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곳

왜 그 사람이랑 똑같은 말해

230715

*기린닭 혹은 지와지 + 목주와론

*새까만 닭의 잊고 있던 상처를 건드는 담청색 기린

*와론에게 113화를 반영

정말 좋아하는 담우님의 그림 연성을 보고 썼습니다. 와론의 푹 숙인 고개를 보면 마음이 쉽게 미어져요. 이 연성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듬뿍 담습니다

    전투의 흔적으로 한층 해진 망토는 현재 새까만 닭의 몸 상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온몸이 격통을 호소하고 얻어 맞은 복부 때문에 속이 뒤집혀 구역질을 한다. 투구를 치워 한 차례 게워내고 멍들고 움푹한 몸을 대충 일으킨다. 와론은 지쳐 있었다. 왼쪽 어깨가 너덜대며 무언가가 속에서부터 찢겨나간 것을 알아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반응하지 않는 게 예사다. 적을 속이기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기사가 되면 지극히 비효율적인 반응들을 인내하는 비이성적인 방법을 배운다. 기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싸울 수 있다. 닭에게는 전투의 방해물조차 되지 못한다.

통증이란 전투에 수반되는 감각에 불과한 것이다.

"네 몸을 좀 아끼는 게 어떤가."

순간 새까만 닭은 굳어버려 기린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기린은 그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턱짓으로 희미하게 색이 짙고 몸에 달라 붙은 망토의 왼편을 가리킨다. 피가 흐르잖아, 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 뒤에 어떤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은 충격에 휩싸여 와론은 그대로 정지한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시감이다.

'네가 기사들을 너무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오랫동안 속에 엉켜있는 실타래의 끝이 발견되어 무엇인가 풀려 나온다.

체구도, 목소리도, 하다못해 색깔마저도 전혀 닮지 않았는데 기린에게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 기분이 혼란스럽다. 그러나 속에서 울컥 치솟는 감정이 닭을 참을 수 없게 한다. 네가 아닌 그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커다란 체구를 자신보다 작은 지우스의 품에 무너지듯 묻고 팔을 둘러 목을 감쌌다. 지우스의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그가 안기기에는 낮고 모자란 품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새까만 닭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도저히 보기 힘들어 한마디 했을 뿐이다. 기린의 말을 들은 그늘 속에서 이채가 감돌았다. 들여다 보일 정도의 거리가 불편해 기린은 와론에게서 물러서려는데, 와론의 무게가 그를 와락 덮친다.

푹 숙인 고개가 괴리감으로 안겨온다.

"가만 있어봐." 

낮게 쉰 목소리가 그에게 명령한다. 지우스는 와론을 밀어내려던 동작을 멈춘다. 

누군가 그를 걱정하는 것이 너무 오래된 일이라 새까만 닭은 그 감상을 걷잡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숨을 쉬어 본 게 언제였더라. 이것은 와론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아집이다. 한참을 헤매였으며 그의 안에서 내쳐버리고자 그렇게도 노력했으나 끝내 비워내지 못한. 오래된 구정물처럼 가슴 속에 고여 자신을 썩게 하는.

어떠한 담청의 맑은 물로도 씻어낼 수 없고, 어떤 생명의 귀함을 아는 신수도 치유할 수 없는. 

고칠 수 없이 병든 부분이다.

기린의 한 마디에 와론은 그의 인생이 새까만 구정물에 쳐박혀 온 것을 실감했다. 와론도 처음부터 강한 기사였던 건 아니었다. 

그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혐오스러운 한심함과 나약함을 대면하면, 목걸이를 손에 쥐고 스스로를 강하게 타일러 왔다. 이들과 같은 기사가 되는 날은 그에게 오지 않으리라. 싸움 끝에 몸이 진창이 되어도 버텨내는 건 그런 마음이다. 죽음은 그에게도 찾아오겠지만 그런 변명으로 물러설 것이 아니다. 

도망은 그 사람을 버리는 일이다. 약한 눈이더라도 똑바로 떠서 봐야 한다. 그들 앞에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심은 손을 쥐며 살려달라고, 

숨죽여 그것에게 구조를 청한 건지도 모른다. 앞 뒤로 어둠이 꽉 쩔어있어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할 때는 어디로도 나아갈 공간이 없다. 검은색의 이명과 투구가, 어둠은 새까맣게 그를 덮고 그늘 속에 감춘다. 눈을 감으면 오로지 검은 것 투성이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인영(人影 )을 새까만 닭이라고 부른다. 그는 그림자가 없는 데도. 그가 와론이기를 포기하는 순간부터 무언가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투구 안에 있는 것은 마땅히 밖으로 기어나올 만한 것이 아니다. 

와론이 살고 있는 그 안에는 어딘가 외칠 곳도, 기댈 곳도. 창살 모양의 투구 틈으로 비치는 작은 불꽃 하나 조차도. 

회색 머리의 여자가 헐떡이며 헤매고 있다.

한때 자신을 걱정하던 소리가 메아리 친다.

기사를 죽여도. 힘을 길러도. 다시 그 힘으로 기사를 죽이고. 살인은 한낱 경험이 되고 그는 사냥을 터득해간다. 스스로가 저지른 일로 죄악감이 폐부를 찔러도 마음이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현상을 반복했다. 그의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망가졌다. 희미하게 남은 일말의 선의가 약자를 지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잘 되지 않았다.  

빈번하고 진득한 육체의 고통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때때로 찾아오는 정신의 고통은 광포하게 그를 찢어놓고 쉽게 떠나지 않는다. 마음에 고인 구정물이 흔들리고 사정없이 뒤집어 썼다. 그것을 비롯한 존재들에게 두서없이 더러운 감정을 쏟아낸다. 작금의 그의 혈기를 불러일으키고, 꼬일대로 꼬여 아군을 죽이고, 자신마저 갉아내리는 상황들은 스스로의 탓이 아니라, 잘못된 존재들의 탓이라고. 

세계의 모순은 일그러진 그들이지 자신이 아니라고.

그러나 아무래도 스스로를 역겨워 할 이유가 더 많을 뿐이다. 머리가 온통 궃게 물들어 젖은 것이 덕덕 떨어졌다. 자신이라는 인간성을 바닥까지 내던지면서도 나올 수 없는 아집이 가득 차오른다. 와론은 어둠 속을 박박 긁는다. 그의 손으로 살인의 길을 택했다. 그들이 그 사람을 떠밀었고, 이제는 자신을 떠밀기에 닭은 오히려 버티고 선 것이다. 

벼랑 끝에서 누가 자신을 밀지 않았더라면 와론 스스로가 밀었으리라. 

이윽고 이 모든 것을 당해내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새까만 닭은 충분히 강해졌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보다 강해지는 방법을 찾아냈다. 어둠에 길들여진 눈이 본래의 투명함 대신 명민하고 날카로운 포식자를 닮는다. 그러고 나서 참으로 오랫동안 잊어온 것이다. 스스로를 먹어버리고 태연한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강한 기사는 과거를 떠올리며 나약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버렸다. 

짙은 진창에 가라앉은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오늘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정말로 오랫동안...

"...왜 그 사람이랑 똑같은 말해,"

뭐라고? 작은 목소리에 기린이 재차 묻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상처가 난 것보다도 자신은 지쳐있었다. 와론은 결국 인정하며 잠든 것처럼 묵직한 무게로 지우스의 어깨를 기대어 누른다. 어깨 위에서 느린 호흡의 끝이 섬세하게 떨린다. 여러 번 나뉘어 들이 쉬는 숨에 섞여 나오는 음성이 떨리는 것은 착각일까. 지우스는 다친 채로 돌아다니는 닭을 멈춰 세울 때의 짜증감과 분노가 가라앉는 걸 느낀다. 처음으로 그는 제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엇 때문에 지우스에게 이런 모습까지 내비치고 있는지. 기사에게는 누구나 상실이 있는 법이고, 사정이 있는 법이고. 상처가 있는 법이고. 그는 다만 닭의 무언가를 건든 모양이다. 애초에 혈향이 풀풀 풍기는 와론을 모른척 하지 못한 그의 탓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새까만 닭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어 기린은 그가 평소대로 돌아오기를, 자신을 놓아주기를 기다리면서,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가만히 바랄 수 밖에 없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

묵묵히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마음에 새긴다.

...

그런 아픔을 조용히 안고도 살아가야 했다. 네 흔적을 따라서 살아가다 보니 어느 날 불현듯 되돌아온 건가.

너를 보던 날 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계속 숨을 참아온 것 같아 그 말을 건넨 어깨에 무너지게 된다. 감히 걱정을 해댄, 흙탕 속을 헤집고 가던 나를 다시 불러 세운 사람은 이 기사가 아닌 너일지도 모르니까.  

나는 수많은 것을 버렸어도 결국 너만은 버리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네 목소리가 내게 들리는 날이 올 것이다. 명예를 저버린 기사의 이름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계승하듯, 우리가 함께 하는 기록도 반드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기사(機事)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너 없이 혼자 무의미한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니니까.

그러므로 이 어깨에 한 번의 숨을 내뱉고 나면,

지금 순간만 흘려내고 나면,

나는 다시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기사가 될 거고 이 작은 기사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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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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