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견] 하루
0229 | 240229
현대AU(기린견/지우견)
"뭐해?"
늦은 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불 꺼진 고요한 거실을 울리는 약간 잠긴 목소리에 베란다에 기대 바람을 쐬던 어린 청년이 고개를 살짝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뭐... 그냥."
짧게 대꾸한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실과 베란다를 가르는 큰 창틀에 기대 그를 보던 남자는 그처럼 창밖 너머 하늘과 불이 꺼지질 않는 건물 그 사이 어딘가로 눈을 돌리며 다시 입을 뗐다.
"날이 풀리는 거 같더니 또 추워졌어."
"비와서 그렇죠 뭐."
"그걸 아는 놈이 이렇게 얇게 입고 베란다에 나와 있어? 감기 걸리려고."
"크흠."
남자의 애정 어린 타박에 그보다 조금 어린 청년은 할 말이 없어서 헛기침과 함께 눈만 슬쩍 피할 뿐이었다. 창은 열려있으나 유리되어있던 공간에 남자가 성큼 발을 들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난간에 팔을 얹고 있는 청년에게 양손에 들고 있던 것 중 하나를 건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하얀 머그잔과 조금 피곤해 보이는 남자를 번갈아보던 청년이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 나서야 그는 한마디 툭 뱉었다.
"마셔."
"뭔데요?"
건조한 물음과 함께 잔을 입 근처에 갖다 대니 상큼한 향을 품은 열기가 코를 간질였다.
"페퍼민트 레몬 티? 몰라 나도 선물 받은 거라."
"잘 마시겠습니다. ...괜찮은데요?"
감사 인사를 전하며 후후 불어 한 모금 삼킨 차는 민트 특유의 화한 향과 레몬티의 상큼한 맛이 따끈하게 녹아들어 나쁘지 않았다.
"그래? 음. 민트 맛은 별로 안 나네."
청년의 맛 평가를 듣고 따라서 작게 한 모금 넘긴 남자 또한 입에 맞았는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한참을 남정네 둘이서 베란다에 나와 차를 홀짝이길 잠시, 내용물이 반쯤 남은 컵 안을 보며 남자가 물었다.
"뭐가 또 그렇게 걱정이야?"
"걱정...은 아니고, 음.. 2월 29일. 오늘의 탄생화가 뭔 줄 아세요?"
목을 충분히 적시고 손난로처럼 컵을 손안에 쥐고만 있던 청년은 조금 고민하더니 오히려 엉뚱한 질문을 답으로 주었다. 남자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곤 정해진 답을 말했다.
"탄생화? 글쎄 그런 건 잘 모르는데."
"아르메리아라는 꽃이래요. 부추랑 닮았다고 너도부추꽃이라고도 불린다던데."
"그런데?"
"그 꽃의 꽃말이 '배려', '동정'이래요. 4년에 딱 한 번 돌아오는 날이라 그런가?"
하하. 작게 살짝 웃고 입술을 적시는 그를 흘긋 보며 남자는 말을 골랐다. 우선 지은 죄도 없으면서 바닥에만 고정된 저 시선부터 들어 올려야겠지.
"아기가 제일 적게 태어나는 날이 언젠 줄 알아?"
"네?"
몇 분 전 청년이 한 것처럼 뜬금없는 질문에 자연스레 그를 향했다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눈동자을 보며 남자는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새하얀 잔에 얹어진 검지가 두어번 톡톡 컵의 표면을 두드렸다.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침내 틈을 보인 입술 사이로 그가 예상한 답이 조용히 삐져나왔다.
"어... 글쎄요. 2월 29일?"
"땡. 틀렸어. 정답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야. 오히려 2월 29일은 특이하다고 그때 낳는 부모들도 꽤 있다더라."
"그런가요?"
말과는 달리 '어쩌란 거지?'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건 착각이려나? 뭐가 됐든 그에게 감정의 편린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청년에게 남자가 그만큼 편해졌다는 의미였으니까.
"내가 이 얘길 왜 하나 싶지?"
"아, 음... 조금?"
이제는 미적지근해진 잔을 여전히 꼭 쥐고 있는 소년에 머물러있는 청년. 그보다 인생을 몇 년 더 산 선생先生으로서 가르침을 하나 전해줘야겠지. 남자는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민트 향이 아래에 다 깔려있었던 건지 화-한 맛이 더 컸다. 그는 방금 넘긴 찻물처럼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동정과 동경은 한 끗 차이야. 뭐 문자 그대로도 그렇고 의미적으로도 그렇지."
바람에 날려 툭 떨어진 나뭇잎에 의해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었다.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해보려는 듯 눈꺼풀이 올라갈 때마다 눈동자의 위치가 변했다. 고운 미간은 미미하게 좁혀졌고, 아랫입술은 작게 삐쭉댔다. 역시 너무 다 끊어 말했나? 계속 지켜보는 것도 재밌긴 하겠지만,
"이해가 잘 안된다는 표정이네."
"솔직히, 네."
힌트를 하나 줘볼까?
"특이하다, 독특하다.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많이 쓰이지. 긍정적이면 특별함, 부정적이면 이상함. 안 그래?"
"그렇죠."
"이제 조금 감이 잡히려나?"
방금과 비슷한 표정. 하지만 이전의 것이 남자에게 보내는 의문이었다면 지금은 본인에게 보내는 것이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청년은 입 안에서 굴리던 답의 절반만 허공에 흘렸다.
"...특별함은 동경, 이상함은 동정."
"잘 아네. 그럼 이것도 잘 알겠지? 특별함을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지 않듯 이상함도 언제나 동정받진 않아. 나는 네가 특이하고, 독특하고 또 이상하다고 생각해. 매번, 매 순간. 하지만 누가 널 딱 한 단어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아무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거야. 특별함. 나견, 넌 특별해. 난 널 조금은 동경할진 몰라도 단 한 순간도 동정한 적 없어."
"……."
그가 일부러 뱉지 않은 입 안에 남아 있던 반절도 정답이란다. 알고 싶지 않던,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던 것이 상대의 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견은 줄곧 앞만 보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어쩌면 꿰뚫어 보는 이와 눈을 맞췄다. 보호자 혹은 하우스메이트라고 부르라고 하는 이상한 집주인. 올곧은 사람. 굳이 호칭을 붙여야만 한다면 형. 지우스.
"내가 널 이곳에 데려온 건, 같이 살자고, 살아가자고 한 건 동정도, 배려도 아니야. 조금의 욕심, 그리고 조금의 소망. 감정이 들어갔다면 그게 다야. 내 선택과 네 선택이 필요에 의해 맞잡은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지."
"...네."
"너 자신을 믿어, 그게 힘들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 그런 진부한 말은 하지도, 하고 싶지도 않아. 다만 한가지 네가 기억했으면 하는 건, 때로는 그냥 받아들이는 게 맞을 때도 있다는 거야. 4년에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잖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견은 이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한쪽 눈을 살풋 찡그렸다. 움찔대는 콧망울, 살짝이 벌어지는 입. 그리고 이어지는
"엣-치!"
"아."
재채기. 여기서 웃으면 안 된다. 지우스는 나견의 손에 들린 빈 머그잔을 가져가며 말했다.
"...들어가자."
"...네."
길었던 겨울도 이제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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