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잔불의 기사/와론+지우스] 교섭

* 글의 타임라인은 담청색 기린의 서임 후, 와론과의 사상지평 딜 있기 직전에서부터 시작?하면?? 맞나??? 혹 뭔가 타임라인이 틀렸다면 온후하게 알려주세요,,,

* 혹시 추후에 뭔가 밝혀질까봐. 이 글은 무료분 99화 풀린 시점에서 쓰였습니다.

* 아니 근데 이거 원래 저승사자 겸 암행어사스러운 와론을 쓰고 싶은 거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 논CP글로 쓰였으나, 지와지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 원작과 관계없는, 모브 기사가 등장함(정말 단역임.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

!경고!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살해묘사가 있습니다.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기사라는 제도는 촘촘하게 잘 짜인 직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어느 쪽이냐 하면 신뢰와 명예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기반을 둔, 이게 어떻게 굴러가느냐고 경악할 정도로 엉성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다. ‘기사’를 완결된 존재처럼 여기는 풍토이기에 존재하는 이 제도는 정작 기사의 부정을 막을 장치가 없다. 기사 역시 결국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힘을 가지고도 처음부터 기사라는 직위가 보장하는 무언가를 탐하고 기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자를 견제할 요소는 과연 존재하는가.

기사가 되고 달잔 님 직속으로 배치된 직후, 지우스는 바로 그 점에 대하여 논한 적이 있었다. 중견 기사인 그는 조금 피곤한 얼굴로 미간 새를 문지르고선 입을 열었다.

“억지력이라는 게 있지.”

그러면서 마법장치로 된 잠금쇠를 열고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줬다. 표지는 아무것도 없이 통계라고만 쓰였을 뿐인, 열 장 남짓한 보고서였다. 제목을 쓴 글씨는 설핏 보더라도 달잔의 것이었으니, 그가 무언가를 위해 미리 마련한 자료인 듯했다.

기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건네진 서류를 넙죽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읽어 내려갔다. 제목 그대로인 통계. 표와 숫자, 간단한 메모와 각 줄에 얽힌 자료보관소의 구획이 적혀있을 뿐인 이것은 그의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이었다.

“이걸로 답이 됐나?”

“네, 충분히.”

머릿속에 연도와 일자를 차곡차곡 새기며 지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지우스는 사상지평에 대한 실험이 없는 자신의 빈 시간에 궁의 기록보관소에 틀어박혔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군청색 거북이 님이 맡겼던 몇몇 뒤처리의 진상을 확신했다. 그가 꺼내다 놓은 사건‧사고기록은 기사 등록 연표와 나란히 두고 읽으면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가 다 대 일로 기사를 때려눕혔던 이래 수도를 향한 불온한 움직임이 확실하게 줄었다거나.

그리고 또 하나. 새까만 닭. 그가 기사가 된 후, 특히 기사 사냥이 본격화된 이래로 지방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탈세나 위법행위가 줄었다.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기사’를 매장해버리는 기사의 존재는 어중이떠중이의 헛짓거리를 차단하는 억지력이 된 거다. 기사에게는 오점이라 알려진 ‘기사사냥’은 오히려 이 제도를 지탱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좋게든 나쁘게든 군청색 거북이는 보수적인 기사이므로, 그가 황제나 기사 사회에 해가 될 존재를 가만둘 리 없으니 틀린 판단은 아닐 거다. 새까만 닭 개인이 어떤 인물인지는 혹 연이 있다면 직접 보고 생각할 일이었고.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우스에게 있어 이 명백한 자료가 주창하는 바가 중요했다. 바로 억지력은 기사에게 분명 작동한다는 점. 사상지평의 특성을 가장 효율적이고 평화롭게 이용할 수 있는 저의 가설은 바로 새까만 닭의 기사사냥이 일으킨 여파로 인해 확고부동한 설득력을 가진다.

 

기사란 결국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막고 아둔하게 힘만 지닌 멍청이인 경우가 훨씬 많고, 당연히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아주 골고루 섞여 있기 마련이다. 와론은 막 성벽을 나서는 물류 마차의 행렬을 흘긋 보고서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 깃이 그 움직임에 맞추어 호를 그었다.

“흐음.”

이곳은 지방의 작은 도시. 중앙의 입김이 잘 닿지 않고 싸울 일도 그다지 없는 평화로운 벽지여서 근무지로 지원하는 기사도 거의 없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있어 그걸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아까의 행렬은 그걸 옮기는 걸 테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기사답지 않은 기사라는 소리를 실컷 듣고 산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법이나 규칙‧규범을 모르는 건 아니다. 애초에 아는 것과 지키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닌가. 어쨌건 요지는, 저 마차들 중 일부는 규정보다 짐을 덜 실었다는 사실이다. 뭔가 냄새가 난다. 게다가 사냥꾼으로서도 어떤 예감이 들었다. 어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새끼가 헛짓거리를 한 것 같은, 기사이되 기사가 아닌 짐승이 있다는 그런 감각. 바람결에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육식동물처럼 새까만 닭은 슬그머니 숲 그림자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기사가 되고 나서 연지색 두더지 데니스가 가장 처음 깨달은 것은 이제 이 세상에는 저를 막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어스와 황제에게의 충성을 제하면 기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없다시피 했다. 기사는 오로지 그들의 자율적인 보고에 의해 동향이 파악된다. 기사라는 이름을 취하고 어디 벽지에 박혀 조용히 지내더라도 제재받지 않을 정도다. 사실 어디서 조용히 객사하더라도 모르는 건 아닐까도 싶었다. 굳이 규칙이 있다면, 오가는 성의 영주에게 출입 보고해야 하는 정도지만, 몰래 성벽을 넘고 안에서 제 존재를 들키지 않는다면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기사에게는 그런 걸 가능하게 하고도 남는 신체 능력이 있다.

기사 제도는 순진하다 못해 멍청할 정도로 신뢰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아니, 실은 제도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둘 것도 아니었다. 이건 뭐 거의 마을 꼬맹이들의 구두 약속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 틈을 연지색 두더지는 아주 대놓고 파고들었다. 여기서 민간인 도보 기준 이틀 걸리는 거리에 있는 이웃 영지에다 임무지를 받아놓고, 이곳의 물류를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빼돌려 소소하게 득을 본 거다. 공공의 적이 될 만큼의 나쁜 짓도 아니고, 나름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 만큼의 돈이 되는데 굳이 서쪽 다리 같은 곳에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다.

성벽의 경비 인원도 산짐승을 경계할 정도로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은 이슥한 때, 데니스는 어두운 숲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도움닫기를 했다. 이제 여느 때처럼 성벽을 넘고 물건을 챙기고 시치미 뚝 떼면 될―,

갑자기 시야가 훅 비뚤어지더니 입안에 흙 맛이 느껴졌다.

“까꿍. 드디어 만났네?”

얼핏 듣기에 성별을 확신하기 어려운, 그러므로 오히려 특정하기 쉬운 그 음색에 두더지가 흠칫했다. 새까만 닭. 그렇지만 어째서 그가 여기에? 아무리 벽지에서 지낸다 해도 나름대로 밀수에 손을 대고 있다면, 특히 기사라는 신분을 지녔다면 더더욱 경계해야 할 인물이 겨우 좀도둑 나부랭이에 불과한 제 앞에 있다니.

“어째서…?”

“아~, 내가 널 어떻게 찾았냐고? 그냥 네가 운이 더럽게 없었지. 지나가는 길인데 어째 물류 마차의 높낮이가 미묘하게 다르더라? 비가 온 직후라서 알아보기 좋았지. 응응. 그리고 그냥 닷새 여기서 기다려 보는데, 어이쿠 누가 담벼락을 몰래 넘네? 이름값 참 잘한다, 밀수업자 새끼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뱅글뱅글 맴돌며 전후 사정을 털어놓았다. 연지색 두더지는 그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소리를 빽 지를 뻔하다가 어떻게든 삼켰다. 여기서 비명을 질렀다간 저 성의 경비병이 출동할 거다. 그건 안 됐다. 그리고 반항은 애초에 선택지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사냥꾼’ 새까만 닭을 평범한 기사 나부랭이가 어떻게 이기느냔 말이다.

“목, 목숨만은―.”

칫, 재미없게. 그게 무슨. 연지색 두더지 데니스의 의식은 딱 거기에서 흐려졌다. 뒤늦게 복부에 뜨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샌가 그의 창이 저를 꿰뚫은 거다. 차라리 맞서는 게 나았을까. 아니, 그랬다간 고양이 앞의 쥐처럼 괴롭혀졌을 거란 확신이 있다. 왜냐하면, 저는, 명예를―.

맥아리 없이 숨이 훅 꺼져버린 시체에 발을 대고 와론은 론누를 쑥 뽑아 허공에 털었다. 나린기는 특유의 결벽함으로 그 동작 한 번에 불순한 것을 떨쳐내고 본래의 빛을 찾는다.

“마지막까지 남는 게 청각이랬으니, 아직 듣고 있다면 들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먼저 사람이길 포기한 건 너고, 네 선택이니까. 내 명예는 바로 너 같은 새끼들을 조지는 데에 있거든.”

뭐, 듣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기사란 원래 제멋대로인 놈들이잖아? 그 뒤로 낄낄 웃음소리가 따라붙고, 어스름한 달빛에 목에 걸린 녹주석이 흐리게 반짝였다.


지우스는 익명의 고발로 연지색 두더지의 시신이 발견된 벽지에서 그의 밀수입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고, 데니스의 기사명을 영구 박탈시키는 절차를 밟았다. 확인한 시신의 흔적에서 그는 새까만 닭을 읽어냈으나, 투서는 처음 받았던 익명 그대로 남기기로 한다.

그리고 사상지평의 2차 시험에서 담청색 기린은 새까만 닭과 대련했다.


호기심이 생긴 대상에게는 진득하게 달라붙는 새까만 닭 덕분에 지우스는 그를 관찰할 기회를 얻었고, 그 결론으로 와론이 매번 애들 생떼처럼 장난스럽게 그렇지만 분명한 진담으로 건넸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그 제안, 받아들이지.”

“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기린. 무르기는 없기야.”

“내가 실언하게 생겼나?”

“글쎄. 어쨌든 사상지평에 대한 내 요구는 하나야. 내가 원할 때 네 그 힘을 써. 그럼 뭐, 나는 내가 굽힐 수 있는 선까진 너한테 굽혀줄게.”

“계약서 같은 건 필요하나?”

되게 고지식하네. 와론은 그 말에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웃다가 정색했다.

“네가 정말로 ‘기사’라면 이 대화로도 충분하겠지. 안 그래?”

“그럼 이걸로 계약 성립이다, 새까만 닭.”


원래 추신을 덧붙이는 글이 잘 쓴 글은 아니라지만, 본래 구상하곤 달라져버렸고 하고 싶은 말 하는 게 오타쿠의 본능이니...

쓰기는 저렇게 썼지만, 아마도 와론은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기사사회의 어떤 억지력처럼 작용하고 있고, 그 점에서 달잔이 눈감아주고 사건을 은폐축소하고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그리고 그렇다면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더래도 달잔 직속(으로 추정)인 기린 또한 저런 뒤처리 업무를 해봤을 거고, 머리 팽팽 돌아가는 애니까 기사 권한으로 사건사고 기록 등등 뜯어보고서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새까만 닭'을 알지 않았을까. 그러니 억지력으로서의 사상지평이 작동할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니냐는 그런 생각. 암만 힘이 있다고 해도 그게 반드시 작동할 것이라는 확신은 너무 나이브하니까, 기린이 그렇게 확고하게 밀어붙일 근거가 새까만 닭이었지 않을까(겸사겸사 순백의 코끼리가 다대일 다 까버렸던 것도 어느정도 억제력의 통계를 가졌을 거라고 생각함)라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원할 때 네 그 힘을 써"라는, 엉뚱한 데에 쓸지 모르는 그런 딜을 그렇게 겁나 신중하게 구는 기린이 덥썩 물었다는 게 분명 뭔가 있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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