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초겨울과 감기와 코데인

거미힌셔 힌셔와론

231115

*애늙은이 스포有

거미는 어슴푸레한 보랏빛으로 여명이 시작되기 전에 침대에서 눈을 떴다. 팔다리를 뻗은 채로 뒤척이자 몸을 감싼 이불의 촉감이 느껴진다. 차갑게 식은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자는 동안 해안가에 밀려온 파도처럼 생긴 주름을 적당히 이불의 양끝을 들고 펼쳐내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밤새 체온을 머금은 침구에는 미지근하게 온기가 남아있다. 거미는 아무 불도 켜지 않아 분간이 잘 가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입고 자던 반팔 위로 침대 옆에 걸어둔 선명한 빨간색의 훈련복을 찾아 꿰어 입고는 신축성 있는 질긴 옷으로 몸통과 어깨를 감싸고 보기보다 얇고 가벼운 촉감으로 허리에서 떨어지는 부분을 정리한다. 적막한 거실을 지나고 윗층에로 이어지는 층계를 오르며 자그맣게 그날의 첫 소음을 만든다. 푸른 금속으로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는 창문을 단번에 밀어올리자 덜컥 거리며 바깥의 신선한 대기가 실내의 묵은 냄새를 날려보냈다. 거미는 어깨를 잡고 팔을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평생 움직이며 열을 내는데 익숙해진 몸은 더는 굳지도 않는지 언젠가부터는 두둑대며 관절이 어긋나는 소리도 잘 나지 않게 되었다. 몇 시간 동안 자고 난 뒤여도 매한가지다. 마치 기름칠을 오래한 나머지 자체가 기름을 먹은 기계나 다름 없다. 보통 그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간단하게 몸을 풀거나 명상 등 기공훈련을 하는데 무엇을 할 지는 그때 그때 상태에 따라 정하곤 한다. 이전처럼 큰 임무를 맡아 수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드물었어도 그저 몸에 배인 무의식적인 일과였으므로 주에 한 두 번 몸이 근질 거릴 때 즈음에는 저도 모르게 눈을 떠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미는 창을 등지고 단단한 회색 바닥 위에 단정히 앉아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손바닥이 위를 보도록 무릎 위에 올렸다. 감은 눈 위로 옅고 멋대로 뻗친 빨강머리가 덮어 그의 이마를 따라 흘러내린다. 미동 없이 앉은 모습에서 깊이 호흡하는 소리만 뻗어나오도록 의식을 집중한다. 들숨, 누구 하나 검을 맞대줄 사람도, 그의 동세나 힘의 조절에 대해 조언해줄 사람도 없는 것은 어릴 적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인 사실이나 그래도 새벽에 하는 수련은 애초부터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 기꺼운 것도 있다. 날숨. 단전에서 시작된 활력이 전신에 돌기를 기다린다. 몇 번을 반복하던 그는 일어나 창을 집어든다. 오늘따라 창의 차가운 손잡이를 잡을 때부터 저릿한 느낌이 드는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어제 그렇게 피곤했던가, 움직인 반경은 건물에서 제자의 수련을 봐주고 요 앞 시내에 장을 보러 다녀오며 시장을 한바퀴 돈 게 전부였다.

드물게 잡생각이 드는 군. 거미는 검고 얇은 장갑 위로 창을 역수로 쥐고 뽑아낸다. 창을 다루는 일은 그에게 실행한다는 과정이 생략되어 머리에서 바로 나오는 동작이라, 한번 손에 쥐고 나면 머리와 동시에 움직이는 제 2의 본능이다 . 창 끝이 공중을 날카롭게 가르고 발을 딛으며 정면을 겨눈다. 몸을 가볍게 움직이며 허리를 이용해 내지르는 창날은 마룻바닥과 평행하게 회전하고 일종의 게임과도 같이 끊이지 않는 연쇄를 만들어낸다. 서늘했던 피가 돌며 체온이 오르는게 느껴진다. 적당히 땀을 흘린 팔 끝으로 점점 창의 무게가 사라지고 반동으로 일어난 바람이 바닥에서 먼지를 피워올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그도 사람인지라 아침 수련을 하고 나면 배가 고파왔다. 다시 아래의 생활공간에 내려가보면 어느새 날은 무대 장치가 뒤바뀌듯 환하게 밝아 아까와는 딴판이다. 오전에 힌셔를 데리고 교외로 나가서 훈련을 할 생각이라 그 역시 미리 몸을 풀어두려고 일찌감치 몸을 일으킨 것이다. 오른 어깨가 결리는 게 비가 오려나 싶었지만 연노랑의 볕이 드는 거실은 평소보다 조금 어두웠을 뿐이지 당장 비가 내릴 기미는 없다. 석회에 푸른 안료를 섞어 만든 벽의 색이 햇살에 바랜 듯 투명해 먼지가 날아다니는 것까지 눈에 띈다. 소유물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보편적인 가구들로 적당히 채운 거실은 한켠에 쌓인 책더미만이 이질적이다. 보통 이 시간에 거미보다 조금 늦게 기상해 한 차례 조깅을 끝낸 제자가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땀을 흘리며 들어오고

스승님, 아침 정양에 드셨습니까.

라며 인사를 하는데, 오늘은 그 부분은 빠져있다. 그럴 때마다 저택 전체가 열정이 넘치는 수련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의 활기였다. 거미와는 달리 매일같이 부지런하게 일어나는 힌셔인데 유달리 이상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자라날 나이이니, 더 자게 내버려 둘까. 거미는 식탁에 놓인 물잔 하나를 뒤집어 물병을 기울이고는 벌컥 벌컥 들이켜 수분을 채운다.  사람들은 거미에게 인복은 없는데 희한하게 제자복은 있다며 칭찬인지 아리송한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그의 하나 뿐인 제자, 힌셔가 누구나 탐내는 재능이라는 뜻을 담기도 했지만 순전히 제자라는 입장으로만 본다면, 그의 성실함이란 모든 스승들이 원하는 그것이다. 하여간 아무것도 모른다고, 저 밖의 양반들은. 땡땡이 대신 사고를 치곤 하는 면이나, 혼자 주눅 들거나 의기소침해져 땅을 파고 있는 점까지도 성실을 판단할 때 포함하면 결국 스승의 말을 잘 듣는 제자란 가상의 동물 같은 것이라는 거다. 힌셔는, 니젤의 청소년들을 모아둔 학교에 비유하자면 뒤로 대형사고를 치고 오는 모범생 같은 아이였다. 그런 힌셔를 독려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는 것까지가 스승의 역할이거늘. 그러나 언젠가는 그런 손이 필요 없을 날의 힌셔를 생각하면 거미에게 그를 가르치는 일은 노고라기에는 손에 들린 물잔만큼이나 가벼운 무게다. 하기사 거미가 아닌 이상 누가 힌셔를 감당해 가르치겠느냐만, 그 정도로 한번 의욕을 지피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게 힌셔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정말 그런 때가 온다면 오히려 아쉬워지는 건 이쪽일지도 모른다. 땀을 흘리고 난 뒤라 물에서 단맛이 난다.

평상시 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정신이 든 힌셔는 문득 자신이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물을 먹은 솜 같이 무거운 의식이 그의 육체와 아득히 먼 곳에 있어 늘 그를 재촉하던 기상과 운동의 의지가 실낱같이 희미하다. 푹신한 침구와 시트가 그를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힌셔는 팔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거나 등을 돌려 몸을 뒤집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일어났는데도 아침기온이 조금 떨어졌다고 해서 졸음에 져버리는 몸에 배신감을 느낀다. 두개골이 좌우로 분리되는 감각을 겪으며 어떻게든 졸음을 깨우려고 노력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큰일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똑똑,

“힌셔, 들어간다.”

끼익-. 안에서 대답이 없자 거미는 사람이 없는가 싶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반쯤 의식을 잃은 채로 침대에 누운 힌셔를 발견한다. 혈색이 나쁜 힌셔의 이마에 땀이 송글이 맺혀있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아침부터 유달리 집안 전체가 조용했던 이유를 알아챈다. 어디 아프냐? 이마 위를 가지런히 덮어 오는 커다란 손에 힌셔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은 초겨울의 흐린 하늘처럼 질려서는 이마는 방금 땀을 흘리고 온 사람처럼 열이 끓는다. 초겨울 감기는 기사도 걸린다더니. 거미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수련장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내려왔다. 밤새도록 계곡물에 떠내려가도 감기는 커녕 저체온증도 모른다는 기사가 실제로 독감에 걸릴리는 없으니 그저 비유적인 속담인데, 막상 견습이지만 내로라하는 기사들보다도 더 기사에 가까운 제자가 앓아 누운 것을 보고 거미는 머리를 긁적인다. 감기라, 그는 일곱살 때 이후로는 딱히 앓아 본 기억도, 계절의 덥고 추운 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개념과 연관 지어본 적도 없었다. 무인의 경지에 오른 자신이야 당연히 추위도 더위도 거슬리지 않았지만 힌셔는 자신도 모르게 무리를 하고 있었나. 힌셔가 어제 몇 번 산을 오르내렸다고 골골 감기가 들어버릴 리 없었으니 면역이 떨어진 원인은 하루이틀의 피곤이 아니란 말이다.

“안색이 나쁘구나. 많이 아프냐?”

힌셔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검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거야, 그를 부를 힘은 커녕 제대로 깨어있을 힘도 없어 보인다. 누적 되어온 피로에 내색도 없다가 자리를 보전하고 누운 어린 제자를 보며 거미는 무엇부터 해야 하나 잠시 난처한 채로 서있었다.  

힌셔는 잠결에 따뜻한 불기운이 이불 위를 덮는 것을 느꼈다. 방 한구석에는 누군가 가져다둔 난로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고, 몸을 누르고 있는 이불의 무게는 무거워 그로인해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다.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내려는 데 누군가의 손이 묵직하게 눌러 힌셔를 도로 눕힌다.  

“일어나지 마라. 독감이래.”

스승님의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불가에서 한층 붉어진 옷소매, 그 위로 각지고 하얀 얼굴선과, 연한 머리칼과 음영으로 주름이 도드라진 스승의 눈매가 보인다. 그가 손을 가져가자 이마가 시원해지더니 다시 축축한 물더미가 놓이는 것을 느끼고서야 팔뚝까지 걷어붙인 스승의 소매와 협탁 위의 물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거미는 독서 중이었는지 가름끈이 튀어나온 책 한권이 곁에 함께 놓여있다.

“그동안 별로 쉬지도 않고 그렇게 밀어붙였으니 무리도 아니지.”

“… 오후에는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겠지.”

거미는 평이한 어조로 긍정힌다.

“하지만 며칠은 쉬는 게 좋겠다. 폐렴이 될 수도 있고.”

폐렴이라니, 그건 궂은 날씨에 노출되기 십상이며 기사만큼 단단하지 못한 신체를 가진 일반인이나 여행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인데 힌셔에게 그 병명이 붙는 건 어딘가 부조화스러웠다. 방 안의 공기는 답답할 정도로 따뜻하고 적당히 건조하다. 거미가 고심 끝에 찡그려지는 힌셔의 눈썹 사이를 꾸욱 누른다. 뭐, 농담이겠지. 푹 쉬면 금방 나을거야. 열로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의사가 농담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간에 닿는 검지 손가락 마저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자신이 아픈 건 사실이구나 싶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 건 단순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몇 시지. 바깥의 빛으로 보아 이미 오전은 거의 지나 있다. 폐가 심하게 부은 건 아니라 힌셔 역시 폐렴에는 걸리지 않을 거라는 데 동의했지만 목이 쩍쩍 갈라지는 걸 견딜 수 없다. 힌셔의 반응을 알아차린 거미가 그를 침대에서 뜯어내듯 윗몸을 일으켜 주었다. 물잔을 건네며 어디가 아픈지 물어온다. 힌셔는 열기운에 감각을 더듬으면서 말했고, 어쩐지 그러고 나니 더 증세가 심해지는 듯 싶었다. 거미의 팔에 기대서 물을 마시니 힘 하나 없는 병자가 된 것 같다. 알겠다, 대답을 들은 거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힌셔는 나가려는 그를 붙잡듯이 말했다.

“…스승님, 아무래도 오후에도 못 움직일 것 같습니다.”

약한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속에서 캥겼던 말을 뱉고 보니 그런 어리광이 없다. 제대로 컨디션을 관리하지 않아 몸이 아픈 것은 둘째로 치고도,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침상에 누운 자신에게 뒤늦게 화가 난다. 죽을 정도의 증상은 아니었는데, 고작 독감에 못이겨 수련을 쉬는 것도 그 모습을 스승님에게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도 한심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윗층으로 올라가야 할 성싶었지만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 불가능하다.

거미는 병자 치고는 눈빛이 꽤나 결연한 힌셔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힌셔는 거의 사과하듯이 그렇게 말한다. 장난삼아 누워서 수련하는 법이라도 알려줄까 해도 진심으로 받아 들일 지도 모른다. 누구나 몸이 약할 때는 마음도 덩달아 나약해지는 법인데, 고집스럽게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힌셔는. 쉴 줄 모른다는 점은 어디서 많이 봐온 버릇에 가깝다. 그런 면까지 자신을 닮지는 않아도 되는데.

“그래. 누워있어라.”

거미가 나간 뒤로 달칵, 문이 맞물려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의 근원은 감기도 체력부족도 아닌 쉽게 물러버리는 나약한 마음가짐이다. 머릿속에 비해 이불 밖의 주변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며 누운 채로도 그만이 마구 돌아다니고 있는 듯한 감각에 손발이 떨린다. 속에서부터 몸이 냉각되며 오한이 퍼져나와 힌셔는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 썼다. 아무리 단련해도 무너지는 육신이 한없이 나약하다. 노력으로 헤어날 수 없는 무력함이 버거워 베개에 귀를 대고 막았다. 아무래도 금세 사라질 증상 같지는 않다.

잠시 뒤 거미가 미음을 가지고 들어오고, 힌셔는 건네는 대로 따뜻한 음식을 약간 먹고 물에 타서 분홍색 시럽이 된 약을 마셨다. 으ㅡ 약이라고는 거의 먹어본 적 없는 입에서 나온 건 감탄은 아니다. 남기지 말고. 인상을 찌푸리는 그에게 거미는 마치 소아병동의 간호사처럼 손수 컵의 바닥에 남은 약에 물을 타서 다시 주었고 힌셔는 불평 없이 입가를 닦는다. 방 안의 화력과 습기가 더해 눈 앞이 흐릿하게 번졌지만 수저를 들 힘 정도는 있어 다행이다. 스승님이 미음을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면 그는 완벽한 어린 아이 취급에 고개도 들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폐를 끼치고 있다.

“…실망하셨습니까?”

힌셔는 손 끝으로 이불 자락을 잡으며 물었다. 찬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구겨지는 부분 없이 이불을 끌어올려주던 거미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얘가, 아프더니 정신을 못차리는 군. 열에 들뜬 부정확한 시야로도 그런 표정인가 싶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꼭 한 번씩 아프곤 한다지.”

아이라… 힌셔는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인가 싶으면서도 어딘가 다정한 어감에 고개를 끄덕여 버릴 것 같은 아늑한 충동이 들었다. 늘 이 시간이면 전쟁에 나간 보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천장 너머에 있는 훈련장이나 험한 바위산에서 뒹굴고 있어야 하는데. 혹은 침대 옆에서 그에게 맞지 않을 정도로 등받이 없이 작은 의자에 걸터 앉은 스승과 담소가 아닌 좀더 건설적인 대화가 오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기사, 최초로 여자의 몸으로 기사가 된다는 도전을 하며 그 어려움에는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우선 실력을 기르는 것만을 보며 달려온 힌셔는 이 지경에 처해서야 그 모든 궤적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가를 깨닫는다. 생각을 비운채 수련에만 전념하던 사이에 의욕은 점차 조바심이 되어 몸을 망쳐가는 줄도 몰랐다. 약을 먹은 뒤에도 속은 여전히 울렁거린다. 이마로는 식은땀이 초조하게 촘촘히 맺힌다. 그렇게까지 쏟아부었건만, 정작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달까. 보잘 것 없는 열정과 동기가 감기기운 앞에 패배를 외쳐버린 것이다. 결국 그라는 사람은 어딘가 비어있는 게 아닌가, 방금 식사를 마쳤음에도 공복감이 들어 손 등의 튀어나온 결절로 명치를 문지른다. 그래도 거미만큼은 그런 힌셔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었기에 여태껏 아무도 가르치지 않던 그가 힌셔를 제자로 받아 직접 지도해주었고 그렇게 자신을 북돋아주며 스승을 자처해왔다고 여겼는데, 자신은 그런 스승에게 간병이나 시키고 이런 느슨한 오후나 안겨준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 그 말은 십대 중반의 견습기사에게 붙기엔 지나치게 여린 어감을 지녔다.

“스승님도…인가요,”

“누가 누굴 걱정하냐 힌셔.”

거미는 커다란 손을 들어 힌셔의 눈가를 덮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가의 흉터를 따라 주름이 접힌다.

“누구나 아플 때가 있다는 말이야. 몸을 혹사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냐.”

“…제가 기사가 된다고 뭔가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뜬구름 잡는 대답에도 거미는 힌셔가 뒷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린다. 힌셔는 이불 밖으로 꼼지락 대는 두 손을 보며 주절대듯 털어놓는다. 수련을 하는 건 힘들지만 그에게도 열정이 있고, 싫은 건 아니다, 다만 기사가 되어서 이것들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수도의 기사들을 보다보면 자신이 원하는 바는 그들과는 어딘가 다른 것 같고, 더 나아가서 사실 기사들이 정말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한지 의심이 든다는…

“그래, 네 마음대로 해도 돼. 나중에 기사가 되기 싫다고 해도 말리지 않으마.”

“네? 그건 아니고…”

힌셔는 자신이 꺼내는 말에 확신이 들지 않아 끝을 흐린다. 그런가? 그래도 이제까지 기사가 된다는 목표가 즐거워 지옥 같은 수련도 견뎌 낸거라 생각했는데, 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문득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다.

“…정말입니까?”

“진심인데.”

못 믿겠다는 듯 의심스러워하는 힌셔를 보며 거미가 덧붙이듯이, 그럼에도 어딘가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힌셔, 네가 배우는 것들을 굳이 남들에게 설명하려 하지마.”

“…네.”

“좋아. 이제 쉬어라.”

평소보다 더 크고 각지게 다가오는 어두운 회색의 눈은 검은 눈을 마주하고, 평소보다도 더 그를 들여다보듯 해 초점이 홍채의 자잘한 결을 따라 또렷한 동공으로 쏠린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뭐더라, 힌셔는 조금만 집중한다면 글을 읽어내듯이 그 단어를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약기운에 따라온 졸음이 발끝서부터 나른하게 그를 잡아당긴다. 본래의 밝은 무색에서 희미한 불광으로 깊어지고 온난해진 천장과도 비슷한 홍채가, 힌셔의 것보다 훨씬 옅음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에는 단단한 인상을 준다. 이마에 부드러운 물수건을 얹어낸 시선은 가볍게 떨어지고, 거미는 빈 그릇을 가지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누운 방의 천장이 난데없이 가까웠다가 멀어지며 사방의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 천장의 옅은 분홍빛, 피어오른 땀과 열로 수련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신체와 그걸 부정하듯 밀려오는 두통, 약간은 후덥지근한 방 안의 공기과 상반되게 차가운 감각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으나, 수문을 억지로 열어젖히듯 긴장이 흩어져 버렸다.

나이야 차고도 넘치지만 결혼을 해본 적도, 자식을 가져본 적도 없는 거미는 아이를 돌본 경험이라고는 전무했으므로 힌셔를 수도로 데려올 때 어느 정도의 결심이 필요했다. 변변하게 아픈 이를 간호하는 법은 늘 쓰는 손의 반댓편에서 손 끝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펜대 마냥 낯선 일이다. 끙끙대는 힌셔를 발견한 직후 그는 아무 메뉴얼도 없는 직무를 수행하듯 떠오르는 갖가지 대책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고 약간은 허둥대다가, 제일 먼저 열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간신히 떠올렸다. 답답하게 몸을 내리 누르는 이불을 젖히고, 미지근한 물과 얇은 수건을 가져와 물을 적신 수건으로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힌셔는 악몽을 꾸는 사람 처럼 앓았고 거미는 안심하지 못한 걸음으로 재빨리 의사를 불러오기 위해 벗어두었던 수련복을 걸치고 밝아진 밖으로 나선다. 그는 생각보다 침착했지만, 생각보다는 다소 정신이 없었다. 집 앞의 도로를 밟고 지붕 위로 뛰어오르자 역풍이 앞머리를 까 이마가 드러난다. 기사치고는 성급하지 않게 이동한 편이었으나 그의 표정까지 그랬는지까지는 알 겨를이 없다.  

의원은 힌셔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하아- 의사란 이런 식이구만. 기사와 일반인의 신체는 그 기량이 절대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환자란 모두 동등한 환자일 뿐이고 누구에게나 병은 찾아올 수 있었다. 거미는 다소 눈썹을 뒤틀고 그의 처방을 지켜보았다. 심통이 나거나 아니꼬워서가 아니라 그저 귀로는 힌셔의 처방을 들으면서 머리로는 언제 수련이 체력의 한계점을 넘겼는지 찾아내느라 그렇다. 곧은 성격이 지옥같은 훈련들을 버텨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으나, 같은 이유로 자기 몸 상태도 모를 정도로 단순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뿐이다. 처음 듣는 주의사항들은 듣는 순간 외워 같은 설명을 두 번이나 청하지는 않았다. 찬바람을 쇠지 않게 주의하시고 오늘은 증세가 나쁠테니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상태를 보러오겠습니다, 의사는 과립형의 감기약을 두고 문간을 나선다.

시간을 분간할 수 없지만 늦은 오후가 분명한 시각 방문이 달칵 열리고 스승이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안으로 들어온다. 부드럽게 양탄자를 스치며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는 진동이 느껴진다. 한차례 낮잠을 자고 나니 힌셔는 얼굴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이 떨리듯이 깨어났다. 의사가 그를 진찰 하는 것 같았으나 둘러본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방문 밖의 복도에서 거미와 의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문간으로 걸어간다. 당부하는 의사의 말에 대꾸하는 스승의 낮은 대답은 눈썹 사이가 좁아지고 콧대를 모로 기울여 눈가에 드리우는 그늘까지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낮고 단조롭게 웅웅 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힌셔는 어떤 위화감을 잡아냈다. 그는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열에 들뜬 사고를 이겨내고 대화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일도 차도가 없다면 의원으로 찾아오시구려-

알겠소ㅡ

힌셔는 스승의 그 딱딱한 말투를 평소와 같이 정정해주려다가 문득 깨닫는다. 스승의 대답에 평소와 달리 배어든 위화감은 걱정이라는 감정이다. 손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더위와 추위를 동시에 체험하며 앓아누운 제자로 인한 걱정이 서려있었다. 자신은 스승의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 걸까. 미열로 눈가가 달아오른다.

화로 안의 불꽃이 화를 내듯이 표면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간간히 밖으로 잔여물을 탁탁 튀긴다.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차츰 밝아질 때 즈음, 뜨거운 열 때문에 난로와 다를 바 없던 이마도 짚어본 손만큼이나 온도가 내렸다. 거미는 조용히 도로 의자에 앉는다. 1초.. 2초.. 고심 겨운 감상이 입은 옷과 같이 자신을 감싸고 있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가늘게 코 끝으로 호흡만 뱉어내는 제자를 보았다. 이마에 걸린 식은땀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자신이 아팠던 기억은 거미로서는 별로 선명한 것은 아니었다. 정작 꼭대기에 오르고 나서 까마득한 정경을 보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느낀 아득함이 더 강렬했다. 발 밑에 놓인 외탑 이후로는 가야 할 방향을 잃어 발판 없이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고작 십대 중반. 어딘가가 참아왔던 분을 터트리는 모양새로 앓는 힌셔를 보니 스승으로서는 영 속이 꼬여온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치열하게 싸워왔을 속이 내비치는 듯해서.

“참 애나 어른이나….”

에에취! 힌셔의 열이 내리고 긴장이 풀렸던 것인지 난데 없는 재채기가 나와 코를 훌쩍인다. 그러고 보니 손발 끝이 시린 것 같기도 하다. 그 무너진 균형감마저도 그 날의 이상함 중의 하나였다. 무인의 경지가 어쩌고 하더니, 어느새 다음날 비 소식만 있어도 무릎이 뻐근한 나이의 그가 할 말은 아니었나 보다.

“뭐야?”

힌셔는 그 신경질적인 외침을 듣고서 낯선 인물이 거리나 성 안에서 종종 마주치는 새까만 닭임을 알았다. 물가에서 막 세수를 한 것인지 젖은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임무를 막 마쳤던 것인지 지치고, 피곤한 안색. 그리고 눈가에 묘하게 분홍빛이 돌았다. 기분이 나쁜 듯 잔뜩 찌푸린 그의 샛노란 안광이 힌셔를 향하더니,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와론이 손에 들고 있던 투구를 풀 숲으로 떨어트렸다. 힌셔는 그제서야 이 호숫가가 둘이 우연히 마주치기는 했지만 인적이 거의 없는 곳으로 그가 구태여 이곳을 골랐으며, 그만큼 사람에게 얼굴을 드러내길 꺼려하는 그의 기분을 지금 상하게 하는 건 자신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처 고개를 한켠으로 돌렸다. 철퍼덕, 물소리에 힌셔가 다시 호수변을 보았을 때 와론은 정신을 잃고 물 속에 처박혀 있었다.

납작한 평면같은 사방. 불 냄새와 곡물을 걸쭉하게 끓여 고소한 향이 풍겼다. 와론은 무의식 중에 눈을 뜨려다가 머리 위에 쓴 투구가 없는 것을 알아챈다. 손으로 얼굴 부근을 급히 더듬자 바락거리며 몸 위로 덮여있던 천이 젖혀지고 흰 손 끝에 피부가 고스란히 닿았다. 와론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여기로 데려왔나? 왜 의식을 잃었지?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붕 떠있다. 손 틈으로 보이는 개인의 침실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지만 달그락 거리는 소음과 함께 방 앞의 긴 복도를 지나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투구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와론이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귀에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음이 들렸다.

“… 정신을 차렸나. 새까만 닭? 그런데 뭘 하는 거지.”

“하마냐….”

와론은 급한 대로 이불을 쥐고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차판 위에 담아온 그릇이나 약병 따위를 탁자에 늘어놓던 힌셔는 이불 밑으로 검은 발이 빠져나오더니, 이불채로 일어서려던 몸이 휘청이며 앞으로 넘어지려는 걸 붙잡았다. 내딛는 발이 바닥과의 단차를 파악하지 못해 한 쪽으로 기울어지자 와론도 제 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단단한 악력이 어깨를 감싸며 넘어지지 않도록 그를 부축했다. 그러고 보니 망토도 갑옷도 없었고 허리와 바지를 같이 묶은 천도 느슨하다. 오지랖도 넓군- 비꼬려던 와론은 성대가 까끌하게 긁혀 입을 다문다. 아무래도 감기기운이 있는 듯 했다.

“…비켜.”

“지금 나가면 또 쓰러진다.”

“오지랖이다.”

“네가 날 이길 수 있다면 보내주지. 하지만 지금은 어려울 것 같군.”

“멋대로 투구나 벗기고…”

한겹의 이불 밑에서 웅얼대는 와론의 목소리는 퍽 가라 앉았다. 평소에 쉽사리 보이던 짜증을 낼 기력조차 없고, 상대가 하마란걸 알자 맥이 빠져 살기가 들지도 않는다. 그저 와론은 하마도, 누구의 신세도 질 생각이 없어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건 신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치는 일이라고 헛된 망상마저 맴돈다.

“투구를 벗긴 건 내가 아니라 자네일세. 만났을 때부터 안 쓰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가?”

힌셔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 와론을 내려다보며 얌전해진 그를 달래듯이 말한다.

“자네가 내 앞에서 쓰러져서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내 집으로 데려왔네. 오는 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는 않았다네. 알았으면 얌전히 누워있게.”

“비키라고 하잖아,”

와론은 이불 밖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향해 팔을 억세게 쳐냈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벽에 무언가 부딪혀 깨졌다. 이불 안에 시선을 고정하던 와론도 그에게 얻어맞은 힌셔도 동작을 멈췄다. 이불에 움직임이 없자 힌셔는 천천히 와론을 덮고 있는 천을 한 손으로 잡고 끌어내렸다. 잿빛의 동그란 정수리가 드러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도망가는 걸 포기한 와론이 눈을 감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어지러움으로 인해 힘이 빠진 상체가 순순히 힌셔가 미는 대로 도로 침대에 눕는다. 힌셔는 머리를 베개맡에 대주고, 검은 옷 위로 다시 두꺼운 이불을 덮었다.

“감기라도 발전하면 폐렴이 된다네.”

“뭐래… 기사는 폐렴 안 걸려.”

“기사도 폐렴에 걸린다네.”

힌셔는 마치 폐렴에 걸린 기사를 두 눈으로 본 적이 있는 노련한 장병 같은 목소리로 확신한다.

“난 안 걸려.”

와론은 눈을 감은 채로 흘끗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거칠고 뜨거운 호흡이 섞여 말끝이 흐트러진다. 이미 스스로 얼굴을 까발린 마당에 더 드러낼 것이 있겠느냐만은, 맨 눈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 그는 옆으로 돌아 누웠다. 그러면서 슬쩍 론누를 불러 시야를 그리로 바꿔본다. 같은 공간의 석조 벽에 세워진 론누가 다각으로 자신과 힌셔의 뒷모습을 비춘다. 한때 신전 중앙의 벽에 그려진 템페라 벽화에 불과했던 힌셔는 그의 앞에서 살아 움직인다. 반파된 벽 아래로 가루가 되다시피한 파편을 쓸어내고, 침댓가를 분주히 오가며 벽난로의 장작을 지피고 물을 끓였다.

힌셔는 호수 속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진 새까만 닭을 급히 일으켜 안았다. 물 속에 가닥가닥 퍼졌던 잿빛의 머리카락이 물을 뚝뚝 흘리며 달라붙은 새까만 닭의 얼굴은 그답지 않게 곱상했다. 그의 몸이 열로 펄펄 끓고 있음을 알아차린 힌셔는 후드를 씌우고 부랴부랴 와론을 들쳐맨다. 닭의 거처를 알았다면 그리로 갔겠지만 그 정도로 교류가 깊은 사이는 아니었으므로-여태까지의 들어온 얘기로 볼 때 힌셔가 아니더라도 그의 거처를 아는 기사가 있기나 한가 싶었지만-힌셔는 우선 자신의 집으로 그를 데려왔다.

불편하게 목을 조르고 있는 망토를 풀고 지나치게 무거운 완갑과 장화도 벗겨냈다. 무장은 기사에게 외피와도 같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의사... 의사를 부르려던 힌셔는 고개를 돌려 무명의 베갯잇 위로 머리를 하얗게 흐트러뜨린 채 가쁜 숨을 내쉬는 머리통을 쳐다본다. 일반적으로 병치레를 할 때는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게 힌셔로서는 상식이지만, 와론은 제 3자에게 보여지는 것이 곤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는 지금 힌셔의 호의도 선의도 무엇 하나 거절할 수 없는 상태고, 더 정확히 하자면 제 손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힌셔가 의사를 부른다고 해서 딱히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해보였다. 힌셔는 의원을 찾아 황궁 사람들이 그에게 건네 준 지도를 서랍에서 막 꺼내들다가 결국 동작을 멈추고 도로 집어 넣었다. 아픈 사람, 그에겐 별다른 외상이 없었으니 단순히 컨디션 난조로 인한 독감 같은데, 그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어더라. 그는 어렴풋한 처치법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데려온 이상 직접 그를 돌보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뜻하지 않게 그가 기절하는 순간을 목격한 자에게 주어진 책임이기도 했다.

와론은 몸 속에서 열이 난동을 피우는지 의식을 차리고도 끙끙대며 앓았다. 힌셔가 마주했던 새까만 닭, 와론이라는 자는 수수께끼 같은 검은 무장과 투기를 온 몸을 감고 있어도 예민하게 곤두선 것과는 거리가 먼, 좀 더 호쾌하고 농담도 즐기는 자였다. 아마 약해진 몸이 반사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웠거나, 투구 밑의 모습을 보인 것이 싫었거나 둘 다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투구 밑의 맨 얼굴과 더불어 이 자의 본래의 성격일지도 모르지만 힌셔는 근거라고는 자신의 주관뿐인 세번째 가정은 생각의 깊숙한 곳에 접어둔다.

여긴 아마 하마의 거처겠지. 그렇다면 밖은 수도 한복판일 것이다. 더위로 감각이 예민해졌음에도 시가지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다른 외곽지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소리마저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상태가 최악인지도 모른다. 와론은 내내 눈을 감고 론누로 주변을 살핀다. 두터운 이불 사이에 낑겨서 느끼는 온도, 기감과 함께 널뛰는 사방의 공간감, 사지가 분절된 듯한 피곤... 오감이 무엇하나 제대로 작동하는게 없었다. 초겨울 감기는 견습도 안 걸린다는데. 독감으로 죽은 최초의 기사가 될 수도 있을 것처럼 아팠다. 이대로 죽으면 정말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근거로 하마를 믿고 이곳에 뻗어있는 건지 스스로가 보기에도 위태하고, 그로서는 드물게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풍금 같은 기침 소리를 내면 입가에 세라믹의 촉감이 물려오고 따뜻하게 데운 물이 목으로 넘어온다.

“누군가를 들이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네. 여긴 내 집일세. 전에 지내던 곳과 비슷하게 만들어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어렵더군.”

내가 살던 방이었는데도 말이야. 힌셔는 손수 초대한 손님에게 설명을 해주듯 조근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와론은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다.

“왜 도와주는 거냐, 하마.”

“….”

“내 소문을 못 들은 건 아니겠지? 깨어난 뒤엔 내쫓아도 되잖아.”

책망하는 목소리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하마의 실책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투구 밑을 본 이는 누구도 살려두지 않아. 차라리 밖에서 얼어죽게 두는 편이…”

“자네 추운가?”

하마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뜬금없이 말했다. 너로서는 덜 번거로울 거라고, 말하려던 몸이 어디선가 스며드는 냉기로 덜덜 떨고 있다. 질 좋은 벽돌과 쇄석으로 마감을 한 벽에서 새어나는 게 아닌 건 분명하다. 그는 병세가 나으면 하마를 사냥하러 다시 올 생각이었다. 와론은 목소리에 묻어나는 떨림마저 삼켜내듯 말한다.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불 안으로 들어와 차가운 손을 만져본 힌셔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로 이불을 끌어 올렸다. 와론에겐 그 천의 무게마저 버겁게 느껴져 인상을 찌푸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신이, 당신이 먼저 데려왔으니까 책임은 당신이 져… 난 분명 말렸으니까.”

“걱정마라. 믿으라 해도 안 믿을 테지만, 날 믿어도 된다.

왜 아플 때는 애나 어른이나 거짓말만 하는지 모르겠군.”

힌셔는 그렇게 말하며 수저로 젓던 것을 멈추고 와론에게 시럽으로 변한 액체를 떠먹인다. 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투박하게 들이미는 수저에 와론은 얌전히 약을 받아 삼키는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단 맛이 나는 데도 이상하니 메스꺼워 맛이 없는 감기약.

우웩. 와론은 속이 뒤집어져 소리없이 기함을 한다. 이렇게 아플 정도로 큰 죄라도 지었나. 맛없는 약마저 그에게 내려지는 처벌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피식, 와론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래, 그랬을지도 모른다. 새까만 닭에게 부탁 받은 유언을 무시한 채 제 멋대로 기사를 죽이지 않았나. 평생 그의 손발, 그리고 어느 구세주가 말하듯이 마음이 합심하여 저지른 끔찍한 죄를 무시하고 불편한 가시를 삼킨 채 이곳저곳을 떠도느니, 차라리 이렇게 대가를 치르는 편이 나았다.

정당한 살인이라는 기묘한 범행. 메스꺼움. 이리저리 피가 튀어 더러워진 완갑. 이번에도 그는 기사 하나를 사냥하고 돌아왔다. 손 끝으로 피부를 긁어내듯이 옷에 피를 닦았다. 더러워진 기분은 단순히 낭자하게 흐른 눈 앞의 유혈 때문이라 여겼다. 스스로가 벌인 일이 골수에 깊이 스며들어 죄책감이 되려는 걸 씻어내려고 그 자리에서 내내 내리는 거친 장대비를 맞았더니 그게 감기 기운이 되었던 것 같다. 숨이 막혀 헐떡이던 와론은 그것이 구역질이 올라와서라는 걸 깨닫고 입 밖으로 간신히 기침을 몇 차례 내켰다. 악몽의 끝에선 슬픔과 비참한 감정이 그를 휘감았다. 어쩌면 지저분한 세상에 대한 와론의 면역력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패배를 선언한 것인지도 모른다. 와론은 스스로의 극단적인 결론에 이르렀다가, 그마저도 붙들 정신이 없어 다시 놓아버리고 아래로 추락했다. 하마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새까만 닭을 돕는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도 똑같이 말했을까 하며 작은 속삭임이 들린다. 그가 새장 속에서 키우는 새와 같이 와론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어봐도 다음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그는 날아가듯 창 밖으로 달아나버릴 것이었다.

힌셔는 와론의 목덜미에 수건을 대고 닦아내렸다. 돌출된 두 갈래의 근육에서 쉬지 않고 피를 퍼나르는 박동과 발산하는 열감이 느껴진다. 힌셔는 목을 스치던 그립고 서늘한 감촉을 떠올린다. 어떤 감격은 표현하지 않는 편이, 그 둘 모두에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목을 스치는 물수건의 감촉이 열을 식혀주어 와론은 그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힌셔...”

조용히 핏기 없는 입술이 그 이름을 더듬었다. 그 음성이 힌셔의 기억 속의 것과 겹친다. 

“…고맙다.”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한 가는 소리는 그저 힘에 부쳐서 그런 것만은 아님을, 그것을 모를 정도로 그에게 눈치가 없기를 바라는 게 새까만 닭이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타인의 깊숙한 호의다. 땀인지 체념인지 모를 방울 하나가 눈 주위를 흘러내린다. 그는 끝내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졸음이 눈꺼풀을 쓸어내는 것에 의식을 맡긴다. 잠결에 어디선가 계속 자장가가 맴돌며 들려온다. 익숙하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질리지 않는 단순한 노랫소리가, 계속,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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