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닻

담청색기린

230731

    뱃길을 따라 내리 나아가는 작은 어선의 뒤로 어느덧 따라오던 대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다. 처음 가보는 동대륙에 대한 어떠한 신비감이나 기대를 느낄 새도 없이, 긴장만을 채우고 잔뜩 굳어서 다녀온 동대륙행이었다. 제국을 정탐하려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자기와 동료들의 목숨 하나는 무사히 건사해온 특수 1기 기사들에게 고마웠고 자신은 또 어느 누구 하나 잃지 않고 임무를 끝낼 수 있음에 안도감이 차오른다. 중앙대륙에는 더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만 미숙한 반가움에 기린은 자신 역시 아직은 부족한 면이 많은 기사로, 신입 딱지를 뗀지 그리 오래되지 않음을 실감한다. 노련한 기사ㅡ이를 테면 새까만 닭이나 군청색 거북이ㅡ라면 마음이 제멋대로 일희일비 하지도 않을 텐데. 

자꾸만 풀어지려는 정신머리를 부여잡으려 애쓰며 기린은 동대륙에서 얻은 성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용의 존재와 초월적인 힘이 대륙에 작용하여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인간과 무관히 전설속에 묻혀 살아야 할 용이 버젓이 정계과 군사에 관여한다. 중앙대륙에서는 기어스부터 시작하여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연달아 발생하며 제국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두 대륙이 상황이 비슷하게 돌아가지 않나? 문득 기린은 서대륙의 상황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가면 특수기수가 아닌 강한 기사들로 분대를 꾸릴 마음을 먹는다. 양 대륙간의 전쟁을 막는 것만으로 멈출 수 없는 문제가 밀려오고 있는 지도 몰랐다. 달잔에게 급선무라고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파고가 높은지 선체가 위아래로 크게 출렁이자 기린은 등을 기대고 있던 돛대에 머리를 세게 박았다. 빗줄기와 함께 튄 바닷물이 상처에 들어가자 쏟아지던 졸음이 바싹 달아난다. 차갑고 짭짤한 물이 후덥지근하게 열이 오른 몸을 식혔다. 배의 움직임이 실제 태풍에서 비롯된 것인지 고통에 의식을 놓고자 하는 자신의 몸이 느끼는 착각인지 기린은 알 수 없었다. 이미 거세게 이는 현기증이 멀미와 방전된 체력의 회복해달라는 호소 중에 무엇인지조차 구분 할 수 없다. 그의 상태를 알아보고 이마를 짚는 이가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다들 폭풍우에 정신이 팔려 모자를 쓰고 자는 것 같이 보이는 기린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기린은 팔짱을 껴 옆구리에 바닷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상처를 압박했다. 

어쩌면 지금 중앙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길하고 시끄러운 조짐들은 모두 그의 기어스 실험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사상지평의 실험으로 부터 엮여있는 세 사람이 대륙을 시끄럽게 만든 요주의 인물들이 되었다는 것에서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다. 사건들이 기어스 실험이라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이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그거야말로 개연성인걸까. 실험에 참여하기를 권하고 셋을 한 데 모이게 한 황제와 기사의 수뇌부를 떠올리던 기린은 더 이상 사고를 뻗어나가기를 멈춘다. 그 힘이 억제력으로 쓰려는 계획이 과연 자신만의 의지로 시작된게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담청색 기린의 사상지평은 그 후로 동료기사들의 입담과 새까만 닭의 유명세의 축복을 받아, 기사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반향을 일으켰다. 예상보다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것과 대련을 청해대는 기사들의 관심은 부담스러웠지만, 기사들의 세계에 국한된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새까만 닭은 기린을 상대하고 싶다면 자신을 먼저 상대하라는 말을 퍼트림으로서 그의 보디가드를 자처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강한 힘이 있다해도 가시적으로는 신입에 불과한 무명의 기사보다는 기사를 두 자릿수나 처단했다는 성격 나쁜 기사가 기사들 사이의 기피대상이었다.

레기아는 그 후에 기사명을 받고 자유기사가 되었다. 레기아가 개발한 마법식은 카톤이나 스크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어 확실히 편리하기는 했다. 마법은 훨씬 효율적이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퍼지고 있어, 소수의 신성한 재능이었던 것이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마법사가 되어 마법사들을 휘저어 놓았다는 경이로운 소문은 이전에도 들었지만, 기사가 되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할 줄은 몰랐다. 레기아는 자유기사들의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기사들간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걸 혁신이라고 불러야 할까? 족제비 건으로 모인 회의장에서 기린은 이전에 레기아에게서도 발견해냈지만 당시엔 잠잠했던 광기가 눈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기린에게 인사하며 지나갈 때 그는 드물게 웃고 있었고, 그 후로는 항상 그런 상태였다. 기린은 동대륙 장군을 조우하자마자 레기아를 가장 먼저 의심했지만, 레기아는 말로만 불만스러운 티를 냈을 뿐 정작 문제를 일으킨 쪽은 따로 있다는 걸 이제와서야 알았다.

2차 대련을 끝으로 마무리 되지 못한 실험이 중단 된 후, 라우룬은 자신의 부족에게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 후예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별천지 측에서 내린 임무에 관련된 사항은 기린만이 달잔에게 은밀하게 전해들었다. 기린은 그 후로 라우룬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라우룬의 행방은 묘연했지만, 동대륙 장군과의 전투에서 조우할 줄은 몰랐다.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라우룬은 아마도 기린을 죽이려 할 것이다. 용의 후예와 장군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사상지평을 막고 싶어 할 것이다. 기린은 라우룬을 보았던 그 짧은 기간에도 그가 자신을 회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라우룬은 폐쇄적인 북쪽 출신답게 벽을 세웠고 다소 자기 중심적인 구석이 있기는 해도 큰 야망이 있거나 무고한 피해를 입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후천적이고 불행한 사건으로 그 이후로 라우룬의 망가진 정신을 복수심이 채우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한 이들이 대부분 무력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기사 셋에게 몰살당한 지옥 속에서, 일족의 수장이 부재했다는 사실이 라우룬에게 어떤 비참함과 무력감과 울분을 더해버렸을지 기린을 알 것 같았다.  몇 년전까지도 총기를 띄고 차분하게 빛나던 라우룬의 검은 두 눈이 온통 살의에 젖어 있었다. 

특수 기수 전원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지금의 기린 또한 그들이 모두 목숨을 잃는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그 죄를 갚을 수 없을 것이다. 기사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스스로가 담청색 기린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기린은 속으로 견습들을 하나하나 호명해보았다. 그들 모두가 무사히 이명을 받고, 기어스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기사가 되었다는 어색함 속에서도 피어난 고양감에 드물게 들떴던 자신이 생각났다. 모두가 기사가 될 가능성은 적고, 앞으로 죽는 이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은 본인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그런 상상에 매달리는 게 기린에게 위안을 주었다. 리아민도, 나견도 이탈했지만 나견이라면 어쩌면 기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과 닮은 그라도 기사가 된다는 사실에 들떠할까? 그 광경을 상상해보던 기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 나이에도 라우룬과 비슷한 빛을 띄며 명예를 설명하던 나견의 모습에 기린은 나견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루스를 심문하던 나견의 눈이 진득한 복수심을 담고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냐는 물음의 무게가 턱 박혔다. 명예론을 얘기하던 나견의 눈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어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깊은 상실감을 담고 있었고, 그 무엇보다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짜 나견이라는 사람은 어떤 자이지? 어떤 성격, 어떤 말, 행동, 바람을 가지고 있지? 무엇이 그의 진짜이며 어디까지가 연기일지 고민하던 기린은 함께 크로넬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를 떠올린다. 어디서 나견을 보았는지 흐릿한 정신으로 하나씩 그때의 상황을 짚어봤다. 은하류, 견습동기, 크로넬, 마법사, 함께한 식사, 얼음사막, 장군 ... 자신이 그때 임무에 몰두해 있고 나견을 의심하느라 무언가를 놓쳤던 것은 아닐까? 나진의 흉내가 아닌 진짜 나견을 찾는 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를 믿는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의 직무유기이자 무지한 방관일지도.   

라우룬에게 베인 옆구리에서 끔찍하게 찌르는 고통이 심해지고 있다. 현기증이 기린을 독하게 내리 눌렀다. 의식이 잠시 꺼졌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눈 앞에 보이는 하늘이며 바다가 온통 흐려 짙은 회색을 띄고 구분할 수 없이 요동친다. 흔들리는 선체가 딱딱해 조금이라도 덜 부딫히는 곳을 찾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잡아보려고 노력한다. 몸의 긴장이 풀어지며 노곤한 졸음이 파도처럼 덮치는 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레기아뿐만 아니라 한 명이 더 있었지. 그 실험에 엮여있고 기사를 싫어하는 기사. 실험의 조력자였던 새까만 닭, 그 역시도 무언가를 하고 있나? 특수2기수를 담당하는 내내 닭이 그에게 하듯이 기린 역시 그를 관찰해왔지만, 닭은 자신과 함께 행동할 때 별다른 구석은 없어보였다. 론누를 가지고 정찰하거나 견습과 자기에게 시덥잖은 장난을 걸 뿐이다. 새까만 닭은 변수 그 자체지만 기린은 동대륙으로 떠나있는 동안 그에게 대륙에 남은 특수기수를 맡겨둔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기사들도 있다해도 결국 닭의 행동에 따라서 동대륙과 용의 후예와의 전세가 좌우될 것이다. 

사상지평을 쓰고도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이미 큰 도박에서 이겼다. 닭이라는 기사는 바보가 아니며, 외부의 시선처럼 단순히 싸움과 살해를 즐기기 때문에 행동하는 자도 아니다. 닭에 대한 기린의 가설은 그때 검증 받았고 그라면 적어도 돌아갔을 때 용의 후예와 손을 잡고 있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있다. 두번째 사상지평은 언제고 사용할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닭이 자신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5년이나 서로를 봐왔으니 이 정도의 파악은 해냈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하며 기린은 그의 알 수 없고 새카만 투구 속을 가늠해보았다. 눈치가 빠른 닭이 있었다면 분명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분노에 가까운 성질을 부려댔을 테지. 그리고 까맣고 늘 펄럭이는 망토를 젖혀서 잔뜩 넣어 둔 회로를 꺼내 덕지덕지 붙일 것이다.  

먹색의 구름이 잔뜩 끼어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기린은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대충 해질녘이 되었겠거니 싶었다. 어선은 운항을 마치고 닻을 내렸다. 항구가 아닌 중앙대륙의 외진 해안선은 여전히 비가 내리며 모래는 축축했으나, 그가 익히 아는 풍경이었다. 열은 내렸지만 제대로 된 영양보충도 없이 먼 거리를 다녀온 몸은 천근만근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그의 지치고 닳아버린 몸을 무생적인 장치처럼 다시 움직여 작동시킨다. 배에서 내린 기린은 무게중심이 흔들려 땅에 손을 짚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비가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었다. 

동대륙에서 넘어온 건 아마도 그의 일행 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견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올 것이다. 복수를 위해. 그리고 그 일행들은 동대륙의 장군과 미지의 존재들일테니 두 전력이 마주친다면 곧 전투가 벌어진다. 장군과 맞붙을 때와 같이 다시 사상지평을 쓰게 될 지도 모른다. 나견이 그들에게 붙잡힌 채로는 퇴각 할 수 없으니 이번에도 그를 탈환하는 것이 우선이다. 기린은 우선순위를 정리하며 머리를 굴려 작전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버텨내 제 몫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사라 불리는 것이다. 

이번 원정에서 사상지평을 쓰지 않았던 건 나견이 있었고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사상지평을 많이 사용하면 몸이 망가진다. 전쟁의 기미가 심상치 않게 보이고 변수가 많은 현재 상황에서, 새까만 닭에게 힘을 쓰지 않겠노라 맹세할 때 기린은 이미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설령 닭의 손에 죽지 않더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힘을 사용하는 상황은 계속 발생할 것이다. 파디얀의 나린기와 비슷한 영향으로, 압축된 방대한 힘을 쓸 때마다 무력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까지 함께 긁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쓰는 만큼 채우기를 갈구하는 힘은 평상시에도 그를 현기증에 빠트리고 작아진 생명의 그릇에 체력은 쉽게 고갈된다. 계속 사용한다면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몸이 바스라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특수기수들의 미래가 틀어지는 실수, 자기를 지켜주던 이들을 뒷모습만 바라보다 쓰러지게 하는 실수만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생명을 내어주는 것에 대한 환상은 없다. 희생적인 서사를 즐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린에게는 넘어지면 잡아줄 자가 있다. 사라지면 미래를 이어받을 자가 있다.

사상지평을 사용함으로서 그 순간 몸 바쳐 그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게 그의 크나큰 명예이다. 기사들은 순간마다 명예를 행한다고 하지만 기린은 그것에 크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게 솔직한 속내다. 그러나 모래알 같이 흘러내리는 그의 약함이 4년 동안 모여 후퇴하는 동료들의 뒤를 지켜주었을 때, 이것이 명예라면 그 역시 불나방처럼 뛰어들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담청색 기린은 명예는 앞세우지 않지만, 말로서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라 두 발로 뒤에 버티고 서는 것이 기사가 행하는 정의라면 그는 기사가 되기 위해 기어스 조차도 어길 수 있다. 그리고 여차할 때 가장 강한 패로 어떤 전황도 뒤집을 수 있는 그가 무기가 되기 보다는, 기사가 되는 것이 그에게도 뒤를 따라올 이들에게도 기쁜 일이다.

몸부림과 고뇌에 무색하게 힘이라는 것은 참 지독하게 그에게 얽매고 있다. 어쩌면 유사시에 무의식적으로 꺼내놓는 그의 두 손목에는 쇠사슬이 감겨있는 지도 모른다. 쇠사슬의 끝에서 기린의 손목을 당기고 있는 건 동료들의 목숨인지도 모른다. 사상지평은 명예로 부추길 수 없는 이성적인 기사를 시험대에 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매어놓은 사슬을 의식하게 한다. 

기어스가 그에게 무엇을 저울질하고 있는지 기린은 잘 알고 있다.  

기린은 해안에서 멀어지며 뒤쪽으로 사라지는 모래사장을 힐끔 넘겨보았다. 태풍과 멀미에 고생하면서도 짧게나마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서서히 하늘이 개며 구름을 통과한 햇빛이 지는 것이 보인다. 머리 위의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수평선에서 불어오던 태풍이 약해지고 있다. 며칠 간은 맑은 밤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