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The greenshift
기린닭
240308
*잔불의 기사 와론+지우스 ncp
녹색편이
우리에게로 가까워지고 있는 별이 내는 빛의 스펙트럼에서는 파장이 짧아 보이는 현상인 청색편이가, 멀어져가는 별의 스펙트럼에서는 적색편이가 관측된다. 빛이 운동하며 물체까지 도달하는 길이가 증가하면 물체의 색이 스펙트럼의 가시광선 상의 붉은 영역으로 치우친다.
마찬가지로 중력 적색편이 현상(gravitational redshift)에서 일반 상대성 효과로 인해 빛은 강한 중력장에서 빠져나오면서 에너지를 잃고 파장이 길어지고, 중력장 안으로 들어갈 때는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 별이 외계의 은하계를 공전하면서 지구로부터 가까워질 때 청색편이가, 멀어질 때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
그는 발치에 있는 것이 바다라고 생각했다.
방파에서 부딪혀 부서진 파도가 해안으로 도달하기까지 시간은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몇 분 안에 수면 아래 잠긴 무릎까지 밀려왔으며 금세 구체적인 형태를 잃고 얕은 수면 아래로 추락한다. 파도가 쓸려가는 해변은 안쪽으로 가끔 튀어나온 넓은 바위들로 조금 각진 해안선을 가진 만. 해변으로부터 그 바다란 존재를 가르는 단조로운 경계에 크고 작은 녹주석들이 자갈처럼 깔려 불규칙한 높낮이를 이루며 물살대로 구른다.
자갈들이 서로 부딪혀가며 깎아내고 깎여간다. 그에게는 익숙한 소리였다. 존재하기 위해 서로 마찰한다는 것이 익히 아는 기사들과 닮아있었다. 다만 눈 앞의 대륙 반댓편으로 펼쳐진 연해의 소음은 낯설게 귓가로 들려와 등 뒤로 흩어진다. 바람이 그의 숨을 가져갔다.
대양을 마주하는 건 난생 처음인지도 몰랐다 마치 광합성을 하는 식물 같이 녹빛을 투과해내는 파도가, 살아있는 세포들이 낱낱이 연결된 거대한 녹조가 하얀 그물망 같이 그에게 밀려올 때마다 누군가와 동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들게 했다. 이름을 불러오는 것처럼 등판의 검은 옷을 부풀리는 해수의 넘실거림. 늘 그렇게 자신의 등을 밀어줄 존재를 찾아온 느낌이었다. 원한 건 단지 정의를 내세우는 것만은 아닌가 했다. 갓 태초를 지난 것 마냥 연약한 새끼의 사지 같은 팔다리. 머무를 수는 없었지만 파도가 해안선을 지나쳐 밀려가면 해변으로 퇴적된다고, 혹은 비가시적인 누적이 수면 아래에서 일어난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먼지구름 같이 건조하고 수심 깊은 적란운들이 수평 가장자리에서 용솟음 치면서 신수의 형태를 종용해온다. 보이지 않는 후미로부터 집채만한 해일처럼 넘어오는 위기들이 날씨가 차분해질 때쯤에야 멎을 터였다. 바다에 도착한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기다려왔음에도 맑은 날은 이제껏 도래한 적이 없었다. 지평에 그려진 선은 붉은 구를 반으로 가르곤 했으나 바다는 안개와 회색의 스펙트럼들로 어둡고 모호한 경계 속에 있었으며 대지 속에 석양을 구경한 경험들은 차가운 머릿속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안정이 없는 삶. 끊임이 없이 울고 있는 바다… 표면이 잔잔하게 고이던 호수들이 언제나 그리웠다. 기사의 행군은 또한 그가 살아온 곳을 떠나온 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명은 물론이고 말과 같이 강인한 짐승들의 목숨도 우습게 앗아가는 거센 조류에서 하지 못한 말들이 맴돌았다.
모래 대신 해변을 가득 채운 녹빛 수정 사이에 묻힌 사구가 아무리 높은 가래를 이루어도 해안선은 전진할 생각 하나 없이 이곳 저곳에 요새 같은 돌탑을 쌓아올린다. 녹주석, 베릴, 에메랄드, 아쿠아마린… 각종 이름으로 불리는 그 식물빛 돌들이 이끼처럼 가득히 메운 해안의 절벽. 그 위에 웅크린 이를 본다. 물 흐르듯 두 손 사이로 빠져나간 수정이 잡으려고 해도 자꾸만 미끄러져 내린 것이다.
그저 스쳐가는 건 줄 알았는데.
왜 그는 유일한 선택지일 수 없는지 되내인다. 아무것도 싣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보였던 기사. 강함은 아무도 길들일 수 없는 결과론의 연역이었고, 와론의 자유로움은 어느 격기사들의 강함보다도 더 눈에 띄는 발견이었다.
해안은 혼돈하고, 바다는 그보다 더한 흑암이었다, 마치 태초와 같이 요동치며 말소리 하나 없이 공허했다. 물상은 깊은 아래 잠기고 돌풍이 다만 수면 위를 쓸며 간간히 그 덮개를 들어 파도를 만들었다. 파도에 파묻힌 다리는 금방이라도 영혼과 함께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리겠지. 창공과 바다의 끝은 여전히 흐려 하나의 몸체로 연결되어있다. 암해로부터 기어 육지에 오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해결을 팔뚝으로 하나씩 짚어가는 일에. 정신도 육체도 넘어지는 와중에. 물이 차올라 삭망이 둥글고 검은 눈물이 되어 흐르는 때에 멀리 떠있는 존재를 바라기까지 하게 되었다. 스스로 떨어진 때를 기억하지 못하며 단지 어느 기대에 차 있는 황폐한 계명이었다.
만발하는 눈보라는 재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해초같은 거친 바람을 뺨에 휘감고 있었다. 녹주석의 표면 같은 맨얼굴 사이의 그 눈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자연의 빛을 닮아가고 있었다. 검은 몸을 감싼 폭풍 속에서 제 갑옷을 잃어버린, 물고기 하나 없는 바다에서 문득 공허한 시선 끝에 걸린, 쇠어버린 색을 한참을 보다가, 그가 무언가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바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퉁겨 나오는 광경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를 볼 것 같았다.
이봐, 언제부터 그 시선은 창끄트머리로 날카롭게 휘어져 왜곡하고 굴절된 시야로 세상을 폄하하고 있었어? 언제부터 낱낱이 갈라지는 거친 머리카락이 세어버릴 정도로 이곳에 있었어? 이봐, 듣고 있는 거야? 남천에서 떨어져 버린 갈매기는 혈혈단신으로 바다로 이어지는 낭떠러지에 웅크리고만 있었다. 그 인상이 어느 구전에 등장하는 반인반어와 같기도 했다. 답을 해주리라는 약속이 되는 것처럼, 제가 폭풍이라도 되는 양 갈라져버리는 머리끝이 흘러넘치는 금안에 담긴다.
밀려오고 또 부딪혀 떠밀려 가는 존재.
다가오고 멀어지고
다가오고 다시 멀어지며 해안의 끝을 지정하는 부표.
넌 시간이 지나서 변하는 것이 좋아? 아니면 쓸려 내려가버리는 것이?
지나가고 남는 것.
사라지고 고이는 것.
흩어지고 붙박는 것…
어디선가 기사가 되기 전의 이름이 불린다. 하류의 하류가 모인 곳. 모든 지류가 아우성 치며 끝내 배출하지 못한 것들이 몰려 만나는 해안. 바다는 이전에도 이런 빛깔로 멎어간 걸까. 무호흡과 동의어나 다름없는 깊고 진한 색채를 띄는 그의 뒷모습처럼. 웅크린 검은 뭉텅이의 형상에 거친 이름과 기사명, 투구를 얻고 숨을 닫은 기사처럼. 하늘은 처음 기사가 되었던 날 같이 변함이 없다. 어린 기사에게 담담히 족쇄를 내어준 묵직한 창공이 아무말 없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구름의 무리는 그에게 많은 비밀을 한번에 털어놓지 않았고, 다만 가끔은 물이 되어 떠나간 수많은 이들을 넋기릴 뿐이다. 이곳은 하늘을 향해 뻗은 녹색 무덤이었다. 물제비하나, 갈매기 한마리 그날따라 날지 않는 죽은 바닷가의 풍경은 죽은 고기만을 가득 실은 어선 같이 해초가 만선이었고.
비석 없는 기사들은 숨죽여 기려졌고, 그의 남지 못한 피부 아래의 살갗에는 이미 화상의 흔적이 있다.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게 헤어지고 나면 그래, 더이상 만날 수 없는 그 가치들을 잘 알고 있다. 해지고 닳아버리는 일회용의 그 운명도 그다지도 안다, 결국 누구보다 이치를 체득한 존재인 기사들은.
항성처럼.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고,
스스로를 분해하고 다시 융합하며,
삶의 용해로가 식을 때까지 무수히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왜소하고 조락한 재가 될 터였다.
아니면 자신처럼 여보란듯이 무언가를 좇아대거나. 고인이 되지 못한 기사들은 이름 없이 사라지더라, 자신이 그들에게 특별하지 못한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러니 저 혼자 살아진다면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명을 축낼 수는 없었다. 귀머거리에 장님인 채로 도태될 수는 없다. 물살이 너무나 거세 상륙을 허락하지 않는 섬, 울돌목은 저 멀리서 늘 인간의 대지를 넘실대는 해일을 막아내기 위해 뭇매를 대신 맞는다. 자신은 물고기 밥처럼 수 없는 파편이 되어 이미 바람에 뿌려졌다. 팔다리 부분에 달린 건 누가 잘못 연결한 장난감의 부속이었는데도, 기록은 여전히 가장 가지고 싶은 것 중의 하나였다. 죽음에 이른 생명은 평생 중에 가장 외로움에 몸부림 치면서도 말로의 자유를 누린다. 희망에 뒤틀릴 때보다도 죽음에 어떤 지연도 욕심도 없을 때 더 소중한 것을 찾게 된다. 원래부터 이러한 사경에 처해야 남들의 일상과 비슷한 정도의 행복을 감지하는 기사는 살갗의 통각이 무뎌 살을 찢어놓는 소금기도 그만큼 거친 바람도 시원하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물거품이라는 소멸을 거친 인어는 바다로 돌아갔을까?
언젠가 그들 역시 떠나버릴 이곳. 그침 없는 바다는 여전히 밀려올 듯 먼 해안선을 그리고 멈추고
다시 후퇴하고 멈추고 한순간 해일로 불어닥치다가 그치고...
녹수정들이 달그락거리며 어느 날 닳은 조각이 바다 바닥에서 빛을 반사해 가라앉아 모래알로 남았기에, 와론은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 너에겐 다가오는 파도 하나하나가 이유 있는 그림일지도. 어쩌면 이런 힘을 포기해버리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그리할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제 욕심이 보잘 것 없어 뇌뢰의 잔울음 같이 어깨를 떨었다.
어쩌면 그는 조만간 와론을 부를지도 모른다. 행복이니 질서니 하는 평화와 이미 오래전 근본적으로 동떨어져 더이상 그는 육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빠질 것 같은 녹주석의 바다. 그것은 들어온 바대로 푸르른 빛 따위가 아니었다. 생명을 품고 있는, 산소를 공급하고 혈류를 공급하는 자연의 자애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이 속에 있다는 걸 알리는 구호를 보낼지도 몰랐다. 문턱을 발로 문지르는 중에야 겨우 깨달은 감정이기 때문이며 이미 희미해져가는 기력으로는 무언가를 남기기에도 늦은 건지 모르지만.
그저 지금까지의 잔류가 어딘가에 싹을 틔우고 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또 조화를 이루기 바랄 뿐이다. 풀지 못한 문제의 해(解)를 말년에 얻고 조용한 기쁨으로 죽어가는 이들에게 말없는 기원을 속삭이는 것은 먼 별에 살던 수학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대부분은 G 없는 R과 B의 세상에 살고 있을 테니까.
해안의 경사를 따라 결국 만나게 된 바다의 존재는 절망을 마주하는 일이 끝난 걸까. 어두움마저 아름다울 수 있는 걸.
길들일 수 없는 것은 살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는 끝내 인정하지 않겠지만.
검은 먼지들이 사방으로 휘날려간다. 발 아래에서 녹색 뱀 같은 물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간다. 빛이 간섭하지 않는 물은 저 먼바다였고 뭍이 드러난 해변가에는 어떤 간교한 물보라라 할 지라도 쓸어내린 퇴적을 남긴다. 먼곳으로 흐르는 조수는 만 바깥에서 해류와 만나 소용돌이를 이루며 바닷속을 굽이치고, 깊은 수중의 발악이 우레와 같이 전해져오자 만 전체가 크게 진동한다.
포말. 화석화된 별의 포말. 포말하우트.
그것은 남물고기 자리의 알파성의 이름이다. 물고기 입이라는 뜻을 가진 그 이름의 별은 이편에선 별13개가 함께 자리를 이루었으나 동쪽에서는 혼자서 하나의 자리를 이루는 젊고 밝은 별이다. 푸른 눈은, 악마들의 눈이래. 회색 눈과 흰 포말로 얼버무린 지금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날에도 변함없이 바다를 닮은 눈이었겠지. 물고기자리에 걸린 가장 높은 성운이 떨어져 숨어버린 심연이 저 어디쯤이겠지. 방파제를 치고 퍼진 물보라가 하늘의 유리창을 와이퍼질 하며 맑게 닦았다. 문득 창문이 열린 듯 조그마한 사파이어 같은 푸른 틈새가 하늘에 드러났다가 오래지 않아 닫혀버린다.
모든 걸 처리해주는 바다. 삼키는 바다. 타르타로스가 있다면 눈 앞의 거대한 연해의 바닥일 것이다. 마치 운명은 제가 원하는 강한 방향이 있어 그걸을 질타하려는 것처럼, 개인을 묵살해서라도 휘말리기를 원하고 와론이라는 인간의 의지는 전능한 자연이라는 폭풍 속에 저도 모르게 꺾이고 굽히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그것은 사실 녹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치고 있었다. 세차게 파도가 뒤섞여내는 심해와 표층의 물보라가 공포스레 출렁이다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바다는 물고기와 빛을 그 어두운 구강 속으로 빨아들여 품었지만 녹색만은 그러지 못한다.
피의 보색인 그것만큼은. 다가오고 또 멀어지는
다가오고 또 멀어지는 그것만은....
바다가 무엇을 가두려 하며 그토록 가차없이 몰아치고 있는지 안다. 회빛의 바다를 닮은 눈은 또다시 자연을 갈망한다. 회변해버린 별자리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지 오래다. 수평을 넘어 어둠이 차차 상승한다. 이 세계의 단면과도 같은 바다는 광포하고 흉악하고 멎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천 번씩 밀려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파도가 수만, 수억 번 파도에 부딪혀 모래가 된 파편들을 안개 낀 만의 물더미 속으로 가린다고 해도.
바람이 머리를 뜯는 소리는 리라나 하프보다 과한 음을 내었고 물은 해변을 덮쳐 올 것처럼 녹색의 숲을 흔든다. 쏴아- 바다 자체에서 넘치는 숲내와 알싸한 바람에 그는 손에 들던 수정을 자르르 놓친다. 동공이 크게 확장 되었다. 녹주광의 늪 속에서 이목구비의 형태가 뭉겨간다. 그는 구멍 뚫린 초록 잡숲의 해골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바다를 헤맨다. 간신이 보이는 손목의 삼각형의 편평한 받침이 뼈처럼 무채해지며 색채를 잃어간다. 사실 많은 것들은 이미 잃어버린 뒤였다. 그렇게까지 수없이 밀려왔다가 지나간 거취에도 남겨진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 묵직한 진녹의 자갈들이 바닷속에서 빛을 흘리는 우울한 풍랑 가운데 맑은 담청색 돌 하나라도 던져내려했다. 침몰하는 모든 것을 같은 빛으로 장례지낸다 하여도.
그는 이미 오래전 바다에 도착했다.
이제야 이 해안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얼마전에 수도에서 있었던 불행한 임무들 탓에 모두 질려버려서인지도 모른다. 그 임무를 끝내고 마침내 그는 곁에 무엇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기사가 싫다고 했었지. 그리고 자신을 혐오하는 이들을 이해하는 너의 그 말들.
죽음 이후의 삶을 기대하지는 않나, 와론?
혈혈단신의 기사에게 쥐어짜듯 던진 물음 한마디였다.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존재라면 그저 창연히 이 거리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것이지. 살아있지 않은 듯한 죽은 이들의 표정을 한 그를. 그를 알아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추측은 여전히 뻗어나갔다. 그의 공인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한 투구를 벗겨낼 때까지. 좋고 싫음의 선이 아니라 절대 '안된다'인 규칙이라도 파악하려 했다. 그들이 머무는 이 해안선과 같이 나무의 말단, 나뭇잎 끝의 톱니와 비슷한 모양을 띈 안개나 사라지는 행성의 고리였다. 녹주석 사이로 불시착한 오명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 해안까지 왔지? 그저 강물이 잡아끄는 대로 먹이사슬을 찾아 떠밀려 오는 건가? 아니면 죽어가는 바다로부터 올라와 해안을 향해 다가가고 있나?
어떤 벌보다도 무거운 하늘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데, 잡을 것 하나 없이 헤는 손이 정처 없는 허공을 뒤집어 열어보다가 의탁한 아득한 옛이야기에는 믿을 것이 하나 없었다. 하늘은 다시 무거워지고 말을 건네는 듯 사방은 반복 속에 갇힌지 오래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지 않도록 날개 같은 잔상을 뒤쫒고 싶어. 요동치는 수면에 비추던 새의 그림자를, 반사를. 언젠가는 그 물살을 흐트러트리는 것이 그가 되리라. 그들이 되리라. 그리고 그 작은 소요가, 지진이, 해일이 되어서
다시 이 곳을 덮여온다면…
검은 자락이 바닥을 끄는 광경이 쭉 그의 시선을 걸고 넘어진다. 갈가리 찢긴 끝자락이 그는 이곳에 속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당당한 증표였음에도. 어느샌가,
얼마나 오래 이곳에 머물러 온 거야?
수만의 물음이 입밖으로 흐른다. 그러나 무엇도 매개를 타고 전해질 수는 없었다. 대체 너를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거야? 언제까지 그 한마디에서 너를 잡아내는 일을 계속 해야 해? 그 수많은 단서들이 가리켜낸, 결국 네가 이따금씩 자초하여 비치는 속내를 언제까지 눈 감아야 하는 거야? 그는 다만 시선으로, 그것도 떠보듯이 물었고. 언제나 모르는 척 연기가 돌아왔다.
더 깊이 몸을 담구자 분명히도 얼음 같이 차가운 해수 속에서 해안과 같은 빛의 녹색 바닥이 살아있는 듯 어른거렸다. 수면의 굴절로 오른 팔뚝의 아래부분이 월계수 잎 같이 소리 없이 바다로부터 풀려나 사라져 버린다. 폐쇄되고 무거운 창공을 받치고 넘실거리는 거대한 녹주석의 숲. 다리 사이로 차디찬 해류가 흘러가고 거센 해풍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증스런 폭풍. 그가 그것을 알리라 하는 그 시점부터 그들은 어느 수정보다도 덧없게 깨져버릴 비결정의 관계였으나
지우스는 이 해일을 뒤집어쓰기로 한다.
티타늄 빛의 일렁이는 몸체가 그의 눈과 오감을 흔든다.
와론, 어쩐지 나는 어느 기나긴 낮밤이 가도록 오래 너를 기다려온 것 같다.
네가 멎기를 기다려왔고, 이 해안에 상륙해오기를, 나를 만나러 오기를...
비청대는 우내, 시체같이 창백한 이는 순간 눈보라가 휘날리는 광경을 본다. 바다가 거칠게 들썩거리며 위아래를 뒤집고 뒤섞는 연안이 포말을 잔뜩 일으킨다. 우레 구름들 사이에서 빗방울이 분사하여 먼지처럼 흩어진다. 뺨에 닿는 빗방울들이 하나같이 축축하고 소금이 묻었고 백색의 포말들이 그를 덮칠듯 지척까지 밀려들며 사람의 형태를 드러낸다. 흰 물보라 속에서 인영이 나타난다.
다가오고 멀어지고 다가오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별은 적색과 푸른 색의 중간 같아서,
헛웃음을 지었다. 별은 끊임없이 낙하하는 비명으로 모든 적요를 으스러트린다. 물보라가 일어나는 것처럼 무채색인 기사가 수채에 번지듯 계속 다가온다. 흰색 머리칼이 그의 위로 기울며 쏟아졌다. 더는 가까이 다가올 수 없는 거리가 되었을 때즈음, 마치 자연에 속한 존재가, 생명이 아닌 것처럼 회색의 뿌리같은 그가 서 있었다.
와론,
결국 그렇기 때문에 지우스는 이 구원 없는 기사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밀려와 머무르는, 그와 하나인 것이나 다름없는 해안에 대해. 겨눈 창끝에 담긴 시선으로 펼치는 무한하고도 범람하는 세계에 대해,
도저히 인간같지 않은 그의 일면에서 더없이 아늑한 사람다움을 주는 살 끝과 그에 맺힌 체온에 대해...
가열히 산소를 섞으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치는 바다는 서로에게 간섭을 일으키며 침전하고 붕괴해간다.
그들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기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목숨은 언제든지 가열했다가 기화해버릴 수 있다.
진해되는 걸 좋아하는 인간은 없겠지.
쿵ㅡ
녹색의 수정이 창날 처럼 심장을 겨눈다. 바다에 내리는 눈이 온전한 형체를 만들며 숲을 닮은 바다와 파도 같은 흰 머리를 섞어 넘실댄다. 코가 스칠 듯 가깝게 다가온 거리에서 지우스는 그의 노란, 인간답지 않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이 마찰하는 찰나 주계열의 어느 항성 같은 눈빛이 콧대 위로 내려앉자 그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았다.
어둠이 한순간 밀려와 그들을 덮어버렸다.
칠흑 같은,
점 하나만큼의 불빛도 없는, 정말 칠흑 같은 삶 속에서
구름은 악천후에 젖어서 모습을 보이지 않지. 낯익은 해안선을 거느리는 암초들은 물 속에 잠겨 수평선에는 아무 형태도 없고 파도와 바람이 울리는 건 오직 적요, 적요뿐이지.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는 물과 바람이 혼돈하고 부딪혀 잔물들이 튀어오르는 듯 하지만
허공에 실존하는 것은 무엇도 없어. 공허가 만들어낸 허음일 뿐이야.
그 끝없이 오고 가는 조수 속에서 가나다랗게, 너무 미미해서 기능을 잃은 망막의 속임수가 아닌가 싶지만 눈을 집중하다 보면 흑암으로 갈려버린 천지 사이에 일별되는 실제가 분명히 드러나. 자세히 보이지 않아도 희뿌옇게 떠다니는 가루들이 엹은 노랑으로 빛이 나.
그건 희망이라고 불려.
오래 전 땅과 바다를 갈라버리고 뭍을 우리에게서 떼어버렸을 때 유일하게 남기고 간 낮이라고.
그들이 남겨두고 간 대륙 끄트머리 봉우리에서 보내오는 그리움의 징조라고.
물 위를 미끄러지듯 천천히 탁한 습기들을 가르며 나아가면
어느새 그것도 우리에게로 손을 뻗어, 마치 유리의 반사처럼,
믿을 수 없이 가까워져 손 안에 담긴다고.
우리는 그것을…
…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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