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각인

와론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230718

*대륙을 여행하는 트루디아와 와론. 둘의 시점이 번갈아 나옴

*애늙은이 결말스포

*목와, 람+트루디아, 기린닭ncp 인데 보기에 따라 cp 일 수도

*사망, 유사사망소재

*목주가 명예를 어긴 기사로 나옵니다

*와론이 투구 벗는 장면 있습니다

*소설 데미안 중 새에 대한 부분 인용했습니다

각인 (刻印)

동물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학습 양식의 하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한정된 시기에 습득하여 영속성을 가지게 되는 행동을 이른다.

와론은 거의 정지한 사고로 그저 눈이 떠있는 곳을 멍하니 바라본다. 시선 끝에 검은 단발이 걸리는 건 보통 그가 겪는 일은 아니라 와론의 뇌가 서서히 돌아간다. 왜 그가 여기있지? 이름은? 트루디아. 와론은 며칠 전에 그와 마주쳤다. 그를 지켜주면서 동행한 것도 같은데. 그자는 죽지 않아. 불멸자야. 어떻게 알았지?

그자가 이야기 했으니까.  

무슨 얘기?

너와 그에 대해서. 

여전히 초점없는 눈에 빛이 깜빡깜빡 거린다.

0.

트루디아는 며칠 간 다녀올 곳이 있다며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여행하기 시작했다. 선선한 계절을 맞은 대륙이 떠도는 이들을 반겨주어 여행길은 꽤 괜찮은 인상을 남긴다. 가끔 길을 이용하고 숲이나 마을 등 가는 도중에 지나치는 곳이라면 그는 딱히 마다하지 않고 고민없이 거쳐간다. 접경이 교차하는 작지만 번잡한 마을에서 그는 아무런 전조 없이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 우연하게도 길거리에서 새까만 닭, 와론과 스친 것이다. 

와론은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었다. 드넓은 대륙에서 홀로 여행하다 아는 이를 보는 건 드문 일이다. 그와 함께 겪은 일들이 유쾌했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만 생사의 고비를 함께 했던 사람에게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트루디아의 기억 속의 새까만 닭은 꽤 특이한 기사였다. 

"와론?"

놀란 트루디아는 저도 모르게 약간 튀는 목소리와 콕 겨눈 집게 손가락으로 그를 부른다. 

"오우,"

미세하게 뜸을 들였지만 와론은 그를 알아보았다.

"살아있었군. 투르리아." 

"트루디아야."

"이런 접경지에는 왠일로? 이젠 그 불멸자 친구랑 같이 안 다니냐?"

"람은 더 이상 불멸자가 아니야. 지금은 혼자 여행 중이고. 새까만 닭, 너야말로?"  

"와론이라 부르시게."

몇 년이 지나도 우스꽝스러운 투구깃과 위협적인 기운이 금세 익숙해진다. 와론은 동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마침 트루디아와 같은 방향이라 길이 겹친다. 그들은 며칠간 동행하기로 한다. 

저녁의 주점은 한산하지 않고 왁자하다. 가게 안은 군데 군데 등을 켜두었고 둘은 유독 어두운 벽 옆에 자리를 잡는다. 벽난로를 등진 쪽에 와론이 앉는다. 둘은 오늘 밤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그간 있었던 많은 일들을 꺼내 놓는다. 기사들은 특수기수라는 걸 만들었고 와론은 거기에서 견습들을 가르쳐 왔다고 한다. 와론은 갓 태어난 것 같이 연약한 견습들을 지켜줘야만 했던 노고와 싸가지 없는 후배기사들의 뒷담을 늘어놓는다. 

"이 특수 기수라는 걸 고안한 놈들이 어떤 정신인지 짐작이 가나? 심지어 첫번째 기수는..."

"왜 만든 건데?"

트루디아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와론은 목소리를 깔며 테이블 너머의 거리를 좁힌다. 

"동대륙하고 전쟁이 터질 뻔한 건 알고 있나?"

"얼마 전까지 수도 부근이 시끄러웠던 거? 그 쪽은 갈 일이 없어서 자세히는,"

"있었다고 해도 극비라 듣기 어려웠을 거다.그들이 족제비의 시신을 요구했다네. 장군을 죽였다고 말이야."

"엑.. 그거 설마.."

"화룬샤라고, 너도 알고 있겠지. 뭐 이쪽 대륙에서 장군이 죽었으니 전쟁의 빌미를 찾던 그들에겐,"

"아니. 잠깐만, "

식탁에 팔꿈치를 고이고 얘기하던 와론이 말을 멈췄다. 그 틈에 트루디아가 말한다. 

"화룬샤? 근데 걔를 죽인 건 팅크가 아니잖아."

"그치, 걔는 그냥-"

"-너 아니야?" 

"-자폭한 거지만." 

둘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린다. 서로의 말을 곱씹느라 잠시 정적이 인다.

특수기수에 대해 과연 불평할 자격이 있는 건가, 이 사람이? 그와 자신은 특수기수 설립의 원인제공자라고 할 수 있다. 트루디아는 또한 그들이 동대륙과의 정세악화에도 한 몫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불편했다.

"나는 별 내리기를 했을 뿐이지. 그에겐 손 끝 하나 안 댔다네."

와론은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낭랑하게 대꾸한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기사라는 게 신기한 존재다. 

트루디아는 팅크가 죽고, 그들이 서로 헤어진 후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와론은 말없이 잔을 입에 계속 대고 듣는다. 후드는 속이 깊었으나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이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 담기는 어떤 이해가 편안했다. 

"기사가 됐더군. 고양이."

"아아, 탄시린. 그래, 나랑 결승에서 붙었어."

"여전히 생각이 많아 보이던데."

"그래. 하지만 좋은 기사가 될 거야."

와론은 말없이 슬쩍 입꼬리만 올린다. 아마 후드 안의 눈썹도 능글지게 웃고 있겠지. 긍정의 신호다. 

내일 떠날 것을 생각해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따뜻한 음식과 알코올로 데워진 몸과, 실내와 편안한 침대에 트루디아는 금세 잠에 빠졌다.

트루디아는 낯익은 꿈을 꾸었다. 그것은 람과 여행을 시작하던 날의 꿈이다. 

람, 당신은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나? 종종 이 꿈을 꿀 때 트루디아는 람이 자신을 불러내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동쪽으로 가는 거야, 트루디아."

람은 드물게 웃는다. 그는 배도 장비도 없이 바다 안으로 한 발씩 걸어가 물로 들어간다. 잠겨가는 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트루디아, 안 와? 동쪽에는 요정이 있을 거라며. 

수평선으로 해가 걸린다. 햇살에 미지근한 바닷물이 서서히 거닌다. 

아저씨는 그쪽으로 건너가고 싶지 않아 했잖아.

"동쪽에는 대륙이 있어."

그거 진짜야? 아니, 왜 아저씨가 말하면 지어낸 것 같지? 

느릿한 바람이 머리칼을 쓸어 트루디아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긴다. 

당연히 동쪽에는 대륙이 있을 것이다. 바다 끝에 닿는다면. 

이튿날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와론은 시력이 좋아 길을 아주 잘 찾았다. 트루디아는 그에게 여러 여행지의 얘기를 들려준다. 아닌척 하면서 와론은 아기용 네프렌의 소식이 궁금한 듯 했다. 이젠 그렇게 아기도 아니야, 트루디아는 말하고 와론은 이미 알고 있다며 자신의 두툼한 완갑을 들어보인다. 밤이 오자 둘은 야영을 하기로 결정한다. 절벽 밑이 세로로 깊게 파여 높고 바람을 막아줄 공간을 발견했다. 바위를 둘러 불을 피워놓고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와론은 그의 닭부리 같은 투구를 벗어놨다. 그의 행동은 몇 년 새 꽤 달라졌다. 행동 뿐만이 아니라 그의 성정 역시 이전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고, 트루디아는 분석을 내놓는다. 농담이 늘었고 전에는 잘 드러내지 않았던 퇴폐적인 성격이 이제야 보인다. 한편으로는 트루디아가 끝내 기사가 되지 않은 것도 그의 경계를 풀게 만들었을 터다. 식사를 하면서 둘은 여러 얘기를 나눴지만 트루디아는 끝내 와론이 왜 동쪽으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 와론도 마찬가지였다. 

와론은 그의 피부를 녹일 듯 타닥대는 불꽃을 응시하며 목걸이를 만지작 거린다. 붉은 빛과 열기에 광석의 색이 죽어 들었다. 구부정하게 앉은 기사의 은발은 주름이 없는 얼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트루디아."

와론의 고개가 가만히 그를 향했다. 

"이 목걸이에 걸린 얘기를 들려줄까."

마주친 와론의 눈동자는 불빛이 일렁여 노을졌다. 각진 얼굴이 풍기는 날카로운 인상이 꽤 미인이라고, 트루디아는 평한다. 태도는 차분하지만 그는 묘하게 열기를 띠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본다. 

누구나 남에게 들려 줄 이야기 하나쯤은 갖고 있다. 불을 쬐다보면 긴장과 경계와 같이 이것 또한 풀려 나온다. 오해하지 말자. 트루디아는 보통 듣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다. 다만 그의 탐구와 흥미를 충족 시키는 게 좋을 뿐이다. 어떤 자는 수 천년의 세월에 걸친 긴 이야기를 늘어놓고 내용에 재미도 유머도 없어 듣는 이가 졸 때까지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갓 불멸자가 된 트루디아에게도 있고, 모른다, 말을 할 수 없다, 하는 이도 시키다 보면 한 가지쯤은 털어놓는데, 그런 경우에는 보통 본인의 이야기이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말이야-, 시작은 그러하다. 어쨌든 이야기는 한 사람의 심장을 살아서 뛰게 하는 생명이자 온몸의 핏줄기를 흐르고 맥동하는 무언가다. 

평범함 뿐인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툭 떨구고, 슬프게 말하는 하다ㄹ... 사람 앞에서 웃음을 참는 것은 트루디아가 그 이면에서 홀로 다른 걸 보기 때문은 아니다. 남들은 듣기 즐거운 이야기가 자기에게만 문득 비극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그의 옆 얼굴은 주황색으로 불그림자가 져있다. 트루디아는 무의식중에 비슷한 표정의 누군가를 떠올린다. 꿈에서 람의 시선 속으로 지던 일출의 태양을. 

"아마 하마는 이런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 할 거다."

 

1.

첫번째 각인은, 알 속에서 이루어졌다. 

둥지에서 홀로 떨어진 자신의 알을 그가 찾아냈다고. 

그렇게 흘려보낸 감상이 와론의 사고를 끝으로 밀어낸다.

그가 아니었다면, 하다못해 함께라도 있어주었다면 와론은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았겠지. 새까만 닭도.

그 사람이 머물던 자리는 이제껏 남아있다. 상실이 부재한 삶이란 존재하긴 하는지.

가끔 그런 삶을 떠올려 보아도 도무지 그러한 완전함을 누리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그를 만난 날 부터 모두 정해진 일이었다고 와론은 가만히 회상한다.

바닥에 댄 와론의 오른눈에 핏물이 고인다. 

자신은 어렸을 적부터 결핍된 존재였기에.

 

나는 불안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 어렸을 적에는 겁이 많았다. 눈이 큰 사람은 겁이 많다고 하던가,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시야 속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적대하고 의심했다. 그때부터 난리통 속에서 살아왔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처지였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에서는 겁이 많은 편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 그건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였고 감각에 의지하는 자들의 천성이다. 사소한 것에도 깜짝 놀라곤 했다. 두려움은 울음을 터트려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전쟁통에 사라지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깨달았다. 

예민해서 작은 변화에도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툭 하면 열이 올라 며칠을 쓰러져 앓는 일이 잦았다. 혼자 감기와 싸우며 희미하게 옆에서 이마를 짚어주는 사람의 온기를 그려보았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로 태어나서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건, 지금의 어른의 눈으로 보아도 참 잔인한 일이었다. 필요하다고 해서 주어지지 않았기에 부정하는 데에 익숙한 아이가 되었다.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지 않는 소심한 고집은 그때도 여전했다. 그건 외로워서 였다. 

"네가 꿈에서도 나한테 그렇게 말했는데. "

트루디아가 문득 언젠가 와론이 나오던 꿈을 떠올린다. 

"그게 무슨 자다 깬 소리냐, 트루디아"

"진짠데," 

언제더라, 중얼대자 그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한다. 

"됐고, 그래서, "

와론은 집게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끊겼던 말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왔다."

전쟁터에서 엮이는 인연은 참 기묘한 것이란 걸, 트루디아도 동감했다.

그런 한 때에 내 세계에는 그가 가득했다. 그를 만난 건 전쟁터를 전전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어 철이 들 무렵이었다. 그 나이에도 이미 어디를 가든 나를 당해낼 만한 자가 없었지만, 혼자라는 건 익숙해도 적응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내 또래로 보였지만, 

"하, 기사가 아니라고 했지?" 

나보다 훨씬 셌다. 강하다는 게 무엇인지 그 날 체험했다. 

그는 가볍게 완갑으로 칼을 튕겨내고 그대로 나를 낚아채 단숨에 깔아뭉갰다. 내 위에 올라타 제압하는 몸짓은 깔끔했다. 바닥에 짓눌린 볼은 아프지 않았으나 그 사람이 여유롭게 웃는 소리에 자존심에 금이 갔다. 

"그러는 너는 뭔데? 기사라도 되나?"

그 햇살진 웃음소리.

"그래, 그렇다면?"

나는 신경질적으로 항복의 제스처를 취한다. 그는 날 해칠 의도가 없는지 잡고 있던 팔을 놓아준다.

"너 이름이 뭐야?"

"와론."

"난 oo이야."

그는 갑주를 찬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 날 이후로는 그와 늘 붙어 다녔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다. 함께 보낸 시간들은 너무나 각별하여 남은 모든 삶을 숨 쉬게 하는 기억이 되었다.

그는 내가 자신과 같은 기사가 되기를 바라, 다니는 동안 내게도 무투와 창술을 가르쳤다. 그와 다닌지 2년이 넘어가기 전에 나는 그럭저럭 그의 공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네가 어서 기사가 되어서 우리가 같이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

전쟁터에서 기사의 더러운 면을 무수히 보았던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앞으로도 함께 있으려면 기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싸움을 하고 엉망인 채로 그에게 갔다. 그의 표정이 울음 비스무리한 것을 담으며 일그러졌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속이 상한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엉망이 된 내 팔을 잡으며 내게 걱정스레 속삭였다. 내 해진 어깨를 안쓰럽다는 듯이 보더니 조용히 안아주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걱정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다.

무엇이든지 노력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햇살이 비치던 광경에 눈이 부셨다. 혼자 고뇌하며 앉아있던 그의 뒷모습을, 감싸주지 못하고 돌아누워 잠들지 못한 날을 후회한다. 피가 묻은 손을 황급히 닦아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내가 오롯이 담기던 푸른 두 눈에서 선명한 애정을 받았다. 함께 보내는 하루가 내일도 반복될 거라는 지루한 사실에 마음을 떨며 잠들었다. 망막에 맺힌 기억들이 세상을 수천가지 빛깔로 물들였다. 

그는 기사란 무엇인지 내게 알려주었다. 

단순히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보금자리가 아닌, 그는 내 안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다. 기사들이 그를 찾아왔어."

와론은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동료를 살해하고 명예를 어긴 게 밝혀졌지. 그래서 기사들이 그를 처형했다."

그 말을 내뱉은 와론의 표정이 극도로 냉담했다. 이제까지의 활기찬 웃음은 모두 꾸며낸 것 같았다. 새까만 닭의 투구 밑에 숨겨진 진짜 표정은 이것에 가깝다고, 트루디아는 생각한다.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를 꽉 껴안은 와론이 그를 흔들다가 심장 소리를 듣고선 내려놓고, 서툴게 가슴을 압박한다. 지혈을 시도하는 손이 피투성이다. 악을 지르는 비명소리가 트루디아의 귓가를 파고 든다. 와론은 시체에 꽂힌 창을 뽑고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떠나간다. 

"머물던 곳에 그가 없더군. 그를 찾아 근방의 숲을 뒤졌다."

와론은 그 기억을 계속 반복한다. 감이 좋은 기사는 정녕 트루디아의 능력을 모르는가?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말을 이어가며, 

"그를 잃고 나서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기분이었지. 솔직히 세상이 어떤 곳인지 나는 잊고 있었다. 그를 포함하여 많은 기사들이 진정하리라고 믿었던 건 안일함과 오만함이었다. 적어도 그 만큼은 내게.. 누구보다 정의로웠지만. 그가 살해한 동료는 한 둘이 아니었더군."

많은 기사의 죽어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는 내게 기사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내게는 선한 일만 알려주고 싶어 했다. 정의가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 오늘은 말해야지, 내일은 말해야지하며 다정하게도 수없이 망설였으리라. 

그러나 나는 끝내 기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잃어버린 마음이 나를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누구의 옳음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스스로 찾아내겠다고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감기지 않은 눈이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시간선과 공간축이 회전한다.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된다.  이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가령 기사가 되어 달라는 그 말에 숨겨진 의미 같은 것. 머리 위에서 뺑글뺑글 도는 태양은 뜨겁고 메말라 어제와 같지 않다.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자신과 남의 피를 쌓아올려 정의를 세워왔나. 

나는 그대로 그와 지내던 곳을 박차고 나와 기사가 되었다. 그의 무덤으로 부터 달린다.

네가 없더라도 나는 여전히 네가 있는 와론이니, 너는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네가 없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너를 만나기 전에 나와는 완전히 다르니까. 내가 진정한 기사가 될 때 너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사로서 살아있는 순간마다 내뱉는 숨에서조차 네가 없다는 걸 실감할 뿐이다.

론누를 지지해서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무릎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와론은 간신히 몸을 세운다. 

한 때는 아예 평생을 그 시절에 머무르고 싶었으나,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두고 달려 멀어진다.

함께 가야했던, 함께 갈 거라 믿었던, 그것이 옳다고 믿었던 수많은 가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곳에 가지 못한 이유는 이 세계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내게 남긴 부탁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이곳에 존재해야 하는데. 너는 명예로운 존재여야 하는데. 너는 기사여야 하는데.

그래서 나는 기사가 되어야 해. 

와론의 턱을 타고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새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 속은 안락하지만 나오지 못한 새는 새가 되지 못한 채 죽는다. 두드리는 신호는 마치 맥박처럼 두근댄다. 딱딱한 것의 갈라짐은 쩌적대며 벽은 사라진다. 껍질을 깨고 까마득하고 아련한 새끼가 기어나온다. 그는 완전히 다른 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알에서 나오는 것은 스스로를 살려주던 하나의 세계를 완전히 부숴버리는 일이다. 

어린 시절의 천진했던 삶을,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그 모습을, 누군가 대신 해주리라 믿었던 정의를, 명예를.

나는 어린아이를 보면 여전히 그런 기분에 빠져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를 간신히 만나기 이전의 길들여지지 못한 아이가 보이나 보다. 다치고도 그 품에 안겨있음에 조용히 설레던 자신을 겹쳐보나 보다.

두 번째 각인은 새까만 닭이라는 기사가 탄생한 날이었다. 

깨진 껍질을 비참하게 내려다 보다가 허리를 숙여 하나를 줍는다. 그가 완전히 죽을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 속 한구석에라도 살려두는 것이 낫다. 그것을 끈에 꿰어 목에 걸었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나에게 주고 떠났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와론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릎에 올린 손이 무의식적으로 옆에 놓아둔 투구의 깃을 만지작 거렸다. 

"그는 왜 동료를 죽였을까? 나는 그가 명예롭지 못하다고 탓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를 알기를 원했지."

타닥, 모닥불에서 불티가 떨어지고 와론의 눈이 천천히 타올랐다.

"와론,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기사들이 무언가 바뀔까."

트루디아는 문득 그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무언가를 바꾸는 건 그들이 할 일 이겠지."

"알아주지 않는 일을 너 혼자 해도 무슨 의미가 있어."

와론은 등을 세우며 대답했다.

"그러는 너는 이해하나?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할 일이 있을 뿐이다. 그건 굳이 정의나 명예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지."

"그건..."

트루디아가 보기에 와론의 정의는 어딘가 삐뚤어져 있다. 언성을 높이는 대신 공간에 정적이 흐른다.

"그렇지만 너는 오늘날까지 기사로 남아있잖아."

트루디아는 고요를 깨고 화제를 돌린다.

"아, 흐음. 그렇지."

생각에 잠겨있던 와론은 트루디아의 말을 인지한 듯 놀란 기색을 하더니 의뭉스러운 미소를 띄운다. 입꼬리가 옅게 올라갔다. 왠지 그가 씨익, 큰 미소를 짓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창 기사들을 사냥하던 무렵, 나는 어떤 기사를 만났다."

와론이 잠시 뒤에 덧붙인다.  

"너희와 족제비를 만나기 조금 전의 일이었지."

2. 

와론은 그에게서 불가항력의 무언가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와론을 자신의 손으로 골랐다. 그런 선택도 각인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와론은 불공평하다고 투덜댔지만 참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그를 손에 쥐고있는 일은 나름의 즐거움을 주었으니까. 기다림의 끝에 존재하는 것이 와론을 무엇보다도 참을성 있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달잔이 와론을 수도까지 호출했다. 국경을 떠돌던 그는 한 보급소에 들렸다가 전령을 받았다. 군청색 거북이로부터, 

와론은 무미건조하게 읽어낸다.

새까만 닭, 와론

한 주 내에 수도로 복귀 바람.

용건은 후에 알았지만 신입기사와의 대련이다. 

재미있는 대련을 성사 시켜준다더니 조건으로 와론에게 서쪽다리로 파견까지 운운한다. 보아하니 그는 와론을 뼛속까지 이용해먹고 싶은가 보다. 어디 할 수 있으려나 한번 보자고. 마침 말토에서도 딱히 수확이 없어 시간이 비던 차다. 달잔이 그를 종종 즐겁게 해준 건 사실이다.

"되게 위세 떠네, 꼰대 같은 놈. 차마 코끼리랑 신입을 붙일 순 없었나 보지."

후딱 끝내고 그 건방짐을 비웃어 줘야지. 와론은 무장을 갖추고 대련장으로 간다. 그 대련이 모든 걸 바꿔놓을 줄은 모르는 채였다. 

신입 기사의 푸른 번개를 보는 순간 어떤 약속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와론은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존재임을 직감한다. 마치 예정된 듯이 그는 와론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아왔으나

더 이상 편하게 호흡할 수 있거나, 없거나

맹세없이 자기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거나, 없거나 

순식간에 그런 것들이 우선순위의 저 뒷편으로 밀려난다. 

그 힘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간절히 찾아 헤매던 것을 만났다. 중력과도 같은 것이 그로부터 나와 자신을 끌어당긴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듯이, 권능은 와론이 좇는 목표물 그 자체다. 

힌셔와의 싸움을 끝낸 와론은 그를 다시 만나러 온다. 호전적이지 않고 강하며 동시에 보호를 필요로 하는 기사와, 기사가 가진 힘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를 손에 넣을 계산을 몇 가지 떠올린다. 그건 와론을 위해 준비된 힘이나 다름없다. 

"이봐, 힘을 받을 때 무슨 맹세를 했나?"

"... 그런 걸 말해주겠어?"

그는 다소 어이 없어 보인다. 

"처음 몇 년을 넘기고 살아남는 기사는 많지 않아 . 그 힘을 가지고 있어도 모을 새도 없이 죽게 될 거다."

"가령, 지금 내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면 넌 어쩔 도리가 없지 않나." 

"글쎄, 넌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널 죽이지 못 할 거라고?" 

"내 능력이 필요해서 날 찾아온거지?" 

"..." 

"네가 내 힘이 되어주면 생각해 볼지도 모르지."

그는 얌전한 태도를 버리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와론을 마주본다. 단어 선정이 뭔가 건방진데. 와론은 그에 대한 환상에 금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는 와론에게 몇 번 정도 자신의 임무에 동행할 것을 부탁했다. 신입기사의 부탁 따위 큰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같이 다닌지 6개월 쯤 지났을 때 그는 난데없이 어떤 사실을 고백한다. 

"그 힘을 쓰지 않을 작정이라고?"

"그래, 적어도 3년은 쓰지 않고 모을 생각이거든. 네가 지금 당장 쓰겠다면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그럴 생각이 아니라면 그 정도는 기다려줘야겠어." 

그 동안 본인을 지켜주면서? 그의 능력은 조건을 만족하는 적당한 때에 써먹을 예정이었기에 당장은 사용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마 그도 짐작하고 있는 듯 하다. 

"인간이란..."

와론은 머리가 충격에 얼얼하여 잠시간 론누를 쥐고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는 진절머리를 낸다.

"특수기수도 걔 때문에 간 거야. 이젠 해체했지만. "

그 기사가 아니였다 해도 너만은 빠지지 말았어야 할 텐데, 트루디아는 속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 기사는 와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기사였다. 임무와 개인적인 사냥으로 살육과 피비린내에 질려 마비 되었던 후각이, 그와 있으면 숲내음을 맡는다. 힘이란 건 결국 그 기사 자체였으므로, 와론은 그를 따라 다니면서 점차 하던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와론에게 기사들과 싸우러 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신입기사는 생각 이상으로 손이 가는 존재였고 그는 더 했다. 와론은 가끔 그의 이상에 핀잔을 준다. 

"그런식으로 굴다간 일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거다. 그까짓 미래, 그런 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단 걸 모르냐?" 

"너한테나 그렇겠지."

"한 세기나 반세기 뒤에도 네가 이룬게 남아 있을 것 같아? 죽고나면 다들 제멋대로 굴 걸."

그가 좀 더 현실을 직시했다면 와론은 그를 도와주지도 않았겠지만 답답함이 치솟을 때가 있다. 

"나를 판단하는 거냐, 새까만닭? "

응수하는 그의 얼굴에 와론의 시선이 한참 머무른다. 그는 이런 면에서 늘 모호하게 굴고 넘어가곤 한다. 

"왜 그렇게 쳐다 봐." 

... 별로 상냥한 기사는 아니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은 점차 와론이 그의 곁에 머무는 계기로 변해갔다. 그는 와론을 이 땅에, 기사라는 존재에 묶어 두었다. 누군가를 받아주고 기른다는 입장의 책임감 속에서 와론은 떠나간 이와 함께 기사가 되었다면 비슷한 풍경일까 상상했다. 와론이 홀로 하곤 하는 의미부여들은 그가 골치를 썩힐 때마다 산산히 부숴져 현실감각을 잃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점차 신입기사에서 기사로, 기사에서 영웅이 되어가도 여전히 그 곁에서는 향내가 났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목숨은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게 와론의 불행이었다. 그 역시 와론을 내버려 두고 떠났다. 와론이 나긋한 음성으로 이야기 하는 동안 트루디아는 그의 눈을 바라본다. 

전투가 끝나 폐허가 되어버린 숲에 한 기사가 누워있고 곁에는 와론이 있다. 품에 안긴 기사는 팔다리가 맥없이 축 쳐져 잠든 아이 같아 보인다. 와론을 강하게 끌어당기던 인력이 사라진 것이 느껴진다.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의 뺨에 조용히 얼굴을 부빈다. 어떤 사실이 부정할 수 없이 와닿았다. 도리질하는 고개가 말을 전하지 못하는 곳에 있을 이에게 끊임없이 다정을 속삭이고 부드럽게 그를 깨우려한다. 젖은 속눈썹에서 눈물이 납작하게 얼굴을 타고 흘러 가슴께로 뚝뚝 떨어진다. 

와론은 기사의 목에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묻는다.

"어째서 이다지도 내게 잔인하게 구는 거야, 기린,"

그깟 미래 때문에, 평생을 얽맬 것 같던 중력이 그를 놓아준다. 예견된 미래는 참 쉽게 허물어지고 마음을 옥죄어준 속박은 무너진다. 그가 자유를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도. 와론은 결국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는 기사를 무릎에 눕히고 한 손으로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조용히 이마에 입을 맞춘다. 

어떤 종교에서 대자(代子)에게 해준다는 입맞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언젠가 보았던 그 장례를 치르는 광경이 떠올라 트루디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영상이 끊어지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이를 한참 뒤에야 마주 본다.

와론은 환상이란 병과도 같다고, 그때야말로 그만 자신도 떠난 이들의 곁으로 가기를 원했노라고 이야기 한다. 그의 기억은 한 전장을 헤집고 이내 빠져나온다. 

"그래서 결국 그 기린이라는 기사는 자신의 능력을 쓰게 해준 거야?"

"그럴 놈이었으면 애초에 날 이용하지도 않았겠지. 

나중에 봤더니 살인을 안 하는 건 그 자식 기어스였어." 

그래서 아니라는 건가. 와론은 말을 얼버무린 셈이다. 

"진짜 이름은 뭐였는데?" 

와론은 잠시 머뭇대다가, 이번에야 말로 웃으며 답했다. 

"지우스, 담청색 기린. "

3.

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트루디아와 와론은 각자의 감상에 빠져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다가, 모닥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뒷날은 조금씩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씨였다. 동쪽으로 갈 수록 조금씩 해가 일찍 뜨고 금세 떨어졌다. 

낮이면 그들은 이동하다가 마을에 들려 식량을 사거나 했고, 저녁이 되면 그 날 머무를 곳을 찾았다. 야영이 익숙했기 때문에 주로 너른 황무지의 구석에서 밤을 보냈다. 밤이면 트루디아는 람과 여행하는 꿈을 꿨다. 트루디아의 눈과 같은 색의 구름이 하늘에 폭신하게 깔려 있었다. 람은 트루디아와 하늘을 번갈아 보며 예의 차근한 어투로 말한다. 

"분홍빛 구름은 폭풍의 전조라는 거 알아?"

"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트루디아의 꿈이니까.

"하지만 그건 속설에 불과한 얘기야."

"엥? 구름 색이 저러면 보통 비가 오지 않나?" 

"저런 색으로 보이는 건 산란 때문에 생기는 환상이야. 실제로 분홍색 구름은 없는 거지."

"... 라는 개꿈을 꿨어."

"핑크다이아몬드가 그렇게 값을 많이 준다던데."

트루디아는 그의 농담에서 오싹함을 감지한다. 와론은 큭큭 대더니 말한다.

"나도 아직 꿈에서 그를 보곤 하지"

"네가?"

"꿈이니까. 하하, 너도 마찬가지라며?"

"글쎄, 지금은 특이한 경우잖아. 평소에 아저씨나 팅크가 꿈에 나오면 그건 그것대로 좀.."

으, 트루디아가 오만상을 쓰자 와론은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확실히 무투는 둘 사이에 떨어지지 않는 주제였다. 와론은 무투에 관심이 지대했다. 트루디아는 와론의 지식들에 깜짝 놀란다. 그러면서 몸을 풀 겸 종종 대련을 하기도 했다. 그는 트루디아의 스타일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네가 기사가 되지 못한게 고양이 때문이라고 했나?"

"대련은 내가 이겼다고. 람도 싸움으로는 어디가서 지지 않을 거라고 했고."

"시원찮게 하는 건 아니고? 어디 한번 보여주시게."

"오, 상대 해줄 거야?"

둘은 작은 대련에도 싸움이라면 진심이라 하다 보면 불이 붙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와론은 무투에 대해 박식하지만 트루디아도 나름대로 돌아다니면서 본 게 있다. 대륙은 넓은 만큼 수많은 무술이 있어, 둘의 견해가 맞는 때도 맞지 않는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김없이 시비가 시범으로, 시범이 증명으로 이어진다. 

어느 새벽 나는 한 천사의 혼이 나무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천사를 좇아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것은 내가 도달하기 전에 땅으로 내려앉아 장난을 쳤다.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사뿐히 지상에서 발을 떼었다.

그것은 붉게 아지랑이가 피는 너머로 자신의 무리와 함께 사라져 간다. 해의 끄트머리와 지평의 끝이 만나 넘실댄다. 나무 위에서 그 광경을 볼 수 있는 한 오래 지켜본다. 

태양의 뜨거운 에너지가 지평선 아래에도 닿고 있을까.

현실의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을까. 혹은 사라질까.

"나는 그걸 보러 동쪽에 가고 있다네." 

와론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속삭인다. 트루디아는 그 말까지는 듣지 못했다.

와론은 자신의 이야기를 더 늘어놓기도 했다. 누구나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끝날지 알지 못한다. 

흐려서 해가 뜨지 않은 날, 그들은 운수가 나쁘게도 다수의 인원과 전투를 벌였다. 적들은 와론에게 원한이 있어 보였다. 그들은 와론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그가 쓰러져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고 둘을 버리고 떠났다. 

와론의 육체는 진흙에 쳐박혀 있다. 차디찬 하늘과 땅 어느 것에도 온기가 없다. 다만 와론의 가슴께에서 따뜻하게 흐르는 피가 적실 뿐이다. 트루디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피로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쓰러진 와론을 보았다. 그가 간신히 한 무릎을 땅에 대고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다시 고꾸라졌다. 와론에게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게 시시각각 느껴진다. 그는 곧 숨이 끊어질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가슴팍이 움직이며 공기가 닳아버린 쇳종소리 같은 규칙음을 내었다. 

댕- 댕- 댕- 

그 소리가 말하는 것 같다. 육신의 속박, 힘의 제약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진정 남는 건 거기에 새겨진 기억이라고.

어떤 자는 수 천년의 세월에 걸친 긴 것을 가지기도 하고 어떤 자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한참 짧은 것을 가지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어디에서 끝날 지는 알 수 없다. 

트루디아는 그런 결론을 도출 할 수 밖에 없다. 언젠가는 지평선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모여들지 않을까.

와론의 눈빛이 흐려 무엇을 보고 있는지 꿰뚫을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여행길에서 와론은 끝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트루디아는 그의 눈에서 목적지를 엿보았으니 굳이 묻지는 않았으나,

'그런 델 왜 가려고 하는데?'

트루디아는 몇 번이나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자신이 할 만큼은 했다. 와론은 어딘가에 홀려서 가는 사람 같았다. 트루디아는 람을 떠올린다.  

바다의 너머의 광경을 담던 눈.

와론은 동대륙의 끝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홀로 여행 하는 건 참 외로운 일인가봐."

트루디아는 가만히 와론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 기사 새까만 닭이라도 잠은 자겠지.

-....! ---..!!

희미하게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어떤 무리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닭! 새까만-"

그의 옷으로 보아 와론의 기억 속에 등장한 기사였다. 

외침이 그들에게 닿았을 때 와론의 눈 속에서 빛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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