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헌팅은 의외로 진지함이 필요하다

와론무시아. 말토로 처들어간 와론

애늙은이 스포 有


소극적인 놈은 분명 아니었다. 제몸을 사리고 뜸을 들이는 것은 영리한 여우 등의 들짐승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으로 분명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건데, 나는 뒤에 몸을 도사린 그가 먹이를 잘 놓치지 않는 개중에서도 최상위의 포식자이며 사냥꾼이란 걸 알았다. 뒷목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기사. 할 수 있는 최선은 들키지 않게 견습과 기사 신분인 초등 법사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는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 – 표정이라 할 수 있다면 – 을 지으며 깃과 망토를 땅으로 길게 늘어트리고 통로를 지나 걸어온다. 

*

도시에 잡다한 지하굴이 많아 이리저리로 뚫린 모양이 파리굴이 있다면 비슷한 구조일 터였다. 하수도를 따라 전체가 들끓는 날파리의 서식지였으니까. 빈 굴마다 공기의 반이 벌레떼로 채워져 일 초라도 견디기 어려운 냄새였다. 누군가 살기는 커녕 무언가 존재하기도 어려운 하수구는 머리 위 십여 미터 너머의 창구에서 간헐적인 햇빛만 비추었다. 도시의 폐쇄된 지하에는 도로 아래로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뚫려있다. 그물로 된 배수구의 밑를 지날 때마다 위에서 내리쬐는 격자 빛이 수로 안을 넓직하게 비췄고, 물결이나 간혹 그 안에 물고기 비늘에 은색의 반사광이 얼룩이 튄 것처럼 벽에 남았다. 이 오수에서도 살아가는 물고기가 있다니. 닭이 가벼이 다닐때 종종 이용하는 하늘과는 달리 완벽한 미로의 영토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을 감기만 해도 균형을 잃었지만 새까만 닭은 시각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고도 낡은 구조물 사이를 지나는 곡예를 부렸다. 길은 없었지만 배수로를 따라가면 구역 끝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와론은 마지막 한 끗을 풀썩 건너뛰어 불안정하게 미끄러진 파이프의 곡률 위를 한 다리로 착지했다. 구멍 속으로 떨어지며 그는 물컹한 반투과 막 같은 것이 자신의 몸을 통과 하는 걸 느꼈다. 몇 십년간 청소된 적 없는 배수로는 곰팡이로 미끄덩하다. 고개를 들어 도달한 곳을 살피기도 전, 요란한 경보음이 귓전을 때렸다.

제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하며 와론은 오물을 뒤집어쓴 론누의 끝을 털었다. 하수구에 설치되기 적절한 함정들이었다. 망토는 멀끔했어도 배어든 냄새까지는 모르겠다만, 굴하지 않고 통로를 걸어가며 새까만 닭이 중얼댔다. 기사들은 복에 겨웠군.

더럽고, 곰팡내나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서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는 것이 마땅했다. 평범한 사고로는 여기 사는 어느 주민도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으리라. 생리적인 불결을 차치하고서라도 지하의 습기에는 뼈가 녹았고 마법은 물론이고 어떤 연구에도 해로웠다. 천정이 넓은 홀로 들어오자 허공에는 나린기– 론누 –가 마치 눈처럼 아래를 비스듬이 겨누어 모든 이들을 감시했다. 누구 하나 그의 허락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명백한 표시였다. 지하세계의 왕과 같이 장식 없는 토좌에 앉은 이는 피라미드 모양의 단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굳어있었다. 그래보았자 누구보다 낮은 위치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발 밑으로 납작 낮추고 숨은 꼴은 면할 수가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가 누구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었다. 기사. 그리고 새까만 닭 와론이었다. 

- 방위진도 발동 시키고. 그래그래, 나도 알아. 기사가 들어올까봐 설치한 거지? 왠만한 수준의 기사들은 들어오지도 못하도록. 준비만 할 수 있으면 마법이 한 수 위인가.

시도는 좋지만 역시 마법사. 전투에 문외한이면서 마법만으로 기사를 봉쇄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실전 경험만큼 좋은게 없으니 이번에 나로 인해서 깨달았을 테지만...

여러 쌍의 눈들이 그에게 꽂혔다. 지나온 통로 뒤로 내부의 어딘가가 망가지는 소음이 산명한다. 고용되거나 동원되어온 무인들은 제대로 저항해본 기색조차 없는 것이 한층 불길했다. 눈 앞의 갈가리 찢긴 망토에 마감이 날카로운 무쇠투구를 쓴 몰골이 기사를 넘어서 같은 종이라고 믿기 어려운 흉악함을 내비쳤다. 새까만 닭이 다시 낮고도 소름끼칠 정도로 유한 목소리로 물었다.

- 좋아. 빡쳐도 약자한테 거칠게 구는 취미는 없거든. 대화로 해결하자고. 대화. 너네 저거 써먹어 본 적은 있긴 해? .. 좌표지정식이라 안으로 들어와도 무력화 할 수 없다니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 준비해온 건지 감도 안잡혀. 몇 번이나 발동했냐?

-... 네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80년 만일거다 아마. 

잔뜩 긴장한 말토의 수장에게서 살짝 쉬어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후드로 얼굴을 가린 표정까지는 드러나지 않아 법사들은 모두 분간할 수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새까만 닭은 보통 기사나 혹은 그 이하의 무력을 지닌 견습기사, 혹은 몇 해전의 자신이 같은 상황을 마주하면 곤경에 처하는게 어느 쪽일지 계산한다. 그는 이제 기사가 되었고, 왠만한 법사들로는 손도 댈 수 없는 거칠고 위험한 자였다. 실로 말토의 존속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 자의 코앞에서 까지 인질을 들이대지는 않았다.

지난 몇 번의 충돌간에 이어 새까만 닭이 굳이 아지트에 직접 찾아온 이유는 뻔하다, 고 말토의 수장은 생각했다. 그 정도의 거물을 건드린 순간 부터 각오해야 할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상대를 단단히 잘못 고른 것이다. 검은 것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는 느낌에 어깨로 흠칫 소름이 일어난다.

- 얼굴 보는 건 처음이지? 우리. 살려달라고 울며 불며 사정이라도 해보지? 아니면 너무 두려워서 굳어버린 건가?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참 만에 새까만 닭이 입을 떼었다.

- 이곳은 마법사들의 길을 밝히는 곳. 우린 너를 도울 수 있다, 기사여. 

- 닥쳐, 

고등법사의 섣부른 참견을 기사는 간단히 일갈했다. 수장이 따로 법사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도 전이었다. 

기사는 투구 밖으로도 웃음기 하나 없이 메마른 채로 묻는다. 

- 나를 도와? 땅만 파는 애들이라 그런지 개미굴을 자랑이라도 하나. 너희들 멋대로 평화를 뒤트는 게 아니고?

- 새까만 닭. 얌전히 돌아간다면 대우는 약속하겠다. 

- 아아. 주문 같은 경우에는 감정도 중요하다지. 어때? 날 죽일 수 있겠나?

- …그 투구를 벗기긴 어렵지 않아. 우리를 위협하지 말고 물러나다오.

- 네가 이 원숭이들의 여제로군. 재밌나? 이딴 소굴에 숨어서 군림하면서 사람을 갖고 노는게.

어떻게 된 게 인간들은 변하질 않냐...

가식적인 한숨이었다. 와론은 타협의 여지없는 비웃음으로 마무리하고 느릿하게 홀을 거닐었다. 이런 곳에서 연구라니. 그들이 있는 굴에서 지상까지는 거리가 멀어 드문드문 마법으로 밝힌 천정 빛이 희미했다. 서책에 스는 검은 곰팡이와 쉽사리 습기가 차는 폐와 햇빛 부족으로 푸르게 질린 인영들이 유령과 같았다. 무엇도 진리나 광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태여 손을 대는 것 조차 내키지 않은지 기사는 치미는 혐오감을 삼키는 손짓을 했다. 허공을 떠돌던 창날이 그의 손짓에 따라 돌았다.

- 우리를 뭘로 생각하는지는 모른다만, 우리는 말토. 지혜의 마법사라고 불리던 두 번째 마법사를 따라 명맥을 이어온 이들로 마법과 마법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다. 나는 이들의 수장, 무시아다.

무시아,

모를 리가 없는 그 이름을 듣고 그는 마법사들에 대해 근본적인 혐오와 흥미를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기사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따위는 관심도 없을 터였다. 말토는 하루 아침에 기사의 손에 사라져도 좋을 개밥그릇은 아니었으나, 연구의 가치를 알아 보긴 커녕 그 분야에 가장 문외한인 기사가 그들을 찾아왔으니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말토의 주요 연구들은 전부 방진과 방수 처리가 되어 아지트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들이 전부 죽고 나면 몇 세기는 지하에서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말토의 사정을 들어달라 구걸할 여지 또한 그러했다. 수장인 무시아는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의자의 돌 손잡이를 맨 손가락으로 으깨 쥔다. 그럼 두 손으로 매달린 사람들은 죽으라는 건가. 그럴 지도 모른다. 다시 구원책을 강구했으나 모르겠다. 이런 하수도 구석에 처박혀서 죽는 사람의 신상 따위 누군들 신경 쓰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될 것이다. 부패하는 동안은 상당히 구역질이 날테고 온갖 잡식 잠승들과 벌레가 들끓겠지만 그러고 나면 누가 와도 시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하수도 속에서 시체는 쉽게 부패하지 않았지만, 유능한 청소부들이 늘 이곳의 쓰레기들을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수 백여년의 노력이 고작해야 삼십여 년에 달했을 어느 기사의 패기 아래 무너질 것이니 억울했다. 그럼에도 고립집단인 그들은 외부의 도움을 요청할 처지가 못되었다. 결연히도 마법사만을 위해 지내온 세월의 댓가를 치르자고 생각하니 미결의 연구들이 못내 마음을 잡았다. 일련의 사고를 마친 무시아는 이 기사라는 존재들의 가치체계를 설득시키길 포기하고 작은 탄식과 함께 대답했다. 몸을 움직이며 망토의 발치가 흔들렸다. 오수 속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던 비늘처럼 마법 장치가 드러났다가 가려졌다.

- ...군림 같은 건 한 적 없어. 

- 그럼 투표제인가? 

- 뭐? 

아니. 작게 중얼거리던 새까만 닭은 혼잣말이었다며 말을 정정한다. 무시아는 그의 마지막 창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공격하는 순간 뒷편에서 대기하는 법사들이 무시아와 새까만 닭을 함께 가두려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새까만 닭은 투구를 닭벼슬 처럼 위를 향해 처들고서 질문을 몇 가지 더 늘어놓았다. 

- 군림이 아니라면 무시아가 되는 조건은 뭐지? 네가 내걸었던 건 뭐였나. 마법사 이외에 인간은 가축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 너네가 세상을 구할 애들로 보여? 

- 무슨 말이냐. 

기사는 토단 위를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경사가 그에겐 평지로 느껴진다는 듯이 망설임은 없었다.

- 자기 앞가림 하나도 제대로 못하다가 돌아버린 녀석들이. 성문 앞에서 세계 멸망 외치는 놈들이야 아무 실행력도 능력도 없으니 두렵지 않지. 세계를 구하거나 하는 대단한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작 자기들의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영생 같은 걸 계획하는 터무니 없는 녀석들이라고. 그것도 몇 세기 몇 십 세대에 걸쳐서 지하에 틀어박혀서 말이지. 

- 네가 이들을 이해할 수 있나?

- 또라이들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어.

토단 꼭대기에 도달한 기사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투구를 무시아에게로 들이밀었다. 단정에 가까운 추궁이 무시아를 압박해왔다. 투구 속의 눈이 물끄러미 후드에 가려진 얼굴을 응시해왔다. 목을 따라 진땀이 흘렀다. 무시아는 그의 기세를 맞받다기 보다는 피하거나 움직일 수 없어 고개를 살짝 젖히자 후드가 기울어지며 레몬색의 금발과 불편한 낯빛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중년의 여성을 예상했던 닭의 눈에 들어온 건 자신 보다 살짝 나이 먹은 홍안이었다. 눈길이 이마의 화상에 머물렀다.

오만한 기사는 역시 그들에게서 무언갈 탐내지는 않았다. 마법서는 어차피 마법사 개인들 만이 알아볼 수 있는 내용으로 암호와된 전유물이다. 대부분의 암호는 시간을 들이면 풀 수 있었으나 개중엔 까다롭고 복잡한 암호에 공을 들이는 마법사도 있었고, 성질이 괴팍하여 간혹 기록물을 분권하여 숨겨두거나 함정을 준비해두기도 했다. 개중에 가장 복잡하기로 이름 붙여진게 무시아 문헌. 세번째 마법사인 모린은 이 무시아 문헌을 풀어낸 천재였다. 

무시아는 수장으로서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으나 마법사의 나이란건 의지할 게 못되었다. 무시아는 힘에 대한 두려움은 있지만 또한 주어진 힘을 이용할 줄 알았으며 엄격하고 합리성을 따지는 리더였다. 그들은 셋째도 첫째도 아닌 현명한 둘째 마법사를 칭하고, 그가 계속되는 한 말토 역시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 숨쉰다. 

화염은 무시아의 오라비와 두 다리를 앗아갔다. 아무도 목격하지 못한 최초의 마법사의 전말처럼 사고는 어느 방관자도 없었으나 무시아는 차마 그걸 불운이라고 형용하지 않았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 되돌아본 말토는 그에게 지켜야 할 곳이 되어있었다. 그곳에 숨겨진 어떤 끔찍한 비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하기에 무시아는 침묵해왔다. 구도의 행세를 하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들이 지상으로 나갈 때까지.

그는 불멸자에 대해 설명했다.

- 불멸자가 있다.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건 시간 뿐.

그의 이름은 말튠. 불멸자가 있나? 와론은 세계의 비이성적인 존재들에 전혀 견식이 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히려 일반인보다 많이 탐구 하고 찾아다닌 덕에 이것저것 아는 바가 많았다. 이 세계에, 불멸자가 있어? 와론에겐 전설과 실제를 단번에 구별할 능력까지는 없었다. 기사는 그들을 동정했지만 도울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불멸자에 관한 정보에도 관심은 없었다.

 

- 그대들은 우릴 돕지 않지. 

무시아의 태도에서 누구에서도 이해 받길 단념한 것이 선명했다.

- 무시아... 무시아라. 

긴장 서린 침묵이 지하에 감돌았다. 공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 토굴에 바람이 휘감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혼자 생각에 잠긴 기사는 이윽고 결정을 내리고는 선언했다.

- 좋아. 마음에 들었다. 죽이지는 않으마. 지금은. 

정보를 내놔라. 

- 어떤 정보지?

- 기사.

기사는 단칼에 대답했다. 무시아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이기도 했다. 

- 기사가 관련되었을 때만 부르도록. 그때는 생각해보지.  

- 원래의 이름은?

- 버렸다. 

와론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아도 그런 무시아가 마음에 들었고, 그의 심경을 풀어내는 매력이 무시아에겐 있었다. 보아하니 기사님의 동정이 필요할만큼 가냘픈 공주는 아닌 것 같았다.

- 난 새까만 닭이라 하네.

기사는 흉터와 검은 천으로 덮인 손을 들어 악수를 건넸다. 살인자가 되고 나서 민간인을 가까이 한 적은 없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피비린내란. 도장이나 서약조차 없었다. 무언가 찍을 만한 것을 새까만 닭은 남기지 않는다. 무시아는 머뭇대며 손을 빼내어 맞잡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두 안광이 잠깐 마주쳤다.

짧은 도약으로 다시 깊은 지하를 빠져나온 새까만 닭은 나린기를 어깨에 걸치고 다시 하수도를 감상했다. 진리를 발견하고, 진보로 이끌고, 세계를 뒤집는 자들은 결국 감옥이나 어두운 석굴이나 이런 카타콤에서 뭍으로 드러났다. 낮의 왕좌에 앉은 고귀한 자들이 아니라, 무릎에 흙과 오물이 잔뜩 묻어있은 자들. 가끔 황성의 지하감옥에 간수지기를 뚫고 요인 경호를 하러 가다보면 학계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기소된 마법사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이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무얼하나 봤더니 자기들끼리 소근 거리며 새로운 방식에 대해 또 논의를 하더랬다. 그 기가 차는 광경에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탐구가 있을 뿐이었지만.

바닥에서 볼 때는 법의 자락에 가려있었지만 무시아는 의도적으로 다리를 감추고 있었다. 악수를 할 때 드러난 맨팔. 온몸에 화상을 지닌 마법사가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에도 조금은 흥미가 들었다. 지하의 심연에서 해례를 구하는 용. 천년도 전에 잊힌 행방불명의 불멸자.

그러나 본디 진리라는 건 가장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던가? 인류가 처음 빛을 묻혀 횃불을 처든 곳도 동굴 안을 향해서가 아니던가. 그곳에서 그들은 진리를 발견하고, 마법을 발견하고, 밝은 곳에서 버려지고 배척되는 것들을 끌어다가 탐구했다.

모든 것은 와론의 공상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평생 진리따윌 찾는 데에 실패하고 쥐새끼로 전락한 무리를 마주하며 그런 상상의 열을 불태우는 건지도. 그들은 손에 묻은 암흑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결국 진부하고 흔한 범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지 몰랐다.

와론은 그럼에도 빛을 원했다. 간절히 바라는 인류에게만 불을 손에 넣는 기적이 언젠가 일어났듯이, 그가 보는 것이 망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그러하길 바랐다. 그는 정형과 계획을 깨부수는 파멸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는데도. 원래 후환을 두고 보지 않았으나 기사는 그들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오늘 그가 베푼 개인적인 관용이 후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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