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용울음
용의 후예와 리아민. 리아피도
230811
0.
레툰에서 눈이 내리는 것은 신성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하얀 눈 속에서 용이 휘몰아 친다고 믿는다. 눈보라 속에는 용이 있다. 간혹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바람사이에 그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전해진다.
레툰은 험준한 산악과 고원이 뒤섞인 땅이다. 날씨가 온화한 하절기에는 아무 색도 없는 바위산과 황무지와 간간이 협곡 사이로 숲이 나타나는 공허한 곳이다. 사람이 사는 몇 안되는 마을들은 식물조차 자라지 못하는 높고 메마른 산맥을 피해 사이에 숨은 평탄한 지대에 위치했다. 레툰에서는 늦여름부터 이미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해 가을이 끝날 무렵 눈이 펄펄 내려 사방을 희게 뒤덮는다. 칙칙한 갈색의 마을들이 하나둘씩 눈에 파묻혀 낯익은 풍경이 되고, 볼에 닿는 온도가 익숙하고 차가운 한기를 품는다.
이곳과 대륙에서 쓰는 겨울이라는 말은 일년 내내 눈이 오던 그곳과 전혀 다른 것을 지칭했다. 이곳의 겨울은 부족의 언어로는 간절기를 뜻할 것이다. 그리고 부족의 겨울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위가 뒤덮여 잠잠할 때야 거대한 몸을 일으켜 숲을 배회하는, 그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 따위는 없었다. 이곳에 나를 보내놓은 라우룬은 벌써 몇 개월째 소식이 끊겼고, 그동안 이곳의 말과 지형을 비롯하여 이것저것을 익혔다. 레툰의 마을들도 작았으나 부족의 개념이 없고 외부와 교류했다. 대륙에서는 상단을 보내고 사람들이 오갔다. 동절기를 제외하고는 추위와 식량에 상관하지 않고 전투에 목숨을 걸지도 않는 나날을 보낸다. 마을 아이들과 동물을 잡는 일은 손끝의 감각을 둔하게 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늘 사나운 빛을 띄는 초록도 색이 죽어 잠잠해졌다. 처음 레툰의 눈을 보던 날 마을을 뛰쳐나가 눈 밭으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눈 속을 휘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달궈졌던 피부와 체온을 식혔다. 눈으로 뒤덮인 황야과 험한 숲은 위험하고 방향을 잃기 일쑤였으나 자연의 혹한은 반가웠다. 그 날 부터 습관이 되어 눈이 올 때면 밖을 헤매고 번번이, 마을로 돌아왔다.
일족들을 잃고 나서도 그들을 지키던 힘은 내게 남았다. 용의 전사의 힘은 레툰에 홀로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다. 라우룬이 살아남았기에 용의 힘은 살아남은 걸까? 마지막 한 명까지 절명한다면 이 힘은 어떻게 되는가. 일족이 사라진 힘은 대체 무슨 의미를 주는지, 스스로의 생각이 의지를 망쳐버리기 전에 그만 둔다. 오랜만에 만난 라우룬은 라우준이 살아있다는 뜻 밖의 소식을 알려왔다. 내내 찾아오던 그가 살아있었다. 그를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좋았을 텐데.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덕분에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라 속이 울렁댄다. 마을은 사라졌는데, 남아버린 우리 용의 후예들은,
겨울의 레툰은 거의 매일 밤 폭풍우가 쳤다. 그 날도 나는 눈 속으로 사라졌다.
레툰에 온 지 일 년이 넘은 날이었다. 아무리 물어도 라우룬은 끝내 용의 후예의 최후에 대해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 그 편이 오히려 사람을 쉽게 미치도록 한다. 광활한 하늘을 하얗고 더 이상 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얼음의 파편들이 가득 휘몰았다. 용의 마을이 가까워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날이다. 휘파람 소리는 일족들이 외치는 사냥음으로 들렸다. 사방의 넓은 공간을 춤추는 눈폭풍은 허공에 자국을 남기며 연기처럼 흘러 간다. 옷자락은 젖을 새도 없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용의 마을이 나오는 지 알 수 없다. 신기하게도 레툰의 고원은 그곳보다 고도가 높았기에 커다란 언덕이나 산등성이에 오르면 마을을 볼 수 있을 것도 같으나, 정작 눈구름이 낀 설산에서는 오르막을 찾기도 어려웠다. 한계까지 온도가 내려붙고 뼈가 시렸다. 추위 속에서 모든 게 살아나고 있다. 눈 속의 사냥, 어둠 속의 오두막, 불꽃, 그리움, 야밤의 눈을 뜨고 내려오는 맹수와도 같던 일족의 전사들. 폭풍우에 고립된 고원 위로 낮은 구름이 배회하며 지나갔다. 두세 걸음 전에 남긴 발자국이 눈으로 서서히 차오른다. 세상 끝에서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던 감각이 되살아나 손발이 저리다. 오래 전 용의 후예가 가졌던 모든 전투신경과 생존본능과 치열함은 오랜만에 쓸모를 지녔다. 사시사철, 갈색과 녹색 사이에서 안쓰럽게 창백했던 내 안색도 지금은 눈 속에 묻히리라.
결국 용의 마을에는 닿을 수 없었다. 고원 밑으로 한참 내려가다가 포기하고 레툰의 오두막으로 되돌아갔다. 마을에서는 사라진 사람을 찾으러 나갔던 모양이다. 사냥 중에 길을 잃었다는 말과 퍼렇다 못해 붉게 바람에 에였을 얼굴에 어른들은 불 앞으로 보내주었다. 꾸중과 걱정의 중간쯤 되는 말들을 듣는다. 얼어붙은 몸이 마비된 것이 오히려 정신을 차분하게 누르고 있어 불 앞에 풀리지 않았으면 할 때쯤, 다급하게 다가온 소년은 레툰에서 종종 입는 양털옷 같은 머리를 가졌다.
"리아민! 대체 어딜 돌아다니다 온 거야!"
바보 같긴. 이 정도 폭풍에는 길을 잃어도 얼어죽는 일은 없다.
".... 사람들을 봤어."
"사람들? 벌판에서?"
"이렇게 눈이 오는데 누가 있을 리 없잖아."
"됐어, 그냥 헛것을 본게야."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마을을 떠나려고 했어. 그렇게 말하기에는 주변에 어른들이 가까웠다.
어른들은 그를 진정시켜 돌려보냈다. 벽난로의 불은 차가운 공기에 더 밝게 타올랐다.
아주 어릴 때 높이 타오르는 불 앞에서 의식을 치렀다. 높게 쌓인 나무와 환하게 타오르는 불, 그 열기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고 나는 용의 전사가 되었다.
비정할 정도의 혹한 속에는 냉랭한 초록눈을 가진 용의 후예들이 살았다. 용의 마을에서 자부심과 일족을 지키며 살았고, 강인했고 냉혹했고 안쓰러웠다. 북풍을 맞는 두 눈은 삽시간에 얼어붙는 수정으로 되어 있어 먼 곳에서 비치는 불빛을 반짝거리며 굴절하였다. 마을은 언제나 눈구름이 덮여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누구나 사냥과 싸움을 익혔다. 전사가 되기 위해 거치는 수련은 혹독했고 자연의 섭리에 파묻혀 지냈다. 그곳에 사는 우리는 심장까지 얼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일족에게 죽음은 삶의 일부였다.
시린 혹한 속에서 첫 전투를 치루었다. 입김을 따라 휩쓸려가는 눈이 결정을 이루어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손수 나에게 첫무기를 쥐어주었다. 손도 발도 얼어 잘 움직이지 않았을 테지만 쇠붙이가 따뜻하게 달구어져 있기라도 하는 양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용병으로 전장을 누볐다.
용의 마을에서도 폭풍이 심할 때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세상 끝에 고립된 단단한 오두막 밖으로 눈보라가 부수어 댈 듯이 돌아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수많은 일족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가르쳐 준 눈짐승을 잡는 법, 전쟁터에서 싸우는 법, 마을에서 벌어지던 축제와 전설과 온갖 사건들을 곰곰히 더듬었다. 하얀 눈 속에는 용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리아민, 잠깐 따라와줄 수 있어?"
며칠 뒤 파이멜이 퍽 얌전하게 부탁하며 어느 야트막한 산 위로 이끌었다. 마을보다 훨씬 고지에 있는 산중턱에서는 사방이 내려다 보였다. 파이멜은 정말 먼 곳까지 볼 수 있었다. 그가 설명해주는 지형을 짚어보며 머릿속으로 어디쯤에 용의 마을이 있을지 짐작해본다. 혼자서도 종종 그곳에 올라가서 머나먼 곳을 보았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은 선뜩하고 쇠냄새가 났다.
죽은 줄 알았던 라우준은 우디온에 살아있었다.
아, 그 초록눈. 그 눈을 평생 그리워 해왔다. 마을을 가득 채우던 광경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라우준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그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냉혹했던 북부의 바람을 새기고 있었다. 용의 마을을 잃고 자신이 이렇게 절규해왔는 줄 친족인 그도 알고 있을까? 라우준, 나를 기억해?
어렸을 때 우린 친구이자 가족이자 한 부족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모두가 너와 나 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지. 그들이 다 죽어서 우린 복수를 결심했어. 라우준, 루얀을 기억해? 너의 아버지를 기억해? 기사들이 무참히 짓밟아 놓은 용의 후예들의 마을을 기억해?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눈빛으로 계속 그에게 물었다. 그의 눈 속에 담긴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기억하노라고. 내가 그들을 대신해 기사의 피를 마을에 바른다면 만족스럽지 않겠냐고. 녹안이 고요하게 눈보라를 담고 있다. 사냥의 신호음이 휘몰아 치던 레툰의 고원은 아름다웠다. 눈은 속속들이 결정을 이루어 불빛이 반짝거리며 굴절하였다.
1.
*리아민+피도란스
밤이 시작되는 늦은 시간에 한 그림자가 동굴 앞을 서성였다. 그 인영을 알아본 리아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를 불렀다.
"....승냥이."
"오랜만이네, 리아민."
고민 끝에 동물의 기사명으로 호명한다. 말하는 입가가 찢어져 피딱지가 졌다. 피도란스가 불이 비치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수 2기의 기사들이 견습을 습격해온 용의 후예와 교전하며 그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잡혀 온 리아민은 부상을 입고도 얌전하지 않아 취조를 뒤로 미루고 묶어서 격리했다.
넌 견습일 때도 기사들에게 존칭을 붙이거나 기사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지,
"그래서 네가 첩자인걸 알아차린 이도 있을 걸."
"... 괜히 말 걸러 온 거면 가시죠. 동정하는 겁니까?"
"용의 후예에 대한 얘기는 들었어. 기사들이 한 일에 대해선 유감이다"
"닥쳐,"
흥분해서 승냥이를 노려보는 리아민에게서 희미하게 비릿한 쇠냄새가 풍겼다. 그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리아민을 감시하러 온 건지 기만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자기가 다르다는 듯한 태도다.
싸움 끝에 정신을 잃은 리아민의 검은 옷을 뒤져서 무기를 빼앗을 때 다리에는 출혈이 있었다. 다리를 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크게 덧나지는 않을 정도였고 기타의 자잘한 상처는 크지 않았다. 낮에는 포로로 잡을 바에야 죽이라며 흉흉한 난동이 있었고, 제압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그 틈에 벌어진 상처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기사들은 도망갈 수 있으니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상처가 곪아서야 도망가기 어렵겠지. 그 정도 고통은 너라면 버틸 수 있을 거야.
기린의 말이었다.
"가만히 있는 게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그러면 지우스는 마음이 약해서 상처를 치료해줄 테고. 적진에서 혼자 날뛰라고 가르친 적은 없는데."
"난 네 부하도, 학생도 아니야."
그 말을 들은 피도란스의 표정이 굳었다ㅡ그는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피도란스라고 불러보지 그래."
"뭐?"
"네가 용의 후예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거든.. 너희의 목적도 대강 알고 있어. 그렇지만 기사에게 복수하는 건 자살행위다, 리아민."
그건 수많은 기사 중에서 고작 승냥이 하나와 검을 맞부딪혀본 리아민도 알고 있다. 기사와 처음으로 싸웠을 때 느낀 전력차는 개개인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용의 후예가 무력으로 기사들에게 복수 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라우룬의 말은 옳았다.
"남의 사정이라고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군..? 당신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감추지 않은 살기가 승냥이를 향했다. 승냥이는 살기에 무덤덤하게 맞선다. 리아민은 평정을 되찾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는 말려줄 이도 없다.
"넌 좀 더 굽히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어. 주변을 보는 눈도 말이야."
승냥이는 그렇게 말하며 리아민에게 무언가를 툭 던졌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서 다시 동굴 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굽히라고? 주변을 보는 눈? 승냥이가 하는 말의 맥락을 따라 갈 수 없었다.
리아민은 몸을 수그려 발치에 던져진 작은 용기를 보았다. 연고였다.
개같다. 기사들의 거만함이라 비웃지 조차 못한다.
용의 후예가 몸값 높은 용병 정도로 취급 받던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었듯이. 기사가 고고함을 내세워도 그들도 인간이라는 말이다. 아무것도 알 리 없는 자가 뱉고 간 몇 마디 말은 가벼웠을 텐데 마음이 동요하고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것을 기뻐해야 할까, 쉽게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하는 걸까. 기사도 아닌 견습들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없는 상황이 피차에게 반복돼 오늘 일을 초래한다. 전쟁터에서 그토록 수많은 목숨을 베어놓고, 이제와 피를 묻히기를 주저하다니,
기사에게 정을 주다니. 동정을 받다니.
물러터진 기사 같으니라고...
열지 못한 연고가 발치에서 굴렀다. 핏내나는 입가를 조용히 다물렸다.
발행한지 좀 지나서 몇 마디 추가. 안 읽으셔도 무방해요
레툰은 지구의 끝이라 불리는 파타고니아 산맥을 참고했습니다. 리아민은 결국 눈밭에서 뭔가를 만났나? 싶기도 합니다
1의 피도란스가 묘한 조언을 하는 건 승냥이가 과연 기린이 보내서 온 건지, 다른 목적으로 혼자 온 건지 여러 가지 해석을 염두에 뒀는데 써놓으니 그냥 cp 그 자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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