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우울한 휴일의 기사

별천지의 괴담소동

*애늙은이 스포 有

니젤의 어느 행정기관. 나린기 관리부처 일명 별천지에서 7개월 째 근속 중인 등록 관리과 A씨는 몇 주째 기이한 환영과 악몽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는 가끔 주인 없는 발들을 보곤 했으며 발끝을 따라 서서히 올라가다 보면 시선이 닿아야 할 곳이 아닌 허공이었다ㅡ 그런 괴담들의 간증이 앞뒤로 끊이지 않는 근래였다. 별천지 내부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돌았다. 딱히 괴담의 계절이 아니었음에도 철을 모르는 귀신 소문은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돌아 다닌다.

최근 별천지는 거의 비어있는 상태나 다름 없었다. 연이은 휴가로 내부 업무는 소강상태. 그마저도 시설을 수리하느라 사무소를 임시로 옮겨 직원들은 대부분 그리로 출근한다. 이맘때 니젤은 마치 유원지의 가장 인기없는 놀이기구 처럼 한산하다. 그중에서도 그들이 옮긴 별천지의 옛건물 ㅡ 정확히는 수도 위병대의 옛숙소 ㅡ은 한산함을 넘어서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지우스에게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소문이었다. 그가 누구든 죽은 기사면 기사답게 장례를 치러주지 않아도 알아서 성불하길 바랐고, 듀라한의 이야기라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정 일이 복잡해져 제령사를 부르면 꼴은 사나울 테지만, 휴가를 못간 직원들에게는 그런식의 일탈이라도 주어지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그 일 마저 별천지 행정을 돌보는 상주 직원들의 몫이고 지우스 본인은 귀신 소동을 비롯해 어떤 논란에도 끼지 않고 외떨어진 임시 사무소의 제 응달진 자리에서 한걸음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직원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전분기 보고서를 마무리하여 저에게 주어진 업무를 떨쳐내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던 것이다.

똑똑,

문을 두엇 두드리는 소리 뒤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던 서류와 주름을 편 모자로 얼굴을 덮고 짧은 휴식을 취하던 담청색 기린은 무언가 두꺼운 책뭉치 같은 것이 책상을 내리찧는 소리에 간신히 졸음을 누르고 눈을 뜬다. 서늘하고 습한 목조 건물에서 종일 머무르니 몸도 근육에도 습기가 배어 며칠째 수면의 질이 좋지 못하다.

“… 왜 자꾸 일이 늘어가지?”

그는 종잇장 틈으로 새로이 놓인 보고서 더미를 보며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평이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하며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기도 했다. 이마에서 시작된 시커먼 다크써클이 턱을 향해 내려가며 우울하게 피로를 칠한 물기 어린 얼굴을 안쓰럽게 보던 젊은 직원은 오늘도 또 하나가 쓰러져 나오지 못했다고 답해주었다. 최근에 이런 식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앓는 직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분 귀신인줄 알았어요. 어제도 너무 창백하게 사무실에 앉아계셔서, ”

“어렸을 때부터 계속 그런 체질이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 터에 뭐 있다니까요. 사실 어제도 이상한 걸 봤대요. 야근하고 새벽에 돌아가다가…”

구식 갑옷을 우중충하게 덧입은 모습을 보고 달잔 연배의 기사인 줄 알았던 당직은 둘 밖에 없는 복도 공기가 고요한 가운데 고개를 숙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목 위로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갑옷만 형체 모를 육신을 이고서 덜그럭 거리고 돌아다니더라는 거다.

“그게 몇시쯤이었는데?”

“한… 두 시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알겠어. 오늘 저녁엔 내가 있어보지.”

지우스는 불안하거나 초조한 낌새를 내지 않으려 조용히 주머니 안으로 주먹을 쥔다. 비단 소문은 얼토당토 않았으며 그는 이제 갓 발령 받을 적보다 능숙하게 일처리를 했으나, 빈 별천지를 혼자 수습하고 있는 이때에는 작은 일 하나가 피로를 더하는 법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공란이어야 마땅할 기사들의 장례 비용은 0이 아니다. 장례를 치르는 않는게 사람을 불러모으고 영결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 시신을 염하거나 묻을 자리 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 소유의 장지에 묻는 경우 절차는 간소하고 식을 치르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이 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그부분의 예산이 0에 수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무과를 슬쩍 떠본 결과 보급품 중 신입기사들에게 지급되는 액수를 생각하면 높은 사망률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기사 임명을 받을 정도의 격에 맞는 재원은 매해 극히 드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존도 존속도 신경 쓰지 않고 인력으로 대체하는 견습기관에서 가져다 준 부품을 소비하는 듯한 현상황에서는 꺼림칙함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자 아래로 꺼질 듯한 한숨이 기어나왔다. 신입 딱지를 제대로 떼기 전부터 이런 사정을 훤히 알게 된 탓도 있었으나 왜 지금 자신은 이런 업무들에 두통을 겪으며 처리하고 있는가. 그건 행정을 돌보는 달잔마저 수도를 비웠기 때문이라고 간추릴 수 있다. 검붉은 하마가 돌아온 뒤로 수도의 군사력이 크게 보강된 건 사실이라 내내 업무에 파묻혀 있던 달잔을 마냥 탓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여튼 심심함에서 비롯한 헛소문이던지, 한풀이를 원하는 기사나 누군가의 의도 던지, 혹은 깔끔히 명명할 수 없는 괴현상이던지 걸리는 구석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그나저나 새벽 두 시까지 일을 하다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피로함이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처럼 그 직원은 그다지 건강한 체질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에게 차마 그 시간까지 일하지 말라는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휴무 없는 별천지의 사정에 따라 휴가철엔 손 하나조차 아까운 게 현실이었고 지휘권은 있어도 그가 별천지의 수장인건 아니었으니. 카페인을 빨고 몸으로 떼울 나이는 지난 법이었다. 아무래도 기사를 더 뽑거나 직원을 더 들이거나 그들에겐 인원이 더 필요했다. 기왕이면 살아있는 사람으로. 지우스는 서늘하고 비교적 평온했던 사무실 자리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수도에서 와론은 가장 한가한 기사 중 하나였다. 기사들에게 내려지는 일방적인 할당으로나 세간의 평으로나 그는 만능 해결사에 가까운 기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의 문제를 일으키는 기사. 어디서 어떻게 튈지 모르는 인간. 파티건 경조사건 그는 부르지 않는걸 서로에게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로 여겨지는 상대. 물론 기사들은 서로 청접장 돌릴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고 그보다도 흔해빠진 부고조차도 그로인해 집합령이 내린 적은 한 번이 다였다.

“새까만 닭,”

와론이 그에게 주어진 짧은 여름휴가 속에서 새까만 닭이라는 이명과 더불어 자신의 그런 위명들을 즐기고 있는지와는 무관히 담청색 기린이 부채처럼 그의 얼굴께를 가리던 나뭇가지를 치워낸다. 직사광의 햇살이 면갑 구멍의 좁은 틈을 뚫고 들어와 와론은 인상을 찌푸린다.

“왠일이셔.”

꼴을 보아하니 그는 와론을 한참동안 찾아다닌 모양이다. 보통은 여름휴가가 특별히 주어지지 않아도 임무의 끄트머리에 적당히 쉬거나 다른 곳에 들렀다오는 것이 기사생활을 오래 해온 이와 중앙 사이의 적당한 관례다. 특히나 닭은 꼬박꼬박 보고를 올리는 타입은 아니어서, 임무가 없을 때의 소재지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누가 고무줄로 발을 묶어두기라도 한듯 탄성처럼 수도로 성실히 복귀해 담청색 기린의 주변을 뱅뱅 맴도는 중이었다. 그들이 수도에 틀어 박혀온지도 한 계절이 되었다. 거기에 비가 오는 우기는 철로 만든 장비들과는 상성이 별로 좋지 못했다. 무구정비를 완전히 마쳐놓고 간혹 그의 몸을 풀어줄 대련 상대를 찾는 일 외에는 ㅡ사실 그것은 행차에 가까웠다ㅡ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닭은 정보를 모으거나 한가로이 누워 나무 그림자나 구경했다. 구석구석이 막힌 황도는 썩은 육류의 악취처럼 우스울 정도로 그의 혐오감을 자극하는 데가 있다. 아마 발령지 교대나 임무를 위해 대기하며 수도에서 머물러야 하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러하리라고 곱씹으며 어찌어찌 시간을 추슬렀고, 모르는 동안 그 사이 깊게 누적된 피로가 풀려갔다. 인구가 득실거리는 황도에서 자발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휴식 속에서 몸을 놀리는 것만으로도.

"네가 해줄 일이 있어."

"아~. 드디어? 좀 쑤셔 죽는 줄."

알아서 좀 할 것이지, 왜 날 더러 도와달래. 누가 와론을 불러내려 해도 그는 그렇게 대답할 사람이었으나 전반적으로 익숙해진 무료함을 벗어날 구멍임을 번뜩 직감했다. 와론은 투구 속으로 씨익 웃으며 어깨 위로 론누를 걸친다. 이번엔 어딘데? 리틴시아? 레툰? 서쪽다리? 생각하기로는 그 너머의 서대륙 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래의 상황을 감안해 동대륙으로 간다면. 군청색 거북이 없는 틈을 타 제국을 탈출하다니 과연 그가 신예때부터 눈여겨본 기사다웠다. 담청색 기린은 긴 창의 형태의 나린기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마치 이 나린기가 파리채와 같이 악당이나 기사 말고도 무언가를 때려잡을 수 있을 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황궁."

"하?"

그건 또 무슨 골때리는 소리다.

움직일 생각이 싹 사라진 머리와는 별개로 검은발의 부츠는 당연스럽게 앞장서는 푸른 옷자락을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녀석은 언제 모자를 빠는 걸까. 실없는 생각에 빠진 와론을 데리고 황궁 입구의 철저한 경비를 지난 담청색 기린은 별천지로 가는 길목에서 방향을 틀었다. 낯설고 낡은 이층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풀색머리를 따라 그는 론누를 모로 기울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다갈색 목재로 지은 내외부는 튼튼했으나 관리가 부족했는지 칠이 벗겨졌고 며칠 비가 온 터라 복도 이곳 저곳에는 비새는 곳에 대어놓은 양동이들이 놓여 있었다. 그탓에 실내가 한층 어둡고 낡은 기미가 있다.

"여긴 뭐야?“

담청색 기린은 귀찮고 예민한 시선으로 와론을 한번 흘겨 볼 뿐이다. 와론이 알기론 여기는 황성 안에서도 지금은 딱히 용도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위치가 좋지 않아 적절한 보수 없이 버려진 많은 건물들 중에 하나로, 황성의 안팎 경계가 달라지는 일은 증개축을 하고 중심궁을 옮길 때마다 종종 발생하는 법이라 황성의 중앙에서 많이 벗어난 건물은 사실 도시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래되고 낡고 때묻은 창을 비롯해 모든 것이 바래있다. 나무 곰팡내가 올라오는 지휘관실 하나로 들어가니 책상 위에 쌓인 서류만 죄다 새것이다. 습기로 눅눅해져 있었지만. 와론은 가볍게 기침을 한번 했다.

"밤…새벽 때까지 기다리자. 그럼 나는 잠시 일 좀."

책상으로 다가간 담청색 기린은 그대로 무인치고는 상당히 굼뜬 동작으로 서류 더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좌우로 쌓인 탑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그에게서 일을 도와달라고 말할 낌새는 추호도 없어 보여 와론은 다소 어이가 없는 모양이 된다. 휴식의 반나절을 빼앗긴 새까만 닭은 평소와 달리 완갑도 망토도 없어 제대로 무장을 갖춘 것은 아니었으나 기사 중에서도 손꼽는 아우라와 예의 커다란 덩치로 정갈한 사무실에 혼자 창을 들고 멀뚱히 서있다가, 눕는 곳이 단지 젖은 나무 위에서 음습하고 축축한 실내로 바뀐 것으로 받아들였다. 구석에 먼지에 파묻힌 안락의자 비슷한 것이 보였다. 치밀어 오르는 지루함에 눈을 가늘게 접으며 그리로가 자리를 잡았다.

저녁이 되자 하필 비가 와서 배식은 건물로 오지 못하고 다른 직원들은 식당 건물로 식사를 하러 갔다. 둘은 누군가 가져다 준 저녁을 간단히 먹고, 와론은 옛 군사시설로 쓰이던 내부를 짧게 구경했다. 감청색으로 저녁놀이 가라앉고 불 없이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고여간다. 사무실로 도로 들어와 보니 담청색 기린은 책상 앞에 등촉 몇 개만 두고 서류에 얼굴을 들이 대고 있었다. 시력이 나빠질 것 같은 눈그늘을 초록머리가 나무와 구분할 수 없이 덥수룩히 쏟아져 덮는다. 저러니 시력이 안좋은 거라며 혀를 찬 와론은 쓰지 않은지 십 년은 더 된 듯한 옆방에서 눈을 좀 붙이기로 했다.

시계는 한 시간 마다 쳤으나 새벽 두 시가 넘어가자 그 소리는 옅어졌다. 바깥의 괘종시계 울리는 소리가 잠잠해진 것을 보고 와론은 소리없이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복도 밖을 돌아다니는 낌새가 들자, 바닥에 놓아둔 론누를 집어들고 기사는 조용히 닫힌 문 앞으로 다가섰다. 문틈 아래로 창날을 밀어 넣으려던 순간, 급작스레 문이 열렸다. 벌컥. 반사적으로 문에서 두 어 걸음 물러나선 예고 없이 문을 열어 젖힌 이의 실루엣을 보았다.

“여기서 자고 있었어?”

한주머니에서 손을 빼낸 기린이 불빛 하나 없는 방에 똑같은 꼴로 거뭇거뭇한 몸집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먼지 투성이인 공간에 몸을 바싹 붙였던 와론은 긴장감이 순식간에 떨어지는 걸 느끼며 바닥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 기린의 위쪽으로 높은 장신이 솟아나고, 몸을 바로 한 기사는 졸음으로 멍한 투구 위의 먼지를 털며 툴툴 거렸다.

“사람을 불러놓고 지금까지 일만 하다니.”

“집에라도 간 줄 알았지.”

기린은 가볍게 말하며 나오라는 듯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고 와론은 머리가 깨질듯 무거운 게 졸음으로 인해서인지 불편한 잠자리 때문인지 날씨탓인지 알 수 없었다. 텅 빈 복도에서 시계는 새벽 두 시 반을 가리킨다. 소파에 구겨져서 자느라 등과 허리가 굳어 있다. 야행성인 그들은 서서히 몸이 풀릴 즈음이라 와론은 기지개를 키며 찌뿌둥하게 굳었던 관절을 풀다가 앞서 걷는 기사에게 몇 마디를 던졌으나 제대로 답이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다지 크지도 넓지도 않은 구식 군사건물은 다만 가로로 끝도 없이 길게 지어 병영 특유의 투박한 구조를 지녔고, 복도의 한쪽 끝에서 일직선으로 걸어가며 반댓편에 닿을 때까지 걷고 중앙의 계단으로 돌아가면 복도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 구조였다.

“갈라져?”

기린은 잠시 고민하더니 ㅡ 그 놈의 턱 좀 그만 만지지? ㅡ 함께 다니는 편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봐야할 공간이 복잡하지 않으니 딱히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선택은 아니었다. 사방팔방 난리를 치며 시끄러워야 할 그는 다만 하품을 하며 기린의 뒤를 따랐다. 불쾌하고 끈적한 잠기운이 좀처럼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꼬리처럼 그를 따라온다. 어두운 회색으로 변한 복도를 산책하듯 걷다보니 건물에 있던 이들은 둘 이외에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 듯했다. 마루를 끼익 거리며 밟는 소리는 그들의 것 뿐이었고 혼자 문답을 하던 와론은 곧 온 복도에 제 낮은 음성만 울리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물방울이 바닥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주인 없는 처소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낡은 가구에서 오래전 사라진 사람의 흔적들이 메아리처럼 감돌았다. 여전히 과묵하게 입을 다문 채로 무언가를 탐색하듯 병영을 돌아다니는 담청색 기린에 와론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 뭐가 있는데?”

“유령.”

“아?”

“목 없는 기사. 황궁 밖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면 귀찮을 것 같아서.”

와론은 꽤나 황당하다는 반응을 해보였다. 서로가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삐긋 정지 해서 기사가 유령 소동이라니, 하는 태도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일을 나같이 연약한 기사에게~! 미리 말해줬어야지!”

“무서운 척은. 말해도 왔을 거잖아.”

“아니. 집에 가서 발이나 닦고 얌전히 자기나 했을거다.”

“일할 차례야. 기사 사냥꾼씨.”

“그 농담 재미없거든.”

바깥을 향해 난 창에서 드문드문 짧은 그림자가 생겼으나 대부분 허술한 나무 덧창이 닫혀 있었다. 와론은 예민한 시력으로 멀리 뻗은 복도 앞을 주시했다. 투구의 날카로운 삼각면이 앞으로 길게 펼쳐진 어둠 속을 겨눈다. 기사인 기린이 별천지의 뒷수습을 해주는 것도 어불성설이었고, 유령 퇴치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에 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필요이상으로 감각을 곤두세우고 전방을 살폈다. 건물 자체가 낮과 달라진 점은 없었으나 어둠이 그 위로 겹치면서 전혀 다른 적막함이 감도는 것이 이곳이 십 년이상 쓰이지 않던 폐건물이라는 게 실감났다. 안개와 어두움이 뒤흔드는 나무 건물의 복도는 폭풍 속에 갇혀버린 배와 같았다. 문제가 이 건물 자체인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론누를 실외에 던져두었을 것이었다. 정체 모를 무언가라면 론누도 그들의 무력도 소용없을 가능성이 높았으나 와론은 탐색에 집중했고, 담청색 기린이 저로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앞 대신 위쪽으로 높이 뻗은 투구를 올려다보았다.

“2층에는 별관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기는 한데….”

복도의 적막 끝에 사람 하나가 지나갔다. 한번 더 보았을 땐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와론은 죽은 듯이 멈춰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거리는 멀었으나 그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멈추어 인사를 할 만한 상황이었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 여기에 있을리 없었다. 그는 무의식 중에 발을 확인했다. 갑주에 걸맞는 묵직한 무장이 땅 위를 단단하게 딛고서 마치 기사를 흉내내듯이 이쪽으로 몸을 향했다. 와론은 저도 모르게 움찔 하며 태세를 갖추었다. 론누가 무겁게 떨어지고 당장이라도 땅을 박찰듯 발이 복도를 짓이기자 기린이 옆에서 방해할 것을 감수하고 검은 형체를 손으로 툭 쳤다.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시 옷을 당기는 손길에 와론은 시선을 고정한 채 앞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본 어린 기사는 그제야 같은 것을 보았다.

“사람이 있네. 우릴 쳐다보고 있는데.”

밖은 비가 멎어 있었음에도 옷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져 발치가 젖어있었다. 마치 물 속에 잠겼다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홀린 사람 처럼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 주변에 그럴만한 호우가 온 적이 있는지 생각하던 기린의 가슴 앞을 묵직한 팔뚝이 막아 세운다.

“피냄새가 나. 그것도 아주 오래 썩은 내.”

물이 아니구나. 기린은 그제야 서서히 갑옷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어깨가 액자 끝에 걸리던 사람은 지우스나 와론 보다도 장신이었다. 격한 전투로 마모되고 우그러든 흔적이 설핏 눈에 들어왔고, 고개가 그 위로 향했다. 다시 보니 아무도 없었다.

“...사라졌군.”

그자리에 굳어있는 와론을 지나 기린이 복도의 끄트머리까지 걸어갔다. 복도 끝에는 벽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바닥도 액자도 깨끗하다. 사붓한 보조로 원래의 지점으로 되돌아온 기사는 말을 던졌다.

“머리가 없었을 텐데.”

“그냥 가려서 안보이나 보다 했지.”

“네가 보기엔 어때. 장난이었던 거 같아?”

“글쎄에. 저쪽도 착각이었으려나 싶은데. 아무래도 가짜는 아닌가 보군. 유령이라는 거.”

“…돌아가야 할까?”

목걸이를 매만지는 와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담청색 기린은 다시 물었다.

“잠깐 더 돌아보는 건?”

외에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는 이곳에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나 기린은 기왕이니 다른 단서를 찾고 싶었다. 와론은 내키지 않는 다는 듯이 론누를 쥐었던 반댓손을 주억거렸다. 귀신이니 초자연이니 하는 것들과 관계 없는 그들 중에서, 그나마 감이 예리한게 와론이었다. 기사의 유독 야성스러운 면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기린은 그가 긴장할 만한 무언가가 있나 싶었지만 그럼에도 이상한 정지가 몇 차례 있었다. 표정을 잘 짓지 않는 기린은 드물게 호기심을 드러내고 계속 그의 뒷편에 높이 솟은 투구를 재차 올려다봤다.

“닭 너 설마…”

그날 새벽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뒤로 와론은 며칠을 홀로 앓았다. 무슨 병에 걸린 건지 영문 모를 일이었으나 제령사를 불러다 주어야 하는 건가 기린은 고민했다. 같이 본 기린은 멀쩡히 ㅡ 즉 특별한 이상 없이 ㅡ 피곤하고 녹녹한 삭신 그대로 였다. 알린다면 기사의 기강이 흐트러진다고 나무랄 만한 일인터라 적극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나 그 소식이 일종의 전염처럼 타고타고 흘러 어느 기사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검붉은 하마의 복귀 소식이 들려오고 마침 황궁에서 마주치기까지 했을 때 그 소식은 끝내 하마의 귀에 들어가 있었다.

“닭이 아프다 들었는데. 혹시 아는 것이 있소?”

“…? 두 분이 아는 사이 입니까?”

검붉은 하마는 짧게 기침을 하며 그런 것이 아니라 부정했으나 노란 눈이 선명한 기사는 그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하마는 그제야 일전의 회의에서 닭이 보디가드를 하듯 같이 다니던 신예에 대해 한 두번 언급하던 얘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사는 최근에 별천지 ㅡ 그건 이 시대의 기사들의 무기를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ㅡ 에서 있었던 일련의 소문들을 간추려 설명하고는 닭이 앓아눕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곤란하다는 빛이 짧게 드리운 기색을 파악한 힌셔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알겠소. 내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지.”

“…이런 쪽에도 재주가 있으신 겁니까?”

“무슨 유령이든 나보다 나이가 많기야 하겠소?”

젊은 기사는 그의 농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떨떠름함이 가득 서린 눈을 보던 힌셔는 바뀌어버린 이 세대의 유머감각을 실감했다.

날이 저물면 황금빛은 서둘러 회색으로 바뀌어 가고, 힌셔는 어린 아이가 노는 냇물가처럼 어스름이 바닥부터 차오르는 거리를 지나 황성의 위병대 건물로 향했다. 한사코 같이 가겠다는 이도 있었으나 수도의 지리는 대륙에서 가장 자신 있는 곳 중 하나였다. 특히 위병대라면 옛 근위대의 위치가 아닌가. 기사가 되고나서 닳도록 드나든 그곳은 제아무리 그에게 길찾는 재능이 없어도 찾아갈 수 있는 장소다. 자신 있게 길을 찾던 흰 장화발은 낡아버린 건물을 보고 입구의 현판이 형편없이 세월에 바래진 것을 보고는 혹여 지난 오 백년간 기사들의 근무장소가 다른 건물로 변경된 건 아닌지에 대해 처음으로 의심이 들었다. 건물 앞에 서서히 멈춰서서 한참 안의 기척을 살폈으나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다.

... 그러고 보니 귀신이 나온다고 하던가.

어쨌거나 경첩의 기능이 형편 없는 문짝을 당겨보니 열려있기는 하였고 힌셔는 문 안으로 발을 디디고 들어갔다. 주황색으로 물든 사무실들은 비어 있었으나 책상 위에 질서 없이 쌓인 서류나 일감들로 봐서 이곳이 여전히 기사들의 일터는 맞는 듯 했다. 누군가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힌셔는 그날 낮에 새파랗게 질려 ㅡ그럴 수만 있다면 ㅡ 진지하게 귀신은 진짜라고 말하던 후배 기사를 만나고 왔다. 겁을 주려는 태도일지도 몰랐으나 후배의 말에는 일말의 사실이 담겨 있었다. 같이 가자고 하는 말에 호들갑 하나 떨지 않고 거절하는 그를 버려두고 혼자 와서는 뭐가 무엇인지 도통 분간하기가 어려웠으나 힌셔는 의자를 하나 끌어 빼어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위병소야 말로 힌셔에게는 지난 몇 백년의 세월의 부속이나 다름 아니었다. 힌셔 자신의 나이는 지금과 2년도 채 차이 나지 않았으나 이 건물이 평범한 위병소이던 시절 거닐었던 것이 마치 십 년, 이 십년 전의 일처럼 회상되었다.

힌셔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꽤나 지식이 있다 자부했음에도 귀신 같은 건 거의 믿지 않는다. 그에 대한 경험도 최근에 벌어진 일이 아닌 한참 이전으로 올라가고서야 어렸을 적 들었던 도깨비에 대한 공포나 애인이 말해준 수도의 괴이쩍은 일들을 귀로만 들은 것이 다였다. 재미도 없었을 뿐더러 그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로 그 배후가 죽은 인간의 원혼 같은 초자연적인 무언가라기 보다는 못된 인간의 장난이거나 사람들의 불안이 만들어낸 착각이라고 여겼다. 역시 닭이 아프다는 것은 이곳에 두 번 오기 싫어 댄 핑계인지도 모를 일이다.

닭은 회의 이후로 잠깐을 제외하곤 내내 수도에서 지냈고, 둘은 원치 않아도 자주 마주쳤다. 서로를 할 일 깨나 없냐는 듯 바라보다가도 힌셔는 닭에게 그게 보편적인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일전에 닭과 둘이 같이 수도를 돌아다니자 병사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보았으나, 기사들이 아주 낯선 방식으로 안부를 건넨 적이 있다. 힌셔가 알기로는 기본적으로 기사들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서로 길에서 마주쳐도 친한 체를 하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는데도 이 시대의 기사들은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편이어서 대개 다가와 인사를 건네거나 자신을 소개했다. 닭과 수도를 산책하던 그날은 처음에 인사를 하러 오던 기사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닭과는 아주 무겁고 짧은 목례나 눈인사를 어렵사리 전달해, 힌셔는 그들이 서로 비밀 신호라도 주고 받고 있는 줄 알았다. 안부를 전한 기사는 아주 고통스럽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뭘 했나?”

“글쎄~?”

닭은 모르겠다는 듯이 시침을 떼었다. 다음 기사가 인사하러 왔을 때는 닭이 그 기사에게 시간 많냐? 하고 짧은 말을 주고 받았다. 몇 번 같은 꼴을 반복하던 기사들은 이내 멀찍이 서서 힌셔에게 다가오려다 멈칫하며 돌아가고, 다가오려다 그의 옆을 보고 발을 멈추고는 그자리에서 부담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힌셔는 그런 식의 주목은 처음이었으나 결국 제가 그 거리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이 느껴져 부끄러워졌다. 유독 그날 따라 거리에 기사가 많았고, 갈 수록 많아졌다. 옆에선 닭이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은 건 아니었지만, 마치 그들 만 통하는 언어로 다가오지 말라는 태도를 전할 수 있는 모양이었고 그게 더욱 많은 이목을 부르고 있었다. 그 뒤로는 다시는 함께 산책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자신을 떠받드는 이 시대 기사들 간의 공기는 불편한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영웅이 되어있었고, 어째서인지 그는 의존할 존재가 되어 있었으며, 어째서인지 임무는 도통 내려오지 않았다… 조금씩 그 이유를 깨달았으나 힌셔는 그것으로 그들의 전부를 판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기사들이 어떨지는, 결국 제몸으로 겪으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힌셔는 닭이 있기에 이곳에 느끼는 많은 괴리들을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기사로서 그런 위험한 맞수를 곁에 두고도 딴눈을 파는 것만큼 우습게 보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후배 호칭을 운운하는 기사에겐 다른 방식으로 골려주고 싶은 구석이 있었고, 노란 눈만 선명하고 늘 피로해보이는 침침한 기사 하나가 함께 떠올랐다. 통쾌한 성격을 자부하는 자신이기 때문일까. 닭을 부탁한다거나 닭이 나으면 다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는 제의는 제 생각에도 곤란할 터였다.

사무실에서 나와 혼자 건물을 돌아다니다 보니 바깥이 금새 어두워졌다가, 이내 고개를 든 달에 실내가 다시 밝아진다. 습기에 흐린 달빛이 실내로 흘러 들어오며 구조들을 비추어 간혹 옛기억을 더듬게 한다. 힌셔는 수도에 머물음이 좋지 않다. 과거와 두 시간선은 공존할 수 없다는 듯 단절된 그 공간에서는 무엇도 현재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옛형태가 거의 남은 이 건물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곳도 이전에는 군과 반반 나누어 썼는데. 여즉 황성 구석에 처박힌 이곳이 기사들의 건물이며 초라하거나 간소한 것을 넘어 상태가 좋지 않은 것과, 규모가 훨씬 불어난 집단이 되었는데도 예전보다 홀대받는 그들이 한켠으론 안타까이 여겨지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사들은 늘 황궁 복도에서 서있곤 하였다.

등을 덮은 붉은 망토와 함께 어두운 복도를 살피던 힌셔는 이질적인 그림자를 발견했다. 사람의 뒷모습은 아무래도 그가 찾던 괴담의 그것이었다. 등 뒤에는 동그란 물자국이 남아있었다. 옷의 나머지가 전부 마를때까지도 어딘가에 등을 받치고 오래 앉은 모양이다. 장난은 끝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려던 힌셔는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그 긴긴 시간 그것의 머리를 차지한 것은 무엇으로 무슨 까닭일까 하는 숙고에 덩달아 들게 된 것이다. 영웅은 이윽고 타이르는 어조로 입을 연다.

“이보게. 무슨 까닭으로 이런 곳을 배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지. 억울하고 한 맺힌 것이 많더라도 기사답게 사라져 주시구려.”

달빛이 분산하며 복도가 조금 더 밝아지고, 귀신은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뒤틀었다. 잠에서 깬 것처럼 순간 빛에 드러나 자세히 본 갑옷은 허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녹슬어 있고, 불결했으며, 무엇보다 오래 되었다. 그제서야 잔뜩 마모된 적색 갑옷과 다리 하나가 뭉텅 사라진 부근이 눈에 들어온다.

“…!”

“… OOO, 여기 계셨습니까.”

마치 만월이 차듯 힌셔의 마음 속에 기억들이 슬며시 차고 있었다. 기억이나 과거라 불러야 마땅한 것들. 어제였으나 저 육안으로 감지 할 수 없이 먼 곳에 있는 것들.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했으나 한줌의 흙조차 되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사라져 있다. 그는 한참을 혀끝을 더듬으며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익숙한 미소와 온기 하나 조차 없음에도, 힌셔는 어째서인가 다시 이런 날이 돌아올거라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수도에 올라오던 시절 어설픈 아이가 된 듯이, 다시 한 번 먼 간격을 두고 마주한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눈에 익었다. 모든 이들이 잊고 이름과 기억을 지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거기 있었다. 그리움이라는 말로 밖에는 힌셔는 그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다. 서리를 들이마신 것처럼 숨이 독했다. 어쩌면 자신도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숨이나 눈물 따위는 사실 한기에 불과한 유령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럴 수록 다시 없을 희망이란 사실에 괴로워져갔다. 날튼에서 목이 베인 기사가 이곳에 있을 리도 없었다.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져 갔다. 다정한 인사 한 마디 전할 수 없던 마지막처럼 이것이 이미 끝난 이야기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저를 축복해주시렵니까? 오 백년 전의 망령처럼 여즉 이곳을 떠나지 못한 저를.

들릴리 없는 말이 공기에 가득 차오르다가 붉은 갑옷으로 부터 끝내 시선을 거두고 나자 어둠과 함께 옅어진다.

검붉은 하마는 외진 강둑에 혼자 앉아있는 익숙한 기사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그 옆에 무기를 내려놓고는 털썩 앉는다. 중무장이나 망토는 벗어뒀어도 더운 날씨임에도 기사는 여전히 답답한 무복을 건장하게 둘러입은 채로 평소의 그다운 모습이었다. 붉은 깃과 붉은 망토를 물가의 버들처럼 흔드는 바람이 불었다.

“정말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던데, 그새 나았나.“

“어느 정도는 그러길 기대했지. ”

새까만 닭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올려 제 녹색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건물은 철거 한다더군.”

“선배는 봤어? 유령.”

“…글쎄. 다시 가보니 입구도 창문도 폐쇄되어 들어가기 어려운 꼴이더군. 그러니 정말 미신이라도 믿는 사람 같군, 새까만 닭.”

목이 있어야 알아보든 말든 하지. 닭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 부터 그러는게 나았을지도. 더이상 그런 얘기는 없겠지.”

그러길 바라네, 하마는 시선을 바로 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말로 그들이 현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해도 시간 따위가 규정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것이다. 살아갈 시간 조차 제대로 택할 수 없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는 그들이었다. 니젤의 오후는 느랏하고 끈적한 습기로 차오른다. 닭의 동료는 새로 단장한 별천지 건물로 출근하고, 근무자들은 휴가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에피소드로 내세울 괴담 하나 정도가 늘어있을 것이다. 힌셔는 그렇게 빨리 새건물을 찾은 것에 축하를 보내다가 닭으로 부터 길고 미묘한 시선을 오래 받아야 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2


  • 잠자는 앵무새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름의 흔적이 옅어져가는 이 끝물더위에 끝내주는 오컬트미스터리 기린닭하마를 읽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어요! 축축한 듯 어둑한 듯한 톤이, 이제 말할 수 없는 과거에 누군가를 묻고 온 하마와 닭의 반응...너무 최고예요. 군데군데 박힌 유머까지도-귀신이 나와도 나보다 나이가 많겠느냐는 농담은 정말 최고였어요. 보자마자 터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주한 듀라한이(갑자기 멈춤) 하마가 본 듀라한의 정체와 닭이 본 듀라한의 정체가 아주 동일할지는(다르기에 저런 반응이었다고 초견으론 그리 생각합니다만) 또 여러번 읽어봐야할 거 같아요. 정말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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