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블랙 조커
기린닭
*59화 전반부 시점
와론은 기사들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다. 실제 와론이라는 기사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와론을 만나지 않은 기사도 누구나 와론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실제로 와론의 여유롭고 기사로서 내보이는 위압적인 태도를 마주해본 이들은 더욱 더 그의 소문에 대해 확신을 가질 뿐이었다. 그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도 그의 강함에 대해 한몫을 하고 있었다. 강한 기사는 유명했고, 와론은 어느 기사보다 진한 색의 이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에 걸맞는 위험한 기사였기에 기사들이 손쉬운 색깔론에 더욱 경도되게 만들 정도의 영향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와론의 대척점에 언제나 순백색을 받은 칸덴티아가 있기는 하지만, 통상으로 비교하기에 칸덴티아는 여러모로 논외적인 대상이었다. 소문은 마치 불빛 앞에 두 약지와 중지를 구부려 엄지에 맞대어 만든, 여우모양의 그림자 놀이와 같아 와론 스스로도 사람들이 손으로 빚어낸 그림자만 보고 새까만닭 와론은 이렇다, 저렇다 하며 지어내는 것을 충분히 이용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에게 걸리면 딱히 잘못이 없어도 기분이 내키는 대로 싸움을 걸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와론을 특임대로 불러들인 지우스는 사상지평을 쓰기 전까지 그를 아껴두었는데, 와론이라는 사람을 아꼈다기 보다는 전력으로서 그를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어느 때에도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와론은 특수기수에서 탄약고에 들어있는 화력 좋은 뇌창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사람으로서는 그의 태도는 방치에 가까웠으니까.
“야.”
기린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그를 바라보았다. 작전명령을 하달 해간지 반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 숲을 가로질러 수색대에 합류하려는 지우스를 향해서였다. 와론은 반장갑의 끝을 이로 물어 벗겨낸다. 땀에 젖은 천이 손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고, 끝이 말려 올라가며 겨우 손밖으로 빠져나온다. 억센 손이 지우스의 팔을 단단히 잡아오고 이윽고 목깃이 하늘을 향해 들렸다. 느슨하게 쓴 투구 밑으로 회색의 누에고치의 명주실 같은 가닥들이 빠져나와 지우스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코와 이마가 맞닿을 듯 내려온 위협적이고 낮은 목소리와 그늘진 낯 속에서 지우스는 눈을 질끈 감는다.
“날 써먹어. 이번에도 망설이면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아직은 아니야. 새까만 닭.”
“이만하면 충분히 기다렸어. 몸이 굳는다.”
사태는 충분히 심각해 기사들 마저 몇 번이나 아찔한 국면을 마주쳐 왔다. 무엇보다 새까만 닭은 그의 ㅡ 별천지의 ㅡ 특수 2기를 믿지 않았기에 지우스는 자신을 이용해 그를 잡아두었고 취약기간의 보완이라는 거창함에 비해 실질적으로 전투는 와론에게 도달하기 전에 소멸했다. 전쟁을 목적으로 한 특임대가 아니더라도 사실 언제건 기사들을 동원하는 충돌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일각의 상황에서 판단이 늦어질 까봐 긍긍했던 새까만 닭은 자기에게 전투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란 걸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판단을 기다리다가는 모든 것이 늦어질지도 모른다고. 지우스는 신뢰가 서서히 떨어져가는가 닭의 인내심을 가늠했다. 내리깔아 뜬 눈에는 푸른 옷의 가슴팍 위로 떨어지는 오후 햇살에 젖은 긴 머리칼과 녹색이 산란하는 작은 광석이 닿아있다. 그 위로 인간의 턱선이 선명히 시선에 걸렸다.
“실전을 양분 삼아 사람을 양성하겠다는 생각 따윈 관둬라. 소꿉질 할 시점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어.”
그렇게 말하고는 짐승 잡는 덫처럼 옷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불편한 시선은 아래를 맴돌아 빠져나간다. 투구를 쓰고, 장갑을 낀 와론은 그대로 창을 들었고 경고하듯이 그를 돌아보는 시선에는 낙조의 태양 같이 일말의 불안이 붉게 걸린다. 지우스는 옷에 구겨진 주름을 털어냈다. 이때의 지우스는 수도에서 훈련 중인 견습들이나 갑작스레 감정을 터트리는 닭보다도 그들이 있는 대륙 바깥에 잠입해 있을 또다른 특임대에게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험도, 지략도 앞서는 와론의 전투본능을 간과하는 건 큰 실수라는 생각이 문득 엄습했으나 지우스에게 그는 여전히 전략보다는 무력에 더 가깝다. 어렵사리 얻은 그의 힘. 사용할 것을 촉구하는 투기와 그 아래에 숨은 천 길 물 속 같은 속내. 눈을 마주쳤다면 그렇게 아껴둔 전력이 자신에게 쏟아졌을 거란 생각에 지우스는 선뜩한 목덜미를 손끝으로 긋는다. 최악의 때를 상정하는 와론만은 다가오는 전운이 느끼기라도 하는 걸까. 숲으로 사라지는 날선 창촉 위로 주어진 건 끝도 없는 대기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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