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지곤듀🔥

집도, 돈도 없는 개털 용병 나진. 낙엽에 파묻혀 공터에서 자던 그는 드디어 다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슬렁어슬렁 길드를 찾아가 언제나처럼 단기 고수익 의뢰를 내놓으라고 깽판 치자 난처한 표정의 접수처 직원의 눈짓 한 번에 우락부락 형님들의 손길을 받으며 뒷골목에 버려졌다.

"자꾸 연기가 늘어? 다음번에 팔도 한 짝 부러뜨리겠어 아주."

돌아가는 경비대의 뒤통수에 엿 한 번 날려주고 직원이 소매에 몰래 찔러넣어 준 의뢰서를 꺼내 확인해보니 오랜만에 맡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암살의뢰였다.

"삼일 뒤 후작가 별장. 음... 좀 센데? 귀족 암살은 껄끄럽긴 한데 또 페이가 쓰읍 아슬아슬하게 배탈 날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일단 간 보고 에바면 삥땅 쳐야겠다."

그렇게 사흘 뒤 완전무장 후 적힌 대로 수도 외곽 별장의 3층 5번째 창문의 방에 들어가 암살 시도를 하려던 나진은 기척도 없이 뒤통수를 후려친 주먹에 기절했다.

"으으."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 했으나 두손이 등 뒤로 묶여 고개만 치켜들게 된 나진이 처음 본 것은 달빛처럼 새하얀 백발의 여자. 그리고 그 뒤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나?

"뭐지?"

"어? 일어났다! 안녕~"

"일어났나요?"

"네.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요? 어떻게 이런 애를 찾으셨대?"

"운이 좋았죠, 뭐."

말도 하고 움직이는 걸 보면 유체 이탈은 아닌데? 그럼 뭐지? 도플갱어? 그거 보면 죽는다 하던데? 나 죽었나?

"씨바ㄹ"

"어머, 얘, 그게 무슨 과격한 언사니? 이분이 누구신지는 알아?"

"괜찮아요. 나진 맞죠?"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지? 긍정하면 죽는 건가? 아니 저 여자 눈빛 보면 부정하면 죽는 걸지도...

"...누구세요?"

"음 제가 누님보단 덜 알려지긴 했죠. 저는 이 나라의 황위 계승 제 2 후보 나견입니다."

"예?"

"그리고 당신에게 암살의뢰를 넣은 장본인이기도 하고요. 원래는 좀 더 온건한 방법을 쓰려했는데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 점은 미안해요. 아, 의뢰금은 파디얀이 줄 거예요. 파디얀 저것 좀 풀어줄래요?"

"네, 전하."

파디얀이 손을 풀어주는 순간에도 나진의 극단적 생각은 정신 없이 이어졌다.

전하래. 진짠가? 그래도 도플갱어보다는 나은 것 같긴 한데. 아닌가? 더 ㅈ된 상황인 건가? 아니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씨발."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아서 정확히 뭔지 모르겠는데?

"입.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니?^^"

나진은 풀린 손목을 돌리며 공손하게 입을 닫았다. 귀한 분 앞이라서 그런 거지 절대 파디얀이라는 여자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진짜다.

"그래. 조용하니까 얼마나 예뻐. 자, 받으렴~"

파디얀에게서 받은 주머니는

"너무 무거운데?"

"ㅎㅎ"

"요. 거의 두배 아니 세배? 정도 되는 거 같은데요. 잘못 주신 거 같습니다."

"아뇨. 맞아요. 제가 다른 의뢰를 하나 더 드릴 거거든요."

"네? 무슨 의뢰길래 이렇게 많이... 거울은 왜?"

나진은 자신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는 희고 고운 손과 눈앞의 거울, 거울에 비치는 자신과 귀한 분을 떨리는 눈으로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응. 역시 꼭 닮았네요. 쌍둥이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네? ...네."

"이런, 머리 끝이 상했네요. 머리 좀 다듬고, 눈 밑에 점은 분칠을 하면 가려질 것 같네요. 괜찮을 것 같죠?"

"네. 상류층 위장 잠입 의뢰도 여러 번 성공했다 하니 예법도 금방 익힐 것 같습니다."

"좋아요. 잘 부탁해요 나진."

"네? 아니,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당신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펴, 평생 해야 하는 거 아니죠?"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말에 나진은 자신이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럼요. 한... 반년 정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1년 안에는 끝날 거예요."

"네..."

대답을 들은 그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나진은 소름이 돋았다. 설마? 네가 지금 하는 생각이 정답이라는 듯 천천히 끄덕여지는 고개에 아득해져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곳은 제가 요양 차 일주일간 빌렸으니 들킬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봐요. 편안한 마음으로 하라고도 하고 싶지만 일주일 안에 완벽해져야 하니 바로 지금부터 해야겠죠?"

"전하, 조금 있으면 동이 틀 것 같습니다. 어서 가시죠."

"네. 전부 다 끝나면 돈이든, 작위든, 땅이든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줄게요. 미안하지만 최대한 노력해주세요. 전하?"

"아니.."

저 여자랑 저만 두고 가시는 건가요? 진심?

나진은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내는 여인처럼 가련하게 손을 뻗었으나 그 무엇도 잡을 수 없었다.

그걸 보던 파디얀은 사냥감을 찾은 최상위 포식자 같은 눈빛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우리 전하 때 빼고 광내보자고요~?"

세 시간 뒤 벼락부자 개털 나진은 시고르자브종에서 순종으로 환골탈태 되었다. 물론 외견만 멀쩡해졌다. 옆구리가 썰리고 다리가 부러져 뼈가 튀어나왔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만 돌아다니던 그였으나 생판 모르는 인간들한테 박박 씻겨지고 기름 범벅으로 온몸이 주물러졌다는 충격에 희게 질려 질질 짜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천 리 길의 한 걸음 뿐이었으니, 그가 잊고 있던 사실 한가지.

"그, 그게 뭐죠?"

"뭐긴 뭐에요, 코르셋이랑 패티 코트지. 매일 입던 거잖아요. 황녀 전하?"

"......아."

그가 사는 제국에 황제의 자식은 금발 황녀 둘밖에 없다.

잘 알려진 1황녀 칸덴티아와 14세 이후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는 소문만 무성한, 베일에 싸인 2황녀.

황후 소생인 1황녀와 달리 2황녀는 변방 귀족 출신 후궁 소생이니 제 자식이 죽을까 두려웠나 보지?

음 그래 어쩐지 남자치곤 가녀리긴 했어. 매일 저런 걸로 조이고 압박하니 몸이 그 모양

"아아아ㅏ악!!!"

"전하,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숙녀의 언어는 담벼락 너머로 나가선 안 된다고 말씀드린 지가 어언 10년 전인데 아프셔서 그런가 잠깐 잊으셨나 봐요?"

"숨, 을 못 쉬겠어. 살려줘."

"매일 입으셔야 하는데~"

일주일간 나진은 지옥 같은 일상을 보냈다. 걸음걸이와 자세를 교정했고, 필기체를 숙달하고, 거추장스럽고 무겁기만 한 옷을 입고도 나풀나풀 깃털처럼 움직이는 연습을 했고, 골격은 어쩔 수 없지만 근육량은 조절할 수 있다며 매일 풀떼기만, 그것도 손바닥만큼만 먹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에 마차를 타고 황궁에 도착한 그는 지금 굉장히 예민했고 제 눈에 거슬리는 게 누구든 -심지어 황제일지라도- 지금 제 머리에 빳빳이 꽂혀있는 머리핀을 뽑아 경동맥에 심어줄 거라고 저주 섞인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띈 희생양이 있었으니, 나진은 그의 녹빛 머리가 거슬렸고, 궁 내에서 모자 따박따박 쓰고 있는 밥 말아먹은 예의가 아니꼬웠고, 그냥 눈앞의 인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이 망할 사태의 원흉을 알아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첫째, 그가 평소에 입던 것보다도 훨씬 더 무거운 드레스를 껴입었다는 것, 둘째, 가뜩이나 무일푼이라 먹은 게 없는데 일주일 내내 초식동물처럼 풀만 먹었다는 것, 셋째, 생전 처음 신은 굽 높은 구두로 인해 갓 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치마폭에 숨기고 힘겹게 내딛고 있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입궁일이었기에 시녀들이 전력을 다해 틀어 올린 머리가 태풍으로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언덕에서 굴러도 흐트러짐 하나 없을 만큼 견고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머리핀을 뽑지도 못한 채 추하게 굴러 넘어질 뻔한 나진은 파디얀과 초록 머리 사내에 의해 붙잡혔고 다시 일으켜 세워졌다. 나진은 죽고 싶어졌다. 그의 생에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적은 없었다. 일주일 전 씻김 당한 것만 제외한다면.

"황녀님이 아직 덜 나으신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이지?"

"그러게. 갑자기 열이 오르셨나 봐. 오전까지만 해도 제국의 고귀한 두 번째 별이셨는데 말이지."

"...몸이 안 좋은 듯하네요. 폐하만 뵙고 쉬어야겠습니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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