, 네 투구는 스라소니의 묘비에 묻었어]

아마 그 투구 역시 스라소니의 것이었을 확률이 높았지만. 

애초에 새까만 닭의 투구는 묻지 않고 오두막 뒷뜰에 표식으로 두었었다. 새까만 닭이 묻히길 원하는 곳조차 알지 못해서 기린이 남몰래 가져온 것이었다. 차마 닭이 무얼 바란건지 아무 상관도 하지 않고 보내줄 수가 없었다. 목걸이를 반으로 나누어 묻어주고 싶었지만, 나린기와 비슷한 물건인지 광석은 쪼개지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루었나?]

사방은 빗소리만 가득했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산 속에는 자신과 무덤밖에 없었다. 얼굴은 빗물로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닭이 했던 많은 말들이 기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네가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새까만 닭이 자신을 나무 위에서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네 비밀을 멋대로 알아낸 것에 화를 내려나, 아니면 너를 그 사람 곁에 묻어주길 바랐나. 닭이 자신의 행동을 기꺼워 할지 조차 알 수 없다. 

다만 기린은 새까만 닭이 이 비를 맞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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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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