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잔불의 기사/지우스] 역천의 역장

이 순간, 사상지평의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저 자신이다.

* 투비로그에 23.06.29에 올렸던 글을 글리프로 그대로 옮겨왔습니다.

* 야로 @YaRoEri 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짧은 조각글입니다!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조각글이 쓰인 시점은 최신 유료분이 124화인 시기입니다.

* 멋대로 중앙대륙을 내전에 휩싸이게 했습니다(). 김에 사상지평 사용처의 은근한 날조까지 덤으로.

* 오탈자와 수정은 미래의 제가 언젠간 할 겁니다.


말이 좋아서 이념 대립이지 이건 결국 아이들의 편 가르기 싸움판의 어른 판이었다. 마법사도 격기사도 자유기사도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뒤엉켜 싸우게 된 중앙대륙의 내전은 제각각의 자리에 서서 기어코 체면마저 벗어던지고, 힘이자 능력인 폭력이 야만스럽게 날뛰는 장이 되었다. 오로지 살아남은 자가 정의라는, 웃기지도 않은 궤변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또 다른 명제가 뒷받침하고 만다.

억지력으로도 누를 수 없는, 이미 시작된 싸움이라면 방법이 없을 터다. 새까만 닭과 약속했던 사상지평은 한 번 사용했다. 제 우선순위를 체험으로 확실하게 깨달은 그가 이를 득득 갈면서 지켜내 모았던 힘은 와론이 바랐던 순간에 그럭저럭 활용할 수 있었다.

'비록 내전의 도화선이 됐지만, 일방적인 학살은 막았지.'

기실 이제 와선 그게 가장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의 정답이었음은 안다. 일방적인 대량 학살을 막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바로 그 생존자들이 있기에 내전이 발생했다. 새까만 닭 와론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그 속이 복잡하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지금의 그는 곧잘 가장하던 가벼움을, 부푼 깃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답은 충분했으나, 늘 그랬듯, 지우스는 저는 그를 위로할 자격도 위치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저 눈을 감고 모른체할 뿐이다.

숲이 끝나고 벼랑이 시작되는 조막만한 평지에서 지우스는 적당한 너설에 주저앉는다. 기분 탓인지 코끝에 감기는 바람에는 화약과 모래 먼지의 잔향이 난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런 싸움을 정말로 바라지 않았는데도, 현실은 이러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마법사는 마력으로 틔운 시야 너머에서 저의 목표물을 발견한다. 모든 걸 한번에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시 세우려던 위대한 작전을 단숨에 수포로 되돌린 자. 그의 능력을 연구한 적이 있는 위대한 대마법사가 '사상지평'의 골조를 알려줬기에 저희는 그를 반드시 소모시켜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물론 그 중에 해치우면 좋고. 사상지평이 없더라도 담청색 기린은 단체전에 훨씬 익숙한 전략가였으니까.

지금 제가 선 이곳은 사상지평이 펼쳐질 수 있는 범위의 아득한 밖이었다. 그의 힘이 쌓인 시간을 감안하고 거기서 안전을 위해 최대오차를 일주일로 잡고 사수 셋이 검토까지 해준 결과이니 확실하다. 여기서 제가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 마법을 때려부으면 된다.

더는 천재와 귀재의 것만이 아닌, 누구나 손쉽게 휘두를 수 있는 이 강력한 힘에 취한 채로 그는 마나를 휘감아 저를 보조하는 도구의 힘을 빌려 맨몸의 제가 낼 수 없는 출력의 대규모 공격 마법을 시행했다.

영창이 끝나고, 검붉은 빛깔의 몸통을 가진 괴물 같은 불이 찰나에 목표를 향해서 달겨든다. 마나가 달려 거의 탈진한 그는 눈 깜빡하는 순간에 이미 보이지 않게 된 저의 작품에 푸슬푸슬 웃었다.

'이 정도면 제 아무리 그 기린이어도 죽겠지.'

시험용이라던 마나 회복약 한 병을 들이킨 마법사는 겨우 그 멀리 있는 데를 볼 수 있는, 망원경과 같은 마법 하나만 겨우 불러냈다.

"이, 이럴 수가...!"

마법사는 경악했다. 먼 데에서 시선이 맞는다.


사상지평으로 인해 급감한 기본 능력치 중에는 역시 감각에 관한 것이 뼈 아팠다. 본래 기사가 대치하는 존재는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징후를 눈으로 보아 확인하고 먼 데서의 살의를 감지하는 것은 목숨에 직결된 일이었다. 그러니 이 내전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는 단독행동을 늘 삼갔더랬다. 저 홀로 있다간 어디서 콱 죽어버리기 십상이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사상지평의 약조에 매이지 않기에,

먼저 감지한 것은 피부에 와닿는 지독한 열기, 직후 본 것은 시야를 그득 메운 검붉은 화염이다. 피부가 순간 우그러드나, 인간을 초월한 기사의 몸뚱어리는 그걸 꽤 금방 회복해낸다. 달군 바늘처럼 찔러대는 고통을 무시하고 그는 손을 맞잡아 돌린다.

어디선가 끼리릭하고 문을 어거지로 비틀어 뜯는 소리가 들린 듯도 하다. 이제는 익숙하게 지나온 시층에서 쌓여온 힘이 켜켜이 제 몸에 강림하는 것을 느끼고, 세상 모든 것이 지독하게 느려진다. 방금 바스라진 앞머리 끝이 재가 되어 떨어지는 것조차 뭉근한 속도로 더디다. 바로 코앞까지 달겨들었던 불은 그 흉포한 속력을 잃고 그저 거기 선 벽이 되었을 뿐이다. 더는 뜨겁지 않다. 더는 위협적이지 않다. 이 순간, 사상지평의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저 자신이다. 모든 물리법칙을 역전하고 다시 쓰는, 과히 역천이라 부를 법한 공간의 창조자.

지우스는 신중하게 힘의 출력을 조절해 불벽이 선 공간만을 도려내 자른다. 과한 힘으로 가른 자리는 일순 진공이 되며, 불은 산소가 없으면 금방 꺼지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마법으로 만든 불이라도 결국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불에 지나지 않으니까.

몸을 태워 나를 산소가 사라져, 불 역시 스러지는 것조차 새순이 나무 한 그루가 되기까지의 시간처럼 느리다. 그는 저를 세상에서 유리시키는 이 감각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협상패이자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을 살 뿐이지. 그는 제 공간의 뒤틀린 법칙을 힘입어 망원경의 유리알 같은 것을 겹겹이 쌓아본다. 마법사가 있다. 눈이 마주친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은 충분할 거다.

5분이 지나지 않았으나, 저쪽에 다른 이는 없었으므로 지우스는 이르게 사상지평을 닫는다.

불어오는 바람은 이전에 그러했듯, 제가 알고 느껴온 속도의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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