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애늙&잔불/힌셔+와론+지우스] 하마와 닭 그리고 자미

- 23년 5월 18일 투비로그에 업로드했던 글을 이전해오며, 이하 글을 사족 포함 그대로 이전함.

- 하마와 닭과 ㄱ, 아니, 자미. 기사명(뭔가 하나 함정이 있지만)은 조합명. 논CP글입니다.

* 다시 둘러보니 제가 하마+닭을 쓴 적이 없더라고요. 왜째서. 그래서 써보았습니다. 하마+닭+자미.

* 배경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애늙 엔딩 후~잔불 시작 전. 애늙 엔딩 쪽에 좀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 저는 힌셔님과 와론이 마음 편히 노는 술친구라는 헤드캐논을 가지고 있어요. 저희집 와론은 힌셔 선배 앞에서 퍽 잔망스러운 후배입니다.

* 술 취해서 텐션 나간 닭 주의. 술 취한 와론이 힌셔님한테 지우스 뒷담(일까?)을 깝니다.

* 술집에서 힌셔님과 와론이 나누는 대화의 주요 골격은 문수 @_mun_su_ 님의 아이디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 기세로 쓴 글이라 어딘가에 설정구멍이나 오탈자, 비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개그를 지향했는데, 이거 개그인가? 


약 500여 년의 시간을 건너뛴 검붉은 하마 힌셔에게 버릇이 하나 생겼다. 가끔씩 망토가 목을 감싼 부분을 느슨하게 풀어대는 것. 실제로 저 자신이 숨을 잘 쉬고 있음에도, 뭔가 목구멍에 공기가 딱딱하게 굳어서 걸린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순간들이 있다. 이유는 대강 알고 있다.

‘악마 기사를 처단한 영웅.’

어딜 가나 선망과 존경을 덧입고 반짝이거나 우러르는 시선이 따라온다. 진실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그것은 스승의 유지를 지키는 길도 아니다. 저는 많고 많은 기사 중 하나일 뿐이고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스승님의 말씀처럼 강한 기사는 널리고 널렸음에도, 검붉은 하마는 기사 개인이라기보단 어떠한 개념이며 영광의 대체어로 쓰이는 듯했다. 그것이 때때로 숨이 막힌다.

물론 사유와 당위성은 안다. 힌셔 본인도 기사로서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는 일에 거부감은 없다. 그렇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을까.

‘이건 또 다른 문제군.’

저의 시대에서는 최초의 여성기사(이 단어가 더는 통용되지 않는 점을 힌셔는 제 후대의 후배들에게 깊이 감사했다)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시선이 도장처럼 따라다녔는데, 이건 그것과는 궤가 달랐다. 이전의 그것이 호시탐탐 저를 노리던 이리떼였다면 이번은 저를 금칠하고 박제하는 무언가다. 저를 저 자신으로 봐주는 이가 없는 것은 이리도 숨이 막히는 것이다.

“여~, 선배. 오랜만.”

곧 누군가가 덥썩 등을 쳤다. 기감에 진작 잡혔다지만 힌셔는 굳이 내버려 두었고, 상대도 당연히 알 터이다. 이 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잔망스러운 후배는 여느 때처럼 살랑살랑한 태도로 낄낄 웃었다.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아닌 목소리가 투구 안에서 웅웅 울린다. 조금은 숨쉬기가 편해졌다. 힌셔는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서 화답한다.

“그래, 오 개월 만인가.”

“벌써 그렇게 됐어? 하긴, 저번에는 우리 엇갈렸지.”

“그랬지. 그대는 이번에 수도에 얼마나 머물 예정인가.”

“아, 그건 나도 몰라. 걔가 정할 일이라서. 못해도 사흘은 있겠지.”

저나 와론이나 키톤인지 케톤인지 신문물과는 영 거리가 먼 사람들끼리라 따로 약속하고 만나지를 않았다. 힌셔는 대체로 수도에 묶여있는 편이었고, 와론은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자였으니. 그러니 하마는 맥락도 없이 인칭대명사로 튀어나온 ‘걔’가 무엇인지 잠시간 고민했다. 반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전을 뒤적여보면, 선술집에서 흑맥주를 둘이서 한 통을 거덜 내던 저희가 보이고, 그는 곧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재미있는 녀석이 있더라구―.’

‘와론 너는 사람을 너무 흥미 위주로 보는 게 아니냐.’

‘흐흐, 선배도 많이 취했나 보다. 말투가 다 풀렸다네~.’

아, 그래. 떠올렸다. 뭐라고 했지. 뭔가의 특수능력이 있어서, 그걸로 이 후배 녀석과 대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싸웠다는 새내기. 이명도 이름도 썩 기억은 안 나지만, 달잔이 자기 집무실로 거뒀다고 했다는 걸 끝으로 별다른 정보가 생각나진 않았다.

상념을 뒤적이는 걸 끝내고 시선을 들자, 투구 안에 흐리게 보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히죽이는 기색이 짙다. 제아무리 투구 속에 얼굴을 감춰놨어도 눈은 마주치게 되어있으므로 통찰의 눈은 또다시 제게 정보를 들이민다. 다른 이였으면 상기 이유로 인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지만 새까만 닭이 상대라면 다르다. 그에게서는 저를 도금하려는 기색이 정말 한 톨도 없으므로. 가끔은 괘씸할 정도로 존경심이고 나발이고가 없기까지 하다. 뭐, 뒤 꿍꿍이 없는 발칙함이 이 친구의 매력이고 그 점을 제가 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속 빈 투덜거림이다.

“하여간 그대는 한결같군. 그럼, 가지. 하늘 같은 선배에게서 저녁을 뜯으려는 후배님.”

“히히. 농이 늘었네, 힌셔 선배.”

“어떤 후배 덕이라 볼 수 있지.”

통찰로 읽힐 걸 뻔히 알고서 밥과 술을 사달라는 생떼를 부리다니. 힌셔는 피식 웃으면서 땅에 기대두었던 하마턱을 걸쳐 매고 앞장섰다.

 

수도에 자리한 선술집쯤이 되면 그냥저냥인 기사 가지고는 놀라지도 않고, 유명한 기사라도 몇 번 얼굴도장을 찍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적응력까지 갖추기 마련이다. 그 정도의 배짱 없이는 음식장사 술장사를 할 수가 없을 테지. 기사가 아닌 자들에게도 꽤나 깊은 존경심(그노제스가 제게 일깨워준 것이기도 하다)을 가지고 있는 힌셔는 가게 주인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넸고, 그는 여타 손님에게 그러하듯 무심한 까닥임으로 화답했다. 온갖 소문을 달고 다니는 새까만 닭에게도 주인장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오히려 열린 공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새빨간 망토의 기사와 빨간 깃을 단 투구의 기사를 보고서 웅성거렸다. 두 사람은 익숙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한 반응을 흘려보내며, 가게 안쪽 반 칸막이가 쳐진 구석 자리를 향한다. 곧 종종걸음으로 종업원 하나가 다가왔다. 손에는 연필과 수첩이 들려있는데, 좀 후들거린다. 저번에 못 본 얼굴이니 신입일 테지.

“그, 주문, 받겠습니다.”

마침 저녁때이기도 했고 와론은 아예 이른 점심 후에 먹은 게 없다고 한 터라, 둘은 거의 식재료를 거덜 낼 기세로 음식을 주문했다. 온갖 제철 야채를 넣고 닭가슴살을 좍좍 찢어 넣어 끓인 스튜 한 솥, 사과를 기조로 한 양념을 발라 통으로 구운 거위 세 마리, 올리브를 넣고 쫀득하게 구워낸 빵 네 덩이, 거기에 끼워 먹을 수 있게 얇게 썰린 건락(치즈)과 훈제된 돼지고기 등심살 여섯 접시. 거기에다 오늘의 추천이라는 포도주 두 병에 저번에 먹었던 흑맥주 한 통까지.

알차게도 꽉꽉 눌러 담은 주문을 신입 종업원은 간혹 떨리는 손으로 받아적고서 꾸벅 인사를 하고 주방장에게로 향했다. 이제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그 종업원이 충분히 멀어지기가 무섭게, 하마와 닭은 거의 동시에 말을 뱉었다.

“주인장이 신입 교육을 단단히 하는군.”

“저 신입, 배짱이 있네.”

그리고서는 서로 피식 웃었다. 비슷한 걸 보는 것 같으면서 제일 먼저 찌르는 점은 다르다. 그런 점이 재밌는 거지만.

음식과 술이 나올 때까지는 그냥 시답잖은 근황이나 풀어놓았다. 그러다가 음식도 술도 나오고선 먹느라 잠깐 말이 없었다가, 어느 정도 배가 차고 술도 들어가자 슬슬 속엣말이 줄줄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힌셔는 중앙에서 자꾸 저를 수도에 동상처럼 세워두려는 게 맘에 안 든다고 한탄했고, 와론은 거기에 낄낄 웃으며 그럴 바에야 엎어보라고 부추기다가 투구를 얻어맞고 뎅- 울리는 머리를 쥔 채 괜히 징징댔다. 겨우 이걸로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이 영 괘씸하여 힌셔는 씩 웃으며 식탁 아래의 정강이를 찼다. 이번에야말로 악 소리가 났다.

“와, 진짜 너무하네. 하나뿐인 귀여운 후배를 이렇게 대해도 돼?”

“그대는 귀엽기보다는 잔망스럽고 때론 가증스럽게 구니 별 수 있나.”

“평가 박한 것 봐. 내가 벽공 혼자 복원했다고 했을 때 놀라던 검붉은 하마 님은 어디로 가셨나 모르겠다.”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말해보게나.”

“허, 내가 못 할 줄 알아?”

낄낄.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 웃음이 헤퍼진 두 사람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키들키들했다. 술 자체가 꽤 들어가기도 했거니와 마음 한 귀퉁이를 편히 내려놓고 지낼 수 있는 사이에서 마시고 있으니 취기가 빨리 도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와론은 이제 무슨 곡조인지도 모를 것을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닥이고 있고, 힌셔는 그게 무슨 곡인지 모르면서 박자나 맞춰준다. 그러다가 투구가 비뚜름하게 뭔가를 쫓듯이 움직였고 하마는 몸을 반쯤 돌렸다. 아까 저희 앞에서 떨면서도 침착하게 주문받고 음식을 날라줬던 그 종업원이 주방과 다른 손님들이 앉아있는 식탁들을 바지런히 오가고 있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와론이 갑자기 제 몫의 맥주잔을 꽉 움켰다. 얘는 갑자기 뭐가 이리 열받아서 이러나. 힌셔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후배 녀석은 투구를 슬쩍 끌어 올리고 맥주 한 잔을 그대로 꿀꺽꿀꺽 끝장냈다. 그리고선 잔을 던지듯이 팽개치고는 활개 치는 닭처럼 성난 목소리를 쏟는다.

“아니, 힌셔 선배, 들어봐. 지금 저 신입 보고 있으면, 기린 그 자식이 떠올라서.”

힌셔는 몇 초는커녕 거의 분 단위를 소비하고서야 앞서 말했던 걔이고 새내기가 방금 튀어나온 기린임을 눈치챘다. 뭐, 어쩌겠나. 힌셔는 원래 옛날부터 제가 인정하지 않고서는 머릿속에 담아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점에선 당당하다. 선배의 느린 반응을 확인하고 툴툴거린 후배는 부루퉁하게 말을 이었다.

“걔 되게 비리비리하게 생겼거든? 잡고 꺾으면 그냥 똑 부러질 것 같이? 근데 겁대가리가 없어. 아니, 겁은 먹어. 분명히 그래. 근데 진짜로 그냥 겁대가리가 없어. 나 걔랑 한 판 붙었다고 말했던가?”

“싸웠고, 재밌는 놈이라고만 했지.”

너 지금 겁대가리 없다는 말을 두 번이나 똑같이 반복했다고 하기엔 이어질 말이 흥미롭긴 했다. 그가 읽은 와론은 어린아이에게는 유했고 결단코 방심하는 자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탐구심과 호승심이 어우러진 면이 있어 굳이 약한 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그가 괜히 굽히고 맞추고 들쑤시려고 드는 새내기에 대해 아무런 호기심도 일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거다. 제 뇌리에 새겨질지는 둘째치더라도. 말을 재촉하듯 턱짓하자, 와론이 기다렸다는 듯이 떠들었다.

“아니, 선배, 요즘 애들은 다 이래? 내가 꼰대인 건가?”

“…목이나 축여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논리가 아뜩하게 뛰었다.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쉰 힌셔는 차마 나한테는 너도 요즘 애들이라고 말하진 못하고, 그냥 빈 잔에 술이나 따라줬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학습한 바로는, 이 후배 녀석은 술기운이 넉넉히 올랐을 때 심기가 틀어지면 아주 귀찮은 쌈닭이 된다. 몸으로 치받으면 모를까 세 치 혀를 제 나린기처럼 자유자재로 써대는데 여간 곤욕이 아니다. 옆에서 말리는 것도 문제였을진대 공격받는 당사자가 되는 건 절대 사양이다.

“봐봐, 걔가 지금 거북이 밑에 있어서. 응, 책상머리 샌님이긴 한데. 아니, 걔는 내가 뭔지 알면서도 까불어대고 있어. 내가 만만한가? 내가 지금까지 기사사냥 소문 달고 다니면서 신입놈들이 나 보면 쫄아대는 꼴을 매번 봤거든? 그래, 뭐 거기까진 그렇다 이거야. 쫄았는데 당당한 거. 좋지. 근데 혓바닥이 길어. 그리고 싸가지가 없어. 아니, 내가 좀 튀는 놈이고 위아래 없긴 해도 선배한테 선배라고 하잖아. 걘 날 그냥 막 불러제낀다? 뭐 하는 놈이지?”

모르겠다. 취객한테서 멀쩡한 말을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보다. 힘차게 쏘아졌던 말이 이제 투구 안에서 쭝얼거리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힌셔는 얼마 안 남은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다. 그러다 보니 말이 미끄러졌다.

“역시 애들은 빨리 자라지.”

“지금 그거 먼 소리야?”

이런. 그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마주 보고 앉은 투구 안쪽에서도 뾰족하게 찔러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검붉은 하마에게서 답이 없자, 발음이 묘하게 풀린 채로 와론이 삿대질했다.

“그거 먼 소리냐-고. 선배. 선배, 대답 안 해? 안 할 거면 연병장. 연병장 따라 나와. 가자.”

힌셔는 평소보다 회전수가 낮은 머리로 생각했다. 어차피 돈은 제가 낼 것이었으니 상관없고, 후배 놈 꼬라지를 보니 그냥 도중에 기절시켜서 여관에 던져놓는 게 빠를 것 같다. 속 풀릴 때까지 놀아주기엔 저도 많이 마셨으니 그게 나은 선택일 거다.

“그래그래, 가서 저번에 봐준 벽공도 얼마나 능숙해졌나 한 번 보는 걸로 하게.”

“힌셔, 어, 날 애 취급했겠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새파랗게 어린 애는 따로 있는데!”

그래, 헛소리. 옆구리에 껴붙들어둔 와론이 뭐라고 떠들던 힌셔는 그냥 흘려들었다. 흐늘거리는 취객을 부축하고서도 능숙하게 한 손으로 값을 지불한 힌셔는 공간지각이 워낙 뛰어난 후배 놈이 거긴 연병장 방향이 아니지 않느냐는 말에도 대충 대꾸하고 어르고 달래가며 걸음을 이끌었다. 와중에 론누는 또 잘만 쥐고 있는 게 웃기긴 했다.

그리고 여기는 수도, 기사가 제일 많이 상주하는 곳이었으므로 영웅 검붉은 하마가 피식피식 웃어가며 술에 절어서 휘느적거리는 그 새까만 닭(이미 여기서 대다수의 기사는 형용모순에 정신을 놨다)을 부축하고 있는 광경을 많은 기사들이 목격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저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눈을 깜빡이거나, 눈을 비비거나, 아니면 들고 있던 무기마저 쩔그렁 떨어뜨리고도 눈치채지 못하거나―하여튼 당황이 극치에 이른 모든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가 “환각인가?”까지 중얼거렸을만큼 까무러칠 정도의 광경이다.

당연히 이 소식은 궁 내에도 빠르게 번졌고, 모종의 건으로 군청색 거북이 달잔과 회의 중이던 담청색 기린이 양해를 구하고서 저잣거리로 뛰쳐나간 도화선이 됐다.

지우스가 그 둘을 찾는 건 쉬웠다. 그냥 충격을 받은 듯한 사람마다 붙들고, 그 사람들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면 됐다. 때로는 물을 필요도 없이, 공허한 눈을 한 채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일도 있었다. 먼 데를 다니지 않은 대신으로 수도 지리만큼은 빠삭한 그는 그럭저럭 정보를 조립해서 장소를 유추했다. 아마 궁 근처에서 기사 전용 숙소에 던져두려는 게 아닌가 싶다.

‘검붉은 하마와 친하다더니 거짓은 아니었나보군.’

괜히 허튼 생각도 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만치서 선명한 붉은 망토가 보였다. 옆구리 쪽에 와론은 망토 탓에 투구만 떠 있는 것 같았다. 뭘 얼마나 마신 건지 모르겠지만 걸음이 아주 비틀비틀 엉망이다. 하마 쪽도 썩 멀쩡하게 걷는 건 아니어도 걸음 자체가 탄탄하긴 했다. 사상지평 건으로 거래하긴 했지만 새까만 닭이 어디에서 사고를 쳤다간 지금 구상하는 계획이 더 심하게 틀어질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음습한 소문 때문에 인선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판에, 어디서 술 먹고 쌈박질이나 해서 철천지원수라도 되어봐라. 내심 그가 그 정도의 망나니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딱히 발소리도 기척도 죽이지 않아서인가, 해파리처럼 흐느적대던 와론이 고개를 치켜들고선 평소보다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야, 이게 누구야! 싸가지 없는 신입 놈이잖아!”

그리고 검붉은 하마가 지우스를 보고서 머뭇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음, 그대가 이 잔망스러운 후배 녀석과 같이 일한다고 들었소만. 그러니까―자미?”

“예?”

“큭, 크하하하!”

처음의 거리감을 헛디딘, 남의 이름을 썩 기억하지 않는 힌셔가 내뱉은 말에 지우스는 그냥 멀뚱그러니 멈추어 섰고, 하마의 옆구리에 끼워지다시피 했던 와론은 거의 파열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굴러졌다. 정신이 혼미하다. 지우스는 이제 왜 아까까지 마주쳤던 모든 기사가 그토록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는지를 절감한다.

거리에는 한참 동안 새까만 닭의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만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후, 자기 추태를 봤다는 빌미로 와론은 지우스를 선배와의 술자리에 끼워서 반죽음시켰고, 담청색 기린은 이틀을 내리 숙취로 앓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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